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ittle History of the World (Paperback) - 『곰브리치 세계사』원서 A Little History 2
Gombrich, E. H. / Yale Univ Pr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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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History)는 나의 아킬레스건이다. 자신의 무지나 실수를 인정하며 민낯을 드러내는 것은 쉽지 않기에, 나도 핑계 거리를 찾아본다면 중학교나 고등학교 때 역사와 세계사를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상황이나 환경을 탓하기에는 그동안 충분한 시간과 정보가 많았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왜 나는 그동안 한국사나 세계사에 대해 더 깊은 관심과 흥미를 가지지 않았을까 원망스럽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듯이, 역사를 알지 못함으로 다른 책을 읽어도 맥을 잡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적이 많으리라. 우연히 이 책을 구매하게 되었지만, 나의 방치되었던 역사에 대한 무지를 깨우는 데 촉매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이 책은 2008년에 발행되었으며, 역사서를 대체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모든 배움을 포함하여 역사 탐구도 즐겁게 다가설 수 있다는 것을 목적으로 쓴 책이다. 공부하듯이 접근하지 말라고 했기에 가볍게 읽었으나, 한 권의 책(284쪽) 안에 구석기 시대부터 2차 세계대전까지 방대한 내용을 모두 담고 있어 내 기억력의 한계로 리뷰를 쓰기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책을 좋아해서 책에 대한 애착이 강하지만, 항상 내가 느끼는 것이 있는데, 독서에 대한 욕심이 지적 집착, 인지적 허영, 권태를 피하는 호기심, 외로움을 채우는 수단 등 그 어떤 것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책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수단으로 읽기에 가끔은 활자만 읽으며 ‘읽기 위해 읽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지는 않았나 하는 부끄러움이 있다.

오랜 기간 읽었음에도 전체적인 맥을 잡거나 자연스러운 흐름을 이해하기는 어려웠으나, 파편적으로 듣고 배운 기억을 상기시키며 인상적인 부분이 많았다. Veni, Vidi, Vici (I came, I saw, I conquered)를 부르짖으며 승리의 쾌거를 외쳤던 로마 장군 Julius Caesar가 친구에게 배신당하면서 “You too, Brutus”를 말하며 생을 마감했다. Henry IV가 Pope Gregory VII와 충돌해 파문당하자 북이탈리아의 Canossa 성을 찾아가 3일 동안 눈 위에서 맨발로 교황에게 용서를 구했던 일로 인해 ‘go to Canossa’라는 표현이 자존심을 접고 비굴한 용서를 구한다는 뜻임을 알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예외는 아니겠지만, 종교와 정치의 결탁이나 결합이 옳은 것인지 혼란스럽다. 종교가 삶 속에 깊은 영향을 끼치기에 반드시 비세속적일 수는 없다. 그러나 종교 자체의 본연의 의미를 벗어나 정치적인 영향력에 깊이 관여하거나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모르겠다.

소설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역사도 인물 중심으로 읽은 것 같다. 농군의 딸로서 프랑스 군대를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했으나 19세의 나이에 ‘마녀 사냥’에 의해 화형에 처해졌던 Joan of Arc, 지적 호기심과 창의력으로 다재다능했던 이탈리아 르네상스인 Leonardo da Vinci, 로마 제국의 몰락과 더불어 시작된 중세 시대 가톨릭의 부패를 세상에 알리며 종교 개혁에 앞장섰던 독일인 Martin Luther와 프랑스인 John Calvin, 현대 과학의 대부라 불리며 과학적 사고를 도입하고 기독교적 세계관과 정면 대치하며 종교 재판에 넘겨져 가택 연금 속에서 생을 마감한 Galileo Galilei,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으나 프랑스 황제로 군림하며 만족할 줄 모르는 야망을 펼쳤으나 워털루(Waterloo)에서 패한 후 영국의 작은 섬 세인트헬레나(St. Helena)에서 외로운 생을 마감한 Napoleon,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간의 계층 갈등을 언급하며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The Communist Manifesto (1848)를 저술한 Karl Marx, 노예 제도 폐지의 쾌거를 이룬 Lincoln, 독일 통일에 기여한 외무장관 Bismarck,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고 1939년 폴란드 침공을 시발로 하여 세계 2차 대전을 일으킨 Adolf Hitler,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발발한 2차 세계대전의 원자폭탄 개발 기반을 마련한 덴마크인 물리학자 Niels Bohr 등등.

과학과 기술은 현재 문명의 이기를 도모하며 편리함을 가져왔으나, 못지않게 부정적인 영향도 끼쳤다. 그럼에도 이제 인간은 과학과 기술의 도움 없이 살아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다. 결국 열쇠는 다시 인간에게 있는 것인가? 세계 대전을 통해 인간(human)이 얼마나 비인도적(inhumane) 야수로 변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양날의 검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과학과 기술의 파괴력과 영향력을 묵과해서는 안 된다. 역사는 잊혀져서도 안 되며 침묵해서도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기억하며, 용서를 구하고, 용서하며, 서로를 존중하고 관용을 베풀며 나아가는 방향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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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unded Healer : Ministry in Contemporary Society - in Our Own Woundedness, We Can Become a Source of Life for Others (Paperback)
Nouwen, Henri / Darton,Longman & Todd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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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아픔, 슬픔 없이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았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지 않을까한다. 누구나 저마다 다른 정도와 깊이의 상처가 있어서 이런 책에 대한 수요가 높을 수도 있다. 제목에 이끌려서 구매하였는데 읽다보니 목회자를 위한 책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 방식대로, 내 마음의 상처에 연고를 바르는 심정으로 읽으니, 어느새 치료받은 느낌이 든다. Book Therapy가 그 어떤 특효약을 대신할 것인가?

현재의 강력한 포로가 되어 사는 현대인은, 의도치 않게 자신의 미래의 수동적 희생자가 되어 살아간다.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사는 핵인간(nuclear man)은, 사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역사적 혼란과 단절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있다. 자기 중심적 내향적 삶을 사는 핵인간은 어떤 외부적 현실도 그의 불안감과 외로움으로부터 그를 자유롭게 해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핵인간의 삶의 두번째 특징은, 그를 이끌어 줄 권위자인 아버지가 없는 삶이다. 아버지 대신에 그의 동료가 기준이 되고, 동료가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에 민감성을 드러낸다. 즉, 동료의 폭력에 노예가 된다(become enslaved by the tyranny of their peers). 아버지의 인도가 없다는 것은 동료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삶과 다르지 않다. 그누가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세상의 인정에 대한 욕구가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거짓일 것이다.

타인의 시선과 인정의 욕구에 속박되어 있는 핵인간의 세번째 특징은 분노이다. 뿌리 깊은 불행, 우울, 불안감으로 가득찬 세상을 향한 경련성 발작과도 같은 공포와 소외감을 느낀다. inwardness, fatherlessness. convulsiveness의 특징을 안고 살아가는 핵인간을 치유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어쩌면 그 어떤 사람도 이들을 치료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인간은 인간일 뿐이고, 인간이 신이 될 수 없으며, 신이 없이 인간은 인간이라 불릴 수 없고, 오직 신만이 치유자가 되실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인간인 우리도 누군가의 ‘내일’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becoming his tomorrow). 내일이 있음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살아갈 의지를 잃을 것이고 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병원의 낯선 환경에서 수술을 기다리던 Mr. Harrison에게는 그를 기다리던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오로지 고된 일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살아가는 것도, 죽는 것도 두려웠던 사람이었다. 그에게 ‘내일’은 큰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의미있는 내일이있었거나, 누군가가 그의 내일이었다면 그는 삶에 대한 희망을 보였을 것이다.

누군가의 내일이 되어 주기 위해서는 자신의 상처를 잘 직시하고 먼저 치료해야 한다. 자신의 상처를 부인하거나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잘 묶고 보듬으며 돌보면서 다른 사람의 상처를 치료할 준비를 하라고 했다. 상처에 대한 출구를 찾기 위해서는 상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The way out is way in.) 상처가 꼭 타인으로부터 입은 흔적만은 아닐 것이다. 평생 안고 가야하는 외로움, 내적 공허함, 파괴적 기대감도 우리를 괴롭히는 아픔과 상처가 아니던가?

외로움의 상처까지 잘 싸매고 안아주며, 마음을 열어 상대를 환대하고, 무법의 침입자라는 개념이 아니라 겸손함으로 타인의 상처 속으로 들어가 치유자가 되어 보라고 한다. 나는 예전에, 내 마음을 먼저 추스려 회복이 되고 난 후에 상대가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환대(hospitality)는 있는 자, 가진 자, 마음이 따뜻하고 온유한 자의 특권이라 생각했는데, 나처럼 상처 투성이인 자도 healer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어쩌면 엉터리 삶을 살아온 내 마음의 상처가 온전히 치료되어 온유함과 겸손의 삶을 살 수 있는 날은 영원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바로 오늘 상처받은 치료자가 되어 누군가의 내일이 되길 촉구하는 것인가? 어쩌면 다른 사람을 위한 공간을 내어줌으로써 내 상처가 어느새 아물어 있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아픔이 있는데 자꾸 일어나라고 해서 가혹하다 생각했는데, 이것 또한 나를 치료하시는 방법이었던가?

Being alive means being loved.
We can only love because we are born out of love.
We can only give because our life is a gift. (P.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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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팬으로서 감동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이 mixed review를 받은 것과 달리 역시나 나의 집중력 부족으로 작가의 의도를 다 파악하지 못했다. 역시나 일과 독서를 병행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분량이 적다고 이해가 잘되는 것은 아니었다. 장기간 조금씩 읽는 것은 허영이며 사치이고 책을 제대로 이해하긴 힘들다는걸 다시 느낀다. 나의 지적 허영이 피로 쓴 작가의 귀한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것 같아 늘 미안하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책을 가까이 함이 오히려 독서의 본질을 해치는 것일까?

작가가 의도했던 깊은 의미를 다 파악하지 못했으나, 제목 자체에 작가가 의도했던 것이 있다고 추측했다. 언어 천재 밀란 쿤데라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언어의 연금술사이기 때문이다. 무의미의 축제(The Festival of Insignificance)라는 것은 우리가 의미를 부여하며 열심을 다해 살아내는 일들이 결국엔 무의미하며, 무의미한줄도 모르고 바보처럼 즐겁게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감을 의미하고 있을까?

무의미가 존재의 본질이고, 우리는 무의미를 사랑해야 하고, 무의미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한다(Insignificance is the essence of existence. We must love insignificance, we must learn to love it. p. 113) 무의미를 인정할뿐만 아니라 사랑해야함은 삶 자체가 무의미의 연속이고 축제이기 때문인가? 지난 날 내가 엄청난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며 안달하고, 흥분하고, 잠못 이루던 일을 생각해 보면 위의 말이 너무나 이해가 된다. 몇 달이 지나고, 몇 년만 흘러서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기억이 흐려진다.

심지어 무의미의 가치(value of insignificance), 총명함의 쓸모없음(uselessness of brilliance)에 대한 표현도 공감이 된다. 총명한 남자가 여자를 유혹할 때, 여자 또한 남자만큼 총명해야 된다는 의무와 부담감이 생기기에 총명함은 쓸모도 없고 해롭기까지 하다. 오히려 무의미함은 여자를 자유롭게 하고 경계심으로부터 해방감을 준다. 사실 여자들은 자기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한 남자를 원하지만, 만약 실제로 그런 이성을 만난다면 실수할까봐 긴장되고 두려운 마음에 항상 긴장되고 불편한 것이 사실일 것이다.

Alain의 사과에 대한 표현도 매우 인상적이다. 사실은 그를 버리고 떠난 엄마가 그에게 사과해야 하는데 자신이 먼저 사과를 하고 자신은 늘 먼저 사과하는 사람이며, 엄마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하고 있다. 서로 사과할 때 기분이 좋고, 서로 사과하는 것이 아름답지 않냐고 묻고 있다. 이것은 엄마의 사과를 받기 위한 그의 전략이 아닌가 싶다. 그는 매 순간 죄책감을 느끼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결국 상대방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한 자가 승자이기에 먼저 사과함으로써 엄마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싶었을까?

어떤 의미에서 자신을 사과하는 자라고 했는지 정확히 모른다. 미움과 분노를 벗기 위한 수단, 즉, 마음의 평화를 위한 용서의 수단일 수도 있다. 상대방으로부터 사과를 끌어내기 위한 전략일 수도 있다. 사과를 먼저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게 함으로써 낮은 자세이나 승자의 위치에서 하는 사과일 수도 있다. 어떤 의도이든 사과는 아름답다 생각한다. 심지어 후자라 할지라도 쌍방의 사과가 허락되고 서로의 용서가 이루어진다면 아름다운 관계가 성립될 수 있다.

설령 그렇지 못해도, 사과의 시늉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과하는 척, 시늉‘ 조차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사과하지 않아도 불편을 느끼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음이 무섭기도 하다. 몸이 매우 편리한 세상에 살고 있고,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편의를 도모할 수 있는 시대이지만,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상식이 통용되고 있는지 가끔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사과하는 것이 상식이고 기본인 세상이 되면 좋겠다. I am an apologizer. That’s the way you made me. I feel good when we apologize to each other. Isn’t it lovely, apologizing to each other? (p. 103)

이 세상을 전복시키고 새롭게 바꾸거나 정면으로 위험에 맞서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걸 알게 되었다. 세상을 향한 유일한 저항이 있다면 더 이상 심각하게 받아 들이지 않는 것. 이 부분에서 작가의 체념이 보이기도 한다. 심각하고 진지한 모습으로 세상에 대한 힘겨운 싸움을 해 온 지식인이 결국 농담 속에서 안주하며 모든 싸움이 무의미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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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에 감동을 더하고 밤을 지새며 읽었던 톨스토이의 두 작품, ’전쟁과 평화(1869)’, 안나 카레니나(1878)‘와는 결이 완전히 다른 작품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1881)’ 와도 다른 색깔의 작품으로써 많은 생각거리를 던진다. 이 책은 1886년에 발표된 책으로 톨스토이의 신앙적 고뇌가 담겨진 책이라 들었다. 정통 러시아 정교회와 국가 권력의 결합, 형식적 교리와 의식에 회의를 느끼던 그가 기독교에서 새로운 내적 질서를 찾아가는 과도기적 시점의 작품이라 들었다.

톨스토이의 깊은 고뇌가 어쩌면 바로 모든 인간의 원초적 궁금증을 표현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이반의 죽음은 살아 생전보다 더 근엄하고, 살아 있는 자들에게 보내는 꾸짖음과 경고처럼 보인다고 첫장을 시작하고 있다. 죽은 자들이 산 자들에게 보내는 경고의 메세지는 무엇일까? ‘항상 죽음을 기억하라’, ‘모든 사람은 죽음 앞에 평등하다’ , ‘죽음의 불가피성을 기억하며 유의미한 삶을 살아라’ 등등의 사인일까? 죽음이란 단어 앞에서 작아지지 않는 자 누구인가?

살아 있는 자들의 슬픔과 눈물은 죽은 자를 위한 것인지, 살아 남은 자를 위한 것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예정되어 있으나, 이미 죽은 자에게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죽음이, 마치 내게는 부자연스럽고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평소에 행동을 한다. 알지만 일시적으로 애써 부인하려는 인간의 연약한 자기 부정이 아닐까? 죽음은 터부시해야할 주제가 아니라 현재 시제로 늘 기억하며, 하루를 헛되이 살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나침반이 되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이반의 삶의 목표는 쉽고, 유쾌하고, 품위있게 사는 것이었다. 가족에게 조차 품격있는 거리(dignified aloofness)를 유지하며 자신의 편안함과 취미를 침해 당하면 안되는 사람이었다. 불편하고 지저분하며 품격이 떨어지는 것은 그와는 무관한 삶이었고, 그 주변에는 그와 비슷하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 뿐이었다. 삶의 흐름과 질서가 늘 있어야 할 곳에, 가장 어울리는 세련된 모습으로 정돈되어 있어야 했다. 그런데, 과연 겉으로 보이는 풍요와 안정된 삶이 그의 행복을 정의할 수 있을까?

갑자기 찾아온 질병이 심해지면서 죽음의 그림자와 마주해야하는 그에게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외로움이었다. 아내와 1남1녀에게 사랑받고 인정받는 평온한 삶이라 생각했으나, 그는 철저한 외로움을 느끼며 그의 삶 전체가 거짓과 사기였음을 알게 된다. 오직 한 가지, 그가 죽는다는 것만이 진실일 뿐 무기력, 외로움, 인간과 신의 잔인함, 신의 부재를 느끼며 아이처럼 울고 있는 이반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성공가도를 따라 성실하게 노력하며 살아온 그가, 왜 고통을 받아야 하고, 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지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반은 그가 평생을 잘못 살아 온 것은 아닌지 생각을 하게 된다. (What if my whole life had been wrong?)또한, 어쩌면 해야할 것을 하지 않고 살았던 것은 아닌지 깨닫게 된다. 갑자기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가슴과 옆구리를 맞게 되고 숨쉬기 조차 힘들어진 그가 구멍으로 떨어져 바닥에서 빛(light)을 보게 된다. 그 때 그는 실제로는 앞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뒤로 가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결국 무엇이 옳은 일인가? (What is the right thing?)를 생각한다.

결국, 그는 그 빛을 잡고, 비록 그동안 틀린 방향에서 해야할 일을 하지 못하고 살아 왔으나, 잘못 살아온 삶도 여전히 수정되고 교정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구멍의 바닥에 있던 그가, What is the right thing? 이라는 질문을 하고 나니, 누군가가 그의 손에 키스를 했고, 눈을 떠 보니 아들이 그를 동정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유일하게 동정심과 연민을 얻은 두 사람은 하인(Gerasim)과 아들뿐이었다. 친구와 가족이라는 이름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돌아보게 된다.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무서운 상황보다, 혼자라는 처절한 외로움과 나약함으로 절규하며 건강하지만 냉소적이고 세속적인 사람들을 향해 비난과 원망을 쏟아내던 그가, 이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 놓고, 죽음의 자리에 빛이 있음을 알게 되며(In pace of death there was light.) 편안하게 숨을 거둔다. 건강하고 부유하여 모든 것이 평온할 때, 이반은 자신이 가는 길에 대하여 옳은 방향인지 점검하지 못했다. 그러나 바닥에 떨어지고 나서야 앞으로가 아닌 뒤로 가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반 같은 속물에게도 빛(light)은 여전히 기회를 주고 있다. 그의 삶이 바뀔 수 있고 교정될 수 있다고 하고 있다.(though his life had not been what it should have been, this could still be rectified.) 이 얼마나 희망적인 메세지인가? 그래서 이반은 죽음 자체가 영원한 끝이 아니며, 죽음의 자리에 빛(light)이 있음을 알게 되어,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했으리라 생각한다.

비판적,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던 톨스토이가 완전히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쓰여진 책이 아니라 할지라도, 빛(light), 아들(son), 교정되는(rectified)이라는 실마리에서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내 나름의 해석을 할 수가 있다. 죽음을 앞두고 빛을 볼 수 있고, 잡을 수 있고, 빛이 있음을 알 수 있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적으리라. 나처럼 뒤늦게 잘못 살아왔음을 알고 가슴을 칠때,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수정, 교정, 구원의 기회가 있다고 말해 준다면 그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내 삶의 목표, 의미, 방향성을 늘 점검하고, 죽음을 기억하며(Memento Mori), 게으름 피우고 싶을 때 몸을 더 움직이고, 나 자신만의 유익과 편의만를 도모하는 삶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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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우웬은 카톨릭 신부님이자 하버드 대학 교수님이셨다. 그런 그가 서커스단에 매료되어 몇년간 생활을 같이 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신부님과 교수님에 대한 고정관념을 넘어 그의 명성에 큰 타격이 있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한 그의 용기와 도전에 박수를 보낸다. 뜨거운 가슴이 시키는 일에 도전하여 즐거움과 기쁨을 얻고 아울러 서커스 단원들과 함께 했던 시간으로부터 영성을 끌어 낼 수 있었던 그에게 존경심을 표한다.

나이든 노교수가 서커스 공연 맨 앞자리에 앉아 어린아이와 같은 황홀한 얼굴로 박수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우리에게 항상 따라 다니는 족쇄가 있다면 ‘나이’라는 단어이다. 마치 그 누가 몇 세에는 무엇을 하고 몇 세에는 어떤 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정해둔 것 처럼 나이값이란 단어에서 조금이라도 이탈하면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먼저 생각하게 한다. 내가 여자라서 더 나이에 민감한 것일까? 평생을 정신적인 고뇌와 영적인 싸움에 시간을 쓰신 신부님이 몸으로 표현하는 서커스단에 매료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Body-centered spirituality라고 표현되어 있었다. 서커스와 영성은 서로 닮아 있었다. 서커스 공연은 매일 위험을 감수하고 실패를 극복하며 한계에 도전해야 한다. 서커스 단원들은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알지 못하는 영적 허기를 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무리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며 flying을 잘 해도, 잡아주는 catcher가 없다면 그 공연은 실패로 끝이 난다. Flyer의 노력이 아니라 catcher가 잡아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공연의 완성이 전적으로 catcher의 능력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Flying은 무엇을 의미할까? 나는 이 단어 속에서 자유를 보았다. 구속에서 자유롭게 어딘가로 마음껏 날 수 있는 자유함이 그립고 그립다. 현재 나의 하루 하루가 얼마나 버겁고 큰 구속에 단단히 묶여 있는가? 난 이 속박을 벗어나 자유롭게 날고 싶다. 그러나, 비행을 시도한다는 것은 떨어질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내가 자유롭게 마음껏 날아 오를 때 누군가 항상 그 자리에서 나를 잡아주는 catcher가 있다는 것과 떨어져도 safety net가 있다는 것을 믿어야 날 수가 있다.

나는 이제 확실히 나의 catcher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그동안에도 여러번 떨어졌고 우아하기는 커녕 엄청 추한 모습으로 떨어진 적이 있다. 앞으로도 살아가는 동안 또다른 추락이 있을 수 있다. 이제는 예전과 다른 나의 safety net을 생각하며 용감하게 도전할 수 있을까? Henri Nouwen 만큼은 아니지만 나 역시 쉼없이 도전하는걸 좋아한다. 이제 나도 직업에서 소명으로, 개인주의에서 공동체 의식으로, 쾌락에서 영성으로 삶에 도전이 가능할지 생각해 본다.

놀라운 문장이 있었다. God does not want to be feared. God wants to be loved. God wants to be as close to us as we are to ourselves.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이라 했기에 경외감이 당연하다 생각했는데, 사랑과 친밀함을 원하실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도,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도 마치 서커스 공연을 하듯이 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과 같다. catcher에 대한 믿음이 없이 날 수 없고, 떨어져도 safety net가 있다는걸 믿어야 도전할 수 있다.

나의 catcher이자 safety net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고 멀리 있지도 않다. 늘 나와 함께 동행하며 나의 연약함을 잘 알고 있고, flying을 두려워하는 것도 아신다. 가끔은 falling도 계획하시어 나의 교만을 고개 숙이게 하시고, 겸손이 글로벌 코드임을 알게 하신다. 나에게 falling이 없었다면 나는 고개 숙이는 법을 몰랐을지도 모른다. 사랑할만한 구석하나 없는 내가 무조건적으로 사랑받았음으로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조건없이 사랑하고 돌려받지 못함에 서운한 마음을 품지 않고 그 누구도 정죄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아무리 기도하고, 신앙 서적을 읽으며 감동하고 회개해도 하루에도 몇번씩 넘어지고 실패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safety net으로 떨어졌기에 매번 다시 일어나 사랑하기를 연습한다. 덜 받음에 서운한 감정은 조금씩 희석되는 것 같으나, 또 넘어질 가능성은 여전하다. 그래도 catcher가 있는걸 알기에 사랑과 도전을 계속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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