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인 블랙니스 - 아프리카, 아프리카인, 근대 세계의 형성, 1471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하워드 프렌치 지음, 최재인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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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세계는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었고 아프리카인이 완성했다. - 본문 중.


우리는 아프리카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5대양 6대주를 통틀어 우리 한국인들에게 아프리카만큼 인연을 가지기 어려운 대륙도 없지 않을까 싶다. 평생 살면서 어지간해서 아프리카를 여행할 기회도 없을뿐더러, 아프리카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공부하지도 않는다. 특별한 사람들만이 업무나 선교, 봉사 활동을 위해서 아프리카를 찾을 뿐이다. 우리 같은 일반인들이야 아프리카에 가고 싶어도 일단 치안과 위생부터 걱정되니까 말이다. TV에서 아프리카에 대해 나오는 것이라고는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광활한 대자연과 그 위에서 뛰어노는 야생 동물들이 등장하는 다큐멘터리, 굶주림에 허덕이는 불쌍한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해 기부하라는 국제봉사단체의 광고 정도이다. 내가 어릴 적에 본 어느 만화에서는 주인공이 아프리카에 갔다가 벌거벗은 식인종들에게 붙잡혀서 잡아먹힐 뻔했던 장면이 기억난다. 아프리카에는 식인종 따위는 없음에도 말이다. 그 시절 한국인들의 아프리카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셈이다. 우리만이 아니라 여전히 많은 사람은 아프리카인들이 수천 년 동안 문명도 나라도 없이 부족 단위의 원시적인 삶을 살았으며 유럽인들의 노예사냥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갔을 것이라고 믿는다. 아프리카의 역사는 서양의 침략과 함께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말이다. 이러한 관념은 19세기 인종 차별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던 유럽 우생학자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서울 둘리 뮤지움에 있는 포토존이라는데 1980년대에 방영했을 때 둘리 애니메이션에서 나온 바 있는 아프리카 식인종에게 잡혀서 국거리가 되기 직전의 둘리 패거리들. 애들용 만화라고는 하지만 엄연한 인종 차별이다. 뭐 얘네들은 인간이 아니라서 상관없나.


유럽인들 역사에서 때때로 동방에서 아시아인들이 밀고 들어왔지만, 그 이상으로 피 터지는 경쟁을 벌였던 쪽은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있는 아프리카였다. 우리는 람세스와 클레오파트라가 통치했던 이집트만을 기억하지만 유럽 대륙의 3배 크기인 아프리카에는 오랜 역사와 광대한 영토를 자랑했던 많은 제국과 왕국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15세기 중엽부터 17세기 초까지 150여 년 동안 존재했던 송가이 제국(Songhai Empire)은 한때 서부 아프리카 대부분을 지배하면서 올망졸망한 유럽국가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의 번영을 누렸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대항해시대에 뛰어들게 된 계기도 송가이 제국을 상대로 노예와 황금 교역을 위해서였다. 아시아로 후추를 찾아서 나선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신대륙으로 보내진 1천만 명이 넘는 흑인 노예들의 대부분은 백인들이 아프리카를 침공하여 잡아들인 것이 아니라 현지 흑인 노예상들로부터 구입했다.


어벤져스에서는 아프리카에 '와칸다 포에버'를 외치면서 천조국조차 능가하는 SF적인 국가가 있다는 설정이지만 이쪽은 만화인지라.


더욱이 대항해시대는 유럽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유럽인들이 신대륙을 개척하고 흑인 노예들을 대서양 너머로 보내고 있을 때, 북아프리카에서 위세를 떨치던 바르바리 해적들은 유럽 해안가를 침략했고 100만 명 이상의 유럽인들을 잡아다가 노예로 부렸다. 대니얼 디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에서도 영국 태생의 주인공이 항해에 나섰다가 바르바리 해적에게 붙잡혀 노예 생활을 하다가 탈출하는 내용이 나온다. 하지만 양쪽의 대우는 전혀 달랐다. 백인 노예들은 유럽인들에게 붙들려서 신대륙의 사탕수수 농장으로 끌려간 흑인 노예들마냥 지독한 강제 노동에 시달리지 않았고 훨씬 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 아프리카와 오스만 제국에서 노예 출신이 운 좋게 관대한 주인을 만나 자유민이 되고 나중에는 출세하여 고관대작이 되는 것도 드물지 않았지만 신대륙의 흑인 노예들에게는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야만적인 쪽은 문명인을 자처하던 백인이었다. 유럽인들은 다른 대륙들을 모조리 정복한 뒤인 19세기 말에야 아프리카를 손에 넣었다. 말라리아와 같은 풍토병 탓도 있지만 아프리카인들이 그만큼 강적이었다는 얘기이다. 오늘날 가난과 기근, 폭력, 정치적 혼란이라는 아프리카의 어두운 모습은 원래 그랬다기보다 유럽 식민지 시절이 남겨놓은 후유증이다.


흔히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를 가리키는 '검은 아프리카(Black Africa)'라는 표현 자체가 인종 차별적이고 편견 가득한 것이기도 하다. 단순히 피부색이 검은 사람들이 살기 때문이 아니라(다른 대륙은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르네상스 시절 중세를 싸잡아 '암흑기'라고 불렀던 것 마냥 야만적이고 암울하다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학자들 사이에서 중세가 알고보면 그렇게 암흑은 아니었다고 재평가하는 것처럼 우리 상상속의 아프리카와 진짜 아프리카가 얼마나 일치하는가는 별개의 얘기일 것이다.


인문학 전문 출판사인 책과 함께에서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주목할 만한 신작 도서가 나왔더라. <본 인 블랙니스(Born in Blackness)>는 국내에서는 보기 드물게도 대항해시대가 열리는 1471년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아프리카의 근대사를 다룬 책이다. 저자인 하워드 프렌치(Howard W. French)는 언론인 출신 저명한 미국인 작가이자 아프리카 전문가이다. 2022년에는 두 차례 비소설 분야에서 수상하기도.


스스로 자신에게는 아프리카에서 붙잡혀 온 흑인 노예의 피가 흐른다고 하는데 이렇게 봐서는 백인 같기도. 혼혈이라서 그런지.


언젠가 읽었던 주경철 교수의 <그 해 역사가 바뀌다, 21세기 북스>에서는 '인류사의 결정적인 변곡점'이라고 하여 그 첫번째 사건을 1492년, 즉 콜롬부스의 신대륙 발견을 꼽는다. 그로 인하여 대항해시대가 열리고 우리네 세상은 비로소 하나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비록 유럽인들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원주민들은 죽어나갔지만 원래 대업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이니 말이다. 이것은 서구 학자들이 만들어낸 지극히 유럽 편의적인 역사관이다. 우리가 교실에서 배우는 소위 '근대사'란 식민지 개척에 뛰어든 일부 유럽 국가들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삼아서 다른 나라들을 어떻게 침략하고 노예로 삼아서 세계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에 대한 것이다. 그 나머지 세계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따위는 한낱 곁가지이거나 관심 밖이다. 하지만 그 시절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나 발견이 죄다 유럽에서만 벌어졌던가. 애초에 중요하고 말고를 누가 어떤 기준으로 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책은 유럽이 전부라는 식의 그런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내용이다.

우리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대항해시대가 처음 열리게 된 것은 유럽이 아시아와 관계 맺기를 열망했기 때문이라고 배웠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유럽이 수 세기 동안 상업적 유대를 원했던 쪽은 아시아가 아니라 전설로 오르내렸던 유명한 부자 흑인 사회, 즉 '가장 어두운' 서아프리카 중심부 어딘가에 숨어 있다고 알려진 부유한 흑인 사회들이었다. 유명한 이베리아 반도의 항해자들은 아시아로 가는 항로를 모색하면서가 아니라 서아프리카 해안을 왕래하면서 경험을 쌓았다. 이곳에서 콜럼버스는 대서양의 해풍과 조류의 기능을 충분히 익혔기에 훗날 대서양 서쪽 끝까지 항해할 수 있었다. - p.15


저자는 14세기 말리 제국을 통치했던 황제 아부 바크르 2세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바크르 2세는 콜롬부스보다 150년이나 먼저 함대를 편성하여 대서양을 넘으려고 했다는 인물이다. 단순한 도시 전설로 치부하기에는 실제로 말리 제국의 영토는 무려 프랑스의 두 배 크기였고 그 시절 유럽 어느 나라보다도 크고 부유했다. 바크르 2세의 뒤를 이어 옥좌에 앉은 만사 무사는 '아프리카의 황금왕'이라고 불리었을 정도였다. 아프리카에 황금이 많다는 것을 안 유럽인들은 대박의 꿈을 꾸면서 너도나도 바다로 뛰어들었다. 아프리카와의 무역이 확대됨과 비례하여 유럽인들은 점점 더 멀리 나아갔고 어느 순간 정신 차리고 보니 전 세계 바다를 지배하고 있었다. 저자는 아프리카의 이권을 놓고 벌어진 경쟁이 우리가 아는 근대 세계를 열었다고 말한다. 그만큼 아프리카가 부유한 세계였다는 것. 대표적인 예가 서부 아프리카의 해안가를 지배했던 말리 제국, 가나제국, 송가이 제국이었고 어마어마한 황금의 나라이기도 했다. 대항해시대의 선도자인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인들과의 황금 거래를 통해서 막대한 부를 쌓았고 그 돈이 훗날 더 먼 세계, 즉 신대륙 개척의 밑천이 되었다. 그 시절 아프리카는 꿈도 희망도 없는 검은 대륙이기는 커녕, 금빛으로 반짝반짝하는 신천지였던 셈이다.



16세기 대항해시대 초반을 무대로 하는 코에이사의 고전 게임 <대항해시대2>에서는 5명의 유럽 상인들과 그 시절 유럽의 최대 경쟁국이었던 오스만 상인 1명이 등장하는게 전부이다. 아프리카는 은과 후추, 육두구를 찾아서 머나먼 아시아로 항해하는 도중에 물과 식량을 보급하기 위해 잠시 들리는 중간 기착지이거나 신기한 발견물을 찾는 곳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황금 교역은 짭짤하지만.


황금 무역과 더불어 아프리카 근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노예 무역이다. 노예제 자체는 아프리카의 전유물이기는 커녕,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고 옆동네 일본만 하더라도 전국시대에 최대 수출품이 인간이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이다. 그 시절 인간을 팔아서 총을 구매한 것은 아프리카만이 아니었다. 우리 역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수십만명이 노예로 끌려간 아픈 역사가 있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면 아프리카 노예들은 인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는 점이다. 신대륙 개척지에서 원주민들을 병균과 가혹한 강제 노동으로 몰살시킨 유럽인들은 그 빈자리를 아프리카 노예들로 메꾸어 놓았다. 유럽인들이 원주민들의 저항을 분쇄하면서 광대한 신대륙을 개척하고 거대한 플랜테이션을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무한정 수입하여 끝없이 갈아넣은 덕분이었다. 신대륙은 사실상 '제2의 아프리카'가 되었다.


만약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에서 대량의 노예를 구할 수 없었다면 신대륙 개척 또한 결코 오래 갈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노동력이 부족한 백인들만으로 도전하기에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물론 산업혁명도 없었을 것이고 오늘날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도 없었을 것이다. 비록 노예로 끌려간 흑인들에게는 비극이라고 해도 말이다. 이 책에서는 저자가 직접 신대륙과 아프리카의 유적지를 좇아가면서 대항해 시대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에서 어떻게 노예를 획득했으며, 어째서 아프리카는 유럽의 신대륙 개척을 위한 노예 공급처가 되었던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두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에스파냐 왕 카를로스 2세는 에스파냐령 아메리카 식민지에서의 노동 현황에 대한 보고서를 의뢰했다. 그리고 이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제시했다. 노예 무역이 없다면 "거의 흑인 노예가 경작하고 있는 토지 재산을 상실하는 격이며 아메리카는 완전히 파산하게 될 것이다." - p.318

세계적으로 인정하는 교환 수단은 원래 금이었다. 그런데 17세기 중엽부터 아프리카 사회들이 외부와의 교역에서 지불 수단으로 노예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노예는 신세계에서 귀중품 생산의 기초로 자신들의 가치를 이미 증명했다. 그 대가로 황금해안의 사회들이 얻은 것은 오래가지 않고 금방 가치가 사라지는 물품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내놓은 상품은 거의 보편적인 가치의 저장소인 금이나 노예처럼 상당한 생산 잠재력을 가진 인간이었다. 이런 교환의 본질적 성격으로 인해 교역조건은 꾸준히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프리카 대륙에 불리한 방향으로 기울어갔다. - p.325

해안 지대에 살던 아프리카인들은 유럽인이 가장 탐내는 것이 흑인의 육체라는 사실을 점차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해안을 따라 작은 나라들로 갈라져 있던 사회 지도자들 대부분은 포로를 판매하는 것에 도덕적 가책를 거의 느끼지 못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프리카로 되돌아오는 아프리카인이 거의 없었고 아프리카인을 신세계로 데려간 목적에 대해 거의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했으며 단합된 혹은 하나의 아프리카인이라는 의식과 정체성이 없던 시대였음을 고려해야 한다. 오늘날 아프리카인과 아프리카인 디아스포라의 구성들이 널리 선전하며 공유하는 정체성 따위는 없었다. - p.335


1415년 지브롤타 너머 모로코 북쪽의 세우타를 포르투갈이 처음 정복하여 아프리카 진출의 발판으로 삼고 15세기 말에는 스페인이 서 서하라의 카나리아 제도를 손에 넣은 이후,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서 꾸준히 남쪽으로 향해했다. 1488년에는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희망봉을 발견했고 9년 뒤에는 바스코 다가마가 희망봉을 넘어서 인도로 향하는 동방 항로를 개척했으며 1521년에는 마젤란이 지구를 거의 한바퀴 도는데 성공한다. 유럽인들은 인도, 중국과 무역했고 신대륙을 정복했으며 동남아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정작 유럽에서 가장 가까운 아프리카에 대해서는 정복은 커녕, 거의 발을 들이지 못했다. 아프리카 노예는 유럽인들에게 붙잡힌 포로도 있었지만, 대개는 그만한 대가를 주고 현지에서 구입한 것이었다. 콜롬버스가 히스파니올라 섬을 처음 발견한 지 불과 한 세대 만에 광대한 잉카, 아즈텍 제국을 무너뜨린 것과는 대조적이다.


아프리카가 신대륙의 운명과 달랐던 이유는 물론 <총 균 쇠>에 나오는 것처럼 이곳에서는 병균이 유럽인들의 편이 아니었던 탓도 있지만 그보다도 아프리카인들이 유럽인들 못지 않게 용맹하면서 근대 전쟁에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인도에서 세포이들의 반란을 무력 진압하고 아편전쟁에서는 청의 보잘 것 없는 함대를 격파하여 서구 문명의 위세를 떨쳤던 영국조차 아프리카인들을 상대로 패배를 거듭했을 정도였다. 1879년 1800여명의 영국군이 2만명의 줄루족에게 포위되어 괴멸한 이산들와나 전투는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이상으로 고전을 면치 못한 쪽은 지금의 가나에 있었던 정복 국가 아샨티 제국과의 싸움이었다. 1823년 제1차 영국-아샨티 전쟁에서 영국군은 대패하여 찰스 매카시 장군이 전사했으며 그의 해골은 술잔이 되었다. 영국은 1901년에야 아샨티 제국을 멸망시켰다. 1885년에는 수단 마흐디 군대에게 대패했고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여 명성을 떨쳤던 찰스 고든 장군이 전사하기도 했다. 아프리카는 근대 내내 유럽과 동등한 지위를 누렸다. 유럽 국가들은 아프리카 국가와 동맹을 맺었고 유럽 군인들은 아프리카에서 용병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아프리카가 유럽인들에게 완전히 정복된 것은 20세기 초에 와서였다. 더욱이 에티오피아는 1896년에 이탈리아를 상대로 아두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서 끝까지 누구도 정복하지 못한 나라로 남았다.

19세기까지 어떤 규모의 아프리카 국가도 유럽인들에게 정복된 적은 없다. 유럽인과의 접촉이 단단하고 지속적으로 이어져 노예 무역으로까지 치닫게 되었지만, 어떤 정치 체제도 복속되지 않았다. 캉이 콩고 왕국을 처음 발견한 이후 150여년 동안 콩고는 포루트갈과 전반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 p.379

콩고 군대는 다시 결집하여 이듬해 1월 음반다카시 마을 부근에서 포르투갈-임방갈라 군대와 맞붙어 완승을 거두었다. 콩고 왕 페드로 1세는 특출난 외교적 능력을 발휘하여 승리를 굳혀 나갔다. 그는 에스파냐 왕과 교황에게 보낸 편지에서 포르투갈의 공격과 임방갈라의 찬혹행위들을 비난했고 노예로 브라질에 보내진 콩고 귀족 등을 되돌려 달라고 요구했다. 2년 뒤 그의 항위가 결실을 맺어 1천여명이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귀국했다. - p.398


불과 두 세기 전만 해도 유럽인들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었던 아프리카가 어째서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빈곤하고 낙후한 세계로 전락했는가. 이것은 무엇보다 가장 핵심적인 질문일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동남아시아와 비교해도 아프리카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어느 연구에 따르면, 프랑스 식민 치하의 베트남에서도 인구의 10% 가까이 문자 교육을 받았다. 이는 동 시대 아프리카 어떤 식민 체계가 이룬 교육적 성과보다도 열 배는 큰 규모이다. 남아프리카 이외의 지역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기반 시설에 대한 투자가 비로소 시작되었다. 정말 얼마 안 되는 철도도 대부분 작은 궤도로 지어졌고 그마저도 광물을 광산에서 항구로 이송하는데 집중되었다. 아프리카의 많은 지역이 독립 이후 발전하는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불안하고 경제적으로 발전하지 못했던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 p.415


유럽인들이 아프리카를 지배한 시간은 아시아나 신대륙에 비하여 훨씬 짧다. 인도만 해도 19세기 초부터 이미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1877년에는 영국의 직할령이 되었다. 여기에 비하면 북아프리카와 남아프리카를 제외하고 아프리카 대륙이 본격적으로 식민지로 전락한 것은 19세기 말부터였다. 그리고 1950년부터 시작하여 1960년대에 오면 대부분의 나라들이 독립을 쟁취했다. 길어야 70여년 남짓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은 아프리카의 역사를 왜곡시키기에 충분했다. 아예 원주민이 절멸당하고 백인들과 흑인 노예로 메운 신대륙과 달리 아프리카에서는 여전히 흑인들이 주류 집단으로 남았지만 유럽 국가들은 기존 왕국들의 경계를 무시한 채 제멋대로 국경을 그어서 흑인들끼리 서로 피터지게 싸우도록 만들었다. 이런 모습은 그럭저럭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한 채 독립했던 아시아 국가들이 겪지 않은 일이다. 아프리카는 유럽인들에게 오직 수탈의 대상이었고 교육이나 인프라 건설에 아무런 투자도 하지 않았다. 식민 지배만이 아니라 수백년 동안 지속된 노예 무역 또한 막대한 인구 유출로 이어지면서 아프리카의 발전을 가로막았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한마디로 아프리카의 불운은 하필이면 유럽 옆에 있었다는 것.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프리카를 놓고 첨예하게 벌어진 미-소 냉전의 대결 또한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미국과 소련은 아프리카에서 쿠데타를 조장하고 독재자들을 후원했으며 무기를 팔아먹었다. 1960년대만 해도 건실하게 성장하던 에티오피아에서 공산 혁명이 일어나 막장으로 만든 것도 냉전의 불똥이 튀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게다가 독립과 함께 시작된 폭발적인 인구 증가는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새로운 가능성보다는 또 다른 재앙이 되었다.

수백만 명의 사람을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빼앗아간 대서양 노예 무역 때문에, 인류 사회가 처음으로 지구화되던 바로 그 시기에 아프리카는 세계 다른 지역들과의 경쟁에서 크게 뒤쳐진 상태로 남게 되었다. 이 시대 어디에서든, 급속한 인구 증가는 도시화를 촉진했고 도시화는 모든 종류의 근대화 과정을 차례로 이끌어냈다. 인구 증가는 시장의 엄청난 확대와 무역이 성장할 잠재력을 의미했다. 그러나 노예제로 아프리카에서 이 모든 것이 빠져나가게 되면서 외부 경쟁자와 공격자, 특히 유럽인 앞에서 더 취약해졌다. 유럽은 아프리카 노동력을 활용하여 더 큰 부자가 되었다. 사실상 아프리카 인구는 식민화 초기인 20세기 초반까지도 지속적으로 감소했을 것이다. - p.418


유럽인들이 대항해시대를 연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다. 어느 세계도 그렇게 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중국인들은 명나라 시절 정화 또한 아프리카에 당도했으며 그가 지휘했던 대함대에 비하면 콜롬부스의 함대 따위는 보잘 것 없다면서 자화자찬하지만 일회성 이벤트로 끝났을 뿐이다.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를 연결하는 항로를 개척하여 세상을 하나로 만든 쪽은 유럽인이지 아프리카인도, 아시아인도 아니었다. 유럽을 제외한 대다수 국가들은 자국 연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먼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더 큰 배와 숙련된 선원이 필요했고 막대한 돈이 들 뿐더러 위험이 너무 컸다. 한마디로 남는 장사가 아니라는 얘기이다. 바꾸어 말해서 유럽인들이 원양으로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이유나 그들이 남들보다 호기심이 더 많아서가 아니라 돈벌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했던 것이 아프리카 덕분이었다는게 이 책의 결론이다. 그로 인한 수혜는 모두 유럽인의 몫이었고 아프리카인들에게는 재앙에 지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우리에게 아프리카는 달나라만큼이나 멀고도 먼 세상이다. 시중에는 중국 관련 책은 하늘의 별만큼 많지만 그 밖의 나라들, 특히 아프리카에 대한 책은 여행 에세이 정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더욱이 한국전쟁의 폐허에서 일어나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다는 자부심에 가득한 우리는 그렇지 못한 나라들을 가리켜 "너희는 왜 우리처럼 하지 못하느냐"라면서 실패자나 낙오자로 낙인찍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사정 따위는 알 바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성공은 세계적으로도 이례적인 것이며 상당부분 운이 따랐다는 점도 간과해서 안 된다. 소위 가진 자들이 취업난과 열정페이, 생계난에 허덕이는 청년들을 가리켜 "너희 노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소리이다. 어느 사회이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빈부 격차는 단순히 개인의 노력보다도 차별과 기회의 불평등이라는 구조적 모순이 더 크기 때문이다. 국가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아프리카나 아이티와 같은 중남미의 흑인 국가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은 근본적으로 유럽의 식민지가 남겨놓은 유산이다. 아프리카인들은 서구식 민주주의를 배울 기회도 없었고 유럽인들은 서로 적대적인 민족들을 한 자리에 모아두고 서로 싸움을 부추겼다. 유럽의 식민 지배는 아프리카인들에게 근대화의 선물은 커녕, 아프리카인들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 자체를 박탈했다. 물론 어떤 이유로건 결국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아프리카인들의 몫이지만 말이다. 세계의 중심은 서양이라는 캐캐묵은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여러모로 아프리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드는 책이다. 세상을 보는 눈을 한 단계 넓혀 주리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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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모른다 - 이분법을 넘어 한 권으로 이해하는 우크라이나 전쟁
메데아 벤자민.니컬러스 J.S. 데이비스 지음, 이준태 옮김 / 오월의봄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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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뭐가 균형잡힌 시각이라는 것인지. 젤렌스키가 피해자가 아니면 푸틴이 피해자라는 건가. 나토가 동유럽 국가들을 침략했던가. 지금 침략하는 쪽은 나토인가, 푸틴인가. 민스크 협정이 파토난 것에 푸틴의 책임은 없는가. 푸틴이 악당으로 낙인찍힌게 서방의 음모 탓인가. 질문을 던지고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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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포성
바바라 터크먼 지음, 이원근 옮김 / 평민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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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미쳤다! 이런 짓을 하는 걸 보면 미친 게 틀림없다. 이 학살극을 보라! 이 공포와 주검의 광경을! 내가 받은 인상을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지옥도 이 정도로 끔찍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은 모두 미쳤다!” ☞ 베르뎅 전투 당시 프랑스군 제5사단 소속 21살의 젊은 중위였던 알프레드 주베르(Alfred Joubaire)의 일기 중에서. 그는 이 일기를 남긴 지 며칠 뒤 전사했다.

2022년 개봉 영화 <서부전선 이상없다(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에서는 한 어린 독일 병사의 눈으로 본 제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사실적이면서 신랄하게 묘사한다. 입대할 때만 해도 교사들과 동창들의 열렬한 격려를 받으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전장터로 향했던 주인공은 막상 최전선에 도착하자 환상은 대번에 깨진다. 그는 배치 첫날에 참호에서 죽을 뻔했고 프랑스군의 격렬한 포격으로 친구를 잃는 등 참혹한 신고식을 치르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독일은 패전을 눈앞에 두었고 한쪽에서는 휴전 협상이 진행되는 와중에 다른 한쪽에서는 연합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 했다. 결국 협상이 타결되면서 주인공은 집에 갈 기회를 얻었지만 이에 반발하는 장군이 최후의 공격을 명령한다. 이미 무의미한 싸움이었지만 주인공과 전우들은 어쩔 수 없이 공격에 나섰고 휴전을 몇 분 남기고 주인공은 프랑스 병사의 총검에 찔러서 전사한다. 하지만 그것은 제1차 세계대전 내내 무수히 죽어나가야 했던 수백만명의 개죽음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정작 아집에 눈이 멀어서 어린 병사들을 사지에 몰아넣은 늙은 장군은 끝까지 살아남음으로서 현실의 부조리함을 고발한다.

영화 <서부전선 이상없다> 마지막에서 최후의 돌격을 앞두고 주인공의 무표정한 얼굴은 영화 초반의 생기 넘치는 모습과 대조적이다. 늙은 정치인과 장군들의 아집과 독선이 만들어낸 무의미한 전쟁이 한 젊은이의 인생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보여주는 셈이다.

1918년 11월 11일 유럽에서 포성이 멈추었을 때 승자는 없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오스만 제국, 러시아는 전쟁의 고통에 참다 못한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아예 정권이 붕괴되었고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역시 말이 승전국일 뿐 만신창이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처럼 나치의 압제에서 벗어난 것을 기뻐하는 환희의 물결도, 해방군을 환영하는 인파도, 폐허가 된 적의 수도에 승리의 깃발을 꽂는 장면도 없었다. 승자와 패자의 차이는 그저 어느 쪽이 먼저 나가떨어졌는가일 뿐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말 그대로 한 세대를 파멸시켰다. 가장 큰 피해자는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가장 인생이 창창했던 젊은이들이었다. 20여년 뒤 히틀러가 새로운 전쟁을 위협했을 때 영국과 프랑스의 정치인들이 1914년처럼 강경하게 맞서는 대신 지레 꼬리부터 내렸던 것도 그만큼 제1차 세계대전의 트라우마가 악몽마냥 뼛속까지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해문집에서 나온 제1차 세계대전 그래픽노블인 <그것은 참호전이었다>의 한 장면. 유럽인들이 기억하는 제1차 세계대전의 이미지란 하나같이 인간도살장과 다를 바 없는 무자비한 학살과 지옥의 참호전이다. 이런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 아닐까 싶다.

전쟁이 끝나는 순간, 도대체 이 지독한 싸움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을까. 제1차 세계대전이 제2차 세계대전이나 태평양전쟁과 다른 점은 누구도 처음부터 원했거나 미리 계획한 전쟁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실로 어이없을 만큼 그야말로 어쩌다가 시작된 전쟁이었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세르비아 극우주의자의 테러에 의해 암살당했을 때만 해도 이로 인해 세계 대전으로 확대되어 장장 4년 동안 지속되리라 예상했던 사람은 어느 누구도 없었다.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어느 쪽도 유럽 정치의 중심에 있지도 않았을 뿐더러, 몹시 신경질적이고 제멋대로인 것으로 유명했던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대중의 동정심을 얻을 만큼 인기 있는 인물도 아니었다. 이 사건은 25년 뒤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을 위해 조작된 글라이비츠 사건처럼 자작극도 아니었고, 진주만 기습이나 911테러처럼 "그 일을 기억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온 국민의 공분을 자아낼 일도 아니었다. 정작 한달 뒤 유럽 대륙에서 제일 먼저 총성이 울린 쪽은 사건과 전혀 상관없는 수백km 떨어진 벨기에-독일 국경이었다.

문제는 유럽 특유의 복잡한 외교 관계와 보불전쟁 이래 프랑스와 독일 간의 증오심, 무엇보다도 지도자부터부터 일반 국민에 이르기까지 마치 몽유병자마냥 전쟁에 취하여 전쟁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 어느 한 사람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산업혁명과 기술의 발전으로 전쟁 무기가 나폴레옹 전쟁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파괴적으로 바뀌었음에도 무책임한 정치인들은 그저 여기서 물러나면 자신들의 위신이 떨어진다는 이유만으로 전쟁을 선동했다. 이들은 한 세기 전 워털루 전투처럼 한바탕 크게 붙고는 길어야 서너달이면 끝날 것으로 태평하게 여겼다. 바로 반 세기 전 대서양 저편에서 벌어졌던 미국 남북전쟁이 4년 동안 이어졌고 100만명 가까이 죽었으며 수백만명이 불구가 되었다는 사실은 유럽인들에게 아무런 교훈이 되지 못했다.

마치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참호전을 연상시키는 광경이지만 남북전쟁 말기인 1864년 6월부터 1865년 3월까지 벌어진 피터스버그 포위전(Siege of Petersburg). 남북전쟁하면 영화 <게티즈버그>나 <영광의 깃발>에 나오는 것처럼 나폴레옹 시절의 구태의연한 라인배틀을 떠올리게 되지만 실제로는 남북전쟁 후반부에 오면 참호전이 중심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예행연습인 셈이었다.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위협하자 세르비아의 큰 형님 노릇을 하던 러시아가 끼어들었고 독일이 동맹국인 오스트리아의 편을 들었으며 독일의 라이벌인 프랑스가 들고 일어났다. 독일이 프랑스 침공의 길을 빌린다는 명목으로 벨기에로 진격하자 벨기에의 보호자인 영국 또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여기에 영국 해군대신이었던 처칠이 영국에서 건조 중이던 오스만 제국의 전함을 멋대로 몰수하면서 분노한 오스만 제국이 독일 편에 섰다. 항상 으르렁대던 발칸 제국들 역시 편을 나누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다. 작은 불씨는 한달 사이 것잡을 수 없이 유럽 대륙 전체로 들불마냥 번져나갔다. 제1차 세계대전의 비극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평민사 출판사에서 모처럼 제1차 세계대전을 다룬 책이 나왔다. 저자는 바바라 터크먼 여사. 국내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국에서는 시오노 나나미급으로 유명한 여류 역사가이다.(참고로 이미 죽었다.) 그것도 여자들이 대개는 어려워 하거나 따분하게 여기는 전쟁사 쪽으로 말이다. "여자가 뭔 전쟁이야?"라면서 가부장적인 분위기에서 젠더간의 역할과 경계가 분명한 우리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 엄밀히 말하면 권위를 갖춘 역사 연구가라기보다 작가에 가깝지만 말이다. 그녀는 스페인 내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특파원으로 종군하면서 여러 권의 역사서를 썼고 퓰리처상을 두번이나 수상했다. 그 중 하나가 1962년에 쓴 <8월의 포성(The Guns of August)>이다. 국내에서는 2008년에 이미 나왔더라. 그렇다고 완역판이나 개정판이 아니라 같은 출판사, 같은 역자에 표지까지 똑같은 것을 보면 한번 절판되었던 것을 재출간한 모양. 제1차 세계대전이 국내에서 그다지 인기 없는 주제라는 것을 생각하면 신기할 따름. 독자들의 아우성이 있었나.

1971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의 외아들이자 군사 역사가인 존 아이젠하워(오른쪽)와 <제3제국의 흥망>의 저자 윌리엄 샤이러 영감님(왼쪽)과 대화 중인 바바라 터크먼 여사(가운데). 뭔 얘기를 하는거지?

크리스토퍼 클라크의 <몽유병자, 책과함께>가 1912년 발칸 전쟁을 시작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까지 복잡했던 유럽 정치의 상황을 파헤쳐서 전쟁의 기원을 찾고, A. J. P. 테일러의 <기차 시간표 전쟁, 페이퍼 로드>가 유럽의 군주들이 꽉 짜여진 철도 운행의 스케줄 때문에 원하건 원치 않건 전쟁에 끌려들어 가야 했음을 보여주었다면, 터크먼 여사의 <8월의 포성>은 원래 단기전으로 끝났을 싸움이 어째서 4년에 걸쳐서 그토록 지독한 학살극으로 이어지게 되었는지 전쟁의 첫 한달 동안 치열했던 현장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1910년 5월 아침,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의 장례식에 참석한 아홉명의 국왕들로 구성된 기마행렬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 p.464

본문은 1910년 5월 6일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장남이자 조지 5세의 아버지인 에드워드 7세의 장례식에서 시작한다. 그는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라는 영국 왕실의 오랜 원칙을 준수하면서도 외교에 매우 능숙하여 영국을 고립된 섬나라에서 유럽 외교 무대의 중심에 놓은 인물이기도 했다. 특히 어린 시절 나폴레옹 3세에게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나폴레옹 3세의 몰락 이후 아프리카 식민지를 놓고 한때 무력 충돌까지 갈 뻔했던 프랑스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1904년에는 영불 조약의 체결을 주도했다. 만약 그가 아니었으면 두번의 세계대전에서 영국이 프랑스의 편에 서서 독일과 싸우는 모습은 없었을지도. 그러나 에드워드 7세는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와도 그런대로 관계를 유지하는 등 유럽의 평화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도 영국 육군 원수의 복장을 입고 참석하여 애도를 표했을 정도. 불과 4년 뒤에 서로 원수지간이 되어서 총부리를 겨누게 되리라고는 그 자리에 있던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듯.

에드워드 7세 장례식에 참석한 독일 카이저 빌헬름 2세(왼쪽 앞쪽) 빌헬름 2세의 외할머니가 빅토리아 여왕이었으니 에드워드 7세와는 외삼촌과 외조카의 관계인셈. 책봉 외에 거의 왕래가 없던 동아시아와는 달리, 유럽에서는 군주들끼리 결혼하다보니 서로 친척지간에 특유의 유전병까지. 그래봐야 수 틀리면 남보다 못할 만큼 으르렁대었지만. "원래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법이라고."

보불전쟁 이후 프랑스에서는 '벨 에포크(Belle Époque, 좋았던 시절)'라는 말이 유행할 만큼 약 40여년 동안 유럽은 평화를 누렸다. 대신에 그 힘을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돌렸지만 말이다. 하지만 에드워드 7세가 죽은 뒤 더 이상 유럽에서 평화의 중재자 노릇을 할 사람은 없었다. 프랑스와 러시아가 이국 협상을,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이국 동맹을 맺고 서로를 견제하면서 전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점점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터지면서 상황은 것잡을 수 없이 전쟁을 향해 내달리고 수차례 전쟁을 피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결국 독일이 러시아의 동원령을 핑계로 8월 1일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다. 8월 4일에는 독일군이 슐리펜 계획에 따라 벨기에를 전면 침공했고 프랑스와 영국 또한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전쟁의 불길은 순식간에 유럽 전역으로 확대된다. 이 책은 사라예보 사건을 시작으로 촉발된 7월 위기와 전면전으로 이어지기까지의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4국의 상황, 그리고 8월 한달 동안 치열하게 벌어지는 전투를 600여 페이지에 걸쳐서 다룬다. 독일군의 벨기에 침공, 제17계획에 따른 프랑스군의 공세와 패배, 국경전투, 탄넨베르크 전투, 마른 전투까지 타크먼 여사는 특유의 뛰어난 필력으로 마치 한편의 다큐멘타리나 대하 드라마처럼 꼼꼼하고 생생하게 묘사한다. 특히, 탄넨베르크 전투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엉뚱하게 알려진 렌넨캄프와 삼소노프의 주먹 대결이 독일군 작전참모였던 막스 호프만의 근거없는 낭설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어쨌든 두 사람이 제대로 협조하지 못하여 삼소노프가 전멸한 것은 사실. 그 이유는 두 사람의 불화가 아니라 러시아 북서전선군 총사령관 질린스키의 무능함 때문.

호프만은 자신이 독일군 참관단원이었던 러일전쟁에서 시작된 렌넨캄프와 삼소노프 간의 개인적인 불화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중략) 삼소노프는 묵덴 정거장의 플랫폼에서 싸움을 벌여 렌넨캄프를 때려 눕혔다고 말했다. 그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듯이 렌넨캄프는 분명히 삼소노프를 돕기 위해 서두르지 않았을 것이다. 호프만이 자신의 얘기를 정말로 믿었던 것인지 그저 믿는 척 한 것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그는 항상 일화, 소문 따위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었다. - p.464

놀랍게도 호프만은 OHL의 작전과장인 타펜 대령으로부터 3개 군단과 1개 기병 사단 규모의 지원 병력을 보내주겠다는 제안을 들었다. 서부전선으로부터 새로운 병력이라니! 슐리펜의 계획은 마지막 한명까지도 우익을 강화하는데 쓰도록 되어 있었다. 아연실색한 루덴도르프는 타펜에게 동부전선에서 병력 증강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며 이미 시작된 전투에 맞추어 오기는 너무 늦은 것 같다고 말했다. 타펜은 그들을 아껴두었다가 나중에 써도 좋다고 말했다. 타펜이 지원병력을 보내겠다고 언급하게 된 이유는 프랑스 국경에서 거둔 '위대한 승리'였다. OHL 내부에서는 이미 서부전선에서 벌어진 결정적인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믿음이 자리잡았다. - p.466

독일군이 퇴각 중이라고 '추정한' 질린스키는 그들이 삼소노프를 위협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으며 원래의 계획대로 삼소노프의 우익과 서둘러 접선하도록 렌넨캄프를 독려하지도 않았다. 두 개의 러시아군은 서로 연결되지 않았고 서로를 향해 움직이지도 않았으므로 '합동'이라는 단어를 적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았다. - P.472

루덴도르프의 승리에는 여러 사람이 기여했는데, 비록 그 이유는 틀렸지만 시종일관 정확하게 렌넨캄프가 추격하지 않을 것을 확신하고 제8군을 이동시켜 삼소노프와 맞서기 위한 계획을 준비한 호프만, (중략), 그 무엇보다도 기여한 것은 독일군의 계획 입안 과정에서 한번도 고려된 적이 없는 러시아군의 무전이었다. 호프만도 감청이야말로 탄넨베르크 승리의 진정한 요인임을 인정했다. - P.487

뒤이어 벌어진 마수리안 호수 전투에서 렌넨캄프 장군은 동프로시아에서 쫓겨났다. "겁을 집어먹고 군대를 버린 채 차를 타고 국경을 넘어 달아남으로서" 자신의 명성에 완전히 종지부를 찍었으며, 그 자신과 함께 질린스키까지 불명예스럽게 해임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대공에게 보내는 전문에서 질린스키는 렌넨캄프가 공포에 질려 황급히 도망쳤다고 비난했다. 대공은 진노했다. 그는 근본적인 잘못이 질린스키가 저질렀다고 생각했다. - p.488

<중국은 어떻게 실패하는가>라는 책에서 세계대전은 흔히 생각하듯 패권국가가 도전국가를 견제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팽창의 한계에 직면한 도전국가가 경쟁에서 밀려나지 않으려고 전쟁을 일으키기 때문이라고 주장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제1차 세계대전도 그래서 일어났다는 것. 전적으로 일리 없는 얘기는 아니지만 전쟁의 원인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히틀러의 야욕이 불러온 제2차 세계대전은 그렇다쳐도, 제1차 세계대전은 죄다 독일 탓이라기에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 역시 독일만큼이나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전쟁의 발발은 몰라도 전쟁이 장기화된 것은 독일이 자초했다는 점이다. 전쟁 초반 이른바 '벨기에의 강간(Rape of Belgium)'이라고 불리는 독일군의 만행은 유럽 사회의 공분을 불러오고 문명국으로서의 위신을 땅에 떨어뜨렸다. 학살과 범죄는 결코 나치만의 전매 특허가 아니었다. 게다가 국경 전투와 탄넨베르크 전투 등 8월의 승리는 독일을 완전히 기고만장하게 만들었다. 독일이 내건 화평 조건은 보불전쟁과 비할 바가 아니었고 연합국들을 격분시키면서 대화의 통로를 스스로 막아버렸다. 이들이 자신들이 패전하자 베르사유 조약이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떠들었지만 그야말로 뻔뻔한 소리였다.

8월 말이 되자 연합국 국민들은 자신들의 궤멸시켜야만 하는 적, 붕괴시켜야만 하는 정권, 끝장을 봐야만 하는 전쟁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9월 4일 영국,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 정부는 "현재 진행 중인 전쟁 중에는 단독 강화를 맺지 않겠다."라고 약속하는 런던조약에 서명했다. - p.509

독일은 벨기에 전체 국토와 덩커크로부터 볼로뉴와 칼레를 포함하는 프랑스 해안 지역에 대해 지배권을 가질 예정이었다. 또한 아프리카에 있는 프랑스와 벨기에의 식민지도 차지할 계획이었다. 보상에 관해 패전국들은 직접 전비로 최소한 100억 마르크를 지불하고 그 이외에 참전 군인 기금, 공공 주택 및 장군들과 정치인들에 대한 선물에 필요한 비용을 내야 하며, 독일의 모든 국가 채무를 면제함으로서 독일 국민들은 향후 수년 동안 세금을 안내도 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 해 8월 승리에 도취된 상태에서 독일이 설정한 전쟁 목표는 너무나 거창하여 실현 가능한 타협안으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 p.510

카이저에게는 불행히도 독일군의 진격은 9월 12일 파리를 코앞에 두고 마른 전투에서 좌절되었다. 파멸 직전의 프랑스군이 '마른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독일군이 많은 실수를 저지르면서 다 이긴 싸움에 스스로 재를 뿌린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프랑스 지도부가 1870년이나 1940년과 달리 혼신을 불태울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총리이자 전시 내각을 지휘하여 연합국을 승리로 이끌게 되는 조르주 클래망소는 우유부단하기 짝이 없는 폴 레노와 달리 '호랑이'라고 불릴 만큼 단호한 인물이었고 파리 방위를 맡은 조제프 갈리에니는 프랑스 최고의 장군 중 한 사람이었다. 제9군의 지휘를 맡아 독일군을 저지하는데 큰 역할을 한 포슈 장군은 프랑스군의 꺾이지 않는 전의를 보여주었고 나중에 연합군 총사령관이 된다. 무엇보다도 이 순간 '20세기의 잔다르크'는 조프르 원수였다. 그는 개전 초반 로렌과 아르덴에서 무리한 공세로 한때 프랑스군을 궁지로 내몰기도 했지만 자신의 실수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전열을 정비한 뒤 반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만약 조프르가 가믈랭같은 멍청이 똥별이었다면 제1차 세계대전은 한달 만에 끝났을 것이다.

"프랑스 역사를 통틀어 가장 비극적"이었을 이 시기에 조프르는 존 프렌치 경처럼 겁에 질리거나 몰트케처럼 주저하거나 헤이그 또는 루덴도르프처럼 일시적으로 무기력해지거나 프리트비치처럼 비관론에 굴복하지 않았다. 만일 그의 이러한 침착함이 상상력의 부족에서 기인했다면, 이는 프랑스에게 큰 행운이었다. 평범한 사람은 위기감과 책임감을 느끼게 되면 의기소침해지는 법인데, 오히려 "판단력을 강화시켰다면 틀림없이 범상치 않은 위대한 정신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클라우제비치는 기술했다. - p.596

약간 가독성이 떨어지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전반적인 번역은 그런대로 무난한 듯. 하지만 중간중간 군사 용어의 번역에서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는 점이 흠이랄까. 무슨 이유인지 '중포(heavy artillery)'를 '대형대포'라고 번역한 것이나, 특히 프랑스군의 주력 야포였던 75mm 야전포(French 75mm field gun)를 그냥 '75'라고 적어 놓았다. 역자가 원문의 'French 75'를 직역한 모양인데 전쟁사에 대해 잘 모르는 독자들 입장에서는 뜬금없이 숫자만 적어 놓았으니 문맥상 이게 뭔 소리인지 알 수 없어 헤깔릴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이 야포는 현대 야포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큼 포병사에서는 한 획을 그은 물건이기도 하다. M3 리 전차나 M4 셔먼 전차 초기형의 주포 또한 원래는 이 야포를 개량한 것. 그래서 보병 잡는데에는 쓸 만 한데 정작 적 전차 잡는데 화력이 딸렸던 것도 이 때문. 터크먼 여사가 약칭인 'French 75'라고 한 것은 같은 이름의 칵테일조차 있을 만큼 그 동네에서야 워낙 유명한 대포이기 때문이지만 국내에서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역자도 그걸 알고 그렇게 쓴 것은 아닐 듯. 게다가 본문 내내 이렇게 나온다는 점이다.

프랑스 M1897 75mm 속사포. 세계 최초로 유압식 주퇴복좌기를 사용하여 반동을 줄이고 발사 속도를 높였다. 또한 기동성이 뛰어나서 보병과 함께 다니면서 신속한 화력 지원에 유용했다.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 초반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의 공세를 막아내는데 큰 역할을 했지만 이후의 참호전에서는 화력 부족을 드러내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대전차포와 대공포로 사용되기도.

전쟁 초반 독일이 영국 해군에 쫓겨서 콘스탄티노플로 망명한 몰트케급 순양전함인 괴벤(Goeben)을 '궤벤'으로 번역한 것도 이상하다. 독일어 표준발음에서 oe(Ö) 발음은 '외'라고 읽지 않음? 실수로 놓쳤다기에는 한 챕터가 통째로 그리 적혀 있으니. 심지어 p.517에는 그나이제나우(Gneisenau)를 '그나이센노'라고 적어놓기도. p.434와 p.450의 '4와 2분의 1개 군단(army of four and a half corps)'라는 표현도 어색한 느낌. 처음에는 도대체 이게 뭔 소리인가 생각했음. 그냥 '군단 네개 반'이라던가 뒤에 나오는 것처럼 '4.5개 군단'이라는 쪽이 낫지 않았을지. 사실 이런 건 역자보다도 편집자가 꼼꼼이 잡아야 할 일이기도 하다.

바바라 터크먼 여사가 이 책을 내자말자 미국 사회가 떠들썩할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다음해에는 케네디 대통령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퓰리처 상을 수상하여 그녀를 하루아침에 유명인사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여기에는 때마침 벌어진 사건 덕분이기도 했다. 바로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사건이다. 쿠바 미사일 사건은 냉전 시절을 통틀어 인류가 핵전쟁의 위기에 가장 가까이 갔던 순간이기도 하다. 소련이 쿠바의 독재자 피델 카스트로의 요청을 받아들여 쿠바에 핵미사일 배치를 강행하면서 촉발된 이 사건은 원래 흐루쇼프가 깊은 고민 없이 시작한 일이었다. 미국도 소련의 턱밑인 터키에 핵미사일을 배치하고 있는데 소련이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케네디는 소련의 중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벼랑 끝 전술로 맞섰다. 서로 소통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양측은 서로의 진정한 의중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자신들의 선입견과 편견만으로 판단해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흐루쇼프가 먼저 물러섰고 그는 인류를 구했지만 자신의 권좌를 잃어야 했다. 또한 케네디는 이 사건을 통해 의사결정 과정에서 호전적인 각료와 장군들의 말에만 귀 기울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배웠다. 그는 터크먼 여사의 <8월의 포성>을 통해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이 단순히 독일의 야심 때문이 아니라 쿠바 미사일 사건과 마찬가지였음을 깨달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필독서로 추천했다고 한다.


원래 죽음의 문턱에 가 본 사람만이 죽음이라는 말을 함부로 들먹이지 않는 것처럼 전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언제나 전쟁의 위기에 직면해 있는 우리 역시 중요한 교훈으로 삼아야 할 일이다. 대화는 어렵고 선동은 쉽다. 하지만 전쟁은 설령 이기더라도 지울 수 없는 상처와 증오만을 남길 뿐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비극이 한반도에서 재현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몽유병자>와 더불어 이 책을 읽기를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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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함락 1945 걸작 논픽션 26
앤터니 비버 지음, 이두영 옮김, 권성욱 감수 / 글항아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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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을 그 따위로 모욕한 사람은 질라스 당신 말고는 없습니다. 그들은 당신네들을 위해서 피를 흘린 것이 아닙니다. 당신네들은 피와 불과 죽음으로 수천 킬로미터를 가로질러온 병사들이 여자들과 재미를 즐기거나 약간의 사소한 행동을 한다고 해서 그 정도도 이해하지 못합니까?”

 

194412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간부 밀로반 질라스(Milovan Djilas)가 스탈린더러 소련군이 유고슬라비아를 해방하면서 수백여 건의 강간과 약탈, 학살을 저질렀다며 유고슬라비아에 들어온 영국군이 그런 짓을 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항의하자.


2022213만 명의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를 전격 침공했다. 전 세계 사람들을 진정한 충격에 빠뜨린 일은 푸틴의 침공 사실보다도 러시아군이 현지에서 보여준 모습이었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브 주변에서 러시아군 철수 후 발견된 1천여 구가 넘는 시신과 학살의 증거들, 조직적인 약탈, 집단 강간, 민간인 지구에 대한 무차별적인 푸틴 식 응징, 심지어 한 러시아 여성은 우크라이나 침공에 참전한 자신의 남편에게 성욕 해결을 위해서 우크라이나 여자를 강간해도 허락하겠다.”라는 통화 녹취가 공개되면서 우크라이나인들은 물론이고 국제적인 분노를 사기도 했다. 물론 미군 또한 아프간과 이라크에서 오폭과 인권 침해 등으로 국제적인 비난에 시달리기는 했지만 러시아군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만행은 그런 미군의 만행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약자를 상대로 전쟁이 아닌 테러를 자행하는 이들의 모습은 21세기의 문명화된 군대라기보다 아프간 탈레반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부차를 비롯한 우크라이나 점령지에서 러시아군이 퇴각한 후 발견된 학살과 약탈, 강간의 흔적, 심지어 일부 러시아 병사들은 SNS에 자신의 범행을 담은 동영상을 자랑스럽게 게재하여 전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이들의 군기 빠진 모습은 80여 년전 난징에서 일본군이 보여준 것과 다를 바 없을 정도였다. 그때까지 러시아를 자극할까 주저하던 서방이 우크라이나에 본격적인 지원을 시작한 것도 러시아의 만행으로 여론이 극도로 악화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푸틴은 기강을 바로잡기는 커녕 죄다 서방의 조작이라며 스스로 눈과 귀를 막아버렸다. 

 

우리에게 보다 충격적인 일은 푸틴을 비롯한 대다수 러시아인들은 미국과 서방에 대한 피해의식으로 가득하며 자신들의 만행에 대해 아무런 도덕적 가책조차 없다는 사실이다. 자신들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은 이기적인 정복욕 때문이 아니라 미국이 먼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을 선동하여 러시아의 밥그릇을 건드린 탓이라고 항변한다. , 나쁜 쪽은 미국이라는 식이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비롯하여 반러 친서방 우크라이나 지도자들을 가리켜 신나치라고 부르기를 서슴지 않는다. 바꾸어 말해서 이들에게 이 전쟁은 러시아를 미국의 위협에서 지키기 위한 예방 전쟁이나 성전이라는 얘기이다. 하는 행동으로 봐서는 어느 쪽이 진짜 나치에 더 가까운지는 명확하지만 말이다. 러시아인들은 서방이 러시아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투덜거리기 전에 자신들이 먼저 주변국들을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국내 진보언론이나 분별없는 일부 정치학자들은 나토를 동진시키지 않겠다고 했던 미국이 먼저 약속을 깼기 때문이라며 전쟁 책임을 호도하는 푸틴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대변한다. 그러나 한중일 이상으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뿌리 깊은 역사적 원한과 증오에 대한 몰이해이며 우리 사회가 한반도 바깥의 사정에 무지하고 무관심하다는 얘기이다. 러시아가 보기에 미국 하는 일이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두 나라끼리 알아서 해결할 문제이다. 우크라이나를 공격하면서 미국 핑계를 대는 것은 약자에게 분풀이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푸틴이 무슨 생각으로 전쟁을 시작했건 간에 러시아 병사들이 현지에서 약탈과 강간, 학살을 저지르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얘기이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 역시 미라이 사건처럼 기강 해이와 간부들의 통제에서 벗어난 일부 군인들의 일탈 행위가 없지 않았지만 대다수 미국인들은 결코 이런 행동을 당연한 양 옹호하지 않았다. 이 사건이 폭로되면서 정치인들과 군 상층부는 한동안 곤혹을 치르고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해야 했다. 덕분에 걸프전에서 미군의 모습은 베트남전쟁과는 달랐다. 하지만 푸틴이나 군 상층부는 솔직하게 만행을 인정하고 바로잡기는커녕 묵인하거나 오히려 조장하면서 국제 사회를 향해 우리에게는 핵무기가 있으니 주제넘게 끼어들지 말라며 큰소리친다. 그렇다보니 러시아 병사들이나 심지어 일반 국민조차 무관심으로 일관하거나 자기네 위세만 믿고 정복자니까 뭘 해도 된다는 식이다. 러시아가 야만적인 나라로 낙인찍힌 것은 죄다 미국과 서방 진영의 악선전 탓으로 돌린다. 지금은 칭기즈칸이나 나폴레옹 시대가 아니며 엄연히 21세기임에도 말이다. 러시아인들은 더 이상 철의 장막을 두르고 세상과 단절되어 살던 구소련이 아니라 나름대로 국제화 시대에 살면서 서방 물을 먹었지만 가치관과 사고방식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는 얘기이다.

 

푸틴과 러시아인들의 오만한 태도에는 서방에 대한 편집광적인 피해망상증 외에도 또 다른 이유가 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자신들이 막대한 피를 흘려가며 온 유럽을 나치로부터 구한 해방자라는 것이다. 유럽 사람들은 구소련의 진정한 계승자인 러시아에게 마땅히 부채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러시아인들은 독소전쟁을 가리켜 애국전쟁(Great Patriotic War)’이라고 부르면서 엄청난 자부심을 숨기지 않는다. 전후 스탈린의 영토 확장은 2천만 명이 넘는 희생자에 대한 정당한 대가로 여긴다. 푸틴이 나토의 동진에 그토록 광기를 드러내는 이유도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나머지 구소련 국가들은 물론, 동유럽 전체를 주권국이자 러시아와 동등한 파트너가 아니라 독소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쯤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시대착오적이고 아전인수식 사고이다.

 

하지만 2천만 명의 희생자 중에는 러시아인들 외에도 우크라이나, 우즈벡 등 다른 민족들도 함께 싸우고 피를 흘렸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쏙 빼놓는다. 더욱이 피를 흘린 것으로 따진다면 폴란드는 소련 이상의 대가를 치렀지만 어떠한 보상도 받을 수 없었다. 나치에 대한 승리는 러시아인들만의 독점물이 아니라 전쟁의 또 다른 한축을 맡았던 서방은 물론, 함께 피를 흘렸던 유럽 전체가 나누어 가져야 마땅하다. 제아무리 소련군이 용맹스러웠다고 한들, 서방이 무상으로 제공한 막대한 보급물자와 차량이 없었더라면 히틀러가 마지막까지 해낼 수 없었던 베를린-모스크바의 레이스를 스탈린 역시 해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러시아의 일부 국수주의 학자들은 전적으로 자신들의 피와 희생 덕분에 이겼으며 서방의 원조 따위는 소련의 거대한 생산력에 비하면 한줌에 불과했다며 폄하한다. 서방 입장에서 본다면 불 난 집에 불 끄라고 소방 호스를 빌려주었더니만 불 다 끄고 난 뒤에 한다는 소리가 성능이 신통찮았다느니 그거 없어도 불을 끌 수 있었다느니 구시렁거리는 셈이니 배은망덕도 유분수랄까.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은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군의 만행은 독소전쟁 당시 소련군이 보여준 모습의 판박이라는 점이다.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나치 군대를 끈기 있게 밀어붙이며 러시아 증기롤러의 힘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에만 자부할 뿐, 그 뒤에 가려진 자신들에게 불리한 역사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소련군은 해방자이기는 커녕 나치 이상으로 지독한 정복자였다. 그들 스스로도 누구를 해방하러 왔다고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소련군이 해방군이라는 것은 스탈린의 선전매체가 만들어낸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소련군은 지나가는 곳마다 1500년 전 악명 높은 아틸라의 훈족 군대나 수백 년 전의 칭기즈칸 군대에 비견될 만큼 무차별적인 약탈과 집단강간, 대량학살을 일삼았다. 독일군이 자신의 가족들에게 했던 행동을 되갚아주기 위한 복수심이나 일부 군인들의 흔한 일탈쯤으로 여긴다면 실로 순진한 생각이다. 소련군에게는 열심히 싸운 병사들을 위한 사소한 보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야 그들이 그나마 얼마 안남은 인내심을 유지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만행은 심지어 독일에 강제로 끌려갔던 같은 소련 인민들에게도 똑같이 자행되었다. 대부분 거칠고 순박한 시골 농민출신이었던 러시아 병사들에게 어느 누구도 그것은 범죄라는 얘기를 해주지 않았다. 또한 소련 체제로부터 인간으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한 사람들로서는 남의 인권을 존중할 리 없었다. 처벌은 약탈이나 강간을 해서가 아니라 윗분들의 몫을 챙기지 않았거나 강간 피해자로부터 성병을 옮았다는 이유였다. 심지어 스탈린조차 그런 게 뭐가 잘못이냐는 생각이 소련의 낙후하고 봉건적인 가치관이었다. 뒤늦게 문제가 커지자 솔직하게 인정하고 바로잡으려고 노력하기보다 서방의 악선전 탓으로 돌리면서 꽁꽁 숨기기에 급급했다. 러시아인들의 사회주의식 도덕관념과 윤리 의식은 오늘날 우리 상식과는 전혀 달랐다. 그리고 70여년이 지난 뒤 그들의 후손들은 할아버지들이 했던 행태를 우크라이나에서 고스란히 반복하고 있다.

점령지 주민들의 눈에 비친 소련군의 모습은 독일군을 꺾은 고도로 현대화된 정예 군대가 아니라 멕시코 산적떼에 가까울 만큼 기강이 형편없었다. 조국을 위해 싸운다는 명목으로 끌려나온 무지한 농민들은 우직하면서 용맹하고 독일군도 감탄할 만큼 극한의 환경에서도 끈기을 보여주었지만 그들의 사고 방식은 제정 러시아 시절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스탈린은 사기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이들의 일탈을 적당히 눈감아 주었다. 결국 전쟁범죄를 조장한 장본인은 스탈린이었다. 

 

그런 점에서 글항아리 출판사의 신작 도서이자 앤터니 비버의 역작 <베를린전투 1945>는 그동안 독소전쟁을 잘 알지 못하거나 소련군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품고 있던 국내 독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줄지 모른다. 이미 시중에서는 데이비드 M. 글랜츠의 <독소전쟁사>를 비롯하여 몇 권의 책이 나와 있다. 그러나 <베를린전투 1945>는 단순히 소련군의 위대한 승리를 강조하거나 영화 <다운폴>에 나온 것처럼 히틀러의 마지막을 다루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동안 학자들이 간과하거나 정치적으로 민감하다는 이유로 빼놓았던 부분들을 신랄하게 묘사한다. 전장에서 보여준 소련군의 민낯, 스탈린 체제의 비인도성, 전쟁에서 조금이라도 더 전리품을 챙기려고 안간힘을 썼던 스탈린의 탐욕까지, 러시아인들이 자부하는 대애국전쟁은 결코 영광스러운 승리가 아니었다. 동유럽에서 저지른 소련군의 전쟁범죄는 우리가 그토록 비판하는 일본군 못지않았다. 스탈린과 장군들이 병사들을 인간이 아닌 한낱 소모품으로 여기고 명령에 복종하여 조국을 위해 죽기로 싸웠던 전쟁영웅들을 푸대접하는 모습 역시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판박이였다. 소련과 일본의 유일한 차이는 그저 어느 편에 섰느냐이다.

 

물론 앤터니 비버가 이 책을 쓴 목적은 단순히 러시아인들의 추악한 자기기만을 고발하기 위함은 아니다.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나치 제국의 최후이다. 19454월의 독일군이 대단히 불리한 처지에 놓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194112월의 소련군 역시 그에 못지않게 어려웠다. 또한 베를린으로 진군한 소련군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병참선은 한계였다. 어째서 독일군은 모스크바를 영웅적으로 지켜낸 소련군처럼 하지 못했던가. 스탈린그라드는 주코프가 천왕성 작전을 발동할 때까지 무려 삼 개월 동안 독일군의 맹공을 견뎌냈지만 베를린은 불과 열흘도 안 되고 함락되었던가. 공전의 위기를 앞두고 히틀러와 나치 수장들의 모습은 스탈린과 어떻게 달랐던가. 만약 소련군이 독일군 최후의 방어선이었던 오데르-나이세 방어선에서 격퇴되었다거나 발목이 잡혔더라면 베를린은 과연 누구의 차지가 되었을까. 이 책은 베를린 전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가져볼만한 이러한 의문들에 대한 진지한 해답을 던져준다. 특히 전투의 묘사는 그의 뛰어난 필력 덕분에 마치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영화 <다운폴>에 나온 것처럼 파국을 앞둔 히틀러와 나치 수장들의 광기어린 모습은 섬뜩함마저 느낀다.

 

영화 <다운폴>에서 진정한 광기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히틀러. 자신이 저지른 짓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한 채 무너졌다. 


흔히 히틀러가 용서받을 수 없는 이유가 파괴적인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점령지에서 인종청소와 대량학살, 강제수용소, 인권 유린 등을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지만 유럽인들의 이중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미국과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식민 대국들의 지도자들 역시 히틀러가 했던 그대로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저질렀으니 말이다. 유럽인들이 히틀러를 그토록 비난하는 진짜 이유는 히틀러의 잔인함 때문이 아니라 야만스러운유색인종들에게나 적용해야 할 방식을 문명화된 백인들에게 써먹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히틀러가 그저 역사의 운 없는 패배자라고 할 수 있는가. 그의 진면모는 패전 직전에 드러났다. 히틀러는 자포자기한 나머지 패전의 책임이 자신의 무능함 때문이 아니라 독일 국민이 열등하기 때문이며 독일이라는 나라 자체가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결론 내리고 아예 모든 것을 철저히 파괴하라는 '네로 명령'을 내렸다. 심지어 미쳐버린 괴멜스가 자신의 아이들마저 동반 자살하겠다고 말했을 때 히틀러는 말리기는 커녕 그의 비뚤어진 충성심을 칭찬했다. 정신줄 놓은 히틀러의 모습은 나치 정권이 단순한 독재 정권이 아니라 역사에 두 번 다시 등장해서는 안 될 정신병자들의 집단이었음을 보여준다

 

한편으로 저자가 영국 출신이라서인지, 얄타 회담에서 처칠은 스탈린의 야욕을 꿰뚫어보고 그를 저지하려고 노력한 반면 루스벨트의 순진함이 일을 망쳤다고 말한다. 루스벨트는 처칠보다 자신이 스탈린과 더 친하다고 여겼고 상대에게 진솔한 우정을 보여줄수록 스탈린의 협력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실제로 대일전쟁에서 소련군을 참전시켜야 한다는 그의 강박증 때문에 동유럽은 물론 우리 역시 한반도에 38선이 그이면서 얄타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스탈린과 더러운 거래를 시도한 것은 처칠도 마찬가지였다. 이 책에서는 겨우 한줄 언급될 뿐이지만 194410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처칠은 스탈린에게 훗날 악명 높은 퍼센트 합의를 제안했다. 반공 친 서방 성향이 대부분이었던 동유럽 국가들을 스탈린에게 죄다 내주기 싫었던 처칠은 서로 사이좋게 나누어 먹을 속셈이었다. 그리스는 영국과 소련이 9:1, 유고는 반반, 불가리아와 헝가리는 2:8, 루마니아는 전부 소련의 몫이었다.

 

이들이 스탈린과 소련 체제에 대해서 그토록 무지했던 모습을 단순히 인간적인 순진함 탓으로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서방 연합군이 자신들의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베를린을 향해 내달려야 했음에도 스탈린에게 동유럽을 넘겨주어 공산주의 노예로 전락시켰다는 비판 또한 결과론적인 얘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따로 있다. 아무리 강대국이라도 약소국의 운명을 놓고 자기들끼리 밀실에서 흥정하여 결정할 권리는 없다는 점이다. 스탈린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했던 루스벨트와 처칠은 자국이 아닌 남의 나라를 흥정 대상으로 삼아 평화의 십자군이라는 전쟁의 정당성에 제 손으로 먹칠을 했다. 뮌헨 회담에서 체임벌린이 히틀러를 상대로 그토록 비난받아야 했던 실수를 고스란히 되풀이한 셈이었다. 스탈린은 두 사람보다 훨씬 고단수였다. 그로 인한 대가는 약소국만이 아니라 그들 자신도 호되게 치러야 했다.

 

루스벨트의 가장 큰 실수는 스탈린이 자신과는 전혀 다른 부류이며 그런 독재자의 고집을 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개인적인 친분을 쌓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단호함을 보여주는 것임을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스탈린은 떼쓰기가 통하지 않을 때에만 물러섰다. 심지어 그런 상대에게는 경외심마저 드러내기도 했다. 그가 1939년에 물렁한 서방 대신 나중에 뒤통수를 맞을 것을 각오하면서까지 히틀러와 손을 잡으려고 애를 쓴 것도 이 때문이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 전쟁을 놓고 여전히 미국과 서방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인도적인 지원을 하면서도 자칫 푸틴의 심기를 건드려 자신들에게 엉뚱한 불똥이 튀지 않을까 전전긍긍한다. 헨리 키신저, 노암 촘스키 등 미국의 저명한 재야인사들은 푸틴을 더 이상 벼랑 끝으로 몰아넣어서 안 되며 평화를 핑계로 침략자가 아닌 우크라이나에게 양보하라고 윽박지른다. 말로는 체임벌린이나 루스벨트의 유화정책을 비판하면서도 교훈으로 삼기는커녕 막상 똑같은 처지에 놓이면 지레 겁을 먹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 후대 정치인들의 어리석음이 아닐까 싶다.


그런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쪽이 푸틴이다. 따라서 물러서기는커녕 서방과 우크라이나가 얼마나 오래 버티는지 보자며 한층 광기를 부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서방 입장에서는 강자보다 약자가 좀 더 말이 통하고 자기네들이 다루기 만만하다고 여길지 몰라도 독재자들을 다루는 법은 그들이 고집부리는 것 이상으로 단호함을 보여주는 것 밖에 없음을 간과해서 안 된다. 전쟁을 끝내려면 적당한 양보가 아니라 푸틴이 아무리 용을 써도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할 때이다. 푸틴만이 아니다. 도발을 반복하는 북한을 놓고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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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함락 1945 걸작 논픽션 26
앤터니 비버 지음, 이두영 옮김, 권성욱 감수 / 글항아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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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터니 비버의 최고 걸작이자 제2차 세계대전의 종지부를 찍은 베를린 전투가 드디어 나왔군요. 기대 만빵입니다. 당장 주문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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