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과 식민지 사이 - 경계인으로서의 재조일본인 히토쓰바시대학 한국학연구센터 학술총서 1
이규수 지음 / 어문학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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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히토쓰바시대학 한국학 연구센터 교수로 재직 중인 이규수 교수님의 학술 논문이다. 책의 내용은 제목에서 엿볼 수 있듯 제국과 식민지의 경계인으로 생활한 재조 일본인의 체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하여 ‘식민지 수탈론’과 대비되는 ‘식민지 근대화론’과 ‘식민지 근대성론’에 대한 연구 내지는 재조일본인들에 의해 왜곡된 식민지론의 재생산에 대한 현주소를 연구한 논문이다. 제 1부는 재조일본인의 연구와 존재 양태로 ‘연구의 현황과 과제, 재조일본인의 존재 양태’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제 2부는 식민정책론과 재조일본인 사회이며, 제 3부는 식민자의 체험과 기억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1960년대 이후 ‘식민지 수탈론’이 한국 사학계의 통설로 자리매김하였는데, 1980년데 중반 이후에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어떻게 바로 볼 것인가를 둘러싸고, ‘식민지근대화론’이 민족주의 역사학에 기초한 ‘식민지 수탈론’을 비판하는 양상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은 내가 보기에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일제강점기를 ‘수탈과 저항’의 역사가 아닌 ‘수탈과 개발’의 역사로 바라보자는 ‘식민지 개발론’이나 이를 수정한 ‘식민지 근대화론’ 등장하고, ‘식민지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 양자를 모두 비판하는 ‘식민지 근대성론’이 1990년대 중반이후 탈근대주의 입장에서 대두되었다는 사실 또한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아래 내용을 보면 그런 용어들의 개념을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다.

“ ‘식민지 근대화론’은 일제강점기의 근대적 변화에 대해 변화의 주체 문제를 등한시한 채 경제적 측면에서 해방이후 한국자본주의 고도성장과 연관시킨다. 반면, ‘식민지 근대성론’은 사회문화 측면에서 민족주의의 차별과 배제논리, 규율권력의 개인적 내면화를 근대성 일반이 이미 일제강점기에 형성되었음에 주목하고, 이를 탈근대의 문제의식과 연관시킨다. 요컨대 ‘식민지 근대화론’이나 ‘식민지 근대성론’ 모두 ‘식민지 수탈론’에 내표된 민족주의를 비판하지만, ‘식민지 근대화론’은 선진근대국가의 완성을 지향하는 근대지상주의인 반면, ‘식민지 근대성론’은 민족주의에 기초한 근대국가로부터의 벗어남을 지향하는 탈근대주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 ‘식민지 근대화론’과 ‘식민지 근대성론’이 지닌 최대 결함은 일제강점기의 ‘근대성’에 주목하면서 ‘식민성’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22p-

  

  일본인들이 처음 조선에 진출한 것은 1876년 운양호사건을 계기로 ‘조일수호조규’에 의하여 부산이외에 원산과 인천에 개항장을 통해서였다. 이후 일본은 1895년 청일전쟁과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본격적으로 다양한 일본인들이 조선에 진출한다. 이 재조일본인들은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전쟁에 적극 협력했으며, 러일전쟁 이후에 개항장 인천은 일본의 식민기지로 변화했다. 1904년 전북 군산에 설립한 군산농사조합은 개항장 군산을 거점으로 비옥한 곡창지대에 토지소유권과 저당권을 획득한 일본인 지주의 토지 집적방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일본인 지주의 밀집지대인 군산 부근의 1단보당 가격은 상답 15~20원, 중답 10~15원, 하답 10원이었다. 또 전주는 상답 17원, 옥구는 중답 13.5원, 김제는 중답 8.3원이었다. 이런 한국의 매매지가는 일본 관서지방에 비해 약 10퍼센트에 불과한 것이었다. 1904년 일본의 1반보당 평균 매매 가격은 논 150원, 밭 86원이었다. 즉 일본인은 일본 국내의 토지를 처분하여 한국에 진출하면 토지 면적을 10배로 확대시킬 수 있었다. 한국의 저렴한 지가와 소작제 농장 경영을 통한 고율의 토지 수익률은 상업 자본가와 지주 계층의 토지매수를 가속화했다. 그들은 자본가의 임무를 내세우며 한국의 실질적인 통치자임을 자부했다” -153p-

아울러 재조일본인들은 조선인들과 많은 갈등을 일으켰는데, 이 책에서는 전남 벌교에서의 사례가 소개되어 있다. 이 갈등은 일본인 지주의 소작제 농장경영과 가혹한 소작료 징수문제였다고 한다. 재조일본인들은 남아있는 자료만으로 판단한다 해도 관헌이상으로 아주 강렬한 식민지배자였으며, 조선인에 대해 국가의 논리로 무장한 냉혹한 에고이스트이자 편견의 소유자, 차별과 박해의 실행자였다. 이런 귀환자들은 지금도 자기 체험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평가의 기회를 상실한 채 왜곡된 기억과 역사인식을 재생산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잊고 지냈던 조선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주요 사건들을 다시 찾아보게 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동학농민운동, 1894년~1895년 청일전쟁, 1895년 민비시해사건, 1904년~1905년 러일전쟁, 1905년 을사조약, 그리고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일(한일합병조약)부터 광복까지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막상 저번 주 8월 29일이 경술국치일인지는 생각한번 해보지 않고 지냈다. 신채호 선생님의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씀이 생각난다. 재조일본인들에게 경제적으로 수많은 수탈과 핍박을 했지만 아직도 이 나라가 이렇게 건재한 것은 슬픈 역사를 회피하지 않고 저자처럼 연구하고 반성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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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지도책
사라 파넬리 지음, 김산 옮김, 이선미 한글 손글씨 / 소동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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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볼 때쯤 지구본과 세계지도를 샀다. 지구본을 진작부터 갖고 싶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구입한 적이 있었는데, 이사를 다니면서 받침대가 부러져서 버린 것 같다. 지구본을 가지고 있으면 마치 이 지구를 다 가진듯한 기분이 든다. 지구본을 보고 있노라면 세계의 모양이 한눈에 들어와서, 마치 여행을 갔다 온 듯 착각이 들고, 쉽게 여행을 할 수 있 거라는 착각에 빠져든다. 지구본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처럼 환상을 불러온다. 지구본을 보고 있으면 어린아이처럼 마냥 즐겁다.

 

   <나의 지도책>은 사라 파넬리가 그린 그림책이다. 작가가 생소해서 검색해 보니 자세한 소개는 없고 여러 가지 그림책들이 검색된다. 이 책도 그런 책 중에 한 가지 그림책이고 신간인 듯싶다. 사라 파넬리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활동하는 일러스트레이터이며, 손으로 직접 쓴 글과 콜라주 기법으로 독특한 그림책 세계를 보여준다고 소개되어 있다. 책의 뒤표지에도 "이탈리아에서 태어나고 런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책과 지도와 단추와 강아지 보보와 달님을 사랑한다"고 쓰여 있다.

 

  "지도에는 많은 이야기가 숨어있어요. 이 책에는 보물지도나 마을지도처럼 익숙한 내용도 있고, 마음지도와 하루지도처럼 새로운 것도 있어요.

책 속 지도들의 점선 안에 '나의 그림지도'를 그려 보세요. 그럼 이 책이 나만의 지도책이 될 거예요. 그리고 책 겉표지 뒤의 커다란 종이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지도를 그려 보세요" -사라 파넬리-

 

  그림책의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서문 형식으로 위 글이 쓰여 있다. 그리고 각각의 그림에는 명칭들이 쓰여 있는데, 다행스럽게 김산님이 어린아이들이 쓰는 글씨체의 한글로 옮겨 적어서 아주 자연스럽고 전혀 거부감이 없다. 그림지도는 첫번째 보물 지도, 두번째 내방의 지도, 세번째 우리 가족 지도, 네번째 나의 하루 지도, 다섯번째 내 배속 지도, 여섯번째 색깔 지도, 일곱번째 우리 마을 지도, 여덟번째 내 마음 지도, 아홉번째 내 강아지 지도, 열번째 도로 지도, 열한번째 내 얼굴 지도, 열두번째 해수욕장 지도까지 전부 열두 개의 지도가 각각의 양페이지에 크게 그려져 있다. 어른이 그렸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순수한 그림이라서 명확하게 그림을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이 중에 인상 깊은 ‘내 마음 지도’와 ‘강아지 지도’를 설명해 본다. 내 마음 지도는 주황색으로 색칠한 큰 하트 모양속에 검은 글씨들이 있다. 하트의 좌측엔 달님 별님 등 친구들과 동생이 있고, 우측엔 해님과 엄마와 아빠 초콜릿 있으며, 중앙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신나는 일이 있다. 강아지 지도는 큰 강아지 한 마리가 하얀색과 얼룩색이 있다. 좌측엔 강아지 꼬리가 말려서 그려져 있는데 꼬리라고 화살표로 이름을 적어 놓았다. 네 개의 다리에는 1,2,3,4라고 숫자가 써져 있고, 코에는 “축축한 코=건강한 강아지” 라고 설명이 되어 있다. 그리고 강아지 몸통 밖 귀에는 “귀를 쫑긋 세우면=누군가 왔어”라고 귀여운 글씨가 쓰여 있다.

 

   이 그림책은 딱 봐도 어른들이 보는 그림책은 아닌 듯싶다. 그래서 책을 보자마자 이 그림책의 주인은 유치원에 다니는 개구쟁이 조카 것이라는 생각이 단번에 들었다. 나중에 조카가 놀러 오면 이 그림책을 기꺼이 줄 것이다. 환하게 웃는 조카의 얼굴이 그려진다. 내가 어렸을 때는 이런 그림책을 한 권도 본 적이 없다. 그 때는 이런 책 대신에 실제로 나무들과 새들이 있었고, 거리엔 갖가지 풀들과 곤충들이 있었다. 집에서는 소와 돼지와 닭 등 키웠고, 해님과 달님도 수도 없이 보고 자랐다. 그런데 요즘 어린 아이들에게 새들과 가축들은 이런 그림 책속에서나 볼 수 있다. 그나마 이런 그림책을 좋아한다기보다 핸드폰 속 게임이나 동영상에 친숙하다. 그림책에 익숙한 아이들은 커서도 책에 익숙할 것이 분명하다. 어린아이들이 있는 분들게 이런 그림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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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 허준
이재운 지음 / 책이있는마을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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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허준의 동의보감을 모르는 이가 없다. 그러나 인간 허준(許浚 1539~1615)의 삶에 대해서는 정확히 아는 이가 별로 없다. 그 이유는 역사적 기록이 많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인터넷을 뒤져봐도 그의 유년 시절이나 어떻게 의원이 되었는지 자세히 나와있지 않다. 소설 속에 나오는 유지태란 스승도 허구적 인물이라고 한다. 하기는 역사라는 것이 처음부터 위대한 사람을 알아보고 스스로 그것을 기록할 리가 없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어떤 위인들은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자신과 자기 주변의 사람들의 발자취를 남기기도 하지만 그 나머지 사람들은 역시 후세 사람들의 사료분석과 상상력에 의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나 또한 허준의 호가 구암(龜巖)이란 사실과 그가 서자(子)였다는 사실을 이 책을 보고 알게 되었다. 물론 의원이란 신분이 양반 신분이 아니니 중인정도의 신분정도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이 소설을 읽고 또 다른 정보들를 검색하여 그가 서자였음을 확실히 알 수 있었고, 그의 청년시절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역사소설은 다른 소설과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 책을 읽기 전 작가의 다른 역사 소설인 <토정비결>를 30대 중반에 읽은 적이 있다. 그 때 그 감동은 이 책과는 전혀 다랐다. 토정 이지함이란 사람의 일생을 상중하 세권의 책에 걸쳐 흥미롭게 묘사하면서, 동시에 사주와 육효에 관한 전문적인 내용을 부드럽게 곁들인 작가의 문장을 보고, 이 작가가 과연 소설가인지 사주쟁이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강한 매력을 느꼈다. 그리고 그 때 그 책을 통해 육십갑자의 의미를 처음 알았고, 그 이후로 순수 문학소설책만 고집하던 시각에서 벗어나 다른 장르의 소설도 인정하게 되었으며, 기타 사주명리와 주역 등 동양철학들을 접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이 책을 읽은 것도 혹시 한의학에 대한 작가의 미친 듯한 지식이 있지 않을까 기대하였다. 그러나 단권이라 지면이 부족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작가가 이제 나이를 먹어 겸손해져서 그랬는지, 혹은 나의 이해력이 예전과 달리 많이 상승되어서 그랬는지, 이 소설은 의외로 너무 쉽게 읽혀졌다.

 

  요즘은 예전에 비해 의과대학의 인기가 많이 수그러진 듯하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나라 교육현실에서 의과대학은 이과계열 최고의 엘리트들이 가는 대학임에 틀림없다. 아무리 지방의대가 약하다고 해도 서울대를 포기하고 가는 학생들이 있는 것을 보면 그 위상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내 자식 놈 하나가 공부 좀 한다고 의대를 가겠다고 작년까지 고집을 피웠다. 그런데 고삼이 되면서 의대간다는 애기가 쑥 들어갔다. 다른 애들은 중학교때 미리 고등학교 수학을 선행학습했는데 아들 놈은 선행학습을 하지 않아 수학성적이 뒤받침되지 않아 자의반 타의반 포기한 모양이다. 제대로 뒷받침을 못해줘서 미안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지만 차라리 잘된 결정인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을 읽어 봐도 의원이란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라 봉사정신 및 헌신하는 인문적 소양과 자질이 필요한데, 요즘 의사란 직업은 의학전문대학원으로 일부 전환되었어도 그저 고소득 출세지향적인 직업으로 전락해 버렸다. 아무리 공부를 잘한다고 허준과 같은 의성이 되기가 어디 쉽겠는가. 설령 허준과 같은 의성이 존재한다 해도 그런 분들을 제대로 인정해 주지 않는 세태도 문제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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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문장
김애현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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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처음으로 읽은 단편소설이다. 단편소설이 좋은 점은 많은 시간과 노고를 들이지 않고 짧은 시간내에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요즘 애들이 책을 읽지 않는 이유도 일단 책을 읽게 되면 게임하며 노는 시간이 줄고 힘들게 한곳을 응시해야 하는 힘든 수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소설을 쓰는 작가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박경리 작가님의  토지를 보더라도 일단 그 권수에 부담감이 앞선다. 마음을 단단하게 먹지 않으면 일독하는 것도 힘들다. 읽는 것 자체도 힘든데 쓰는 것은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오죽하면 토지 세번만 읽으면 소설한권쯤은 넉넉하게 쓴다는 말이 나왔겠는가. 그런 측면으로 따져보면 단편소설읽기는 식은 죽 먹기다. 하지만 단편소설에도 엄연히 세계가 있다. 짧게 구연된 세계. 이 소설집도 아홉편씩이나 다른 세계가 구연되어 있다. 마음갈 때마다 한편씩 뽑아 읽는 재미가 솔솔하다. 

  책을 읽기 전 먼저 작가의 이력이 궁금했다. 어디학교 출신이길래 남들은 한번하기도 힘들다는 신춘문예 삼관왕을 차지했을까.  확실한 문맥이 아니라면 타고난 천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의외다. 인터넷을 검색해 본 바로 작가는 서울출신으로 세종대학원을 나왔으며 나이 사십에 등단해서 현재 나이가 벌써 사십대 중반이다. 그래서 그런지 예상했던과는 반대로 소설들의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생기발랄한 수채화같은 느낌이 아니라  진중한 유화를 보는 느낌이다. 가장 먼저 읽은 <빠삐루파, 빠삐루파>는 반신불구인 아버지와 난쟁이 아들이 주인공이고, 두번째 읽은 <K2 블로그>는 사촌지간에 결혼하여 혼자가 된 엄마와 딸이 주인공이며, 화자를 여자로 착각해서 읽은 <화이트 이웃>은 이혼하고 혼자사는 남자가 주인공이다.

  단편집의 제목이 왜 <오후의 문장>이 되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다른 아홉편에 비해 작가의 애정이 많이 갔을까. 아마도 신춘문예에 당선된 세편의 단편과 <백야>를 뺀 나머지 단편들 중에서 가장 비중있는 단편이었기에 제목으로 선정된 듯 하다. 아울러 여류작가임에도 주인공이 남자인 경우가 많은 점이 유독 눈에 띄였다. <백야>는 몸에 빛이 나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고, <래퍼K>는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 버린 선배를 찾아다니며 신동 래퍼K를 취재하는 남자이며, 빠삐루파의 주인공도 남자이고, <화이트 아웃>과 <실러캔스>의 주인공들도 또한 남자이다.  작품을 구상하는데 남자의 입장이 주제를 표현하는데 오히려 편했는지 아니면 작품속에서 나마 남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었는지 작가의 의도가 자못 궁금했다.

   연초 단편소설하면 신춘문예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소설을 읽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도전해보고 싶은 등용문이며 상상만해도 즐거운 아득한 꿈같은 무대다. 그 무대에 해마다 새로운 별들이 기지개를 펴고 떠오른다. 그러나 신춘문예는 유명 작가로 가기 위한 첫걸음이며 피해갈 수 없는 좁은문이다. 그런 무대에서 한꺼번에 삼관왕이 된다는게 어디 이름처럼 쉬운 일인가. 그 자체로서 목표에 한 획을 그은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보다 아름다운 작품으로 보다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영원히 회자되는 작품으로 다시 떠오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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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자 오리하라 이치의 ○○자 시리즈
오리하라 이치 지음, 김선영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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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통 원죄라 하면 原罪 즉  original sin(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다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을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제목 <원죄자>에서도 그런 의미의 책이라 생각했었고 책을 읽는 동안 가끔씩 나오는 원죄란 단어도 처음엔 원죄(原罪)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예로부터 인간 본성의 근원적인 갈등을 다룬 소설들이 많고 그 내면에 숨겨진 사악한 본성으로 인해 인간이란 범죄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 맨뒤 옮긴이의 말에 나와 있듯이 여기서 말하는 원죄는 原罪나 怨罪(원한을 품고 저지를 죄)가 아니라 寃罪(억울하게 뒤집어 쓴 죄)를 말하고 있다.

  "내 눈앞의 진상은 환멸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경악은 있었지만 남은 감정은 환멸뿐이었다. 한번 보면 바로 뚜껑을 덮어 어둠에 흘려보내 버리고 싶을 정도로 추악한 진실이었다. 손가락이 스위치를 찾아냈다. 그만둬, 빛을 비추지 말고 이대로 무대에서 퇴장해. 빨리 이곳에서 떠나는 거다. 비밀을 알면 네 눈은 먼다. 코가 비뚤어진다. 냄새나는 물건의 뚜껑을 굳이 열려고 하지 마라 - 572 page에서 -"

  윗 구절을 읽으면서 "판도라의 상자"를 생각했다. 그것은 열지 말아야야 할 상자이며 보지 않아야 할 그 무엇이고, 말하면 안되는 최소한의 자존심이며 넘지말아야 할 최후의 보루이다. 우리들은 사소한 예(禮)의 고마움을 모르고 산다. 예란 여러가지 의미가 있지만 한마디로 쉽게 말한다면 그것은 "지켜야할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기원전 공자는 예(禮)를 말하고 행하였기에 성인군자로 이름이 남았고  그것은 곧 사회의 질서이자 국가의 법(法)되었다. 우리가 일명 "뻑치기"를 걱정하지 않고 생각에 젖어 밤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예(禮)가 있기 때문이다. 가끔씩 살면서 "험한 꼴" 안당하고 살아감을 고맙게 생각한다. 이 소설은 그러한 "험한 꼴"의 하나인 연쇄 성폭행 살인사건을 간접체험하게 해준다. 실제로 저자 오리하라는 1994년 여성 회사원 살해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되었다가 원죄가 증명되어 석방되었지만 그 후에 엽기 살인을 저질러 1996년에 다시 체포된 오노 에쓰오의 범죄를 밑바탕으로 하여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이소설의 등장인물을 열거하자면, 자유기고자 이가라시 도모야, 그와 결혼한 이가라시 구미코(도치모토 구미코), 이가라시와 이메일을 나누며 정신적 사랑을 나눈 고타니 미카, 그리고 구미코를 만나기 전 도모야의 약혼자였던 일곱번째 연쇄살의 희생자인 미즈사와 마이, 그녀의 여동생 미즈사와 미도리, 연쇄살인 희생자 요코의 아버지 세토다 미쓰히로,  그와 동거한 다른 희생자의 어머니 히구치 가요, <주간 토픽스> 데스크 사타케 슌이치로, 가와하라를 구속 취조하고 퇴직한 경찰관 다카야마 다다요시, 12살때 저전거 하야부사를 타고가다 연쇄살인범과 마주 친 무라코시 겐이치로. 연쇄 성폭행 살인범 용의자로 검거된 가와하라 데루오, 그와 옥중 결혼한 가와하라 이쿠에(모리야마 이쿠에), 가와하라 데루오 구명을 위한 모임 사무장인 사사오카 료조 등이 있다.

  1983년 무더운 여름날 일본의 주오선 철로변에서 여섯번의 연쇄 여성 성폭행 살인사건 발생한다. 첫번째 살인사건의 목격자이자 자유기고자인 이가라시 도모야는 <주간 토픽스> 편집자 미즈사와 마이와 이 연쇄사건들을 취재 기고하며 사랑이 싹터 약혼까지 하였는데, 그녀는 불행하게도 일곱번째 연쇄살인의 희생자가 된다. 미즈사와 살인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체액과 동일한 혈액형을 가진 전과 5범 가와하라 데루오가 경찰에 체포되고, 수많은 협박과 폭행 등에 의한 자백으로 그는 무기징역에 선고된다. 그러나 가와하라는 구명모임과 모리야마 이쿠에 그리고 이가라시 도모야의 도움으로 원죄를 증명하여 10년만에 항소하여 무죄로 석방된다. 이 후 주인공 이가라시 도모야의 취재와 원죄자 가와하라의 사회생활이 이어지는데 줄거리는 생략하고 다만 소설 마지막에 대 반전이 있음을 말해둔다.

  내가 읽은 추리소설은 중고등학교때 읽은 스콜틀랜드의 작가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 가 전부이다. 그때 그시절 셜록 홈즈가 준 재미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 한켠이 흡족하다. 그 이 후 이책 저책을 전전하다 올 여름 갑자기 다시 한번 이 소설을 접하게 되었다. 역시 범죄 추리소설의 묘미는 반전이다. 이 소설도 마지막에 깜짝 놀랄만한 반전이 있다. 작가 오리하라의 소설을 처음 읽지만 이 소설은 제 118회 나오키상 최종 후보작이며 그의  "자(者)시리즈"소설중에 최고라고 한다. 아울러 작가는 해외 서스펜스 소설에 정통하다고 한다. 이 소설은 한여름 밤 더위를 식히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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