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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정상가족 - 자율적 개인과 열린 공동체를 그리며
김희경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그랬다.
정상가족만 정상가족이라 여겼다.
미혼모는 잘못 된 행동 뒤의 결과라 여기기만 했을 뿐 그들의 문제점들은 전혀 몰랐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았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조손 가족들 역시 조손들의 고단함을 마음 아파했을 뿐, 그들도 다름없는 가족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은 정상가족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여겨질 뿐이었다.
다문화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단일민족의 전통이 사라질거란 안타까움이 뭔 애국인 양 착각
하고 있었다. 사랑이 기반이 된 가족이 아니라 거래가 기반이 된 가족의 행태에 그저 혀를
차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내가 얼마나 편협적이었던가를 알게 된다.
www - world wide web의 시대이건만 여전히 나의 생각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몹시 부끄러웠다.
"가족동반자살", 언젠가 나도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부모가 먼저 자녀를 살해한 것인데...라고.
이 책에서 말하는, 이 말에 포함 된 여러 복합적인 의미에 적극 공감한다. 그리고 "자녀 살해 후
자살"이라는 표현이 올바르다는 것에 동의한다.
<일자리를 얻지 못한 저소득 미혼모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어떨까.
정부는 아이(만 13세 미만)를 홀로 키우는 저소득 미혼모에게 월 12만 원(엄마가 청소년일
경우 17만 원)의 양육비를 준다.
만약 미혼모가 직접 키우기를 포기하고 아이를 다른 양육시스템으로 보낸다고 해보자.
입양을 보낼 경우 입양가정은 입양 수수료 270만 원을 지원받고 매달 15만 원(만 14세 이전)
의 양육수당과 20만 원의 심리치료비, 100% 의료지원을 받는다.
또는 위탁가정이나 시설에 보낸다고 해보자.
2015년 보건복지부의 <대인양육제도 양육비 실태조사연구>에 따르면 위탁가정은
월 66만 7000원, 공동생활가정은 128만여 원, 양육시설은 166만여 원의 지원금을 정부에게서
받는다. - p122>
우리나라의 법이 이렇구나.
내가 내 아이를 키우겠다면 월 12만 원,
입양 보내면 270만 원+월 15만 원+20만 원+100% 의료비 지원
흐아! 이러면 입양을 보내라는 말 밖에 되지 않는다. 특히 청소년 일 경우는 월 17만 원으로
어찌 육아를 감당한단 말인가.
출산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별별 대안이 다 나오는 시점에서 입양을 독려하는 이런 법은
무엇이란 말인지!
출산율을 높이는 방법은 그저 아이를 더 많이 낳으면 해택을 주겠다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몇 권의 책만으로도 알겠던데 정부는 어찌하여 여전히 구시대적 발상만으로
일관하는지 모를일이다.
한편으로는, 아이를 더 낳게 하려는 정부의 헛된 노력보다는 지금의 아이들을 위한 훌륭한
아동복지를 연구해 보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이 아닐런지 싶기도 하다.
19세기의 교실에서 20세기의 선생님이 21세기의 아이들을 교육시킨다더니, 우리나라의
여러분야에서 이 말과 딱 들어맞는 상황들이 연출되고 있다.
나는 이제 어떠한 가정의 형태이든 다른 시각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가정의 문제는 가정 내에서만 해결할 수 있다는 전통적인 가족관에서 벗어나, 더 나은
가족복지, 아동복지, 사회복지를 위해서 국가가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나라에 수 많은 외국인들이 들어와도 단일민족의 흐트러짐을 염려하지 않을 것이다.
www, 이미 세계는 world wide web의 시대임을 실제로 인식할 것이다.
참 훌륭한 책을 읽었다.
저자가 주장하는 "체벌금지법"이 입법화 되기를 소망한다.
*부모의 체벌 덕분에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부모의 체벌에도 불구하고 나는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고 말해야 한다.
*체벌이 훈육 방법으로 효과적이지 않으며 해롭다는 것을 넘어서서 내가 체벌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더 큰 이유는 아이들에게 폭력도 사랑이라고 가르치며 가해자의 논리를 내면화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초저출산을 경험한 많은 국가들이 종전에 가족이 책임지는 복지를 이제는 사회투자라는
관점으로 바꿔가고 있으며, 이를 위해 가족복지에 대한 국가의 개입과 책임 또한 강화되는
추세다.
*'개천에서 용나는' 모델은 '억울하면 출세하라'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모두가 '용 키우기'에 달려드는 대신 미꾸라지들이 사는 개천도 살 만한 곳으로 만들
자는 강준만의 문제의식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태어난 계급의 격차가 삶의
여러 기회를 차단하고 아무리 '노오력'해도 소용없는 '헬조선'이 굳어질수록 가장 큰 손해를
보는 사람들은 개천의 미꾸라지들, 가난한 집의 아이들이다. 빈부의 양극화가 교육, 주거,
생활의 모든 면에 걸쳐 분리를 가속화할수록 그에 따른 희생은 가난한 아이들에게 집중된다.
*회사에서도 '우리oo가족 여러분', 'oo가족 체육대회' 같은 표현을 접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어떤 회사가 구성원들끼리 친밀하고 직원에 대한 배려가 많아
좋다는 묘사를 할 때에도 '가족적 분위기의 회사'라는 표현이 흔하게 쓰인다.
급변하는 사회지만 가족적 문화에 대한 미화는 여전하다.
공동체 의식과 배려, 책임을 강조하고 싶을 때 아주 자주 가족적 관계에 대한 비유가 호출
되고, 친밀감을 전제로 한 집안의 인간관계가 사회관계로까지 확장된다. 우리는 왜 중립적
호칭을 놔두고 굳이 가족적 거리를 암시하는 표현들을 점점 더 많이 쓰게 되었을까?
*촛불집회에서 또 하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장면은 대거 참여한 청소년들이었다. "우리
아이들을 위해 촛불을 든다"라는 어른들에게 "어른들이 '아이들'을 위한 촛불을 드는
광장에선 '아이'가 존중받는 시민으로 설 틈이 없다. 성숙한 '어른'과 미성숙한 '아이'로
구분하지 말고 '우리 모두를 위한 촛불'을 들자"라고 화답하는 청소년들을 보면서, 아, 우리가
다른 어느 곳에서도 하기 어려운 민주주의의 학습을 광장에서 하고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촛불로 태어난 정부가 공공성 강화를 통해 가족의 짐을 덜어주고 누구도 소외되지 않도록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각 개인들은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기보다 각자 다른 방향으로
뻗어가도 괜찮은 사회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면 좋겠다. 가족 안팎에서 '정상가족'의 숨
막히는 틀 대신 수평적 유대관계를 통해 아이들의 자율을 존중하고 다음 세대에선 나와 다른
사람을 배척하지 않는 개인들이 자라날 수 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