밀란 쿤데라의 팬으로서 감동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이 mixed review를 받은 것과 달리 역시나 나의 집중력 부족으로 작가의 의도를 다 파악하지 못했다. 역시나 일과 독서를 병행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분량이 적다고 이해가 잘되는 것은 아니었다. 장기간 조금씩 읽는 것은 허영이며 사치이고 책을 제대로 이해하긴 힘들다는걸 다시 느낀다. 나의 지적 허영이 피로 쓴 작가의 귀한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것 같아 늘 미안하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책을 가까이 함이 오히려 독서의 본질을 해치는 것일까?

작가가 의도했던 깊은 의미를 다 파악하지 못했으나, 제목 자체에 작가가 의도했던 것이 있다고 추측했다. 언어 천재 밀란 쿤데라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언어의 연금술사이기 때문이다. 무의미의 축제(The Festival of Insignificance)라는 것은 우리가 의미를 부여하며 열심을 다해 살아내는 일들이 결국엔 무의미하며, 무의미한줄도 모르고 바보처럼 즐겁게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감을 의미하고 있을까?

무의미가 존재의 본질이고, 우리는 무의미를 사랑해야 하고, 무의미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한다(Insignificance is the essence of existence. We must love insignificance, we must learn to love it. p. 113) 무의미를 인정할뿐만 아니라 사랑해야함은 삶 자체가 무의미의 연속이고 축제이기 때문인가? 지난 날 내가 엄청난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며 안달하고, 흥분하고, 잠못 이루던 일을 생각해 보면 위의 말이 너무나 이해가 된다. 몇 달이 지나고, 몇 년만 흘러서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기억이 흐려진다.

심지어 무의미의 가치(value of insignificance), 총명함의 쓸모없음(uselessness of brilliance)에 대한 표현도 공감이 된다. 총명한 남자가 여자를 유혹할 때, 여자 또한 남자만큼 총명해야 된다는 의무와 부담감이 생기기에 총명함은 쓸모도 없고 해롭기까지 하다. 오히려 무의미함은 여자를 자유롭게 하고 경계심으로부터 해방감을 준다. 사실 여자들은 자기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한 남자를 원하지만, 만약 실제로 그런 이성을 만난다면 실수할까봐 긴장되고 두려운 마음에 항상 긴장되고 불편한 것이 사실일 것이다.

Alain의 사과에 대한 표현도 매우 인상적이다. 사실은 그를 버리고 떠난 엄마가 그에게 사과해야 하는데 자신이 먼저 사과를 하고 자신은 늘 먼저 사과하는 사람이며, 엄마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하고 있다. 서로 사과할 때 기분이 좋고, 서로 사과하는 것이 아름답지 않냐고 묻고 있다. 이것은 엄마의 사과를 받기 위한 그의 전략이 아닌가 싶다. 그는 매 순간 죄책감을 느끼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결국 상대방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한 자가 승자이기에 먼저 사과함으로써 엄마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싶었을까?

어떤 의미에서 자신을 사과하는 자라고 했는지 정확히 모른다. 미움과 분노를 벗기 위한 수단, 즉, 마음의 평화를 위한 용서의 수단일 수도 있다. 상대방으로부터 사과를 끌어내기 위한 전략일 수도 있다. 사과를 먼저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게 함으로써 낮은 자세이나 승자의 위치에서 하는 사과일 수도 있다. 어떤 의도이든 사과는 아름답다 생각한다. 심지어 후자라 할지라도 쌍방의 사과가 허락되고 서로의 용서가 이루어진다면 아름다운 관계가 성립될 수 있다.

설령 그렇지 못해도, 사과의 시늉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과하는 척, 시늉‘ 조차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사과하지 않아도 불편을 느끼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음이 무섭기도 하다. 몸이 매우 편리한 세상에 살고 있고,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편의를 도모할 수 있는 시대이지만,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상식이 통용되고 있는지 가끔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사과하는 것이 상식이고 기본인 세상이 되면 좋겠다. I am an apologizer. That’s the way you made me. I feel good when we apologize to each other. Isn’t it lovely, apologizing to each other? (p. 103)

이 세상을 전복시키고 새롭게 바꾸거나 정면으로 위험에 맞서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걸 알게 되었다. 세상을 향한 유일한 저항이 있다면 더 이상 심각하게 받아 들이지 않는 것. 이 부분에서 작가의 체념이 보이기도 한다. 심각하고 진지한 모습으로 세상에 대한 힘겨운 싸움을 해 온 지식인이 결국 농담 속에서 안주하며 모든 싸움이 무의미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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