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ason for God: Belief in an Age of Skepticism (Paperback) -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원서
Timothy Keller / Riverhead Books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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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진정한 즐거움은 리뷰 작성에 의해서 완성이 된다. 리뷰를 만족스럽게 쓰고 나면, 읽는 것 이상의 기쁨이 내 가슴속에 차오르고, 무언가 가치 있는 일을 끝낸 느낌이 든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좋은 것은 쉽고 편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어서 그런지, 리뷰 쓰는 일은 가장 피하고 싶고 부담이 되는 일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읽는 동안 행복했고, 많은 감동을 받은 책에 대해 리뷰를 쓰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매 순간, 나의 부족과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불신자와 신앙이 있는 자 둘 다를 위해 쓰인 책이다. 전반부는 무신론자 및 회의론자들의 주장에 대해 논리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있고, 후반부는 신의 존재, 죄, 십자가, 부활 등에 대하여 역시 맹목적인 종교로서가 아니라 다양한 논거에 근거한 의견을 제공한다. 그 누구도 성공하리라 예상치 못했던, 20, 30대 싱글이 주를 이루는 맨해튼의 교회 목사로서 성공한 탓인지 조금 더 개방적일 것이라 추측했으나, 믿음에서만은 회색지대가 없으신 듯 보인다.

그럼에도 무신론자나 회의론자들을 향한 그의 마음은 다른 분에 비해서 더 열려 있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불신자들은 오히려 우리의 기도와 따뜻한 마음이 더 필요한 사람들이며, 회의론자와 신앙인들조차도 개인적인 반대나 맹목적 신앙과 항상 치열한 싸움을 할 수 있고, 의심을 의심해야 한다는 말씀은 굉장히 인상적이다. (You must doubt your doubts.) 나 역시 교회를 다니면서도 회의적인 경우가 많았고, 지금도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런 나의 회의적 사고가 너무 부끄러웠는데, 이제는 나의 회의적 사고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싸워 나갈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완고한 회의론자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들 자신의 인지력(cognitive faculty) 안에 엄청난 믿음(faith)이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을 수 있어도, 회의론자들조차도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의심은 실상 대안적 믿음이라 불릴 수 있고, 기독교뿐만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종교에 대해서 서로 다른 방법으로 배타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 기독교는 배타적이며 구속력을 가진다기보다 오히려 진정한 자유함을 누릴 수 있는 종교이다. 물고기는 단지 물에서만 살도록 제한될 때 진정한 자유함을 누릴 수 있듯이, 자유란 자신에게 가장 옳고 적합한 것을 찾게 하는, 자유함을 주는 구속력(liberating restrictions)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즉, 구속이나 제한은 진정한 자유를 위한 적극적인 수단이 되며, 절제와 제한은 그렇지 않으면 안에 갇혀서 발휘하지 못할 능력을 마음껏 발산하게 한다. 기독교가 지니는 아름다운 구속력에 대한 설명은 매우 인상적이고 설득력이 강했다.

신앙인들의 이중성, 교회의 역기능에 대한 반박도 일리가 있다. 교회는 성자들의 박물관이 아니라 미성숙하고 상처받은 죄인들이 모인 병원과 같은 장소(The church is a hospital for sinners, not a museum for saints.)라는 데 공감한다. 마음 아픈 사람들이 갔다가 상처받고 떠나는 장소가 교회이기도 하다. 세상에 의인이 한 명도 없다는 말을 기억하고,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지 않으면 사람으로 인해 더 큰 상처를 받을 수 있기에 신중하게 교회를 고르라고 충고한다. 부족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은 아직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니며, 그들은 부족하기에 교회를 찾아온 나약한 사람들이며, 정서적·도덕적·영적으로 성숙하기에는 아직 많이 부족한 사람임을 기억해야 한다.

어쩌면 세상 사람들의 비난과 상처는 큰 기대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는 인식이 있고, 사랑을 베푸는 장소여야 한다는 큰 기대감 때문에 사랑으로 덮지 못하고, 사랑으로 용서하지 못할 때 기독교를 향해, 신앙인을 향해 돌을 던지며 비난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가 지니는 큰 책무감이 있다. 실상은 기독교가 보여준 순기능과 사회에 끼친 선한 영향력도 많다. 시민권 운동에 앞장섰던 Martin Luther King Jr.는 아모스 선지자의 말씀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당겼을 것이다. ‘Let justice roll down like waters, and righteousness as a mighty stream. Amos 5:24’. 결국 기독교가 인종차별의 해독제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한편, 사랑·공의·정의의 하나님이신 것은 받아들이지만, 심판과 노여움의 하나님이심은 용납하기 어렵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이 곧 심판의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한다. 사랑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사랑하시기 때문에 심판과 노여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분노는 사랑의 반대말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면 인간에게 과연 절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까 의구심이 든다. 인간적인 생각, 가치관, 판단으로 정죄하거나 비난하고 심판하려는 것도 위험하고, 오히려 하나님만이 심판주가 되어야 이 땅에 공의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각자 저마다의 원한과 분노를 자신의 능력으로 풀고 타인에게 갚으려고 할 때 이 세상은 아비규환이 될 것이며, 신의 분노가 없다면 악인의 권력은 무서움과 절제력을 알지 못할 것이다.

성경의 특정 구절에 대한 지협적 해석으로 성경 전체의 큰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대한 설명도 있다. 나 역시 과거에 성경을 제대로 한 번도 읽지 않은 채 오해했던 적이 있었다. 성경이 2000년 전에 쓰여진 이야기이고, 문화적·역사적 거리가 있다는 것을 무시한 채 특정 부분만 떼어내어 퇴행적·보수적이라 속단하는 사례가 많다. 어떤 이단들은 요한계시록이나 선지서 부분만을 오해하여 심판의 하나님만으로 오역하며 사람들의 불안 심리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progressive’라는 기준으로 성경을 ‘regressive’라고 판단할 수 없다는 말에 공감한다. 몇십 년만 지나면 현재의 progressive는 또다시 regressive가 된다. 진보 혹은 퇴행이라는 단어의 기준으로 재단하며 성경의 한가운데로 들어가지 못하면 핵심 원리를 파악할 수 없다.

과연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계몽주의 이래로 우리는 이성과 논리의 원리로 증명할 수 있는 것만 믿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신의 존재가 시험대에 올라야 하고 정당성을 부여받아야 한다. 그러나 과연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과학과 이성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이타심과 도덕적 의무감은 과연 이성과 합리성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반증은 아니다. 마치 우리가 태양이 떠 있다는 것을, 태양을 보고 아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보기 때문에 아는 것이다. 즉 우리는 태양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을 보는 것이고, 태양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다른 것을 볼 수가 없다. 늘 찬란하게 우리 곁에 빛나고 있지만, 우리는 너무 강해서 태양을 바라볼 수가 없다. 그러나 태양이 존재한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듯이, 어쩌면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현실을 느끼는 것뿐만 아니라 갈망하는 것에 대한 부재를 느낀다. 이는 ‘축복받는 갈망(blessed longing)’이라고 했다. 즉, 현실의 욕구를 모두 채워도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채울 수 없는 무언가를 인간은 원하고 있고, 그 공간은 오직 신만이 채울 수 있다고 했다. 이 자체가 신이 존재한다는 방증이 아닐까 한다. 사람들은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만, 이를 억누르고 있을 뿐이며, 만약 신이 없다면 사랑, 이타심, 도덕적 책임감이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만약 진화론적 사고로 모든 것이 정당화되고 입증될 수 있다면, 인간은 왜 마음속에 선한 삶에 대한 욕구와 갈망이 있으며, 물질적 만족이 있음에도 빈 공허감을 느끼는 것일까?

Victor Hugo의 Les Misérables의 예시는 매우 감동적이다. 신부의 용서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용서는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공격이 되어 뿌리 깊은 자기 연민과 고통을 벗고 주인공 인생 전체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은혜와 감사의 역학이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은혜는 인간은 자율성을 지닌 존재라는 허상에 대한 위협이 되었다. 즉 자신의 노력과 의지로는 달라질 수 없었으나, 신부가 베풀어준 무조건적 은혜로 인해 한 사람의 생애가 달라졌다. 이렇게 부족한 인간은 자신의 행위나 공적 때문에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구원받는다(salvation by sheer grace). 만약 은혜로 인한 것이 아니라면, 약하고 힘없으며 나약한 자는 구원받을 길이 전혀 없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크고 깊고 넓은 것인가?

믿는다는 것은 현재의 나와 바라보는 것,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성경을 읽고, 새벽 기도에 참석하고, QT를 하는 것을 넘어 적극적인 삶으로 살아내지 못하면 죽은 믿음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을 알고, 예배하고, 기뻐하며, 그를 닮아가려 노력하는 삶을 살라고 한다. 전심으로 사랑하면 닮아가고, 닮은 꼴이 되면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신앙을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평생의 과제를, 삶의 목적과 의미를, 행복의 원천을 뒤늦게 알았지만, 지금도 빠른 시간이라 위로하며 도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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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nsgod1948 2026-01-05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감상평 감사합니다.

serendipity 2026-01-05 18:32   좋아요 0 | URL
❤️
 
Man's Search for Meaning (International Edition) (Paperback) - 『죽음의 수용소에서』원서
Viktor E. Frankl / Beacon Press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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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한 애착이 강한 편이지만, 동시에 ‘항상 책을 가까이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있다. ‘더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는 일종의 편집증도 있어서, 같은 책을 두 번 읽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두 번째로 읽게 되었고, 첫 번째와는 전혀 다른 감동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한 글자 한 글자 정독하며 집중했고, 전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보석 같은 문장들이 곳곳에 숨어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되었다. 책이 주는 선물은 읽는 목적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목적이라는 단어는 얼마나 의지심장한 힘을 품고 있는지 다시 실감했다.

‘의미’와 ‘목적’은 평생 나를 따라다닌 화두였다. 삶의 이유를 끊임없이 찾아 헤매며 마음속 깊은 곳에 실존적 공허를 안고 살아왔다. 허무감과의 싸움은 늘 치열했고, 나를 붙드는 질문은 단 하나였다. “왜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 이토록 명료하고 따뜻하게 답해주는 책이 또 있을까. 이번 정독은 마치 내 삶의 실마리를 하나씩 풀어가는 여정 같았다.

작가 빅터 프랭클은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였고, 제2차 세계 대전 중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4개의 수용소를 전전하며 3년간 수감되었다. 그는 미국으로 이민할 기회가 있었지만, 집에 있던 테이블 탁자에 새겨진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을 보고는, 부모를 두고 혼자 떠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결국 그는 부모와 함께 강제 수용소로 끌려갔고, 부모는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 책은 자서전적 기록이기도 하지만, 수용소에서 겪은 인간 이하의 참혹한 삶을 담담하게 서술한다. 작가는 수용소에 끌려가기 전부터 의미 중심 치료인 로고테라피(Logotherapy)를 구상하고 있었고, 그 원고를 몰래 소지했으나 곧 빼앗겼다. 하지만 그는 수용소에서도 기억을 더듬어 원고를 재작성했고, 그 프로젝트를 완성하고 세상에 알리겠다는 목적이 그를 버티게 한 동력 중 하나가 되었다.

수용소 생활은 신체적 고통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파괴적인 환경이었다. 극심한 굶주림, 무감각(apathy), 불면, 냉대, 죽음의 공포 속에서 수감자들은 원시적인 정신 상태로 퇴화해 갔다. 그런 상황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프랭클은 이에 단호하게 “Yes”라고 말한다.“Meaning is possible even in spite of suffering.” 고통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고통 때문에 의미는 가능하다고 그는 거듭 강조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고통을 미화하지 않는다. 피할 수 있는 고통은 피해야 한다. 그러나 삶은 불가피하게 고통을 수반하기에, 고통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조언한다.

Priority: 가능하다면 상황을 창의적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라.
Superiority: 그래도 안 된다면 의미를 부여하고 견디는 노하우(know-how)를 익히라.

그 힘의 원천은 바로 ‘의미’와 ‘목적’이다. 삶의 의미는 고통뿐 아니라 ‘일(work)’과 ‘사랑’ 속에도 숨어 있다고 그는 말한다.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삶의 한 장면 한 장면을 음미하며 살아야 전체의 맥을 이해할 수 있다. 어쩌면 삶의 궁극적 의미는 죽기 직전, 모든 장면을 돌아보는 순간에야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지금 이 순간에 의미가 내포되어 있더라도, 그 자리에서는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다. 프랭클은 말한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기 전에, 삶이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다”고. 우리는 각자 대체 불가능한 소명을 안고 태어났고, 각자의 삶에 책임 있게 응답해야 한다. 인간은 어떤 환경에서도 태도와 행동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수용소에서도 누군가는 돼지(swine)가 되고, 누군가는 성인(saint)이 된다. 누군가는 종교 토론을 하거나 이탈리아 아리아를 부르며 박수를 받고, 누군가는 죽음만을 기다리며 체념할 수도 있다.

그런 자유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프랭클은 이렇게 말한다.
“미국 동해안에 자유의 여신상이 있다면, 서해안에는 책임의 동상을 세워야 한다.”
자유란 책임과 동의어임을 그는 분명히 했다. 프랭클에게 삶의 의미란 단지 자신의 쾌락과 안락을 위한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의미를 찾도록 돕는 것, 그 안에야 비로소 존재의 목적이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수감 전에도 우울증에 시달리는 청소년들을 도왔고, 수감 후에는 로고테라피를 전 세계에 전파하여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 그는 Freud처럼 과거의 상처에서 원인을 찾지도, Adler처럼 인간의 힘만으로 미래를 개척하자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실존 역학(existential dynamics)이 실존 공백(existential vacuum)를 채울 수 있다고 믿었고, 그 믿음을 몸소 실천한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였다.

책을 덮은 지금, 그는 여전히 내게 묻고 있다. “너는 너에게 주어진 소명을 감당하고 있는가?” 삶이 나를 향해 기대를 걸고 있다는 생각은 때때로 큰 부담이 되지만, 동시에 나를 곧추세우는 힘이 되기도 한다. 나는 자아실현을 통해 남들처럼 행복하고 싶었다. 그런데 무서운 것은 자아실현은 자기 초월의 부산물로서만 가능하다(Self-actualization is possible only as a side-effect of self-transcendence)고 했고, 행복은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부산물로서 뒤따라 오는 것이라 했다. (Happiness cannot be pursed; it must ensues.) 결국, 내가 아닌 남을 먼저 생각할 때, 나의 존재가치를 세우며 나를 실현시킬 수가 있고 비로소 그 때서야 행복이 나를 따라온다는 것인데 그동안 잘못 살아온 것인가? 이 문장을 읽고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잘못 살아온 것일까? 마지막으로 떠오른 문장은 프란츠 카프카의 말이다. “A book must be the axe for the frozen sea within us.” by Franz Kafka
Man’s Search for Meaning은 내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산산이 깨뜨린 도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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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ittle History of the World (Paperback) - 『곰브리치 세계사』원서 A Little History 2
Gombrich, E. H. / Yale Univ Pr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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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History)는 나의 아킬레스건이다. 자신의 무지나 실수를 인정하며 민낯을 드러내는 것은 쉽지 않기에, 나도 핑계 거리를 찾아본다면 중학교나 고등학교 때 역사와 세계사를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상황이나 환경을 탓하기에는 그동안 충분한 시간과 정보가 많았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왜 나는 그동안 한국사나 세계사에 대해 더 깊은 관심과 흥미를 가지지 않았을까 원망스럽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듯이, 역사를 알지 못함으로 다른 책을 읽어도 맥을 잡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적이 많으리라. 우연히 이 책을 구매하게 되었지만, 나의 방치되었던 역사에 대한 무지를 깨우는 데 촉매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이 책은 2008년에 발행되었으며, 역사서를 대체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모든 배움을 포함하여 역사 탐구도 즐겁게 다가설 수 있다는 것을 목적으로 쓴 책이다. 공부하듯이 접근하지 말라고 했기에 가볍게 읽었으나, 한 권의 책(284쪽) 안에 구석기 시대부터 2차 세계대전까지 방대한 내용을 모두 담고 있어 내 기억력의 한계로 리뷰를 쓰기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책을 좋아해서 책에 대한 애착이 강하지만, 항상 내가 느끼는 것이 있는데, 독서에 대한 욕심이 지적 집착, 인지적 허영, 권태를 피하는 호기심, 외로움을 채우는 수단 등 그 어떤 것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책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수단으로 읽기에 가끔은 활자만 읽으며 ‘읽기 위해 읽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지는 않았나 하는 부끄러움이 있다.

오랜 기간 읽었음에도 전체적인 맥을 잡거나 자연스러운 흐름을 이해하기는 어려웠으나, 파편적으로 듣고 배운 기억을 상기시키며 인상적인 부분이 많았다. Veni, Vidi, Vici (I came, I saw, I conquered)를 부르짖으며 승리의 쾌거를 외쳤던 로마 장군 Julius Caesar가 친구에게 배신당하면서 “You too, Brutus”를 말하며 생을 마감했다. Henry IV가 Pope Gregory VII와 충돌해 파문당하자 북이탈리아의 Canossa 성을 찾아가 3일 동안 눈 위에서 맨발로 교황에게 용서를 구했던 일로 인해 ‘go to Canossa’라는 표현이 자존심을 접고 비굴한 용서를 구한다는 뜻임을 알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예외는 아니겠지만, 종교와 정치의 결탁이나 결합이 옳은 것인지 혼란스럽다. 종교가 삶 속에 깊은 영향을 끼치기에 반드시 비세속적일 수는 없다. 그러나 종교 자체의 본연의 의미를 벗어나 정치적인 영향력에 깊이 관여하거나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모르겠다.

소설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역사도 인물 중심으로 읽은 것 같다. 농군의 딸로서 프랑스 군대를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했으나 19세의 나이에 ‘마녀 사냥’에 의해 화형에 처해졌던 Joan of Arc, 지적 호기심과 창의력으로 다재다능했던 이탈리아 르네상스인 Leonardo da Vinci, 로마 제국의 몰락과 더불어 시작된 중세 시대 가톨릭의 부패를 세상에 알리며 종교 개혁에 앞장섰던 독일인 Martin Luther와 프랑스인 John Calvin, 현대 과학의 대부라 불리며 과학적 사고를 도입하고 기독교적 세계관과 정면 대치하며 종교 재판에 넘겨져 가택 연금 속에서 생을 마감한 Galileo Galilei,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으나 프랑스 황제로 군림하며 만족할 줄 모르는 야망을 펼쳤으나 워털루(Waterloo)에서 패한 후 영국의 작은 섬 세인트헬레나(St. Helena)에서 외로운 생을 마감한 Napoleon,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간의 계층 갈등을 언급하며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The Communist Manifesto (1848)를 저술한 Karl Marx, 노예 제도 폐지의 쾌거를 이룬 Lincoln, 독일 통일에 기여한 외무장관 Bismarck,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고 1939년 폴란드 침공을 시발로 하여 세계 2차 대전을 일으킨 Adolf Hitler,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발발한 2차 세계대전의 원자폭탄 개발 기반을 마련한 덴마크인 물리학자 Niels Bohr 등등.

과학과 기술은 현재 문명의 이기를 도모하며 편리함을 가져왔으나, 못지않게 부정적인 영향도 끼쳤다. 그럼에도 이제 인간은 과학과 기술의 도움 없이 살아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다. 결국 열쇠는 다시 인간에게 있는 것인가? 세계 대전을 통해 인간(human)이 얼마나 비인도적(inhumane) 야수로 변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양날의 검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과학과 기술의 파괴력과 영향력을 묵과해서는 안 된다. 역사는 잊혀져서도 안 되며 침묵해서도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기억하며, 용서를 구하고, 용서하며, 서로를 존중하고 관용을 베풀며 나아가는 방향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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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unded Healer : Ministry in Contemporary Society - in Our Own Woundedness, We Can Become a Source of Life for Others (Paperback)
Nouwen, Henri / Darton,Longman & Todd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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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아픔, 슬픔 없이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았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지 않을까한다. 누구나 저마다 다른 정도와 깊이의 상처가 있어서 이런 책에 대한 수요가 높을 수도 있다. 제목에 이끌려서 구매하였는데 읽다보니 목회자를 위한 책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 방식대로, 내 마음의 상처에 연고를 바르는 심정으로 읽으니, 어느새 치료받은 느낌이 든다. Book Therapy가 그 어떤 특효약을 대신할 것인가?

현재의 강력한 포로가 되어 사는 현대인은, 의도치 않게 자신의 미래의 수동적 희생자가 되어 살아간다.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사는 핵인간(nuclear man)은, 사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역사적 혼란과 단절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있다. 자기 중심적 내향적 삶을 사는 핵인간은 어떤 외부적 현실도 그의 불안감과 외로움으로부터 그를 자유롭게 해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핵인간의 삶의 두번째 특징은, 그를 이끌어 줄 권위자인 아버지가 없는 삶이다. 아버지 대신에 그의 동료가 기준이 되고, 동료가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에 민감성을 드러낸다. 즉, 동료의 폭력에 노예가 된다(become enslaved by the tyranny of their peers). 아버지의 인도가 없다는 것은 동료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삶과 다르지 않다. 그누가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세상의 인정에 대한 욕구가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거짓일 것이다.

타인의 시선과 인정의 욕구에 속박되어 있는 핵인간의 세번째 특징은 분노이다. 뿌리 깊은 불행, 우울, 불안감으로 가득찬 세상을 향한 경련성 발작과도 같은 공포와 소외감을 느낀다. inwardness, fatherlessness. convulsiveness의 특징을 안고 살아가는 핵인간을 치유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어쩌면 그 어떤 사람도 이들을 치료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인간은 인간일 뿐이고, 인간이 신이 될 수 없으며, 신이 없이 인간은 인간이라 불릴 수 없고, 오직 신만이 치유자가 되실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인간인 우리도 누군가의 ‘내일’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becoming his tomorrow). 내일이 있음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살아갈 의지를 잃을 것이고 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병원의 낯선 환경에서 수술을 기다리던 Mr. Harrison에게는 그를 기다리던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오로지 고된 일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살아가는 것도, 죽는 것도 두려웠던 사람이었다. 그에게 ‘내일’은 큰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의미있는 내일이있었거나, 누군가가 그의 내일이었다면 그는 삶에 대한 희망을 보였을 것이다.

누군가의 내일이 되어 주기 위해서는 자신의 상처를 잘 직시하고 먼저 치료해야 한다. 자신의 상처를 부인하거나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잘 묶고 보듬으며 돌보면서 다른 사람의 상처를 치료할 준비를 하라고 했다. 상처에 대한 출구를 찾기 위해서는 상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The way out is way in.) 상처가 꼭 타인으로부터 입은 흔적만은 아닐 것이다. 평생 안고 가야하는 외로움, 내적 공허함, 파괴적 기대감도 우리를 괴롭히는 아픔과 상처가 아니던가?

외로움의 상처까지 잘 싸매고 안아주며, 마음을 열어 상대를 환대하고, 무법의 침입자라는 개념이 아니라 겸손함으로 타인의 상처 속으로 들어가 치유자가 되어 보라고 한다. 나는 예전에, 내 마음을 먼저 추스려 회복이 되고 난 후에 상대가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환대(hospitality)는 있는 자, 가진 자, 마음이 따뜻하고 온유한 자의 특권이라 생각했는데, 나처럼 상처 투성이인 자도 healer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어쩌면 엉터리 삶을 살아온 내 마음의 상처가 온전히 치료되어 온유함과 겸손의 삶을 살 수 있는 날은 영원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바로 오늘 상처받은 치료자가 되어 누군가의 내일이 되길 촉구하는 것인가? 어쩌면 다른 사람을 위한 공간을 내어줌으로써 내 상처가 어느새 아물어 있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아픔이 있는데 자꾸 일어나라고 해서 가혹하다 생각했는데, 이것 또한 나를 치료하시는 방법이었던가?

Being alive means being loved.
We can only love because we are born out of love.
We can only give because our life is a gift. (P.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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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팬으로서 감동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이 mixed review를 받은 것과 달리 역시나 나의 집중력 부족으로 작가의 의도를 다 파악하지 못했다. 역시나 일과 독서를 병행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분량이 적다고 이해가 잘되는 것은 아니었다. 장기간 조금씩 읽는 것은 허영이며 사치이고 책을 제대로 이해하긴 힘들다는걸 다시 느낀다. 나의 지적 허영이 피로 쓴 작가의 귀한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것 같아 늘 미안하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책을 가까이 함이 오히려 독서의 본질을 해치는 것일까?

작가가 의도했던 깊은 의미를 다 파악하지 못했으나, 제목 자체에 작가가 의도했던 것이 있다고 추측했다. 언어 천재 밀란 쿤데라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언어의 연금술사이기 때문이다. 무의미의 축제(The Festival of Insignificance)라는 것은 우리가 의미를 부여하며 열심을 다해 살아내는 일들이 결국엔 무의미하며, 무의미한줄도 모르고 바보처럼 즐겁게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감을 의미하고 있을까?

무의미가 존재의 본질이고, 우리는 무의미를 사랑해야 하고, 무의미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한다(Insignificance is the essence of existence. We must love insignificance, we must learn to love it. p. 113) 무의미를 인정할뿐만 아니라 사랑해야함은 삶 자체가 무의미의 연속이고 축제이기 때문인가? 지난 날 내가 엄청난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며 안달하고, 흥분하고, 잠못 이루던 일을 생각해 보면 위의 말이 너무나 이해가 된다. 몇 달이 지나고, 몇 년만 흘러서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기억이 흐려진다.

심지어 무의미의 가치(value of insignificance), 총명함의 쓸모없음(uselessness of brilliance)에 대한 표현도 공감이 된다. 총명한 남자가 여자를 유혹할 때, 여자 또한 남자만큼 총명해야 된다는 의무와 부담감이 생기기에 총명함은 쓸모도 없고 해롭기까지 하다. 오히려 무의미함은 여자를 자유롭게 하고 경계심으로부터 해방감을 준다. 사실 여자들은 자기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한 남자를 원하지만, 만약 실제로 그런 이성을 만난다면 실수할까봐 긴장되고 두려운 마음에 항상 긴장되고 불편한 것이 사실일 것이다.

Alain의 사과에 대한 표현도 매우 인상적이다. 사실은 그를 버리고 떠난 엄마가 그에게 사과해야 하는데 자신이 먼저 사과를 하고 자신은 늘 먼저 사과하는 사람이며, 엄마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하고 있다. 서로 사과할 때 기분이 좋고, 서로 사과하는 것이 아름답지 않냐고 묻고 있다. 이것은 엄마의 사과를 받기 위한 그의 전략이 아닌가 싶다. 그는 매 순간 죄책감을 느끼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결국 상대방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한 자가 승자이기에 먼저 사과함으로써 엄마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싶었을까?

어떤 의미에서 자신을 사과하는 자라고 했는지 정확히 모른다. 미움과 분노를 벗기 위한 수단, 즉, 마음의 평화를 위한 용서의 수단일 수도 있다. 상대방으로부터 사과를 끌어내기 위한 전략일 수도 있다. 사과를 먼저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게 함으로써 낮은 자세이나 승자의 위치에서 하는 사과일 수도 있다. 어떤 의도이든 사과는 아름답다 생각한다. 심지어 후자라 할지라도 쌍방의 사과가 허락되고 서로의 용서가 이루어진다면 아름다운 관계가 성립될 수 있다.

설령 그렇지 못해도, 사과의 시늉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과하는 척, 시늉‘ 조차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사과하지 않아도 불편을 느끼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음이 무섭기도 하다. 몸이 매우 편리한 세상에 살고 있고,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편의를 도모할 수 있는 시대이지만,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상식이 통용되고 있는지 가끔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사과하는 것이 상식이고 기본인 세상이 되면 좋겠다. I am an apologizer. That’s the way you made me. I feel good when we apologize to each other. Isn’t it lovely, apologizing to each other? (p. 103)

이 세상을 전복시키고 새롭게 바꾸거나 정면으로 위험에 맞서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걸 알게 되었다. 세상을 향한 유일한 저항이 있다면 더 이상 심각하게 받아 들이지 않는 것. 이 부분에서 작가의 체념이 보이기도 한다. 심각하고 진지한 모습으로 세상에 대한 힘겨운 싸움을 해 온 지식인이 결국 농담 속에서 안주하며 모든 싸움이 무의미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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