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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함락 1945 ㅣ 걸작 논픽션 26
앤터니 비버 지음, 이두영 옮김, 권성욱 감수 / 글항아리 / 2023년 8월
평점 :
“소련군을 그 따위로 모욕한 사람은 질라스 당신 말고는 없습니다. 그들은 당신네들을 위해서 피를 흘린 것이 아닙니다. 당신네들은 피와 불과 죽음으로 수천 킬로미터를 가로질러온 병사들이 여자들과 재미를 즐기거나 약간의 사소한 행동을 한다고 해서 그 정도도 이해하지 못합니까?”
▶ 1944년 12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간부 밀로반 질라스(Milovan Djilas)가 스탈린더러 소련군이 유고슬라비아를 ‘해방’하면서 수백여 건의 강간과 약탈, 학살을 저질렀다며 “유고슬라비아에 들어온 영국군이 그런 짓을 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항의하자.
2022년 2월 13만 명의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를 전격 침공했다. 전 세계 사람들을 진정한 충격에 빠뜨린 일은 푸틴의 침공 사실보다도 러시아군이 현지에서 보여준 모습이었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브 주변에서 러시아군 철수 후 발견된 1천여 구가 넘는 시신과 학살의 증거들, 조직적인 약탈, 집단 강간, 민간인 지구에 대한 무차별적인 푸틴 식 응징, 심지어 한 러시아 여성은 우크라이나 침공에 참전한 자신의 남편에게 “성욕 해결을 위해서 우크라이나 여자를 강간해도 허락하겠다.”라는 통화 녹취가 공개되면서 우크라이나인들은 물론이고 국제적인 분노를 사기도 했다. 물론 미군 또한 아프간과 이라크에서 오폭과 인권 침해 등으로 국제적인 비난에 시달리기는 했지만 러시아군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만행은 그런 미군의 만행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약자를 상대로 전쟁이 아닌 테러를 자행하는 이들의 모습은 21세기의 문명화된 군대라기보다 아프간 탈레반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부차를 비롯한 우크라이나 점령지에서 러시아군이 퇴각한 후 발견된 학살과 약탈, 강간의 흔적, 심지어 일부 러시아 병사들은 SNS에 자신의 범행을 담은 동영상을 자랑스럽게 게재하여 전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이들의 군기 빠진 모습은 80여 년전 난징에서 일본군이 보여준 것과 다를 바 없을 정도였다. 그때까지 러시아를 자극할까 주저하던 서방이 우크라이나에 본격적인 지원을 시작한 것도 러시아의 만행으로 여론이 극도로 악화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푸틴은 기강을 바로잡기는 커녕 죄다 서방의 조작이라며 스스로 눈과 귀를 막아버렸다.
우리에게 보다 충격적인 일은 푸틴을 비롯한 대다수 러시아인들은 미국과 서방에 대한 피해의식으로 가득하며 자신들의 만행에 대해 아무런 도덕적 가책조차 없다는 사실이다. 자신들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은 이기적인 정복욕 때문이 아니라 미국이 먼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을 선동하여 러시아의 밥그릇을 건드린 탓이라고 항변한다. 즉, 나쁜 쪽은 미국이라는 식이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비롯하여 반러 친서방 우크라이나 지도자들을 가리켜 ‘신나치’라고 부르기를 서슴지 않는다. 바꾸어 말해서 이들에게 이 전쟁은 러시아를 미국의 위협에서 지키기 위한 예방 전쟁이나 성전이라는 얘기이다. 하는 행동으로 봐서는 어느 쪽이 ‘진짜 나치’에 더 가까운지는 명확하지만 말이다. 러시아인들은 서방이 러시아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투덜거리기 전에 자신들이 먼저 주변국들을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국내 ‘진보’ 언론이나 분별없는 일부 정치학자들은 “나토를 동진시키지 않겠다고 했던 미국이 먼저 약속을 깼기 때문”이라며 전쟁 책임을 호도하는 푸틴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대변한다. 그러나 한중일 이상으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뿌리 깊은 역사적 원한과 증오에 대한 몰이해이며 우리 사회가 한반도 바깥의 사정에 무지하고 무관심하다는 얘기이다. 러시아가 보기에 미국 하는 일이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두 나라끼리 알아서 해결할 문제이다. 우크라이나를 공격하면서 미국 핑계를 대는 것은 약자에게 분풀이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푸틴이 무슨 생각으로 전쟁을 시작했건 간에 러시아 병사들이 현지에서 약탈과 강간, 학살을 저지르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얘기이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 역시 ‘미라이 사건’처럼 기강 해이와 간부들의 통제에서 벗어난 일부 군인들의 ‘일탈 행위’가 없지 않았지만 대다수 미국인들은 결코 이런 행동을 당연한 양 옹호하지 않았다. 이 사건이 폭로되면서 정치인들과 군 상층부는 한동안 곤혹을 치르고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해야 했다. 덕분에 걸프전에서 미군의 모습은 베트남전쟁과는 달랐다. 하지만 푸틴이나 군 상층부는 솔직하게 만행을 인정하고 바로잡기는커녕 묵인하거나 오히려 조장하면서 국제 사회를 향해 우리에게는 핵무기가 있으니 주제넘게 끼어들지 말라며 큰소리친다. 그렇다보니 러시아 병사들이나 심지어 일반 국민조차 무관심으로 일관하거나 자기네 위세만 믿고 정복자니까 뭘 해도 된다는 식이다. 러시아가 야만적인 나라로 낙인찍힌 것은 죄다 미국과 서방 진영의 악선전 탓으로 돌린다. 지금은 칭기즈칸이나 나폴레옹 시대가 아니며 엄연히 21세기임에도 말이다. 러시아인들은 더 이상 ‘철의 장막’을 두르고 세상과 단절되어 살던 구소련이 아니라 나름대로 국제화 시대에 살면서 서방 물을 먹었지만 가치관과 사고방식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는 얘기이다.
푸틴과 러시아인들의 오만한 태도에는 서방에 대한 편집광적인 피해망상증 외에도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자신들이 막대한 피를 흘려가며 온 유럽을 나치로부터 구한 ‘해방자’라는 것이다. 유럽 사람들은 구소련의 진정한 계승자인 러시아에게 마땅히 부채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러시아인들은 독소전쟁을 가리켜 ‘大애국전쟁(Great Patriotic War)’이라고 부르면서 엄청난 자부심을 숨기지 않는다. 전후 스탈린의 영토 확장은 2천만 명이 넘는 희생자에 대한 정당한 대가로 여긴다. 푸틴이 나토의 동진에 그토록 광기를 드러내는 이유도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나머지 구소련 국가들은 물론, 동유럽 전체를 주권국이자 러시아와 동등한 파트너가 아니라 독소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쯤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시대착오적이고 아전인수식 사고이다.
하지만 2천만 명의 희생자 중에는 러시아인들 외에도 우크라이나, 우즈벡 등 다른 민족들도 함께 싸우고 피를 흘렸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쏙 빼놓는다. 더욱이 피를 흘린 것으로 따진다면 폴란드는 소련 이상의 대가를 치렀지만 어떠한 보상도 받을 수 없었다. 나치에 대한 승리는 러시아인들만의 독점물이 아니라 전쟁의 또 다른 한축을 맡았던 서방은 물론, 함께 피를 흘렸던 유럽 전체가 나누어 가져야 마땅하다. 제아무리 소련군이 용맹스러웠다고 한들, 서방이 무상으로 제공한 막대한 보급물자와 차량이 없었더라면 히틀러가 마지막까지 해낼 수 없었던 베를린-모스크바의 레이스를 스탈린 역시 해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러시아의 일부 국수주의 학자들은 전적으로 자신들의 피와 희생 덕분에 이겼으며 서방의 원조 따위는 소련의 거대한 생산력에 비하면 한줌에 불과했다며 폄하한다. 서방 입장에서 본다면 불 난 집에 불 끄라고 소방 호스를 빌려주었더니만 불 다 끄고 난 뒤에 한다는 소리가 성능이 신통찮았다느니 그거 없어도 불을 끌 수 있었다느니 구시렁거리는 셈이니 배은망덕도 유분수랄까.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은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군의 만행은 독소전쟁 당시 소련군이 보여준 모습의 판박이라는 점이다.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나치 군대를 끈기 있게 밀어붙이며 ‘러시아 증기롤러’의 힘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에만 자부할 뿐, 그 뒤에 가려진 자신들에게 불리한 역사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소련군은 해방자이기는 커녕 나치 이상으로 지독한 정복자였다. 그들 스스로도 누구를 해방하러 왔다고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소련군이 ‘해방군’이라는 것은 스탈린의 선전매체가 만들어낸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소련군은 지나가는 곳마다 1500년 전 악명 높은 아틸라의 훈족 군대나 수백 년 전의 칭기즈칸 군대에 비견될 만큼 무차별적인 약탈과 집단강간, 대량학살을 일삼았다. 독일군이 자신의 가족들에게 했던 행동을 되갚아주기 위한 복수심이나 일부 군인들의 흔한 일탈쯤으로 여긴다면 실로 순진한 생각이다. 소련군에게는 열심히 싸운 병사들을 위한 ‘사소한 보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야 그들이 그나마 얼마 안남은 인내심을 유지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만행은 심지어 독일에 강제로 끌려갔던 같은 소련 인민들에게도 똑같이 자행되었다. 대부분 거칠고 순박한 시골 농민출신이었던 러시아 병사들에게 어느 누구도 “그것은 범죄”라는 얘기를 해주지 않았다. 또한 소련 체제로부터 인간으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한 사람들로서는 남의 인권을 존중할 리 없었다. 처벌은 약탈이나 강간을 해서가 아니라 윗분들의 몫을 챙기지 않았거나 강간 피해자로부터 성병을 옮았다는 이유였다. 심지어 스탈린조차 그런 게 뭐가 잘못이냐는 생각이 소련의 낙후하고 봉건적인 가치관이었다. 뒤늦게 문제가 커지자 솔직하게 인정하고 바로잡으려고 노력하기보다 서방의 악선전 탓으로 돌리면서 꽁꽁 숨기기에 급급했다. 러시아인들의 사회주의식 도덕관념과 윤리 의식은 오늘날 우리 상식과는 전혀 달랐다. 그리고 70여년이 지난 뒤 그들의 후손들은 할아버지들이 했던 행태를 우크라이나에서 고스란히 반복하고 있다.
점령지 주민들의 눈에 비친 소련군의 모습은 독일군을 꺾은 고도로 현대화된 정예 군대가 아니라 멕시코 산적떼에 가까울 만큼 기강이 형편없었다. 조국을 위해 싸운다는 명목으로 끌려나온 무지한 농민들은 우직하면서 용맹하고 독일군도 감탄할 만큼 극한의 환경에서도 끈기을 보여주었지만 그들의 사고 방식은 제정 러시아 시절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스탈린은 사기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이들의 일탈을 적당히 눈감아 주었다. 결국 전쟁범죄를 조장한 장본인은 스탈린이었다.
그런 점에서 글항아리 출판사의 신작 도서이자 앤터니 비버의 역작 <베를린전투 1945>는 그동안 독소전쟁을 잘 알지 못하거나 소련군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품고 있던 국내 독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줄지 모른다. 이미 시중에서는 데이비드 M. 글랜츠의 <독소전쟁사>를 비롯하여 몇 권의 책이 나와 있다. 그러나 <베를린전투 1945>는 단순히 소련군의 위대한 승리를 강조하거나 영화 <다운폴>에 나온 것처럼 히틀러의 마지막을 다루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동안 학자들이 간과하거나 정치적으로 민감하다는 이유로 빼놓았던 부분들을 신랄하게 묘사한다. 전장에서 보여준 소련군의 민낯, 스탈린 체제의 비인도성, 전쟁에서 조금이라도 더 전리품을 챙기려고 안간힘을 썼던 스탈린의 탐욕까지, 러시아인들이 자부하는 ‘대애국전쟁’은 결코 영광스러운 승리가 아니었다. 동유럽에서 저지른 소련군의 전쟁범죄는 우리가 그토록 비판하는 일본군 못지않았다. 스탈린과 장군들이 병사들을 인간이 아닌 한낱 소모품으로 여기고 명령에 복종하여 조국을 위해 죽기로 싸웠던 전쟁영웅들을 푸대접하는 모습 역시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판박이였다. 소련과 일본의 유일한 차이는 그저 어느 편에 섰느냐이다.
물론 앤터니 비버가 이 책을 쓴 목적은 단순히 러시아인들의 추악한 자기기만을 고발하기 위함은 아니다.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나치 제국의 최후이다. 1945년 4월의 독일군이 대단히 불리한 처지에 놓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1941년 12월의 소련군 역시 그에 못지않게 어려웠다. 또한 베를린으로 진군한 소련군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병참선은 한계였다. 어째서 독일군은 모스크바를 영웅적으로 지켜낸 소련군처럼 하지 못했던가. 스탈린그라드는 주코프가 ‘천왕성 작전’을 발동할 때까지 무려 삼 개월 동안 독일군의 맹공을 견뎌냈지만 베를린은 불과 열흘도 안 되고 함락되었던가. 공전의 위기를 앞두고 히틀러와 나치 수장들의 모습은 스탈린과 어떻게 달랐던가. 만약 소련군이 독일군 최후의 방어선이었던 오데르-나이세 방어선에서 격퇴되었다거나 발목이 잡혔더라면 베를린은 과연 누구의 차지가 되었을까. 이 책은 베를린 전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가져볼만한 이러한 의문들에 대한 진지한 해답을 던져준다. 특히 전투의 묘사는 그의 뛰어난 필력 덕분에 마치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영화 <다운폴>에 나온 것처럼 파국을 앞둔 히틀러와 나치 수장들의 광기어린 모습은 섬뜩함마저 느낀다.
영화 <다운폴>에서 진정한 광기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히틀러. 자신이 저지른 짓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한 채 무너졌다.
흔히 히틀러가 용서받을 수 없는 이유가 파괴적인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점령지에서 인종청소와 대량학살, 강제수용소, 인권 유린 등을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지만 유럽인들의 이중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미국과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식민 대국들의 지도자들 역시 히틀러가 했던 그대로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저질렀으니 말이다. 유럽인들이 히틀러를 그토록 비난하는 진짜 이유는 히틀러의 잔인함 때문이 아니라 ‘야만스러운’ 유색인종들에게나 적용해야 할 방식을 문명화된 백인들에게 써먹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히틀러가 그저 역사의 운 없는 패배자라고 할 수 있는가. 그의 진면모는 패전 직전에 드러났다. 히틀러는 자포자기한 나머지 패전의 책임이 자신의 무능함 때문이 아니라 독일 국민이 열등하기 때문이며 독일이라는 나라 자체가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결론 내리고 아예 모든 것을 철저히 파괴하라는 '네로 명령'을 내렸다. 심지어 미쳐버린 괴멜스가 자신의 아이들마저 동반 자살하겠다고 말했을 때 히틀러는 말리기는 커녕 그의 비뚤어진 충성심을 칭찬했다. 정신줄 놓은 히틀러의 모습은 나치 정권이 단순한 독재 정권이 아니라 역사에 두 번 다시 등장해서는 안 될 정신병자들의 집단이었음을 보여준다.
한편으로 저자가 영국 출신이라서인지, 얄타 회담에서 처칠은 스탈린의 야욕을 꿰뚫어보고 그를 저지하려고 노력한 반면 루스벨트의 순진함이 일을 망쳤다고 말한다. 루스벨트는 처칠보다 자신이 스탈린과 더 친하다고 여겼고 상대에게 진솔한 우정을 보여줄수록 스탈린의 협력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실제로 대일전쟁에서 소련군을 참전시켜야 한다는 그의 강박증 때문에 동유럽은 물론 우리 역시 한반도에 38선이 그이면서 얄타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스탈린과 더러운 거래를 시도한 것은 처칠도 마찬가지였다. 이 책에서는 겨우 한줄 언급될 뿐이지만 1944년 10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처칠은 스탈린에게 훗날 악명 높은 ‘퍼센트 합의’를 제안했다. 반공 친 서방 성향이 대부분이었던 동유럽 국가들을 스탈린에게 죄다 내주기 싫었던 처칠은 서로 사이좋게 나누어 먹을 속셈이었다. 그리스는 영국과 소련이 9:1, 유고는 반반, 불가리아와 헝가리는 2:8, 루마니아는 전부 소련의 몫이었다.
이들이 스탈린과 소련 체제에 대해서 그토록 무지했던 모습을 단순히 인간적인 순진함 탓으로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서방 연합군이 자신들의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베를린을 향해 내달려야 했음에도 스탈린에게 동유럽을 넘겨주어 공산주의 노예로 전락시켰다는 비판 또한 결과론적인 얘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따로 있다. 아무리 강대국이라도 약소국의 운명을 놓고 자기들끼리 밀실에서 흥정하여 결정할 권리는 없다는 점이다. 스탈린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했던 루스벨트와 처칠은 자국이 아닌 남의 나라를 흥정 대상으로 삼아 ‘평화의 십자군’이라는 전쟁의 정당성에 제 손으로 먹칠을 했다. 뮌헨 회담에서 체임벌린이 히틀러를 상대로 그토록 비난받아야 했던 실수를 고스란히 되풀이한 셈이었다. 스탈린은 두 사람보다 훨씬 고단수였다. 그로 인한 대가는 약소국만이 아니라 그들 자신도 호되게 치러야 했다.
루스벨트의 가장 큰 실수는 스탈린이 자신과는 전혀 다른 부류이며 그런 독재자의 고집을 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개인적인 친분을 쌓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단호함을 보여주는 것임을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스탈린은 ‘떼쓰기’가 통하지 않을 때에만 물러섰다. 심지어 그런 상대에게는 경외심마저 드러내기도 했다. 그가 1939년에 물렁한 서방 대신 나중에 뒤통수를 맞을 것을 각오하면서까지 히틀러와 손을 잡으려고 애를 쓴 것도 이 때문이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 전쟁을 놓고 여전히 미국과 서방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인도적인 지원을 하면서도 자칫 푸틴의 심기를 건드려 자신들에게 엉뚱한 불똥이 튀지 않을까 전전긍긍한다. 헨리 키신저, 노암 촘스키 등 미국의 저명한 재야인사들은 푸틴을 더 이상 벼랑 끝으로 몰아넣어서 안 되며 평화를 핑계로 침략자가 아닌 우크라이나에게 양보하라고 윽박지른다. 말로는 체임벌린이나 루스벨트의 유화정책을 비판하면서도 교훈으로 삼기는커녕 막상 똑같은 처지에 놓이면 지레 겁을 먹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 후대 정치인들의 어리석음이 아닐까 싶다.
그런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쪽이 푸틴이다. 따라서 물러서기는커녕 서방과 우크라이나가 얼마나 오래 버티는지 보자며 한층 광기를 부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서방 입장에서는 강자보다 약자가 좀 더 말이 통하고 자기네들이 다루기 만만하다고 여길지 몰라도 독재자들을 다루는 법은 그들이 고집부리는 것 이상으로 단호함을 보여주는 것 밖에 없음을 간과해서 안 된다. 전쟁을 끝내려면 적당한 양보가 아니라 푸틴이 아무리 용을 써도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할 때이다. 푸틴만이 아니다. 도발을 반복하는 북한을 놓고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