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포성
바바라 터크먼 지음, 이원근 옮김 / 평민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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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미쳤다! 이런 짓을 하는 걸 보면 미친 게 틀림없다. 이 학살극을 보라! 이 공포와 주검의 광경을! 내가 받은 인상을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지옥도 이 정도로 끔찍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은 모두 미쳤다!” ☞ 베르뎅 전투 당시 프랑스군 제5사단 소속 21살의 젊은 중위였던 알프레드 주베르(Alfred Joubaire)의 일기 중에서. 그는 이 일기를 남긴 지 며칠 뒤 전사했다.

2022년 개봉 영화 <서부전선 이상없다(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에서는 한 어린 독일 병사의 눈으로 본 제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사실적이면서 신랄하게 묘사한다. 입대할 때만 해도 교사들과 동창들의 열렬한 격려를 받으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전장터로 향했던 주인공은 막상 최전선에 도착하자 환상은 대번에 깨진다. 그는 배치 첫날에 참호에서 죽을 뻔했고 프랑스군의 격렬한 포격으로 친구를 잃는 등 참혹한 신고식을 치르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독일은 패전을 눈앞에 두었고 한쪽에서는 휴전 협상이 진행되는 와중에 다른 한쪽에서는 연합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 했다. 결국 협상이 타결되면서 주인공은 집에 갈 기회를 얻었지만 이에 반발하는 장군이 최후의 공격을 명령한다. 이미 무의미한 싸움이었지만 주인공과 전우들은 어쩔 수 없이 공격에 나섰고 휴전을 몇 분 남기고 주인공은 프랑스 병사의 총검에 찔러서 전사한다. 하지만 그것은 제1차 세계대전 내내 무수히 죽어나가야 했던 수백만명의 개죽음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정작 아집에 눈이 멀어서 어린 병사들을 사지에 몰아넣은 늙은 장군은 끝까지 살아남음으로서 현실의 부조리함을 고발한다.

영화 <서부전선 이상없다> 마지막에서 최후의 돌격을 앞두고 주인공의 무표정한 얼굴은 영화 초반의 생기 넘치는 모습과 대조적이다. 늙은 정치인과 장군들의 아집과 독선이 만들어낸 무의미한 전쟁이 한 젊은이의 인생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보여주는 셈이다.

1918년 11월 11일 유럽에서 포성이 멈추었을 때 승자는 없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오스만 제국, 러시아는 전쟁의 고통에 참다 못한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아예 정권이 붕괴되었고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역시 말이 승전국일 뿐 만신창이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처럼 나치의 압제에서 벗어난 것을 기뻐하는 환희의 물결도, 해방군을 환영하는 인파도, 폐허가 된 적의 수도에 승리의 깃발을 꽂는 장면도 없었다. 승자와 패자의 차이는 그저 어느 쪽이 먼저 나가떨어졌는가일 뿐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말 그대로 한 세대를 파멸시켰다. 가장 큰 피해자는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가장 인생이 창창했던 젊은이들이었다. 20여년 뒤 히틀러가 새로운 전쟁을 위협했을 때 영국과 프랑스의 정치인들이 1914년처럼 강경하게 맞서는 대신 지레 꼬리부터 내렸던 것도 그만큼 제1차 세계대전의 트라우마가 악몽마냥 뼛속까지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해문집에서 나온 제1차 세계대전 그래픽노블인 <그것은 참호전이었다>의 한 장면. 유럽인들이 기억하는 제1차 세계대전의 이미지란 하나같이 인간도살장과 다를 바 없는 무자비한 학살과 지옥의 참호전이다. 이런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 아닐까 싶다.

전쟁이 끝나는 순간, 도대체 이 지독한 싸움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을까. 제1차 세계대전이 제2차 세계대전이나 태평양전쟁과 다른 점은 누구도 처음부터 원했거나 미리 계획한 전쟁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실로 어이없을 만큼 그야말로 어쩌다가 시작된 전쟁이었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세르비아 극우주의자의 테러에 의해 암살당했을 때만 해도 이로 인해 세계 대전으로 확대되어 장장 4년 동안 지속되리라 예상했던 사람은 어느 누구도 없었다.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어느 쪽도 유럽 정치의 중심에 있지도 않았을 뿐더러, 몹시 신경질적이고 제멋대로인 것으로 유명했던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대중의 동정심을 얻을 만큼 인기 있는 인물도 아니었다. 이 사건은 25년 뒤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을 위해 조작된 글라이비츠 사건처럼 자작극도 아니었고, 진주만 기습이나 911테러처럼 "그 일을 기억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온 국민의 공분을 자아낼 일도 아니었다. 정작 한달 뒤 유럽 대륙에서 제일 먼저 총성이 울린 쪽은 사건과 전혀 상관없는 수백km 떨어진 벨기에-독일 국경이었다.

문제는 유럽 특유의 복잡한 외교 관계와 보불전쟁 이래 프랑스와 독일 간의 증오심, 무엇보다도 지도자부터부터 일반 국민에 이르기까지 마치 몽유병자마냥 전쟁에 취하여 전쟁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 어느 한 사람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산업혁명과 기술의 발전으로 전쟁 무기가 나폴레옹 전쟁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파괴적으로 바뀌었음에도 무책임한 정치인들은 그저 여기서 물러나면 자신들의 위신이 떨어진다는 이유만으로 전쟁을 선동했다. 이들은 한 세기 전 워털루 전투처럼 한바탕 크게 붙고는 길어야 서너달이면 끝날 것으로 태평하게 여겼다. 바로 반 세기 전 대서양 저편에서 벌어졌던 미국 남북전쟁이 4년 동안 이어졌고 100만명 가까이 죽었으며 수백만명이 불구가 되었다는 사실은 유럽인들에게 아무런 교훈이 되지 못했다.

마치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참호전을 연상시키는 광경이지만 남북전쟁 말기인 1864년 6월부터 1865년 3월까지 벌어진 피터스버그 포위전(Siege of Petersburg). 남북전쟁하면 영화 <게티즈버그>나 <영광의 깃발>에 나오는 것처럼 나폴레옹 시절의 구태의연한 라인배틀을 떠올리게 되지만 실제로는 남북전쟁 후반부에 오면 참호전이 중심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예행연습인 셈이었다.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위협하자 세르비아의 큰 형님 노릇을 하던 러시아가 끼어들었고 독일이 동맹국인 오스트리아의 편을 들었으며 독일의 라이벌인 프랑스가 들고 일어났다. 독일이 프랑스 침공의 길을 빌린다는 명목으로 벨기에로 진격하자 벨기에의 보호자인 영국 또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여기에 영국 해군대신이었던 처칠이 영국에서 건조 중이던 오스만 제국의 전함을 멋대로 몰수하면서 분노한 오스만 제국이 독일 편에 섰다. 항상 으르렁대던 발칸 제국들 역시 편을 나누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다. 작은 불씨는 한달 사이 것잡을 수 없이 유럽 대륙 전체로 들불마냥 번져나갔다. 제1차 세계대전의 비극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평민사 출판사에서 모처럼 제1차 세계대전을 다룬 책이 나왔다. 저자는 바바라 터크먼 여사. 국내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국에서는 시오노 나나미급으로 유명한 여류 역사가이다.(참고로 이미 죽었다.) 그것도 여자들이 대개는 어려워 하거나 따분하게 여기는 전쟁사 쪽으로 말이다. "여자가 뭔 전쟁이야?"라면서 가부장적인 분위기에서 젠더간의 역할과 경계가 분명한 우리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 엄밀히 말하면 권위를 갖춘 역사 연구가라기보다 작가에 가깝지만 말이다. 그녀는 스페인 내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특파원으로 종군하면서 여러 권의 역사서를 썼고 퓰리처상을 두번이나 수상했다. 그 중 하나가 1962년에 쓴 <8월의 포성(The Guns of August)>이다. 국내에서는 2008년에 이미 나왔더라. 그렇다고 완역판이나 개정판이 아니라 같은 출판사, 같은 역자에 표지까지 똑같은 것을 보면 한번 절판되었던 것을 재출간한 모양. 제1차 세계대전이 국내에서 그다지 인기 없는 주제라는 것을 생각하면 신기할 따름. 독자들의 아우성이 있었나.

1971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의 외아들이자 군사 역사가인 존 아이젠하워(오른쪽)와 <제3제국의 흥망>의 저자 윌리엄 샤이러 영감님(왼쪽)과 대화 중인 바바라 터크먼 여사(가운데). 뭔 얘기를 하는거지?

크리스토퍼 클라크의 <몽유병자, 책과함께>가 1912년 발칸 전쟁을 시작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까지 복잡했던 유럽 정치의 상황을 파헤쳐서 전쟁의 기원을 찾고, A. J. P. 테일러의 <기차 시간표 전쟁, 페이퍼 로드>가 유럽의 군주들이 꽉 짜여진 철도 운행의 스케줄 때문에 원하건 원치 않건 전쟁에 끌려들어 가야 했음을 보여주었다면, 터크먼 여사의 <8월의 포성>은 원래 단기전으로 끝났을 싸움이 어째서 4년에 걸쳐서 그토록 지독한 학살극으로 이어지게 되었는지 전쟁의 첫 한달 동안 치열했던 현장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1910년 5월 아침,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의 장례식에 참석한 아홉명의 국왕들로 구성된 기마행렬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 p.464

본문은 1910년 5월 6일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장남이자 조지 5세의 아버지인 에드워드 7세의 장례식에서 시작한다. 그는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라는 영국 왕실의 오랜 원칙을 준수하면서도 외교에 매우 능숙하여 영국을 고립된 섬나라에서 유럽 외교 무대의 중심에 놓은 인물이기도 했다. 특히 어린 시절 나폴레옹 3세에게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나폴레옹 3세의 몰락 이후 아프리카 식민지를 놓고 한때 무력 충돌까지 갈 뻔했던 프랑스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1904년에는 영불 조약의 체결을 주도했다. 만약 그가 아니었으면 두번의 세계대전에서 영국이 프랑스의 편에 서서 독일과 싸우는 모습은 없었을지도. 그러나 에드워드 7세는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와도 그런대로 관계를 유지하는 등 유럽의 평화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도 영국 육군 원수의 복장을 입고 참석하여 애도를 표했을 정도. 불과 4년 뒤에 서로 원수지간이 되어서 총부리를 겨누게 되리라고는 그 자리에 있던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듯.

에드워드 7세 장례식에 참석한 독일 카이저 빌헬름 2세(왼쪽 앞쪽) 빌헬름 2세의 외할머니가 빅토리아 여왕이었으니 에드워드 7세와는 외삼촌과 외조카의 관계인셈. 책봉 외에 거의 왕래가 없던 동아시아와는 달리, 유럽에서는 군주들끼리 결혼하다보니 서로 친척지간에 특유의 유전병까지. 그래봐야 수 틀리면 남보다 못할 만큼 으르렁대었지만. "원래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법이라고."

보불전쟁 이후 프랑스에서는 '벨 에포크(Belle Époque, 좋았던 시절)'라는 말이 유행할 만큼 약 40여년 동안 유럽은 평화를 누렸다. 대신에 그 힘을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돌렸지만 말이다. 하지만 에드워드 7세가 죽은 뒤 더 이상 유럽에서 평화의 중재자 노릇을 할 사람은 없었다. 프랑스와 러시아가 이국 협상을,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이국 동맹을 맺고 서로를 견제하면서 전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점점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터지면서 상황은 것잡을 수 없이 전쟁을 향해 내달리고 수차례 전쟁을 피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결국 독일이 러시아의 동원령을 핑계로 8월 1일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다. 8월 4일에는 독일군이 슐리펜 계획에 따라 벨기에를 전면 침공했고 프랑스와 영국 또한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전쟁의 불길은 순식간에 유럽 전역으로 확대된다. 이 책은 사라예보 사건을 시작으로 촉발된 7월 위기와 전면전으로 이어지기까지의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4국의 상황, 그리고 8월 한달 동안 치열하게 벌어지는 전투를 600여 페이지에 걸쳐서 다룬다. 독일군의 벨기에 침공, 제17계획에 따른 프랑스군의 공세와 패배, 국경전투, 탄넨베르크 전투, 마른 전투까지 타크먼 여사는 특유의 뛰어난 필력으로 마치 한편의 다큐멘타리나 대하 드라마처럼 꼼꼼하고 생생하게 묘사한다. 특히, 탄넨베르크 전투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엉뚱하게 알려진 렌넨캄프와 삼소노프의 주먹 대결이 독일군 작전참모였던 막스 호프만의 근거없는 낭설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어쨌든 두 사람이 제대로 협조하지 못하여 삼소노프가 전멸한 것은 사실. 그 이유는 두 사람의 불화가 아니라 러시아 북서전선군 총사령관 질린스키의 무능함 때문.

호프만은 자신이 독일군 참관단원이었던 러일전쟁에서 시작된 렌넨캄프와 삼소노프 간의 개인적인 불화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중략) 삼소노프는 묵덴 정거장의 플랫폼에서 싸움을 벌여 렌넨캄프를 때려 눕혔다고 말했다. 그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듯이 렌넨캄프는 분명히 삼소노프를 돕기 위해 서두르지 않았을 것이다. 호프만이 자신의 얘기를 정말로 믿었던 것인지 그저 믿는 척 한 것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그는 항상 일화, 소문 따위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었다. - p.464

놀랍게도 호프만은 OHL의 작전과장인 타펜 대령으로부터 3개 군단과 1개 기병 사단 규모의 지원 병력을 보내주겠다는 제안을 들었다. 서부전선으로부터 새로운 병력이라니! 슐리펜의 계획은 마지막 한명까지도 우익을 강화하는데 쓰도록 되어 있었다. 아연실색한 루덴도르프는 타펜에게 동부전선에서 병력 증강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며 이미 시작된 전투에 맞추어 오기는 너무 늦은 것 같다고 말했다. 타펜은 그들을 아껴두었다가 나중에 써도 좋다고 말했다. 타펜이 지원병력을 보내겠다고 언급하게 된 이유는 프랑스 국경에서 거둔 '위대한 승리'였다. OHL 내부에서는 이미 서부전선에서 벌어진 결정적인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믿음이 자리잡았다. - p.466

독일군이 퇴각 중이라고 '추정한' 질린스키는 그들이 삼소노프를 위협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으며 원래의 계획대로 삼소노프의 우익과 서둘러 접선하도록 렌넨캄프를 독려하지도 않았다. 두 개의 러시아군은 서로 연결되지 않았고 서로를 향해 움직이지도 않았으므로 '합동'이라는 단어를 적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았다. - P.472

루덴도르프의 승리에는 여러 사람이 기여했는데, 비록 그 이유는 틀렸지만 시종일관 정확하게 렌넨캄프가 추격하지 않을 것을 확신하고 제8군을 이동시켜 삼소노프와 맞서기 위한 계획을 준비한 호프만, (중략), 그 무엇보다도 기여한 것은 독일군의 계획 입안 과정에서 한번도 고려된 적이 없는 러시아군의 무전이었다. 호프만도 감청이야말로 탄넨베르크 승리의 진정한 요인임을 인정했다. - P.487

뒤이어 벌어진 마수리안 호수 전투에서 렌넨캄프 장군은 동프로시아에서 쫓겨났다. "겁을 집어먹고 군대를 버린 채 차를 타고 국경을 넘어 달아남으로서" 자신의 명성에 완전히 종지부를 찍었으며, 그 자신과 함께 질린스키까지 불명예스럽게 해임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대공에게 보내는 전문에서 질린스키는 렌넨캄프가 공포에 질려 황급히 도망쳤다고 비난했다. 대공은 진노했다. 그는 근본적인 잘못이 질린스키가 저질렀다고 생각했다. - p.488

<중국은 어떻게 실패하는가>라는 책에서 세계대전은 흔히 생각하듯 패권국가가 도전국가를 견제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팽창의 한계에 직면한 도전국가가 경쟁에서 밀려나지 않으려고 전쟁을 일으키기 때문이라고 주장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제1차 세계대전도 그래서 일어났다는 것. 전적으로 일리 없는 얘기는 아니지만 전쟁의 원인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히틀러의 야욕이 불러온 제2차 세계대전은 그렇다쳐도, 제1차 세계대전은 죄다 독일 탓이라기에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 역시 독일만큼이나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전쟁의 발발은 몰라도 전쟁이 장기화된 것은 독일이 자초했다는 점이다. 전쟁 초반 이른바 '벨기에의 강간(Rape of Belgium)'이라고 불리는 독일군의 만행은 유럽 사회의 공분을 불러오고 문명국으로서의 위신을 땅에 떨어뜨렸다. 학살과 범죄는 결코 나치만의 전매 특허가 아니었다. 게다가 국경 전투와 탄넨베르크 전투 등 8월의 승리는 독일을 완전히 기고만장하게 만들었다. 독일이 내건 화평 조건은 보불전쟁과 비할 바가 아니었고 연합국들을 격분시키면서 대화의 통로를 스스로 막아버렸다. 이들이 자신들이 패전하자 베르사유 조약이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떠들었지만 그야말로 뻔뻔한 소리였다.

8월 말이 되자 연합국 국민들은 자신들의 궤멸시켜야만 하는 적, 붕괴시켜야만 하는 정권, 끝장을 봐야만 하는 전쟁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9월 4일 영국,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 정부는 "현재 진행 중인 전쟁 중에는 단독 강화를 맺지 않겠다."라고 약속하는 런던조약에 서명했다. - p.509

독일은 벨기에 전체 국토와 덩커크로부터 볼로뉴와 칼레를 포함하는 프랑스 해안 지역에 대해 지배권을 가질 예정이었다. 또한 아프리카에 있는 프랑스와 벨기에의 식민지도 차지할 계획이었다. 보상에 관해 패전국들은 직접 전비로 최소한 100억 마르크를 지불하고 그 이외에 참전 군인 기금, 공공 주택 및 장군들과 정치인들에 대한 선물에 필요한 비용을 내야 하며, 독일의 모든 국가 채무를 면제함으로서 독일 국민들은 향후 수년 동안 세금을 안내도 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 해 8월 승리에 도취된 상태에서 독일이 설정한 전쟁 목표는 너무나 거창하여 실현 가능한 타협안으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 p.510

카이저에게는 불행히도 독일군의 진격은 9월 12일 파리를 코앞에 두고 마른 전투에서 좌절되었다. 파멸 직전의 프랑스군이 '마른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독일군이 많은 실수를 저지르면서 다 이긴 싸움에 스스로 재를 뿌린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프랑스 지도부가 1870년이나 1940년과 달리 혼신을 불태울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총리이자 전시 내각을 지휘하여 연합국을 승리로 이끌게 되는 조르주 클래망소는 우유부단하기 짝이 없는 폴 레노와 달리 '호랑이'라고 불릴 만큼 단호한 인물이었고 파리 방위를 맡은 조제프 갈리에니는 프랑스 최고의 장군 중 한 사람이었다. 제9군의 지휘를 맡아 독일군을 저지하는데 큰 역할을 한 포슈 장군은 프랑스군의 꺾이지 않는 전의를 보여주었고 나중에 연합군 총사령관이 된다. 무엇보다도 이 순간 '20세기의 잔다르크'는 조프르 원수였다. 그는 개전 초반 로렌과 아르덴에서 무리한 공세로 한때 프랑스군을 궁지로 내몰기도 했지만 자신의 실수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전열을 정비한 뒤 반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만약 조프르가 가믈랭같은 멍청이 똥별이었다면 제1차 세계대전은 한달 만에 끝났을 것이다.

"프랑스 역사를 통틀어 가장 비극적"이었을 이 시기에 조프르는 존 프렌치 경처럼 겁에 질리거나 몰트케처럼 주저하거나 헤이그 또는 루덴도르프처럼 일시적으로 무기력해지거나 프리트비치처럼 비관론에 굴복하지 않았다. 만일 그의 이러한 침착함이 상상력의 부족에서 기인했다면, 이는 프랑스에게 큰 행운이었다. 평범한 사람은 위기감과 책임감을 느끼게 되면 의기소침해지는 법인데, 오히려 "판단력을 강화시켰다면 틀림없이 범상치 않은 위대한 정신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클라우제비치는 기술했다. - p.596

약간 가독성이 떨어지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전반적인 번역은 그런대로 무난한 듯. 하지만 중간중간 군사 용어의 번역에서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는 점이 흠이랄까. 무슨 이유인지 '중포(heavy artillery)'를 '대형대포'라고 번역한 것이나, 특히 프랑스군의 주력 야포였던 75mm 야전포(French 75mm field gun)를 그냥 '75'라고 적어 놓았다. 역자가 원문의 'French 75'를 직역한 모양인데 전쟁사에 대해 잘 모르는 독자들 입장에서는 뜬금없이 숫자만 적어 놓았으니 문맥상 이게 뭔 소리인지 알 수 없어 헤깔릴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이 야포는 현대 야포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큼 포병사에서는 한 획을 그은 물건이기도 하다. M3 리 전차나 M4 셔먼 전차 초기형의 주포 또한 원래는 이 야포를 개량한 것. 그래서 보병 잡는데에는 쓸 만 한데 정작 적 전차 잡는데 화력이 딸렸던 것도 이 때문. 터크먼 여사가 약칭인 'French 75'라고 한 것은 같은 이름의 칵테일조차 있을 만큼 그 동네에서야 워낙 유명한 대포이기 때문이지만 국내에서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역자도 그걸 알고 그렇게 쓴 것은 아닐 듯. 게다가 본문 내내 이렇게 나온다는 점이다.

프랑스 M1897 75mm 속사포. 세계 최초로 유압식 주퇴복좌기를 사용하여 반동을 줄이고 발사 속도를 높였다. 또한 기동성이 뛰어나서 보병과 함께 다니면서 신속한 화력 지원에 유용했다.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 초반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의 공세를 막아내는데 큰 역할을 했지만 이후의 참호전에서는 화력 부족을 드러내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대전차포와 대공포로 사용되기도.

전쟁 초반 독일이 영국 해군에 쫓겨서 콘스탄티노플로 망명한 몰트케급 순양전함인 괴벤(Goeben)을 '궤벤'으로 번역한 것도 이상하다. 독일어 표준발음에서 oe(Ö) 발음은 '외'라고 읽지 않음? 실수로 놓쳤다기에는 한 챕터가 통째로 그리 적혀 있으니. 심지어 p.517에는 그나이제나우(Gneisenau)를 '그나이센노'라고 적어놓기도. p.434와 p.450의 '4와 2분의 1개 군단(army of four and a half corps)'라는 표현도 어색한 느낌. 처음에는 도대체 이게 뭔 소리인가 생각했음. 그냥 '군단 네개 반'이라던가 뒤에 나오는 것처럼 '4.5개 군단'이라는 쪽이 낫지 않았을지. 사실 이런 건 역자보다도 편집자가 꼼꼼이 잡아야 할 일이기도 하다.

바바라 터크먼 여사가 이 책을 내자말자 미국 사회가 떠들썩할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다음해에는 케네디 대통령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퓰리처 상을 수상하여 그녀를 하루아침에 유명인사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여기에는 때마침 벌어진 사건 덕분이기도 했다. 바로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사건이다. 쿠바 미사일 사건은 냉전 시절을 통틀어 인류가 핵전쟁의 위기에 가장 가까이 갔던 순간이기도 하다. 소련이 쿠바의 독재자 피델 카스트로의 요청을 받아들여 쿠바에 핵미사일 배치를 강행하면서 촉발된 이 사건은 원래 흐루쇼프가 깊은 고민 없이 시작한 일이었다. 미국도 소련의 턱밑인 터키에 핵미사일을 배치하고 있는데 소련이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케네디는 소련의 중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벼랑 끝 전술로 맞섰다. 서로 소통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양측은 서로의 진정한 의중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자신들의 선입견과 편견만으로 판단해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흐루쇼프가 먼저 물러섰고 그는 인류를 구했지만 자신의 권좌를 잃어야 했다. 또한 케네디는 이 사건을 통해 의사결정 과정에서 호전적인 각료와 장군들의 말에만 귀 기울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배웠다. 그는 터크먼 여사의 <8월의 포성>을 통해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이 단순히 독일의 야심 때문이 아니라 쿠바 미사일 사건과 마찬가지였음을 깨달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필독서로 추천했다고 한다.


원래 죽음의 문턱에 가 본 사람만이 죽음이라는 말을 함부로 들먹이지 않는 것처럼 전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언제나 전쟁의 위기에 직면해 있는 우리 역시 중요한 교훈으로 삼아야 할 일이다. 대화는 어렵고 선동은 쉽다. 하지만 전쟁은 설령 이기더라도 지울 수 없는 상처와 증오만을 남길 뿐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비극이 한반도에서 재현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몽유병자>와 더불어 이 책을 읽기를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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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을 그 따위로 모욕한 사람은 질라스 당신 말고는 없습니다. 그들은 당신네들을 위해서 피를 흘린 것이 아닙니다. 당신네들은 피와 불과 죽음으로 수천 킬로미터를 가로질러온 병사들이 여자들과 재미를 즐기거나 약간의 사소한 행동을 한다고 해서 그 정도도 이해하지 못합니까?”

 

194412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간부 밀로반 질라스(Milovan Djilas)가 스탈린더러 소련군이 유고슬라비아를 해방하면서 수백여 건의 강간과 약탈, 학살을 저질렀다며 유고슬라비아에 들어온 영국군이 그런 짓을 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항의하자.


2022213만 명의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를 전격 침공했다. 전 세계 사람들을 진정한 충격에 빠뜨린 일은 푸틴의 침공 사실보다도 러시아군이 현지에서 보여준 모습이었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브 주변에서 러시아군 철수 후 발견된 1천여 구가 넘는 시신과 학살의 증거들, 조직적인 약탈, 집단 강간, 민간인 지구에 대한 무차별적인 푸틴 식 응징, 심지어 한 러시아 여성은 우크라이나 침공에 참전한 자신의 남편에게 성욕 해결을 위해서 우크라이나 여자를 강간해도 허락하겠다.”라는 통화 녹취가 공개되면서 우크라이나인들은 물론이고 국제적인 분노를 사기도 했다. 물론 미군 또한 아프간과 이라크에서 오폭과 인권 침해 등으로 국제적인 비난에 시달리기는 했지만 러시아군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만행은 그런 미군의 만행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약자를 상대로 전쟁이 아닌 테러를 자행하는 이들의 모습은 21세기의 문명화된 군대라기보다 아프간 탈레반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부차를 비롯한 우크라이나 점령지에서 러시아군이 퇴각한 후 발견된 학살과 약탈, 강간의 흔적, 심지어 일부 러시아 병사들은 SNS에 자신의 범행을 담은 동영상을 자랑스럽게 게재하여 전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이들의 군기 빠진 모습은 80여 년전 난징에서 일본군이 보여준 것과 다를 바 없을 정도였다. 그때까지 러시아를 자극할까 주저하던 서방이 우크라이나에 본격적인 지원을 시작한 것도 러시아의 만행으로 여론이 극도로 악화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푸틴은 기강을 바로잡기는 커녕 죄다 서방의 조작이라며 스스로 눈과 귀를 막아버렸다. 

 

우리에게 보다 충격적인 일은 푸틴을 비롯한 대다수 러시아인들은 미국과 서방에 대한 피해의식으로 가득하며 자신들의 만행에 대해 아무런 도덕적 가책조차 없다는 사실이다. 자신들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은 이기적인 정복욕 때문이 아니라 미국이 먼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을 선동하여 러시아의 밥그릇을 건드린 탓이라고 항변한다. , 나쁜 쪽은 미국이라는 식이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비롯하여 반러 친서방 우크라이나 지도자들을 가리켜 신나치라고 부르기를 서슴지 않는다. 바꾸어 말해서 이들에게 이 전쟁은 러시아를 미국의 위협에서 지키기 위한 예방 전쟁이나 성전이라는 얘기이다. 하는 행동으로 봐서는 어느 쪽이 진짜 나치에 더 가까운지는 명확하지만 말이다. 러시아인들은 서방이 러시아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투덜거리기 전에 자신들이 먼저 주변국들을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국내 진보언론이나 분별없는 일부 정치학자들은 나토를 동진시키지 않겠다고 했던 미국이 먼저 약속을 깼기 때문이라며 전쟁 책임을 호도하는 푸틴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대변한다. 그러나 한중일 이상으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뿌리 깊은 역사적 원한과 증오에 대한 몰이해이며 우리 사회가 한반도 바깥의 사정에 무지하고 무관심하다는 얘기이다. 러시아가 보기에 미국 하는 일이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두 나라끼리 알아서 해결할 문제이다. 우크라이나를 공격하면서 미국 핑계를 대는 것은 약자에게 분풀이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푸틴이 무슨 생각으로 전쟁을 시작했건 간에 러시아 병사들이 현지에서 약탈과 강간, 학살을 저지르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얘기이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 역시 미라이 사건처럼 기강 해이와 간부들의 통제에서 벗어난 일부 군인들의 일탈 행위가 없지 않았지만 대다수 미국인들은 결코 이런 행동을 당연한 양 옹호하지 않았다. 이 사건이 폭로되면서 정치인들과 군 상층부는 한동안 곤혹을 치르고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해야 했다. 덕분에 걸프전에서 미군의 모습은 베트남전쟁과는 달랐다. 하지만 푸틴이나 군 상층부는 솔직하게 만행을 인정하고 바로잡기는커녕 묵인하거나 오히려 조장하면서 국제 사회를 향해 우리에게는 핵무기가 있으니 주제넘게 끼어들지 말라며 큰소리친다. 그렇다보니 러시아 병사들이나 심지어 일반 국민조차 무관심으로 일관하거나 자기네 위세만 믿고 정복자니까 뭘 해도 된다는 식이다. 러시아가 야만적인 나라로 낙인찍힌 것은 죄다 미국과 서방 진영의 악선전 탓으로 돌린다. 지금은 칭기즈칸이나 나폴레옹 시대가 아니며 엄연히 21세기임에도 말이다. 러시아인들은 더 이상 철의 장막을 두르고 세상과 단절되어 살던 구소련이 아니라 나름대로 국제화 시대에 살면서 서방 물을 먹었지만 가치관과 사고방식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는 얘기이다.

 

푸틴과 러시아인들의 오만한 태도에는 서방에 대한 편집광적인 피해망상증 외에도 또 다른 이유가 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자신들이 막대한 피를 흘려가며 온 유럽을 나치로부터 구한 해방자라는 것이다. 유럽 사람들은 구소련의 진정한 계승자인 러시아에게 마땅히 부채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러시아인들은 독소전쟁을 가리켜 애국전쟁(Great Patriotic War)’이라고 부르면서 엄청난 자부심을 숨기지 않는다. 전후 스탈린의 영토 확장은 2천만 명이 넘는 희생자에 대한 정당한 대가로 여긴다. 푸틴이 나토의 동진에 그토록 광기를 드러내는 이유도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나머지 구소련 국가들은 물론, 동유럽 전체를 주권국이자 러시아와 동등한 파트너가 아니라 독소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쯤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시대착오적이고 아전인수식 사고이다.

 

하지만 2천만 명의 희생자 중에는 러시아인들 외에도 우크라이나, 우즈벡 등 다른 민족들도 함께 싸우고 피를 흘렸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쏙 빼놓는다. 더욱이 피를 흘린 것으로 따진다면 폴란드는 소련 이상의 대가를 치렀지만 어떠한 보상도 받을 수 없었다. 나치에 대한 승리는 러시아인들만의 독점물이 아니라 전쟁의 또 다른 한축을 맡았던 서방은 물론, 함께 피를 흘렸던 유럽 전체가 나누어 가져야 마땅하다. 제아무리 소련군이 용맹스러웠다고 한들, 서방이 무상으로 제공한 막대한 보급물자와 차량이 없었더라면 히틀러가 마지막까지 해낼 수 없었던 베를린-모스크바의 레이스를 스탈린 역시 해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러시아의 일부 국수주의 학자들은 전적으로 자신들의 피와 희생 덕분에 이겼으며 서방의 원조 따위는 소련의 거대한 생산력에 비하면 한줌에 불과했다며 폄하한다. 서방 입장에서 본다면 불 난 집에 불 끄라고 소방 호스를 빌려주었더니만 불 다 끄고 난 뒤에 한다는 소리가 성능이 신통찮았다느니 그거 없어도 불을 끌 수 있었다느니 구시렁거리는 셈이니 배은망덕도 유분수랄까.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은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군의 만행은 독소전쟁 당시 소련군이 보여준 모습의 판박이라는 점이다.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나치 군대를 끈기 있게 밀어붙이며 러시아 증기롤러의 힘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에만 자부할 뿐, 그 뒤에 가려진 자신들에게 불리한 역사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소련군은 해방자이기는 커녕 나치 이상으로 지독한 정복자였다. 그들 스스로도 누구를 해방하러 왔다고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소련군이 해방군이라는 것은 스탈린의 선전매체가 만들어낸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소련군은 지나가는 곳마다 1500년 전 악명 높은 아틸라의 훈족 군대나 수백 년 전의 칭기즈칸 군대에 비견될 만큼 무차별적인 약탈과 집단강간, 대량학살을 일삼았다. 독일군이 자신의 가족들에게 했던 행동을 되갚아주기 위한 복수심이나 일부 군인들의 흔한 일탈쯤으로 여긴다면 실로 순진한 생각이다. 소련군에게는 열심히 싸운 병사들을 위한 사소한 보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야 그들이 그나마 얼마 안남은 인내심을 유지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만행은 심지어 독일에 강제로 끌려갔던 같은 소련 인민들에게도 똑같이 자행되었다. 대부분 거칠고 순박한 시골 농민출신이었던 러시아 병사들에게 어느 누구도 그것은 범죄라는 얘기를 해주지 않았다. 또한 소련 체제로부터 인간으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한 사람들로서는 남의 인권을 존중할 리 없었다. 처벌은 약탈이나 강간을 해서가 아니라 윗분들의 몫을 챙기지 않았거나 강간 피해자로부터 성병을 옮았다는 이유였다. 심지어 스탈린조차 그런 게 뭐가 잘못이냐는 생각이 소련의 낙후하고 봉건적인 가치관이었다. 뒤늦게 문제가 커지자 솔직하게 인정하고 바로잡으려고 노력하기보다 서방의 악선전 탓으로 돌리면서 꽁꽁 숨기기에 급급했다. 러시아인들의 사회주의식 도덕관념과 윤리 의식은 오늘날 우리 상식과는 전혀 달랐다. 그리고 70여년이 지난 뒤 그들의 후손들은 할아버지들이 했던 행태를 우크라이나에서 고스란히 반복하고 있다.

점령지 주민들의 눈에 비친 소련군의 모습은 독일군을 꺾은 고도로 현대화된 정예 군대가 아니라 멕시코 산적떼에 가까울 만큼 기강이 형편없었다. 조국을 위해 싸운다는 명목으로 끌려나온 무지한 농민들은 우직하면서 용맹하고 독일군도 감탄할 만큼 극한의 환경에서도 끈기을 보여주었지만 그들의 사고 방식은 제정 러시아 시절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스탈린은 사기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이들의 일탈을 적당히 눈감아 주었다. 결국 전쟁범죄를 조장한 장본인은 스탈린이었다. 

 

그런 점에서 글항아리 출판사의 신작 도서이자 앤터니 비버의 역작 <베를린전투 1945>는 그동안 독소전쟁을 잘 알지 못하거나 소련군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품고 있던 국내 독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줄지 모른다. 이미 시중에서는 데이비드 M. 글랜츠의 <독소전쟁사>를 비롯하여 몇 권의 책이 나와 있다. 그러나 <베를린전투 1945>는 단순히 소련군의 위대한 승리를 강조하거나 영화 <다운폴>에 나온 것처럼 히틀러의 마지막을 다루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동안 학자들이 간과하거나 정치적으로 민감하다는 이유로 빼놓았던 부분들을 신랄하게 묘사한다. 전장에서 보여준 소련군의 민낯, 스탈린 체제의 비인도성, 전쟁에서 조금이라도 더 전리품을 챙기려고 안간힘을 썼던 스탈린의 탐욕까지, 러시아인들이 자부하는 대애국전쟁은 결코 영광스러운 승리가 아니었다. 동유럽에서 저지른 소련군의 전쟁범죄는 우리가 그토록 비판하는 일본군 못지않았다. 스탈린과 장군들이 병사들을 인간이 아닌 한낱 소모품으로 여기고 명령에 복종하여 조국을 위해 죽기로 싸웠던 전쟁영웅들을 푸대접하는 모습 역시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판박이였다. 소련과 일본의 유일한 차이는 그저 어느 편에 섰느냐이다.

 

물론 앤터니 비버가 이 책을 쓴 목적은 단순히 러시아인들의 추악한 자기기만을 고발하기 위함은 아니다.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나치 제국의 최후이다. 19454월의 독일군이 대단히 불리한 처지에 놓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194112월의 소련군 역시 그에 못지않게 어려웠다. 또한 베를린으로 진군한 소련군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병참선은 한계였다. 어째서 독일군은 모스크바를 영웅적으로 지켜낸 소련군처럼 하지 못했던가. 스탈린그라드는 주코프가 천왕성 작전을 발동할 때까지 무려 삼 개월 동안 독일군의 맹공을 견뎌냈지만 베를린은 불과 열흘도 안 되고 함락되었던가. 공전의 위기를 앞두고 히틀러와 나치 수장들의 모습은 스탈린과 어떻게 달랐던가. 만약 소련군이 독일군 최후의 방어선이었던 오데르-나이세 방어선에서 격퇴되었다거나 발목이 잡혔더라면 베를린은 과연 누구의 차지가 되었을까. 이 책은 베를린 전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가져볼만한 이러한 의문들에 대한 진지한 해답을 던져준다. 특히 전투의 묘사는 그의 뛰어난 필력 덕분에 마치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영화 <다운폴>에 나온 것처럼 파국을 앞둔 히틀러와 나치 수장들의 광기어린 모습은 섬뜩함마저 느낀다.

 

영화 <다운폴>에서 진정한 광기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히틀러. 자신이 저지른 짓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한 채 무너졌다. 


흔히 히틀러가 용서받을 수 없는 이유가 파괴적인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점령지에서 인종청소와 대량학살, 강제수용소, 인권 유린 등을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지만 유럽인들의 이중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미국과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식민 대국들의 지도자들 역시 히틀러가 했던 그대로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저질렀으니 말이다. 유럽인들이 히틀러를 그토록 비난하는 진짜 이유는 히틀러의 잔인함 때문이 아니라 야만스러운유색인종들에게나 적용해야 할 방식을 문명화된 백인들에게 써먹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히틀러가 그저 역사의 운 없는 패배자라고 할 수 있는가. 그의 진면모는 패전 직전에 드러났다. 히틀러는 자포자기한 나머지 패전의 책임이 자신의 무능함 때문이 아니라 독일 국민이 열등하기 때문이며 독일이라는 나라 자체가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결론 내리고 아예 모든 것을 철저히 파괴하라는 '네로 명령'을 내렸다. 심지어 미쳐버린 괴멜스가 자신의 아이들마저 동반 자살하겠다고 말했을 때 히틀러는 말리기는 커녕 그의 비뚤어진 충성심을 칭찬했다. 정신줄 놓은 히틀러의 모습은 나치 정권이 단순한 독재 정권이 아니라 역사에 두 번 다시 등장해서는 안 될 정신병자들의 집단이었음을 보여준다

 

한편으로 저자가 영국 출신이라서인지, 얄타 회담에서 처칠은 스탈린의 야욕을 꿰뚫어보고 그를 저지하려고 노력한 반면 루스벨트의 순진함이 일을 망쳤다고 말한다. 루스벨트는 처칠보다 자신이 스탈린과 더 친하다고 여겼고 상대에게 진솔한 우정을 보여줄수록 스탈린의 협력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실제로 대일전쟁에서 소련군을 참전시켜야 한다는 그의 강박증 때문에 동유럽은 물론 우리 역시 한반도에 38선이 그이면서 얄타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스탈린과 더러운 거래를 시도한 것은 처칠도 마찬가지였다. 이 책에서는 겨우 한줄 언급될 뿐이지만 194410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처칠은 스탈린에게 훗날 악명 높은 퍼센트 합의를 제안했다. 반공 친 서방 성향이 대부분이었던 동유럽 국가들을 스탈린에게 죄다 내주기 싫었던 처칠은 서로 사이좋게 나누어 먹을 속셈이었다. 그리스는 영국과 소련이 9:1, 유고는 반반, 불가리아와 헝가리는 2:8, 루마니아는 전부 소련의 몫이었다.

 

이들이 스탈린과 소련 체제에 대해서 그토록 무지했던 모습을 단순히 인간적인 순진함 탓으로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서방 연합군이 자신들의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베를린을 향해 내달려야 했음에도 스탈린에게 동유럽을 넘겨주어 공산주의 노예로 전락시켰다는 비판 또한 결과론적인 얘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따로 있다. 아무리 강대국이라도 약소국의 운명을 놓고 자기들끼리 밀실에서 흥정하여 결정할 권리는 없다는 점이다. 스탈린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했던 루스벨트와 처칠은 자국이 아닌 남의 나라를 흥정 대상으로 삼아 평화의 십자군이라는 전쟁의 정당성에 제 손으로 먹칠을 했다. 뮌헨 회담에서 체임벌린이 히틀러를 상대로 그토록 비난받아야 했던 실수를 고스란히 되풀이한 셈이었다. 스탈린은 두 사람보다 훨씬 고단수였다. 그로 인한 대가는 약소국만이 아니라 그들 자신도 호되게 치러야 했다.

 

루스벨트의 가장 큰 실수는 스탈린이 자신과는 전혀 다른 부류이며 그런 독재자의 고집을 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개인적인 친분을 쌓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단호함을 보여주는 것임을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스탈린은 떼쓰기가 통하지 않을 때에만 물러섰다. 심지어 그런 상대에게는 경외심마저 드러내기도 했다. 그가 1939년에 물렁한 서방 대신 나중에 뒤통수를 맞을 것을 각오하면서까지 히틀러와 손을 잡으려고 애를 쓴 것도 이 때문이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 전쟁을 놓고 여전히 미국과 서방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인도적인 지원을 하면서도 자칫 푸틴의 심기를 건드려 자신들에게 엉뚱한 불똥이 튀지 않을까 전전긍긍한다. 헨리 키신저, 노암 촘스키 등 미국의 저명한 재야인사들은 푸틴을 더 이상 벼랑 끝으로 몰아넣어서 안 되며 평화를 핑계로 침략자가 아닌 우크라이나에게 양보하라고 윽박지른다. 말로는 체임벌린이나 루스벨트의 유화정책을 비판하면서도 교훈으로 삼기는커녕 막상 똑같은 처지에 놓이면 지레 겁을 먹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 후대 정치인들의 어리석음이 아닐까 싶다.


그런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쪽이 푸틴이다. 따라서 물러서기는커녕 서방과 우크라이나가 얼마나 오래 버티는지 보자며 한층 광기를 부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서방 입장에서는 강자보다 약자가 좀 더 말이 통하고 자기네들이 다루기 만만하다고 여길지 몰라도 독재자들을 다루는 법은 그들이 고집부리는 것 이상으로 단호함을 보여주는 것 밖에 없음을 간과해서 안 된다. 전쟁을 끝내려면 적당한 양보가 아니라 푸틴이 아무리 용을 써도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할 때이다. 푸틴만이 아니다. 도발을 반복하는 북한을 놓고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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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함락 1945 걸작 논픽션 26
앤터니 비버 지음, 이두영 옮김, 권성욱 감수 / 글항아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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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터니 비버의 최고 걸작이자 제2차 세계대전의 종지부를 찍은 베를린 전투가 드디어 나왔군요. 기대 만빵입니다. 당장 주문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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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 스파이 - 나치의 원자폭탄 개발을 필사적으로 막은 과학자와 스파이들
샘 킨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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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전운이 감돌고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불과 한달 앞둔 1939년 8월 2일, 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앞으로 한 통의 편지가 전달되었다. 편지에는 독일계 유태인이자 노벨상 수상자이며 6년 전 미국으로 망명하여 프린스턴 대학의 교수로 재직 중이던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물리학자의 서명이 적혀 있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름만 빌려주었을 뿐, 실제로 그것을 쓴 사람은 아인슈타인보다 20살이나 어린 헝가리 출신의 물리학자 실라르드 레오(Leo Szilard)였다. 나중에 "아인슈타인-실라르드 편지(Einstein–Szilard letter)"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는 편지의 주된 내용은 우라늄을 이용하여 지금껏 본 적이 없는 어마어마한 위력의 폭탄을 만들 수 있으며 나치 독일보다 한발 먼저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각 심각성을 깨달은 루스벨트는 우라늄 폭탄 개발에 대해 조사를 지시했다. 3개월 뒤 우라늄 자문 위원회는 사실이라고 보고했고 1940년 7월에는 미국보다 한발 앞서 핵무기 개발을 연구 중이던 영국이 협력을 제안했다. 1941년 10월 9일 루스벨트는 핵무기 프로젝트에 서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 최대의 비밀 프로젝트인 '맨하튼 계획(Manhattan Project)'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3년하고 10개월 뒤 일본 히로시마에 인류 역사상 최초로 원폭이 투하되어 단 한발로 도시의 90%와 14만명이 사라졌다. 사흘 뒤에는 나가사키에 두번째 원폭이 투하되었다. 북쪽에서는 거대한 소련군이 물밀듯이 밀고 들어오자 일본 지도부는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자 동시에 '핵공포 시대'라는 새로운 시대의 개막이었다.

맨하튼 계획을 주도한 핵클럽 과학자들. 이들 중 상당수는 독일과 이탈리아, 헝가리 등지에서 탄압을 피하여 미국으로 망명한 유태인 과학자들이었다. 핵무기의 기초 이론을 제공한 아인슈타인만 해도 나치 때문에 빈털털이로 달아나야 했다. 미국은 이들 덕분에 맨땅에 헤딩하듯 핵무기를 만들 수 있었다. 바꾸어 말하여 히틀러가 과학자들을 존중했더라면 가장 먼저 핵무기를 손에 넣었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핵개발에 뛰어든 나라는 미국만이 아니었다. 영국, 소련, 독일, 심지어 2류 국가였던 일본도 있었다. 어쩌면 추축 진영의 또 다른 한축인 이탈리아도 최고의 물리학자이자 노벨상 수상자이며 오펜하이머와 더불어 맨하튼 계획의 가장 중요한 멤버 중 한 사람이 되는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가 무솔리니의 탄압을 피해서 미국에 일찌감치 망명하지 않았다면 그 대오에 이름을 올렸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미국은 경쟁에 한참 뒤쳐진 쪽이었다. 루스벨트가 아인슈타인으로부터 편지를 받고 핵개발을 지시한 뒤에도 오랜 평화에 젖어 있던 미국 사회의 태평한 분위기 속에서 과학에 문외했던 관료들과 군인들은 무관심했고 한낱 망상 쯤으로 여겼다. 핵개발 위원회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쓸데없는 회의로 시간만 낭비했다. 성과가 없지는 않았지만 속도는 정권 차원에서 총력을 기울이고 있던 나치 독일에 비하여 한없이 느리기 짝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열한 핵 레이스에서 승자는 미국이었다. 후발주자였던 미국이 이길 수 있었던 비결이 단순히 천조국으로서 남들보다 더 많은 인력과 돈, 자원을 쏟아부었기 때문일까. 다른 나라들, 특히 물리학에서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던 독일은 가능성이 없었던가. 실제로 같은 시간 독일에서는 베르노 하이젠바르크, 오토 한같은 저명한 노벨상 수상자들이 나치를 위해서 일찌감치부터 핵개발에 매진하고 있었고 점령지에서 핵개발에 필요한 원료와 자재를 얻을 수 있었다. 더욱이 독일에게는 미국조차 가지지 못했던 비밀 무기가 있었다. 대륙간 탄도 미사일의 원형이었던 V2 로켓이었다. 나중에 미국의 아폴로 계획을 주도하는 폰 노이만 교수가 개발한 V2 로켓은 초음속의 속도로 최대 300km의 거리를 날아갈 수 있었으며 전쟁이 끝날 때까지 3천발 이상 발사되어 9천여명이 죽었다. 연합군에게는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만약 독일이 핵개발에 성공했다면 오늘날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히틀러가 핵무기를 손에 넣었다면 V2 로켓에 탑재하여 제일 먼저 런던과 모스크바로 날렸을 것이며 사거리를 더욱 늘려서 워싱턴과 뉴욕까지 목표로 삼았을게 분명하다. 제2차 세계대전은 인류의 공멸로 끝났을지 모른다. 우리에게는 최악의 가정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렇게 되지 않은 이유는 히틀러의 어리석음,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의 노력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학 전문 출판사인 해나무 출판사에서 흥미진진한 신작 도서가 나왔다. 핵무기 개발을 놓고 미국과 나치 독일 사이에 벌어졌던, 때로는 황당하고 때로는 대담했으며 결국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첩보 전쟁을 다룬 <원자 스파이>이다. 어쨌든 전쟁에 이겨야 했으니 말이다. 참고로 원작 제목은 "개망나니 여단(The Bastard Brigade)"이라고. 저자 샘킨(Sam Kean)은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이면서 역사 작가치고는 보기 드물게도 물리학을 전공한 과학도라고 한다. 덕분에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우리같은 일반인들에게는 어렵고 딱딱할 수 밖에 없는 과학 용어들을 쉽고 재미있게 풀어쓰고 있다. 역사와 과학의 중간 쯤이랄지.

미국은 독일보다 먼저 핵무기를 만들기 위해서 어마어마한 돈과 함께 세계 최고의 과학자들을 모아서 맨하튼 계획에 착수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가장 큰 걱정거리는 독일이 먼저 핵개발에 성공하는 것이었다. 미국이 보기에 그것은 충분하다 못해 기정 사실처럼 보였다. 미국은 독일보다 훨씬 늦게 핵개발에 뛰어들었고 그나마도 한동안 지지부진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핵개발은 1942년 9월 펜타곤의 건설자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과 오펜하이머가 맨하튼 계획을 맡으면서 비로소 본격적으로 가동하게 된다. 동시에 또 다른 중요한 임무가 있었다. 독일이 미국보다 얼마만큼 앞서 나가고 있는지 알아내고 어떻게 방해하여 늦추는가였다. 그 비밀 첩보 작전이 '알소스 미션(Alsos Mission)'이었다. 그리고 이 책은 그들의 알려지지 않은 모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첩보 영화에서 흔히 나오는 특공대가 그러하듯, 알소스 팀에도 명망 있는 과학자부터 왕년에 메이저 리그에서 잘나갔던 선수, 할리우드 배우, 심지어 불한당까지 온갖 다양한 인간 군상이 섞여 있었다. 알소스 지휘관인 보리스 패시(Boris Pash) 대령은 원래 러시아 이민 2세로 젊은 시절 적백내전에서 싸웠고 전쟁 이전에는 고등학교 교사였다. 참고로, 알소스란 맨하튼 계획의 책임자이자 이들의 상관이었던 그로브스의 이름을 그리스어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안 그로브스는 노발대발했지만 소용없었다고.

나치의 핵개발을 저지하는데 일조한 알소스 팀. 뒷줄 가운데가 보리스 패시 대령. 1943년 9월에 창설된 후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활동하면서 독일의 핵개발 정보를 파악하고 전쟁 말기에는 나치 과학자들과 핵연료를 소련군보다 한발 먼저 차지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들조차 독일 핵개발은 막았지만 소련 핵개발은 막지 못했다. 미국 내부에서 암약한 공산주의 첩자들 때문이었다.


저자는 메이저리그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전설적인 포수였으며 나중에 알소스 팀의 핵심 멤버가 되는 모 버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핵무기를 먼저 손에 넣기 위한 미국의 맨하튼 클럽과 독일의 우라늄 클럽의 치열한 경쟁, 그런 독일을 저지하는 알소스 팀의 활약을 박진감 넘치면서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풀어낸다. 물론 나치의 훼방꾼은 이들만이 아니었다. 나치 핵개발에 치명타를 가한 노르웨이 특수부대의 중수 공장 파괴작전, 퀴리 부인의 사위이자 세계 최초로 방사선 동위원소를 만들어 노벨상을 수상한 저명한 물리학자였지만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일원이 되어 직접 나치에 맞서 싸웠던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 친동생 존 F. 케네디에 대한 과도한 경쟁심에 눈이 먼 나머지 전쟁 영웅이 될 기회를 얻겠답시고 비행기에 올라 독일 V3 로켓 발사포대를 제거하는 무모한 임무를 맡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조지프 케네디도 이 책에 등장한다. 그 밖에도 독일이 언제 핵개발에 성공할 지 모른다는 미국 과학자들의 강박에 가까운 공포심과 자기들이 미국보다 한 수 위일거라는 독일 과학자들의 우월의식, 그럼에도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졌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독일 과학자들의 반응 또한 흥미로운 읽을 거리이다. 디데이에서도 연합군 지도부는 히틀러가 방사능 무기로 프랑스 해안가를 오염시켜 수십만명의 병사들을 몰살시키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만약 그런 무기가 있다면 동부전선에서 먼저 써먹었을 것인데도 말이다. 그런 강박증이 맨하튼 계획을 성공시킨 최대 비결인 셈이다.

<원자 스파이> 이야기는 '저열하고 부정직한 10년인' 1930년대에 일어난 핵분열의 탄생에서 시작하여 전쟁이 끝난 마지막 날까지 이어진 서사시적 추적 임무로 이어진다. 연합국 측은 프랑스와 독일로 진격하기 전에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를 점령하느라 이미 수백만명을 희생했다. 하지만 그들은 히틀로가 고작 우라늄 몇 킬로그램만으로 디데이 작전 전체를 수포로 만들고 연합국을 유럽 대륙에서 영원히 축출하지 않을까 두려워 했다. - p.23

지식인에 대한 불신이 강했던 나치는 1939년에 과학자들에게 병역면제를 거의 해주지 않았다. 그런데 소수의 화학자와 물리학자에게는 예외를 인정했다. 왜 그랬을까? 디프너가 상관들에게 야심찬 계획에 도박을 걸어보라고 설득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 계획은 바로 핵분열 폭탄을 만드는 것이었다. 나중에 이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모임을 '우란페라인' 즉 우라늄 클럽이라고 불렀다. - p.136

전쟁 초기에 영국과 미국은 정보를 자유롭게 교환했지만, 보안에 과도하게 집착했던 그로브스는 건전한 이유와 옹졸한 이유에서 정보 교환을 중단시켰다. 기묘하게도 그로브스의 아버지는 1856년에 태어났음에도 왕정 시대에 영국이 아메리카 식민지를 배신한 행위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고 아들도 영국에 대한 아버지의 증오심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로브스는 이제 미국이 원자폭탄 개발에서 중요한 역할을 도맡아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미국은 영국의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혼자서 원폭을 만들 수 있었다. - p.338

지질학자들은 아이젠하워와 참모들을 설득하여 그들이 선호한 디데이 상륙 장소 대신에 동쪽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오마하비치를 선택하게 했다. 그곳 토양의 접지력이 훨씬 좋았기 때문이다. 이들의 노력 덕분에 연합군은 첫날에 重차량을 8851대나 상륙시킬 수 있었고 처음 7주 동안 15만 대 이상을 상륙시켰다. 게다가 디데이에 최소한 한명의 지질학자가 현장의 전문 지식을 제공하기 위해 군대와 함께 상륙했다. 물론 노르망디에 상륙한 군인들에게 가장 큰 공을 돌려야 마땅하지만 어디로 상륙해야 할 지 알려준 지질학자들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다. - p.391

마르세유의 우라늄염 27톤은 보스턴으로 운송되었다가 결국에는 오크리지로 보내졌다. 그 속에 포함된 우라늄-235는 훗날 히로시마를 파괴할 원자폭탄을 만드는데 쓰였다. 벨기에에서 회수한 61톤 역시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유럽에서 회수한 우라늄염은 도합 90톤이었다. 하지만 벨기에 기록에 따르면 우라늄은 900톤이 있었다. 나머지는 어디로 갔을까. 그것이 남아 있는 한 연합국은 아침에 눈을 떴다가 버섯구름을 목격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칠 수 없었다. - p.464

바이츠제커는 문서를 드럼통 속에 넣고 밀봉한 뒤 어느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을 곳에 묻었는데 몇 년 동안 배설물이 쌓인 변소 바닥이었다. 가우드스밋은 군인 두 명을 보내 그것을 건져 올리게 했다. 그는 두 사람에게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지만 "아주 중요한 입글 기밀 임무"라고만 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명예로운 임무에 선발된 것에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곳이 분뇨 구덩이라는 사실을 안 그들은 몹시 화가 났고 가우드스밋에게 그 고통을 되갚아 주었다. 오물로 뒤덮은 드럼통을 가우드스밋의 방 창문 아래에 갇다둔 것이다. 호스로 물을 뿌려 드럼통을 씻어낸 뒤 뚜껑을 연 가우드스밋은 독일의 원자폭탄 계획에 관한 전체 문서를 발견했다. "알소스가 잭팟을 터뜨렸습니다." - p.522

몇 달 전 독일의 원자폭탄 계획이 한참 뒤쳐져 있었다는 사실을 안 뒤, 가우드스밋은 그로브스의 한 부관에게 "독일이 우너자폭탄을 만들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 아주 환상적이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의 원자폭탄도 쓸 필요가 없으니까요."라고 말했다. 부관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샘, 우리에게 그런 무기가 있다면 우린 그걸 사용할거요." 그 예언이 이제 현실이 되었다. 원자폭탄은 두려움에서 시작되었다. 즉, 핵무기를 보유한 독일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방어무기였다. 하지만 독일의 위협이 사라지자 방어 무기라는 개념도 사라졌다. 불가피하게 원자폭탄은 다른 성격의 무기 - 역사상 가장 공격적인 무기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제 세상은 이전과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될 것임을 그는 직감했다. - p.552

이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미국이 독일의 핵개발을 그토록 두려워 하고 어떻게든 방해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면 반대로 독일은 미국의 핵개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으며 이를 방해하기 위해서 무엇을 했던가. 이 책이나 다른 책을 보더라도 히틀러는 맨하튼 계획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만약 그렇다면 미국이 제아무리 철저한 보안을 유지했다고 한들 연 인원이 1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하고 천문학적인 예산이 투입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프로젝트에 대해서 어떻게 그토록 무관심할 수 있었을까. 심지어 일본조차 전쟁 말기에 오면 미국의 핵개발이 임박했음을 어느정도나마 깨닫고 있었는데 말이다. 미국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도 있었겠지만 히틀러의 오만함, 나치 특유의 극도로 경직된 관료주의, 미국인에 대한 막연한 인종적 편견이 히틀러와 독일 과학자들의 눈과 귀를 가렸는지 모르겠다.

600여 페이지 가까운 분량임에도 저자 특유의 재치있고 유머러스한 필력과 스릴 넘치는 전개 덕분에 도저히 손을 뗄 수 없어서 주말 동안 단숨에 읽어버렸다. 이런 책일수록 내용도 내용이지만 번역자의 실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기술 용어가 난무함에도 흠 잡을 데 없이 매끄럽다. 서울대 출신의 과학 전문 번역가라고 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 개봉을 앞두고 시중에서는 오펜하이머 평전을 비롯하여 맨하튼 프로젝트와 히로시마 원폭을 다룬 책들이 줄줄이 나오더라. 영화는 아직 보지 않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어차피 결말이 정해진데다 핵폭발 빼고는 그다지 임팩트나 액션신이 있는 것도 아닌 이 영화가 그렇게 사람들의 주목을 끌만한 소재일까 했는데 놀라울 따름이다. 역시 할리우드 빠와! 영화가 맨하튼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이자 스스로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라고 자조했던 오펜하이머의 인간적인 면에 포커스를 맞추었다면 이 책은 스케일이 한 단계 더 크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처럼 한편의 액션 영화로 만들어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기 전에 읽어보라. 재미가 2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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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와 배신자 -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이중 스파이, 올레크 고르디옙스키
벤 매킨타이어 지음, 김승욱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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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 <레드 히트>라는 고전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주인공이 무려 아놀드 슈왈제너거. 러시아 마피아 두목이 미국에 마약을 팔자 그를 잡기 위해서 모스크바 경찰국에서 파견된 소련 경찰이 미국 시카고 수사관과 공조 수사를 벌이는 액션 코미디 영화이다. 물론 소련 경찰을 맡은 쪽은 당시 터미네이터로 한창 주가를 올리던 젊은 시절의 아놀드. 이 영화에서 그는 두가지 모습을 보여준다. 고릴라같은 거구에 근육질 몸매, 두꺼운 사각턱, 임무를 위해서라면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한 살인머신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어수룩하면서 세상 물정에 어두운 시골 촌놈같은 느낌이다. 그 시절 서방 사람들이 생각하던 러시아인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셈이다. 아놀드의 파트너를 맡은 미국 경찰관은 반대로 위트 가득한 전형적인 남부 카우보이 스타일이다. 물과 기름이나 다름없는 두 사람은 처음에는 상대를 탐탁찮게 여기면서도 공동의 적과 싸우는 과정에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신뢰와 우정을 쌓아간다는 내용이다. B급 액션물이라고 하지만 꽤 재미있게 본 영화이다.

젊은 시절 우리 주지사님. 진짜 KGB라고 해도 위화감이 없을 듯. 소련인 터미네이터 경찰과 그와는 정반대로 능청스러운 미국인 경찰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콤비는 자본주의 미국과 공산주의 소련을 대표하는 것이자 그 시절 두 체제의 화해를 향한 기대이기도 했다.


이 영화가 나온 것은 냉전 끄트머리였던 1988년으로 아직까지 소련이 건재하던 시절이었다. 고르바초프의 이른바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 따라 소련이 조금씩 문호를 열기는 했지만 그곳은 서방 사람들에게는 같은 지구이면서 여전히 함부로 들어갈 수 없고 함부로 나올 수도 없는 미지의 공간인 '철의 장막' 속 세계였다. 철저한 억압과 통제, 국가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과 무조건적인 헌신의 강요, 전체는 하나라는 슬로건 아래에서 개인을 말살하고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소련 체제는 국가 차원의 거대한 교도소이자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빅브라더 세상의 현실판이었다. 생각만 해도 숨막히는 그런 공간에서 그 동네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견뎠나 싶지만 한편으로 그럼에도 어찌어찌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놀라운 적응력이기도 하다. 자유가 없는 것은 둘째치고 독재와 가난, 범죄가 판을 치는 콜롬비아, 소말리아조차 사람 사는 동네이니 말이다.

하긴 우리만 하더라도 현실의 부조리함 속에서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알아도 모르는 척해야 했던 서슬 퍼런 시절이 불과 30~40년 전에 있지 않았던가. 원래 인간이란 적응의 동물인지라 대부분은 어지간히 부당한 꼴을 당하더라도 묵묵히 참고 견디는 쪽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현실에 순응하는 대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맞서 싸우는 사람 또한 있기 마련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부조리함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발전이 아닐까. 그것은 그저 얻어낸 것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소련 역시 그렇게 무너졌다. 정작 그 수혜는 대중이 아니라 푸틴이라는 탐욕스러운 독재자 한 놈이 독차지하여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렸지만 말이다.

인문학 전문 출판사인 열린 책들에서 주목할 만한 책이 나왔다. 악명높은 소련 KGB의 고위 간부로서 부와 권력, 명예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스스로 모든 것을 포기했던 한 스파이의 파란만장하면서 영화보다 더 스릴 넘치는 실화를 다룬 내용이다. 주인공은 2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베테랑이자 KGB 런던지부장이었던 올레크 고르디옙스키 대령. 우리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재작년 베네딕트 컴버배치 주연의 첩보 영화 <더 스파이>에 나오는 소련 총참모부 산하 GRU(정찰총국) 소속 올레크 펜코브스키 대령과 더불어 냉전 시절 가장 유명한 소련 이중 첩자 중 한 사람이자 서방에 소련 체제의 약점을 알림으로서 냉전이 서방의 승리와 소련 붕괴로 이어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KGB 시절의 고르디옙스키 대령. 매서운 눈빛과 탄탄한 체격은 영화 <레드 히트>에 나오는 주지사님 못지 않게 강렬한 포스 작렬이다. 아직도 살아 있다.


미-소 군대가 직접 맞붙지 않았다는 이유로 냉전(Cold war)라고 하지만, 음지에서는 양측 스파이들간의 총성 없는 열전(Hot war)이 첨예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영화 <007>이나 <킹스맨>, <미션 임파셔블>처럼 화려한 액션과는 거리가 멀었다. 애초에 현실 세계에서 스파이들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악으로부터 은밀하게 세상을 지키는 영웅 노릇을 하지 않는다. 과연 그런 일을 하는 조직이 실제로 있는지 모르겠다. 이들의 임무는 남들에게 들키지 않게 정보를 캐는 일이다. 때때로 영화 <뮌헨>에 나오는 이스라엘 모사드나 최근 푸틴이 자신의 반대파에게 방사능 홍차를 보내는 것처럼 누군가를 납치, 고문, 암살할 수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조직의 배신자들을 응징할 때에만 해당한다. 만약 상대 정치인이나 고위 장성, 기업가같은 거물을 함부로 노렸다가 들통나면 엄청난 보복은 물론이고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첩보 조직에 있어서 최대의 승리는 상대측 첩보 조직 내부에 트로이 목마, 즉 이중 첩자를 심는 것이다. 그럼으로서 가만히 앉아서 상대의 모든 것을 알아내는 셈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러한 냉전 시절 첩보 전쟁의 실체를 다루고 있다.

환갑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구하기 위해 매번 몸을 아끼지 않는 활약을 보여주는 톰 형. 영화에 나오는 IMF(미션 임파셔블 포스)는 설정상 CIA 산하 첩보 조직이지만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슈퍼 빌런 때려잡는 대테러 비밀부대이자 먼치킨 히어로 조직이랄지.


<레드 히트>의 아놀드 못지 않은 탄탄한 근육질의 몸짱이면서 <미션 임파셔블>의 에단 호크만큼이나 명석한 기억력과 몇 개 국어에 능통한 이 책의 주인공 올레크 고르디옙스키는 대학 졸업과 함께 형의 추천을 받아 KGB 해외 지부에 들어가면서 인생의 첫발을 내딛게 된다. 아버지는 스탈린 시절 NKVD(KGB의 전신)에서 고문과 처형을 맡았던 공안이었고 형과 아내 역시 KGB 요원이었다. 심지어 장인은 KGB 장군, 장모도 KGB 출신이었다. 뼛속까지 KGB이자 KGB가 수호하는 체제의 특권층으로서 수혜를 누리면서도 그 체제의 모순과 함께 특권이 사막의 신기루마냥 얼마나 쉽게 사라질 수 있는지 또한 가장 잘 알고 있는 셈이었다.

올레크는 아버지의 태도에서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을 느낄 수 없었다. 세월이 흘러 스탈린 정권의 억압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을 때 올레크는 이제 퇴직할 나이가 가까워진 아버지가 당시 KGB가 저지른 모든 범죄와 만행이 부끄러워 KGB의 일에 대해 아들과 이야기하기 두려웠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니면 안톤 고르디옙스키는 너무 겁에 질린 나머지, 아들에게 그런 세계에 들어가지 말라고 경고해 주지도 못하는 이중적인 삶을 유지하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 p.37

배경 좋고 혈기왕성한 엘리트 청년들이 흔히 그러하듯, 그 역시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야심만만하면서 출세욕과 모험심으로 가득했다. 자신의 이상과 장래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았지만 장미빛 환상은 오래지 않아 깨졌다. 그에게 소비에트 체제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세계였고 KGB는 위선과 가식 덩어리였다. 반면, 서방은 소련보다 훨씬 부유하면서 진보적이고 개방적이며 자유로웠다. 소련이나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이 서방의 물결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문고리를 꽁꽁 걸어잠구고 국민들이 혹시라도 딴 생각을 할까 편집광적인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면서 체제 선전에 열을 올리는 것 또한 그런 현실에서 나온 열등감의 표출이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공산주의 체제가 단숨에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음을 절감하는 쪽은 올레크처럼 소련의 바깥 세계가 어떤지 직접 눈으로 보고 피부로 체감한 젊은이들이었다. 현실은 교실에서 배우는 것과 달랐다.

그가 1970년 1월에 돌아간 소련은 3년 전 그가 떠날 때보다도 훨씬 더 억압적이고 편집증적이며 음침했다. 브레즈네프 시대의 정통 공산주의 통치가 모든 색채과 상상력을 빨아내고 있는 것같았다. 올레크는 고국의 모습에 진저리를 쳤다. <모든 것이 얼마나 추레해 보였는지> 줄을 선 사람들, 더러운 건물들, 숨이 막힐 것같은 관료주의, 공포, 부정부패가 얼마 전 그가 떠나온 덴마크의 밝고 풍요로운 세상과 우울한 대조를 이뤘다. 어디서나 선전을 볼 수 있고 관리들은 비굴하거나 무례했으며 모든 국민이 다른 사람들을 염탐했다. 누구도 웃지 않았다. - p.65

KGB에 들어온 지 13년 째인 1973년 덴마크로 부임한 올레크는 영국 해외첩보부인 MI6와 처음 접촉했고 이중 스파이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당사자 입장에서 그것은 스릴 넘치는 모험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동안 쌓아올린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잃는 것은 물론이고 배신자로 체포되어 잔혹하게 처형될 수 있었다. 이중 스파이는 어디에나 있었고 올레크처럼 KGB 내에서 소련을 배신하고 서방을 위해 일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서방측 첩보 조직 내에서도 서방을 배신하고 소련을 위해 일하는 자들이 있었다. 한발짝만 잘 못 내딛거나 운이 없으면 정체가 발각되어 파멸이었다. 어지간히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스스로 그런 선택을 했고 위험을 무릅쓰고 중요한 기밀을 MI6에 넘겼다. 그 중에는 KGB에 매수되거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소련을 위하여 일하는 영국의 저명한 인사들에 대한 명단도 있었고 소련 체제와 지도부의 사고 방식이 서방의 막연한 편견과 어떻게 다른지, 그들이 얼마나 편집광적으로 서방의 침공을 두려워 하고 있는지 알게 해 주는 것도 있었다. 냉전은 서로에 대한 어이없는 오해와 의심이 초래한 것이기도 했다.

첩자 풋은 저명한 작가 겸 웅변가, 베테랑 좌파 의원, 영국 노동당 지도자이며 만약 다음 선거에서 노동당이 승리한다면 영국의 총리가 될 마이클 풋이었다. 이 나라 영국에서 여왕 폐하의 충성스러운 야당 지도자가 KGB에 매수된 첩자였다는 뜻이었다. 마이클 풋은 정치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20년 동안 영국 노동당 좌파에서 우뚝 솟은 인물이었다. 1974년에는 처음 각료로 임명되어 헤럴드 윌슨 내각의 고용부 장관이 되었다. 1984년 5월로 예정된 차기 총선에서 마이클 풋이 승리해 총리가 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 P.186

KGB 요원들은 <핵 관련 핵심 결정권자>를 면밀히 감시해야 했는데 어이없게도 이 결정권자 중에는 교회 지도자와 최고위 은행가도 포함되어 있었다. 심지어 밤에 핵심 관청 건물에 불이 몇 개나 켜져 있는지 세어 보라는 지시도 있었다. 관리들이 공격을 준비한다면 밤새 불이 꺼지지 않을 터였다. 정부 주차장에 주차된 자동차 대수도 헤아려야 했다. 펜타곤에 주차된 차들이 갑자기 늘어난다면 미국이 공격을 준비한다는 신호일 수 있었다. 병원도 감시 대상이었다. 적이 선제 공격에 대한 상대의 보복을 예상하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경우에 대비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었다. 도살장도 비슷한 수준의 감시 대상이었다. 도살되는 가축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는 것은 서방이 아마겟돈에 앞서서 햄버거를 비축하고 있다는 징후일 수 있었다. <구입하는 혈액의 양이 증가하고 가격이 올라간다면 전쟁에 대한 대비가 시작되고 있다는 중요한 징후일 수 있었다.> 크렘린은 자본주의가 서구인들의 생활 구석구석에 스며들었을 테니 <혈액은행>이 정말로 혈액을 사고 파는 은행이라고 믿었다. KGB 지부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도 감히 이 기초적인 오해조차 바로잡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위계질서가 강하고 비겁한 조직에서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는 일보다 더 위험한 것은 상사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는 일이었다. - p.229

미국의 대외 정책 분석가들은 소련이 선전을 위해서 일부러 과장된 표현을 쓰는 것이며, 그들의 경고성 표현은 오랫동안 이어져 온 허세 대결의 하나라고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의 생각과 달리 미국이 핵전쟁을 시작할 계획을 짜고 있다는 소련 최고 지도자 안드로포프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리고 영국은 소련에서 온 스파이 덕분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크렘린의 걱정이 비록 무지와 의심증에서 싹튼 것이라고 해도 진심이라는 사실을 미국에도 알려 줘야 할 것 같았다. - p.233

KGB는 1983년 선거에서 대처가 반드시 패배하게 하려고 열심히 움직였다. 좌파 성향의 언론인들에게 부정적인 기사를 공급해 주는 것도 그 방법 중 하나였다. 소련은 더러운 술수와 비밀스러운 훼방을 이용하여 민주적인 선거를 휘젖고 자신들이 선택한 후보에게 이로운 결과를 만들어 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만약 노동당이 선거에서 이겼다면, 고르디옙스키의 처지는 참으로 기상천외하게 변했을 것이다. KGB의 현금을 기꺼이 받던 자가 총리로 앉아 있는 정부에 KGB의 기밀을 넘기는 꼴이 되었을테니까. - p.277

올레크는 10여년 동안 MI6를 위해서 일했고 그가 넘긴 정보는 서방의 정책에 큰 영향을 끼쳤다. 쿠바 미사일 사건을 해결하는데 일조한 올레크 펜코브스키 대령만큼이나 인류를 위해 기여한 셈이었다. 그는 KGB 런던 지부장까지 올라가면서 더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었지만 어이없는 일로 정체가 발각될 위기에 처했다. 그것은 KGB가 이중 스파이를 찾아냈다거나 MI6의 실수 때문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CIA가 내부를 단속하는데에는 게을리한 탓이었다. 올레크는 CIA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지만 MI6가 엄청난 정보를 연일 물어오자 CIA는 대번에 질투심을 드러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올레크의 정체를 알아내는데 성공했다. MI6에게 뒤질 수 없다는 자존심에 눈이 멀어서 굳이 알지 않아도 될 정보를 알아내겠답시고 힘을 빼면서도 정작 등잔밑이 어둡다고 자기 발밑은 무관심했던 것이 세계 최고의 첩보 조직을 자처하는 CIA였다.

CIA 간부였던 올드리치 에임스는 무능하고 게으르면서 조직에서는 고립되어 있었다. 게다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고 돈을 물쓰듯 낭비하는 애인 때문에 언제나 돈에 찌들렸다. 배신자를 조심해야 하는 첩보 조직에서는 반드시 경계해야 할 인물이었다. 그는 스탈린의 가명인 '코바'를 자처하면서 제 발로 KGB의 문을 두들겼고 돈 몇푼에 자신의 영혼은 물론이고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망치는 쪽을 선택했다. 에임스는 CIA가 확보한 소련과 서방의 이중 스파이 명단을 넘겼고 KGB는 즉각 배신자 색출에 나섰다.

1985년 6월 13일 올드리치 에임스는 첩보 역사에서 가장 화려한 축에 속하는 반역 행위를 저질렀다. 무려 스물 다섯명이나 되는 서방 정보기관 첩자들의 이름을 소련에 알려준 것이었다. KGB에서 처음 돈을 받은 뒤 한달 동안 에임스는 잔인할 정도로 논리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소련 정보기관 내에서 활약하는 CIA의 수많은 첩자 중에서 누가 그의 꿍꿍이를 알게 되면 그의 정체를 폭로할 거라는 결론이었다. 따라서 그가 스스로를 보호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을 밀고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첩자의 신원을 KGB에 한발 먼저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러면 소련이 그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처형할 것이었다. 에임스는 자신이 이름을 알려준 모든 사람들에게 사실상 사형 선고를 내렸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안전해지고 부자가 되는 길은 그것 뿐이었다. "만약 그들 중 한명이라도 내 존재를 알아차린다면 나는 CIA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힐 것이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었다. 그냥 그 바닥이 원래 그런 곳이었다." - p.377

당장 올레크의 정체가 들통나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시간 문제였다. KGB는 런던 지부의 고위급 중에서 배신자가 있음이 분명하다고 결론 내렸고 올레크를 모스크바로 소환했다. 올레크는 탈출을 결심했고 대처 여사는 MI6에 영국을 위해 목숨을 건 소련인의 구출을 명령한다. 이 점이 단물 쓴물 다 빼먹고는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지면 토사구팽하는 소련 KGB와 다른 점이었다. 그리고 3부에서는 그의 탈출 작전이 시작된다. 여기에 대해서는 미리 얘기하면 마치 영화의 스포가 될 것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스릴 넘치고 흥미진진하다.

냉전 막바지인 1987년 레이건을 만난 올레크 고르디옙스키(오른쪽). 고르디옙스키는 미국의 스타워즈 계획이 소련을 무너뜨릴 것이라고 조언했고 레이건은 그의 말을 충실하게 실천했다. 레이건은 그에게 "우리는 당신이 한 일에 감사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결론만 얘기한다면 올레크는 우여곡절 끝에 탈출하여 영국으로 망명한다. 그는 서방의 영웅이 되었고 대처는 물론이고, 레이건조차 백악관으로 초청하여 냉전 종식에 기여했다면서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세상을 구한 대가는 결코 공짜가 아니었다. 소련에 남은 가족들은 KGB의 집요한 심문에 시달려야 했고 모든 친구와 동료들을 잃었다. 대처는 가족들의 송환을 위해서 고르바초프에게 거래를 제안했지만 거부당했다. 고르바초프에게 올레크는 위험을 무릅쓰고 두 세계에 다리를 놓아준 영웅이기보다 그저 조국에 창피를 준 인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올레크는 소련이 무너지기 직전에야 비로소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지만 한 때 남편을 열렬하게 지지했던 아내는 재회의 기쁨 대신 남편이 자신과 가족을 버렸다면서 분노했고 결국 이혼했다.

게다가 소련의 붕괴는 러시아의 봄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무능한 개혁가였던 옐친의 뒤를 이은 쪽은 전직 KGB 출신인 푸틴이었다. 강한 러시아의 부활을 내건 푸틴은 더 이상 공산주의자는 아니지만 공산주의자들의 방식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자신을 조금이라도 비판하거나 국가를 배신한 자라면 어디에 있건 KGB의 오랜 방식에 따라 사정 없이 응징한다. 85살이 된 올레크는 여전히 러시아의 배신자로서 조국에 발을 디딜 수 없고 혹시 모를 러시아의 암살 위협 때문에 MI6의 엄중한 보호를 받으며 은신처에서 살고 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소련을 배신한 올레크와 서방을 배신한 올드리치 에임스에 무슨 차이가 있냐고. 소련을 배신한 것은 선이고 서방을 배신한 것은 악인가, 어차피 조국을 배신한 것은 마찬가지가 아닌가라고. 전적으로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대로 두 사람은 명백한 차이가 있었다. 에임스는 전적으로 사리사욕을 위해서 나라와 동료들을 적에게 팔아먹었지만, 올레크는 소련 체제의 모순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서 행동했으며 그에 따른 불이익을 마땅히 감내했다. 이 책에서는 두 사람 말고도 두 진영에서 다양한 배신자들이 등장한다. 소련의 배신자들이 죄다 올레크처럼 신념에 따라서 행동한 것도 아니며 탐욕을 이기지 못하거나 자신의 치부를 덮기 위해서 서방으로의 망명을 선택한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어느 쪽이건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환상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설령 배신이 들키더라도 서방에서는 적어도 정당한 재판을 받고 그에 합당한 죗값을 치룰 수 있었다. 소련처럼 끌려가서 고문당하고 뒷통수에 총알이 박힐 위험은 없었다. 반면, 소련에서는 설사 잘못이 없어도 단지 의심스럽다는 이유만으로 얼마든지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었다. 이것은 서방의 악선전이 아니라 진실이었다. 서방이 절대선은 아니라도 최소한 소련보다는 선이었고 소련은 절대악에 가까웠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쪽은 산전수전을 겪었고 양쪽 체제를 모두 경험해 본 자들이었다. 그 시절 막연한 이상주의에 빠져서 세상 물정 모르는 대학가의 햇병아리들이나 공산주의 체제가 자본주의 체제보다 더 나은 세상일거라고 믿었을 뿐이었다.

에임스는 돈을 위해 첩자가 되었고 고르디옙스키는 이념적인 신념에 따라 움직였다. 에임스의 희생자들은 KGB의 손에 대부분 목숨을 잃었지만 고르디옙스키가 폭로한 베터니나 트레홀트같은 사람들은 감시 끝에 채포되어 정당한 재판을 받고 복역한 뒤 석방되어 다시 사회로 돌아올 수 있었다. 고르디옙시키는 대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었지만 에임스는 더 큰 차를 원했다. 그는 전혀 호감을 느끼지 못하는 잔혹한 전체주의 정권, 단 한번도 직접 가서 살아볼 생각을 하지 않는 나라를 위해 일하는 길을 스스로 선택했다. 고르디옙스키는 민주주의 체제를 맛본 뒤 그런 생활 방식과 문화를 보호하고 지지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으며 결국 개인적인 희생을 치르고 서방에 정착했다. 고르디옙스키는 선을 좇았고 에임스는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했다. - p.535

600여 페이지의 만만찮은 분량임에도 읽는 내내 뒤가 궁금하여 손을 뗄 수 없어 무려 이틀 만에 완독했다. 마침 휴가철에 책을 받아서 다행이랄까. 저자의 필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영화로 만든다면 <더 스파이>보다 훨씬 재미있을 것같다. 애플TV에서 방영한 <스파이들의 전쟁> 4화가 이 양반을 다룬 내용이라고 하는데 다큐멘타리인지라. 어차피 나는 애플TV를 구독하지 않으니까 볼 방법도 없지만 말이다.


빌 게이츠가 추천했다고 하는데, 내가 올해 읽은 책 중에서 감히 최고라고 꼽는다. 일독을 강력하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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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08-08 1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독하고 싶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