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king Sense of God: Finding God in the Modern World (Paperback)
Timothy Keller / Penguin Group USA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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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간 종교는 나의 들러리로 존재해야 했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정체성을 증명하기 위해 분주했기에 혹시나 방해될까 하여 신앙을 병풍처럼 세워 두었다. 내가 누구인지를 증명하는 것만으로도 나의 하루는 충분히 바빴고 24시간이 모자란다고 생각했다. 내 정체성의 방향이 늘 한 장소에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아주 오랜 기간 밖으로(outward) 향해 있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그나마 증명하기가 쉬워서 나의 열정, 노력, 능력을 모두 바치면 될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세상의 인정에 대한 나의 욕망은 잠들지 않았고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그 욕구가 모순적이고 파악하기 어려우며 가변적이라는 데 모순이 있었다. 다시 나의 방향은 안으로(inward) 향하기 시작했다. 밤을 지새우며 독서 삼매경에 빠지면서 나의 정체성을 바로 찾는 듯했다. 무서운 것은 그럼에도 내 삶의 이유와 목적을 찾는 데는 한계가 있었고 마음속 빈 구멍은 갈수록 커져만 갔다. 내가 아무리 올곧은 삶을 살려고 발버둥쳐도 두려움과 허무감은 지울 수가 없었다. 결국 나의 정체성의 방향을 위로(upward) 설정하고 나서야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three paths toward identity: outward, inward, upward, pp. 133~134)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 섬기고, 사랑하도록 지음받았음에도 이를 온몸으로 거부하며 살았다.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은 내가 현재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You are what you love. p. 89) 나는 덜 중요한 것을 더 사랑하고, 더 중요한 것을 덜 사랑하며,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일중독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내 사랑의 무질서를 바로 잡기까지 얼마나 오랜 기간이 걸렸는지 부끄럽고 또 부끄럽다. 많은 사람들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어떤 것을 사랑하고 숭배하면서 살아간다. 관심, 애정, 사랑을 넘어 집착하고 매달리는 순간 그것이 곧 숭배의 대상이 되고 우리를 통째로 지배할 뿐만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신으로 모시게 된다. 결국 하나님이 아닌 가짜 신을 숭배한 인간은 지칠 줄 모르는 욕망의 늪에 빠져 만신창이가 되고 나서야 삶의 진정한 목적과 이유를 생각하게 된다. 이런 악순환을 겪은 나는 이 책을 통해 신의 존재, 예수님의 부활, 종교의 필요성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도스토예브스키는 ‘만약에 신과 내세가 없다면 모든 것이 허락되고 인간은 어떤 것도 할 수 있다’라는 무서운 말을 남겼다. (Without God and the future life, everything is permitted, one can do anything. p. 177)

신이 없다면 도덕적 의무감, 인간의 권리, 생각과 의식, 미적 감각 등에 관한 윤리적 가치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옳고 그름을 나눌 때도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그 기준은 누가 정한 것인가? 물리학 상수의 극도로 정밀한 값 때문에 지구상에 생명체가 탄생하고 존재할 수 있으며 아주 미세한 차이라도 중력과 전자기력의 오차가 발생했다면 생명체가 존재할 수 없었으리라는 우주의 신비는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중력이 지금보다 조금 더 약하거나 전자기력이 강해졌다면 우주에는 그 어떤 생명체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주의 신비 뒤에 누군가가 계획하고 디자인한 창조주가 있다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우연이라는 시시한 말로 창조주 혹은 우주를 운행하는 자가 계시지 않다고 무시하는 것은 얼마나 큰 교만인가? 그것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누군가 운행하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그렇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우주의 섭리가 작동하고 있단 말인가? 인간의 이성과 논리의 한계,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설명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아닌가 한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여러 가지 증거를 제시한다.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것, 예수님을 만난 여자들과 많은 제자들의 증언,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의 변화된 삶과 영향력 등이 있다. 4개의 복음서 중 마가복음은 30년 후, 마태와 누가복음은 40년 후, 요한복음은 그 후에 쓰여졌으며 일부 상충하는 것은 있으나 거의 정확히 내용이 일치한다. 대부분의 영웅담이나 설화에는 외모에 대한 묘사가 있으나 예수님 이야기는 외모는 없지만 완벽한 성품 묘사가 탁월하다. 약함이 없는 부드러움, 가혹함이 없는 담대함, 불확실성이 없는 겸손함, 혹독함이 없는 청렴결백함, 편견 없는 열정 등의 묘사를 통해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심을 증명한다. 물론 나는 아직까지도 삼위일체가 온전히 이해되지 않으나 하나님이 곧 인간으로 오셨기에 인간의 고통과 마음까지 모두 감찰하시고 이해하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장에서 왜 하나님이어야 하는지 종교의 필요성을 ‘Shantung Compound’라는 책을 통해 설명한다. Langdon Gilkey가 수용소에서 경험한 자서전적 이야기는 매우 설득력이 있어서 나중에 꼭 읽어보고 싶다. 무엇이 인간을 이성적으로 만들어 주는가? 최소한의 인간의 기본 욕구가 위협받는 극한 상황에서는 인간의 이성과 논리만으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줄 수 없다. 오히려 인간의 이기심이 민낯을 드러낼 뿐이고 그 밖에 무언가가 필요하다. 도덕적 이타심이 우선되어야 이성이 발휘될 수 있고 그 이타심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only in God) 가능하다는 걸 체험했다. 나의 짧고 미약한 경험만으로도 충분히 공감한다. 아무리 선한 양심으로 이타적으로 살려고 노력해도 나의 이기심과 교만함이 불쑥 고개를 들고 나오려고 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종교는 인간의 이기심이 자동적으로 해결되는 장소는 아니며, 오히려 인간의 교만과 하나님의 은혜와의 치열한 영적 전쟁이 일어나는 곳이라고 했다. 즉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나의 이기심이 저절로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종교는 내가 나 자신의 관심을 넘어야 할 필요성과 힘겹고 작지만 나를 넘을 수 있는 탈출구를 제공한다고 했다.

그동안 내가 치열하게 추구했던 외적, 내적 방향으로의 정체성은 나 자신을 넘지 못했다. 나를 지키기 위한 이기적인 삶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세우지 못했다. 결국 위로 향한 내 정체성의 방향만이 나 자신을 넘어 이웃을 바라보게 하고, 비록 실패할지라도 내 관심사가 아닌 타인에 대한 도덕적 의무감, 인간의 존엄과 권리 등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희미한 출구를 보게 되었다. 기독교가 배타적이라 비난하지만, 배타성의 기준은 어디서 오는가? 상대성을 강조하지만, 기독교를 배타적이라 칭하는 것은 진정한 상대성이 아니라 생각한다. 절대적인 가치를 무시하지만 유일신이 없다면 옳고 그름의 가치는 어떻게 논할 것이며 윤리적인 가치의 기준은 누가 정할 것인가? 그동안의 나의 의구심이 모두 해갈된 것은 아니지만 내 삶의 이유와 목적을 찾은 것은 분명하다. 나의 정체성이 정립되고 사랑의 무질서가 회복되니 내 행동의 모든 이유가 분명해졌다. 나는 이제 내가 지음받은 창조 질서를 거스르지 않으며 창조주의 말씀대로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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