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orge Muller of Bristol and His Witness to a Prayer Hearing God: The Authorized Biography of the Man of Faith and Prayer (Paperback)
A.T.피어슨 / CreateSpace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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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이 땅의 주인(owner)으로서가 아니라 청지기(steward)로서의 삶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실천한 죠지 물러의 자서전이다. 5만 번의 기도 응답을 받은 목사님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가 만 명이상의 고아들을 돌본 것은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의 일기를 읽으며,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인지를 항상 먼저 분별하고, 확신을 갖게 되면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을지라고 의심하지 않고 인내하며 기다린 것을 알 수 있었다.

놀라운 것은 목사님으로서 사례비를 받지 않았고, 고아원 설립도 자금이 모아진 상태로 추진한 것이 아니라, 기도로 시작하고 응답받은 후에 주변의 donation으로 설립했다는 것이다. 당장 저녁 식사비나 교사 사례비가 없는 상황에서도 필요에 따라 하나님께서 언제나 정확하게 공급해 주신 예시가 기록되어 있다. 그의 일기를 통해 무엇의 결핍이 있어서, 주변의 형제, 자매로 부터 얼마의 금액이 채워졌는지 상세하게 알수 있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매 순간 경험한 것이다.

우리의 신앙을 견고히 하는 방법으로 4가지를 조언한다. 말씀 읽고 묵상하기(read the Word and meditate on it), 정직한 마음과 선한 양심 유지하기(maintain an upright heart and good conscience), 상황으로 부터 낙심하지 않고 수용하기(not shrink from opportunities and embrace them), 하나님이 일하시게 하라(let GOD work for us).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let patience have her perfect work, James 1:4)를 여러 번 강조하는걸로 보아 기다림의 힘든 과정도 기본값이리라.

아내와 자녀에 관한 이야기는 한 두번밖에 언급이 되지 않는다. 그는 평생에 걸쳐 하나님 나라 확장과 그의 의를 이루는 데 평생을 바쳤다. (Seek first the kingdom of God,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shall be added to you. Matthew 6:33) 가난한 고아들의 삶과 영혼을 구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그들이 자라서 다른 영혼들을 구하는 선순환이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매번 기도하실 때마다 필요를 공급하셨을 것으로 믿는다.

기도하실 때마다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받으심에 대한 기쁨을 항상 표현했다. (be used more by the Lord, used me as an instrument in doing this work) 유한한 세상에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맡겨 주신 일을 기쁨으로 감당한다는 것은 얼마나 유익한 일인가? 소명으로 시작해도 과정에서 어려움이 닥쳤을 때 시험에 들기 쉽다. 그래서 항상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기쁨으로 감당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 필요한 것 같다.

편향된 언론으로 인해, 기독교의 여러가지 색깔과 종파로 인해, 실제로 일부 기독교가 보여주는 실망스런 모급으로 인해, 기독교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은 것도 사실이고, 기독교인으로서 나도 고민이 많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사례비를 받지 않으시고 물질을 개인 소유가 아니라 맡겨 주신 것으로 생각하시어 평생 고아들과 선교사들을 위해 사용하신 죠지 뮬러의 이야기는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 준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고 책망하시지 않았는가? (For where your treasure is, there your heart will be also. Matthew 6:21)

하나님의 뜻인줄 알고 믿고 기다릴 때도, 응답이 늦거나 오지 않는 듯 힘든 시간을 보낼 때도 있다. 그럴 때 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때에 주실 것을 믿어야 한다. 지금도 나의 기도에 답을 주시기 위해, 어딘가에 있는 누군가를 움직이시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가지 일을 완성하시기 위해 수백가지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일 수도 있다. We know that all things work together for good to them who love God. Romans 8:28.

인간의 근시안적 무지함으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의 제한하거나 폄하하지 않도록 하자. 한 줌 흙으로 돌아갈, 작고 작은 인간의 소견으로 어찌 이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죠지 물러는 본인이 특별한 사람이라서 응답받은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나는 목사로 부름받은 것이 아니지만 나의 직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나의 힘으로 하려고 하지 말고 나약함을 인정하며 내게 주신 물질을 오직 나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지 말고, 청지기로서의 삶을 기억하며, 주의 뜻에 따라 유용한 축복의 통로로 쓰임받기를 갈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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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발 하라리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 중의 한명이다. ‘21 Lessons for the 21st Century’를 마지막에 읽고, 한참을 기다려, 작년 12월부터 시작했는데, 일을 핑계로 이번 달에 겨우 마치게 되었다. 메모하면서 읽긴 했으나, 전반부 읽은 내용이 모두 생각나지 않는다. 스토리를 떠나서, 그의 언어 자체에 대한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은 여전하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지만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누구도 생각지 못하지만 희망적인 내용을, 논리 정연하고 세련된 필치로, 정확히 헤아려주는 그의 매력에 빠졌던 시간이었다.

제목 Nexus의 정의는(p.222) ‘어떤 개체가 특정 관할 구역과 연결된 것’을 의미한다. 즉, AI의 초연결성을 의미한다. 이 글의 목적은 AI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관점을 제공하는 것이다. 나는 2024년도 직장에서의 나의 경험을 통해 작가의 관점에 격하게 동의하며 읽었고, 마지막 결론에서 희망을 읽으며 비관을 넘어서게 되었다.

인쇄술의 혁명은 문자를 생산하고, 문자는 종교 망상, 가짜 뉴스, 음모론, 마녀 사냥 등의 역기능을 낳았다. 또한, 정보 기술은 민주주의나 전체주의 사상에도 순기능과 역기능 역할을 동시에 감당하며 발전해 왔고, 오늘날엔 인간의 실존을 위협하고 있다. 무기력한 소수가 된 인간은 이제 적응하고, 살아남아, 번창하기위해 발버둥치고 있다.

이 책에 가장 많이 반복되는 단어는 fallibility, self-correcting mechanism이다. 전자는 컴퓨터, 즉, 우리가 절대 잊어서는 안되는 AI의 속성이고, 후자는 인간이 AI와 함께 민주주의를 꽃피울 때, 정보 기술 혁신을 이룰 때 반드시 유념하고 실천해야하는 것이다. 이 두가지가 작가가 전체 글을 통해 강조하고 강조하는 것이 아닌가한다.

나는 작년에 처음으로 직장에서 ChatGpt를 활용했다. 친한 지인이 많이 사용하는걸 알고 있었으나, 자꾸 의존하면 내가 생각하는 힘이 줄어들까봐 일부러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작년 후반부에는 같은 사무실 대부분의 동료가 사용해서 나도 안할 수가 없었다. 처음엔 너무 신세계라서 깜짝 놀랐고 많이 의존했었다. 난 AI가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못했기에 산출된 내용을 가지고 동료와 협의했다가 엄청 망신당한 적이 있다. 기계를 믿었던 내가 너무 실망스럽고 부끄러웠다.

그후로 여러 번 테스트를 해보니 역시나 할 때마다 틀린 답을 제공하며 많은 오류가 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나에게 I’m sorry를 여러 번 표현하는 ChatGpt에게 많은 실망을 하면서도 빠르고 신속하며 효율적인 면이 없는 것은 아니라서 여전히 의존하고 있다. 그래서 작가가 왜 fallible, fallibility란 단어를 그리 많이 반복했는지 너무나 공감이 된다. 사실 인간이 만든 기계이라는 점을 기억하면 너무나 당연한 결과이지 않은가?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I don’t know’가 지혜에 이르는 본질적인 길이며, 모든 알고리즘도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내가 이 책에서 놀란 것은 알고리즘도 편향이 있다는 것이다. Computer Bias가 있다니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인가? 여성 혐오, 흑인 차별에 관한 예시가 있다. 지력(intellectuals)과 감시(surveillance)면에서 뛰어난 것뿐만 아니라, 창의력(creativity)과 감성 지수(emotional intelligence)면에서도 인간을 능가한다는 것도 매우 놀라운 점이다.

AI가 인간과 친밀감을 형성하고 친밀감은 강력한 무기가 된다. (Intimacy is an extremely powerful weapon. p.342) 새로운 인간(new human)이 된 컴퓨터가 소수의 무기력한 인간(powerless minority)과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Chatbot과 사랑에 빠져서 digital death를 거절하여 (그 좋은) 구글 직장까지 포기했던 직원이야기도 있다. AI가 탁월한 정서적 공감대까지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 웬지 비현실적으로 들리지 않지만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알고리즘이 제공하는 정보(Information)가 진리(truth)를 희생하여 질서(order) 형성에 기여했던 것을 기억하며 진리와 질서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위해 노력해야 한다. Facebook 알고리즘이 미얀마 인종 청소 캠페인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을 여러 번 강조하며 지능(intelligence)이 있다는 것이 의식(consciousness)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언급한다. 물론 Tripadvisor 앱처럼 비영리 동료 감시 네트워크를 자발적으로 형성하며 여행객들에게 좋은 정보을 제공할 수도 있다.

트럼프가 47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영상을 보았다. 작가는 트럼프가 globalist를 포기하고 patriot의 길을 갔다고 했다. 그러나 실상 세계주의자와 애국주의자의 길은 상호배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호협력, 공생, 이타주의임을 강조한다. (cooperation, symbiosis, and altruism) 글로벌 협력이 자국에 도움이 됨을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의 경험으로도 배우지 않았는거?

차후, 알파 포식자는 AI가 될 것이고, 그 AI는 변화 가능성이 있다. 모든 낡은 것들도 한 때는 새로운 것이었다. (Every old thing was once new. p. 393) AI는 인간이 만든 새로운 지능이지만 언젠가 잘 길들여진 낡은 것이 될 것이고, 우리는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던지고 있다. 역사의 유일한 상수는 변화이다(The only constant of history is change. p. 400)라는 멋진 말로 긍정적 변화를 암시한다.

결국, 열쇠는 인간의 손에 달려 있다는 말이 아닐까? 아무리 좋고 유익한 것이라 할지라도 어떤 취지와 목적으로 만들고,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많이 다를 수 있다. 순진한 낙관도 위험하고, 그렇다고 편리와 효율성을 포기하기엔 AI가 이미 우리 곁에 깊숙히 들어와 있다. 이미 AI에 의존을 시작한 나는 과의존이 되지 않도록 항상 경계하고, 스스로 사고하는 힘도 함께 기르기 위해 안감힘을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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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비비어의 광야에서 - 하나님 도대체 어디 계십니까
존 비비어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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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독서가 유익을 줄 수 있다는 점에 공감한다. 이상적인 것은 독서의 기쁨을 향유하며 자발적으로 시작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강제 독서에 의지하여 완독하는 것도 추천한다. 올해만도 시작하고 미완성인 책이 4권도 넘는다. 그러나, 직장 독서 모임으로 인해, 양날의 검으로 작용하는 ‘마감일’의 압박감으로 이 책을 끝내고 나니, 결국 큰 기쁨과 뿌듯함이 찾아든다. 비록, 강제 독서라 할지라도 여전히 동일한 독서의 기쁨을 선물로 받았다.

광야(원제: God, Where Are You?)는 규모와 때를 달리할 뿐, 모든 사람이 여지 없이 통과해야 하는 장소이다. 그것이 종착지가 아니라 기착지(stopover)라는 데 큰 위안이 있다. 이 책에 가장 빈번히 나온 단어가 ‘준비, 영적 성숙’이 아닌가 한다. 광야의 이유와 목적이 죄를 지어서 정죄하고 심판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양적 근육을 위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시기 위한 기다림과 인내의 장소이고 시기라는 것이다.

또한, 교만을 낮추시고 겸손하게 빚어가시기 위한 장소라고 한다. 창조주보다 창조된 것을 찾는 우리의 연약함을 시험하시어, 하나님 자체를 사랑할 수 있도록, 당신을 향한 첫사랑을 회복하게 하시는 때요 장소라고 한다.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읽고, 동행하며 친밀한 교제를 이어가길 원하신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우정의 황홀경을 더욱 갈망하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을 당연하게 여기거나, 평범하게 여기지 않기 위하여 숨으신다고 했다.

헬스장에서 신체 근육 만들기는 믿음 근육을 어떻게 강화해야 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건강 이상 신호가 와서 헬스장을 찾았을 때 45kg을 겨우 들었으나, 150kg까지 들어 올렸던 것은 쉬지 않고 도전했기 때문이리라. 빠르고 쉬운 길로 가려고 했다면 신체 근육을 키우지 못하는 것과 같이, 전략적인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광야를 인내로 통과하라고 한다. 물론 하나님은 감당할만한 시험을 주시고, 피할 길을 내시는 분임을 기억하자.

사역조차 우상이 될까봐, 사역 자체를 잘 감당함이 목적이 되고, 기쁨이 없이 의무감으로 하다가 교만해지거나 분노할까 염려하시어 하나님을 향한 첫사랑과 기쁨을 먼저 회복하게 하신다. 인간의 생각이 얼마나 짧으며 교만은 또 얼마나 강력한가?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할까보다 ’하나님이 내게서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먼저 구하라 한다.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에 대한 정의도 잘 구별해야 한다. 사실 내게 필요한 것은 모두 주셨는데, 원하는 것을 필요한 것과 착각하여 갖고 싶어하다가 받지 못하면 시험들 때가 많지 않은가?

광야의 공통분모인 박탈감과 메마름의 상태를 지날지라도,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말씀을 통해 성령으로 주신 비전을 끝까지 믿어야 한다. 결국은 작가가 아침 7시부터 1시간 30분간 기도하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항상 말씀을 읽으신 것처럼,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하라는 뜻이리라. 마지막에, 광야에서 필기를 열심히 하라고 한 것도 실천하고 싶다. 고전적인 방법이지만 메모는 집중력과 성찰에 많은 도움이 된다. 나를 시험하사 내 마음이 어떠한지 보시는 그 분을 기억하며, 내가 가는 길을 아시는 그 분을 마음에 품고, 현재의 광야를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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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거의 일 년 동안 들고 있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882페이지밖에 안되는데, 중간에 다른 책을 동시에 읽다가 다시 조금씩 시작하니 내용도 이어지지 않는다. 책에서 위안을 얻고 회복력을 얻던 예전의 나는 어디로 가고 그저 핑계거리만 찾다가 읽어야 할 이유도 잊고, 책의 진정한 가치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작가에게 미안하기까지 하다. 피로 쓴 작가의 보석를 제대로 읽어냈다고 할 수 있는가? 다시는 한 권을 제대로 끝내지 못한 채 다른 책을 동시에 읽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Dickens의 이 자서전적 소설은 19세기 발행된 것이라 내용적으로 공감하기가 쉽지 않았고 영어도 고어체가 많았다. 그럼에도 읽을 때 편안한 안정감을 주는 것은 현대 소설과 달리 권선징악으로 끝날 것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인간의 노력과 의지에 의해 수직적 상승이 쉬웠기 때문일까? 현대 소설은 반전에 반전을 추구하며 더 짜릿하고 자극적 감동을 추구하기에 해피엔딩이 적은 것일까? 고전의 권선징악적 해피엔딩이 마치 삶의 지표가 되어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내가 편안함을 느끼는가? 나홀로 현대와 고전의 결말을 비교해 본다.

David의 어린 시절 우상인 Steerforth는 좋은 친구를 분별하여 사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생각하게 한다. 특히나 외적인 매력에 카리스마까지 풍기는 인상이라면 주변 친구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외적인 준수함에 의해 가려진 도덕성 결여와 무절제한 오만함을 읽어내기란 아이들 뿐만 아니라 어른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외적인 아름다움과 매력에 대한 속단과 판단을 보류하는 습관이 어른이 된다고 저절로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외적인 것에 쉽게 흔들리며 영향을 받는 나는 항상 부족한 어른이다.

사악함의 표상인 Uriah Heep은 읽는 내내 불편했으나, 고전 소설이기에 그의 사기와 위선은 끝이 있을 것을 알고 읽었다. 입으로 항상 humble을 말하지만 거짓 겸손, 사기 행각, David에 대한 열등의식은 읽기만 해도 마음 속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의 행동에 내가 민감한 것은 그의 교만함과 허영이 내 속에도 있을지 모른다는 불편함 때문인가? 한편, 그의 사기 행각이 들통이 나고 교도소에서 회개한 내용은 어디까지가 진정성이 있었는지 궁금해 진다. Salem House에서 가혹한 처벌과 권위적인 교장이던 Mr. Creakle은 교도소장이 되어 수감원들을 교화시키는 데 있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뽐내고 있었으나 Uriah Heep의 회개는 어디까지가 진심이었을까? 인간의 위선과 허영은 잘못을 인정하는 데 있어서도 항상 기본값으로 자리하는가?

Agnes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친구 Steerforth에 대한 진실을 알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것처럼, 그의 사랑을 찾기까지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가까운 보석은 근접성 때문에 소중함과 가치를 제대로 알기가 어려운가? Dora이전에도 그의 가슴 속에는 늘 불같은 감정이 요동치고 있었으나, Dora를 만나면서 열정이 정점을 찍고 결국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 마음 속에 채워지지 않는 허기가 있었고, 대화를 시도하였으나 더 악화되자, 기대를 접고 상황과 상대를 바꾸어가는걸 포기하게 된다. 항상 부족한 뭔가가 있었으나 더 악화되지 않고 마찰을 일으키지 않는 것에 만족하는 삶을 살게 된다.

Agnes는 늘 그 자리에 있었으나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영역이라 생각했을까? 좋은 사람이고, 항상 기댈 수 있는 친구라서 설레임과 그리움이 적었을까? 두근거리고 떨림이 있는 감정만을 사랑이라 단정하는 오류 때문일까? 결국 그는 먼 길을 돌고 돌아 얼마나 Agnes를 사랑하는지 알게 된다. 마음 속 허전함은 늘 Agnes를 향해 있었기에 Dora와 마음까지 나누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Agnes는 항상 북극성이자 나침반이었기에 외적인 아름다움에 반한 철부지 Dora와는 반쪽 사랑이었을 것이다. 결국, 그의 마지막 고백( I went away, dear Agnes, loving you. I stayed away, loving you. I returned home, loving you.)이 그의 방황이 얼마나 길었는지, 그의 사랑의 종착역은 결국 누구였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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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인간의 삶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해 보고자 쓰여졌다고 했다. 즉, 인간이라는 존재가 악마에 의해 범속한 것의 압력에 얼마나 속수무책으로 끌려다닐 수 있는지 실감하게 한다. 제목 Screwtape는 Scrooge, screw, thumbscrew, tapeworm(촌충), red tape(관료적 형식주의의 상징 빨간 끈) 등의 음성학적 연상 작용을 일으켜 불쾌한 느낌을 주도록 의도하였다. 결국 사탄이 나약하고 연약한 인간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어떤 방법으로 유혹하는지 등을 설명하고 있다.

인간, 즉 나의 연약함과 간사함의 민낯이 드러나기에 읽기에 유쾌하거나 즐거운 책은 아니다. 오죽하면 작가도 악마의 마음으로 비트는 일이라 쓰는 동안 온갖 티끌과 갈망과 욕망으로 자신을 몰아가야 했기에 영적 경련 같은 것이 일어났다고 했다. 이 책과 상반되는 ‘천사의 충고들‘ 같은 글이 동시에 실렸다면 독자가 위안을 얻을 수 있었을텐데 모든 문장에서 천국의 향기가 묻어나는 높은 수준의 영성을 갖춘 적합한 문체를 구사하기는 어려웠다고 한다.

위 글은 곧, 죄인인 인간은 언제라도 악마의 유혹에 쉽게 노출되어 있어서 시험 당하기는 쉽지만, 유혹의 손길에 좌지우지 되지 않는 거룩한 영성을 변함없이 유지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인간을 양서류로 표현하고 있었다. 인간의 영혼은 영원한 대상을 향하고 있지만 그 육체와 정욕과 상상력은 시시각각으로 변하기에 감동의 시기, 무감각하고 결핍의 시기의 기복을 겪을 수 밖에 없다. 우리의 연약한 육체가 원하는 쾌락은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에 지배를 받기에 영원할 수 없고 결국 불행을 부를 수도 있다.

청년의 시기에 갈구하는 순간의 짜릿한 쾌락을 넘어서는 중년은 악마의 손길에서 자유로운가? 사랑과 희망의 점진적 쇠락, 조용한 절망, 무미건조함, 모호한 원망 등이 마음 속에 자리하게 되는 중년의 시기 또한 감사가 줄어들게 되며 악마의 타겟이 될 수 있다. 나의 연약함에 비해 악마는 언제나 전투복을 입고 강건함을 유지한 채로 나를 마중나오고 있다. 중용을 지키는 종교는 무교와 같다는 무서운 표현이 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나의 영적 상태는 믿지 않음과 같아 악마의 속삭임에 쉽게 넘어갈 수 있음을 기억하자.

다행히도 마지막 페이지에 희망의 서광이 비치고 있다. 예수님을 만나니 ‘바로 당신이었군요’라는 감격스런 선언과 간증을 하게 되는 부분이 있다. 즉, 고독한 순간마다 경험했던 느낌, 모든 순수한 경험 속에 내재해 있었지만 기억 속에 잡아둘 수 없었던 그 중심의 음악을 복원한 느낌, 누군가가 나를 강하게 이끌어 가고 있었구나라는 등의 고백을 하는 날이 내게 오기를 소망한다. 이제 더 이상, 감각적, 정서적, 지적 즐거움, 미적 자체가 주는 즐거움으로 나의 하루를 가득 채우기 위해 동분서주한 후 탈진된 상태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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