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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화 시편 - 행성의 사랑
고은 지음 / 창비 / 2011년 7월
평점 :
책 표지의 그림이 꽃잎인 줄 알았다. '행성의 사랑'과 부드럽고 예쁜 꽃잎들이 잘 어울린다
싶었는데 꽃잎이 아니었다. 그래도 잘 어울린다. '행성의 사랑'이란 이런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빛깔일지 모른다.
50세에 결혼을 하고 그로부터 30년의 사랑이 한 권의 시집이라니, 그의 사랑 몹시 부럽다.
일찍 와 늦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린 사랑보다, 늦게 와 더 늦게까지 펄럭일 사랑을
소망함에 전부를 걸고 싶다, 이제사.
여태 내 보아 온 시집이란 책들은 얇기만 하더라. 얄궂었다. 왜 시집이란 책들은 얄팍하기만
할까? 이 시집은 여간한 소설만큼 읽을거리가 많을 정도로 두껍다. 그의 사랑이 이러하겠지?
고은의 시를 읽다 덮으면 내 모든 것이 시가 되어 버린다. 잡념도, 산책도, 기도도, 슬픔도,
화도, 휴대폰 문자도, 바람도, 바다도, 하늘도, 나무도... 내 보는 것 모두모두 시가 되어 버린
다. 그의 언어 속에서 정신이 혼미하다. 몽롱하다. 출렁인다.
노트에 필사할 건 하고, 부분부분은 여기 옮긴다.
누구는 모든 것이 콜록콜록 일찍 왔으나
나는 모든 것이 중얼중얼 늦게 왔다
...
더 늦은 것 여기 있다
사랑
없는 것이
있는 것이 된 사랑의 삶 여기 있다
사랑의 깃발 늦게 펄럭인다 늦게까지 펄럭이리라 (지각타령 中)
당신 팔다리 없어도 좋아
살아 있기만 해
이렇게 두 눈 뜨고
꼭 살아 있기만 해
살아 있는 지옥이 훨씬 더 좋아 (신우염 中 )
비 오지 않는 거리가
비 오는 꿈을 꾼다 (어떤 술주정 中)
현재는 현재 뒤에서 천년이다
흠 하나 없는 햇빛이
비 온 뒤 내려왔다
마침내
아픔 다음
기쁨이었다
...
그 밑으로 촘촘한 바느질 잔디가 깔렸다 (수유리 中)
꼭 읽고 싶었던 책을 샀을 때
사서
대번에 열일곱 장 열여덟 장 읽어갈 때
...
아직 읽지 않은 대목을 덮어둘 때
...
꼭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났을 때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라고 뒤늦게 깨달을 때 (회상 이후 中)
총동원의 날이다
태양 아래서
내 시각이
내 후각이
내 청각이
내 미각이
내 촉각이
내 튀어나온 심각이 (총화를 위하여 中)
저녁은 원인 없이 서러움이 들어맞는다
저녁은 이유 없이 외로움이 딱 들어맞는다
끝내
저녁은 외로움이 그리움이 되고
그리움이 외로움이 되어 딱 들어맞는다 (귀로 中)
저 선사시대의
누구
누구
그때의 신은 시였다 아흐 시이고말고
그러다가
이놈의 역사시대의 누구
이때의 신은 권력이었다 (사적인 신 中)
아내의 기억은 하늘에서 내려온다 비 온다 눈 퍼붓는다
...
23년 전의 아내
내가 입었던 윗도리를
23년 전의 그날로 돌아가 또렷이 알고 있다
...
36년 전 갔던 식당도 틀림없이 잊지 않고
그 식당의 오후에 자세하게 돌아가 있다 아내는 과거의 세부이다
...
과거가 현재인 아내
아내의 기억 속에는 선사의 미래가 들어 있다
미래가 현재인 아내 (아내의 기억 속에서 中)
밤은 지극히 긴긴 예의입니다 (폴리네시아의 밤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