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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신영복 옥중서간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199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1968년~1988년, 28세~48세, 20년 20일...
이 무슨 변고란 말인지! 빛나는 인생의 한 부분, 그 20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하다니,
변고도 이런 변고가 없다. 그 20년 동안 그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엮은 책이다.
제목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니, '감옥'과 '사색'이 어찌 어울리겠는가 마는 <신영복>
이기에 '감옥'과 '사색'이 한 문장 안에서도 좀은 자연스러운가 싶다.
그의 <강의>와 <담론>을 읽고 정신이 확 깨는 것 같더라. 사람을 키워야 한다는 그의 주장
이 그리 인간적일 수 없는거라. 빽빽하게 가득한 그의 글들이 그렇게 좋았다. 책을 다 읽어
가는게 여간 아깝지가 않았던 기억이 선명하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날짜 순으로 되어 있어, 책의 페이지가 넘어 갈수록 그의 출소일이
가까워오고 있는 것이고, 그의 어머니가 그때까지 살아 계시기를 소망하며 책장을 넘기는데,
아~ 다행이었다. 어머니는 그의 출소를 보시게 된다. 정말 다행이었다.
감옥은 세상의 가장 '밑바닥'이라 말하는 그가 어찌 이런 사색이 그 밑바닥 세상에서 가능했던
것인지 존경스런 마음이 한껏 올라온다.
지성인으로서의 그야 그러하다치더라도 자식으로서의 그, 가족으로서의 그는 너무 눈물 겨운
것이여서 그 20년 세월이 몹시도 애절하고 안타깝다.
"몸 조심하고 행실 조심하겠다"는, "훌륭한 인품을 기르도록 노력하겠다"는 그의 어머니로 향한
다짐들, "항상 너른 마음으로 견디시길 바란다"는 어머니에게로 향한 그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걱정은 그 부질 없음에도 아랑곳없이 더욱 걱정된다"는, 부모님과 가족에 대한 수인(囚人)
으로서의 그의 심정들이 내 가슴에도 콕콕 박힌다.
<청구회 추억>의 글은 무척 감동적이었다. 멘토와 멘티, 사람과 사람이 서로에게 어떻게
감동을 주며, 그 감동으로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이보다 더 잘 나타낼 수 있을까?
무릇 인간관계가 이러하다면 "사람을 키우는 일이야말로 그 사회를 인간적인 사회로 만드는
일"이라는 그의 말이 아주 적절하게 실현될 터이다.
'사상'이란 무엇일까를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잘 모르겠다. 너무나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는
듯 싶어 감히 곰곰 생각해보도 못하겠다.
국민학교때부터 반공방첩 교육을 너무나 잘 받아온 나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의 이승복
어린이가 십 수년 내 학창시절 동안의 진실이었을 뿐이었는데... 선생님의 말씀이 곧 진실이
었던 나 같은 사람을 세뇌시키기란 식은 죽 먹기였을 듯.
편지글마다에 "저는 잘 지냅니다."가 아니라 "저희들은 잘지냅니다."로 항시 적혀져 있어
사람에 대한 그의 마음이 잘 보인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같이 비를 맞는 것"이라는, "더불어 숲"이라는
그의 글을 꼭꼭 새겨둔다. 나도 그러하리라! 나도 그러하리라!
이 책을 먼저 읽고 <처음처럼>을 보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난 거꾸로 읽었네.
고은의 <간첩>이란 시를 다시 한 번 읽어본다.
<간첩> -고 은
여보게 자네 간첩의 고독을 아는가
누구에게도 그 자신을 숨겨야 하는 고독을 아는가
누구에게도 그 자신을 숨길 뿐 아니라
그에게 부과된 조국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독을 아는가
그러다가 모스 부호 추적으로 체포되었다
사형에서
무기형으로 감형
이십 년 이상을 0.7평짜리 마룻바닥
흰 머리카락 떨어지는
그 길고긴 나날의 고독을 아는가
더욱 놀라운 것은
이십 년 전의 신념 그대로인 고독이었다
시대 흘러
그 신념이 고개 숙이고 말았는데
그 고독으로부터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다
아 무엇이 비석이고 무엇이 바람 한 점인가
*불행은 대개 행복보다 오래 계속된다는 점에서 고통스러울 뿐이다. 행복도 불행만큼 오래
계속된다면 그것 역시 고통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불행은 불행끼리 위로가 된다.
*착한 아내, 고운 며느리, 친절한 엄나, 인자한 시어머니, 자비로운 할머니등 긍정적 미래로
열려 있는 여자인가 현재 속에 닫혀 있는 여자인가를 살펴야 한다. 이것은 현재를 고정불변
한 것으로 완결하지 않고 과거와 미래의 연관 속에서 변화발전의 부단한 과정으로 인식하는
철학적 태도이며, 현실성보다는 그 가능성에 눈을 모으는 열려 있는 시각이다.
*새벽마다 저는 두 개의 종소리를 듣습니다. 새벽 4시쯤이면 어느 절에선가 범종소리가
울려오고 다시 한동안이 지나면 교회당의 종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러나 이 두 종소리는 서로
커다란 차이를 담고 있습니다.
교회종이 높고연속적인 금속성임에 비하여, 범종은 쇠붙이 소리가 아닌 듯, 누구의 나직한
음성 같습니다. 교회종이 새벽의 정적을 휘저어놓는 틈입자라면, 꼭 스물아홉 맥박마다 한
번씩 울리는 범종은 '승고월하문'의 고(鼓)처럼, 오히려 적막을 심화하는 것입니다. 빌딩 숲
철제의 높은 종탑에서 뿌리듯이 흔드는 교회 종소리가 마치 반갑지 않은 사람의 노크 같음에
비하여, 이슬이 맺힌 산사 어디쯤에서 땅에 닿을 듯, 지심에 전하듯 울리는 범종소리는 산이
부르는 목소리라 하겠습니다. 교회 종소리의 여운 속에는 플래시를 들고 손목시계를 보며
종을 치는 수위의 바쁜 동작이 보이는가 하면, 끊일 듯 끊일 듯하는 범종의 여운 속에는
부동의 수도자가 서 있습니다.
*저는 힘써 훌륭한 품성을 기르며 살아가겠습니다.
*역마살은 떠돌이 광대넋이 들린 거라고도 하고 길신(道神)이 씌운 거라고도 하지만, 아직도
꿈을 버리지 않은 사람이 꿈 찾아나서는 방랑이란 풀이를 나는 좋아합니다.
*생활의 편의와 이기(利器)들이 생산해내는 그 여유가 무엇을 위하여 소용되는지, 그 수많은
층계, 싸늘한 돌 계단 하나하나의 '높이'가 설상 흙으로부터의 '거리'를 의미하는 것이나
아닌지......
*시를 만들어보는 노력은 어느덧 생각을 정리해주기도 합니다. 아마 깊은 통찰과 간결한 표현
이 시의 방법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모든 아이들에게 있어서 손님은, 어른들의 자상하지 않은 대꾸로 인하여 더욱 궁금해진 그
미지의 손님은 어린이들이 최초로 갖게 되는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이며, 어린아이들의
소왕국을 온통 휘저어놓는 '걸리버'의 상륙 같은 것입니다.
*기쁨과 마찬가지로 슬픔도 사람을 키운다는 쉬운 이치를 생활의 골목골목 마다에서 확인하면
서 여름 나무처럼 언제나 크는 사람을 배우려 합니다.
*겨울 밤 단 한 명의 거지가 떨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겐 행복한 밤잠의 권리는 없다던
친구의 글귀를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불행이란 그 양의 대부분이 가까운 사람들의 아픔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라 믿습니다.
*저는 가끔 햇볕 속에 눈감고 속눈썹에 무수한 무지개를 만들어봄으로써 화창한 5월의 한
조각을 가집니다.
*저녁에 등불을 켜는 것은 어려운 때 더욱 지혜로워야 한다는 뜻이라 믿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주관의 양을 조금이라도더 줄이고 객관적인 견해를 더많이 수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의 바닥에는, 주관은 궁벽하고 객관은 평정한 것이며, 주관은 객
관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객관은 주관을 기초로 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전제가 깔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각자가 저마다의 삶의 터전에 깊숙히 발목 박고 서서 그 '곳'에 고유한 주관을 더욱 강화
해가는 노력이야말로 객관의 지평을 열어주는 것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망치가 가벼워 못이 튈까 조심하고, 여름이 시원하여 겨울이 추울까 염려하다가도 계란을
보고 새벽을 묻는 조급함에 스스로 고소를 금치 못합니다.
*'세상의 슬픔에 자기의 슬픔 하나를 더 보태기'보다는 자기의 슬픔을 타인들의 수많은 비참함
의 한 조각으로 생각하는 겸허함을 배우려 합니다.
*초승달을 키워서 보름달을 만들 듯 어머님과 저와 그리고 마음이 아픈 모든 사람들도 스스로의
마음을 달처럼 조금씩 키워가야 하리라 믿습니다.
*꽃 피는 어느 춘삼월 따스한 날을 정월 초하루로 잡았더라면 새해가 사뭇 다정한 것이 되었으
리라 생각됩니다. 추워서 잔뜩 웅크린 겨울철은 아무래도 무엇을 맞이하고 어쩌고 하기에는
불편한 계절입니다.
*있으면 없는 것보다 편리한 것도 사실이지만 완물상지, 가지면 가진 것에 뜻을 앗기며, 물건은
방만 차지함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마음 속에도 자리를 틀고 앉아 창의를 잠식하기도 합니다.
*한 번 오시겠다던 아버님 소식 없어 혹시나 어머님 편찮으신가 이런저런 걱정입니다. 걱정은
흔히 그 부질없음에도 아랑곳없이 더욱 걱정됩니다.
*몸소 겪었다는 사실이 안겨주는 확실함과 애착은 어떠한 경우에도 쉬이 포기할 수 없는 저마다
의 '진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교육은 놀이와 학습과 노동이 하나로 통일된 생활의 어떤 멋진 덩어리-일감-
를 안겨주는 것이라 합니다. (...) 생활 속의 즐거움이나 일거리와는 하등의 인연도 없이 칠판
에 백묵으로 적어놓은 것이나 종이에 인쇄된 것을 '진리'라고 믿으라는 '요구'는 심하게 표현
한다면 어른들의 폭력이라 해야 합니다.
*제가 징역 초년, 닦아도 닦아도 끝이 없는 생각의 녹을 상대하면서 깨달은 사실은 생각을 녹
슬지 않게 간수하기 위해서는 앉아서 녹을 닦고 있을 것이 아니라 생각 자체를 키워나가야 한
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특히 자신의 사상을 책에다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서 이끌어내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아무리 조잡하고 단편적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사상은 그 사람의 삶에 상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삶의 조건에 대하여는 무지하면서 그 사람의 사상에 관여하려는 것은
무용하고 무리하고 무모한 것입니다.
*'1등'이 치러야 하는 긴장감, '모범'이 요구하는 타율성에 비해 '중간은 풍요하고' '꼴찌는
편안하며' '쪼다는 즐겁다'는 역설도 그것을 단순한 자기합리화나 패배주의의 변(辯)이라
단정해버릴 수 없는 상당한 양의 진실을 그 속에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Because I really conceived that I could be a better person with him."
이 구절은 물론 그이를 통하여 자기가 보다 훌륭한 사람으로 발돋움하고자 하는 자신의 성장
의지를 뜻하는 것입니다만 관점을 바꾸어본다면 반대로 그이가 자기로 인하여 보다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보다 넓은 함의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선(善)의 본질은 공동선
이기 때문에도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