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바그너
오해수 지음 / 풍월당 / 2019년 12월
평점 :
품절


이 두꺼운 책을 구입한 이유는 브라이언 매기의 '트리스탄 코드'를 읽기 위한 준비작업 차원에서이다. 철학자가 쓴 바그너 철학책이라니 어렵다는 평이 자자해서 쉽게 시작하려고. 괜찮은 선택인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나온 바그너의 생애에 관한 저서 중 두께만큼이나 가장 많은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바그너빠다. '중립을 지키려 노력했지만 마음이 기우는 건 어쩔 수 없었다'고 후기에 쓰고 있지만 그냥 기우는 정도가 아니라 대놓고 후세에 길이남을 엄청난 천재라고 찬양을 한다. 중립을 지키기 위해 '지나친 낭비벽에 색마'라는 이미지와 관련된 에피소드들로 가감없이 까고 있긴 하지만, 그마저도 그의 인간적인 매력으로 인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 부분은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의 최고의 천재'로 묘사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떠올리게 한다. 천재적 재능으로 자신의 이상을 완수한 혁명가, 엄청난 채무에도 불구하고 채권자를 을로 만드는 센스로 평생 변제를 안하는 채무자, 유부녀를 밝히는 호색한. 내 주변에는 영웅이 없다는 게 천만 다행이다.

 

이 책은 반쯤은 평전의 성격을 지닌 에세이다. 그래서 중반까지는 다소 산만한 느낌이다. 바그너의 출생을 다루는가 싶더니 작품과 유산, 인물, 여성관에 대한 이야기로 개관하면서 이야기가 반복된다. 그러다 제9장부터 연대기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작가가 글쓰기 훈련을 받지 않았는지, 이상한 문장도 간혹 보이는데, 이런건 편집자들이 적극적으로 개입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내용이 좋다.  마치 바그너가 인생의 중반인 40이 넘어 출세한 것처럼. 망명, 평생의 후원자 루트비히 2세와의 만남, 바이로이트 극장을 건설하고 인생의 절정인 반지를 초연하기까지의 과정을 박진감 넘치면서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나는 아직 바그너의 오페라를 다 보지는 못했다. '방랑하는 네덜란드인' 등 아직 볼 계획이 없는 초기작품들을 제외하더라도, '로엔그린'과 '파르지팔'을 남겨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책이 아직 반 정도밖에 다가오지 않는다. 언젠가 그의 작품들을 다 보고나서 다시 읽는다면 다른 많은 것들이 보일 것이다.

 

이 책은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저자는 후기에서 '바그너의 작품'과 '바그너의 유산' 3부작으로 기획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책이 추가로 나오면 표지가 바뀌고 박스를 주는 우리나라의 출판관행을 생각하면 짜증날 일이다. 아마도 바그너 오페라 9개 작품에 대한 해설, 그의 후손들, 푸치니, 슈트라우스, 영화음악에 이르는 그의 영향력을 다루지 않을까? 그때쯤이면 나도 바그너의 작품들에 대한 지식이 쌓여 이해가 더 깊어져 있을 것이다. 저자가 책을 쓰면서 참고한 서적의 양이 상당히 방대하다. 국내에는 바그너에 관련 책이 거의 없다시피하므로 일본책과 영문책이 대부분인 것이다. 네이버캐스트 등에 별다른 칼럼을 쓰지 않는 사람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 열정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나머지 책들도 매우 기대된다. Long 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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