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변방은 어디 갔나 창비시선 332
고은 지음 / 창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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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은 高銀

 

     시인생활 50여년
     시집 여럿

이렇게 간략한, 명쾌하고 유쾌한, 그러면서 저력이 보이는 프로필은 본 적 없다. 작가의 사진 

아래 달랑 이 세 줄, 14글자가 프로필의 전부라니! 내가 본 최고의 프로필, 단연 으뜸 중의 

으뜸이다. 얼마나 매력적인가! "누님께서 더욱 아름다웠기 때문에 가을이 왔습니다."라는 

구절을 처음 읽었을 때 만큼이나 전율이 일었다. 찬란하다는 말보다 더 빛나는 단어는 무엇

일까? 그를 대표하는 더 상위의 단어를 자꾸만 찾게 만든다. 

'순간의 꽃'보다는 은유가 많은 듯해 조금 더 어려운 듯 하나 제차 보니 처음 보다는 덜하다.

 

ㅎㅎ 찬찬히 두고두고 수 차례 읽어 봐야 할텐데 오늘이 반납일이구만. 





- 만찬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배가 고팠다
별 내려와 있다
별을 먹고 먹었다




- 화개

바야흐로 꽃의 날이다

다 그만두고
너도 울어라
나도 울어라





- 4행의 노래

눈 뜨니 꽃 피시더라
눈 감으니 비 오시더라

살아서 새 우시더라
죽어서 눈 내리시더라

이만




- 후일

며칠을 두고 두 사내가 지지 않누나

바람이 움직이나니
깃발이 움직이나니 지지 않누나

며칠 뒤 한 사내가 나서서
두 사내를 단반에 이기누나

마음이 움직이나니

천 오백년 뒤 심심한 사내 하나 나서서 지지 않누나

함께 바람 움직이나니
함께 깃발 움직이나니
다함께 마음 움직이나니

아이고 잡것들 지랄하고 자빠졌네 잔이나 들어






- 포고

더이상 발견하지 말 것
다시 말한다
더이상 발견하지 말 것

불을 발견하고 술을 발견하던 시절이여
거기로부터
너무나 멀리 와버렸구나

바람분다
나비들
어서 내려앉아라

태평양
인도양
또는 대서양 심해 생명 140여만 종

천만다행이구나
미발견 생명 3천여만 종
제발 그냥 놔둘 것

에디슨아
에디슨아
에디슨아

더이상 발명하지 말 것

이로부터 발견과 발명 그리고 모든 발전
극형에 처함
이와 함께
모든 진리 극형에 처함






- 일몰

누구에게는 이 세상은
단 한번도 태어나지 말아야 할 세상이겠지

아니
누구에게는 이 세상은
단 한번이 아니라
여섯 번
일곱 번이나 또 태어나서
여섯 번
일곱 번이나 또 살아야 할 세상이겠지

막 해가 지누만






-어느날의 일기

아침 여섯시 반 일어났다
웬일로 새소리가 없다 차라리 좋다

말년의 긍정 사절할 것
말년의 타협 거절할 것

감히 모든 유혹의 끄트머리 거기

네 백발귀신 너를 노려본다 당장 오는 춘삼월 어쩔테냐






- 내 변방은 어디 갔나

두 번 세 번 부당하구나

삼천리 강산이 모조리 서울이 되어간다
오, 휘황한 이벤트의 나라
너도나도
모조리 모조리
뉴욕이 되어간다
그놈의 허브 내지 허브 짝퉁이 되어간다

말하겠다
가장 흉측망측하고 뻔뻔한 중심이라는 것 그것이 되어간다

서러웠던 곳
어디서도 먼 곳
못떠나는 곳
못 떠나다
못 떠나다
기어이 떠나는 곳
내 마음이 개펄 바닥
해거리 명자꽃이 똑똑하던 곳
10년 전과 
10년 후가 같았던 곳
어머니의 흐린 경대
거기 계신
한번도 본 적 없던
증조할머니도
못 본 고조할아버지도 함께 살던 곳
아버지쯤이 아득한 과거인 날들
꿈에도 없는 곳
무식한 아버지
묵은밭 어둑어둑 갈던 곳
진리가 마을 안에 있던 곳
내가 잠들면 너도 잠드는 곳
죽은 아저씨 살아 돌아오는 곳
소작료 삼칠제로 뼈 빠져버린 곳
눈 뜰 힘 없어 눈 감고 죽는 곳
낮은 콧잔등으로
호된 가난 견디어온 광대뼈로
제사상 앞에 엎드리던 곳
백년대계 따위 소용없는 곳
궂은비 오는 날 끼리끼리이던 곳
누가 죽으면 모두 상주인 곳
김씨도 장씨 숙부이고
갑씨도 을씨 사촌이던 곳
사또 나리 오시지 않는 곳
커다란 달밤
누군가가 그 달밤에
식칼 갈아 허공 포 뜨며 번뜩이던 곳
의미가 무의미에 고개 숙이는 곳
두고 온 그곳

내 변방은 어디 갔나

 






- 부탁

아직도
새 한 마리 앉아보지 않은
나뭇가지
나뭇가지
얼마나 많겠는가

외롭다 외롭다 마라

바람에 흔들려보지 않은 
나뭇가지
나뭇가지
어디에 있겠는가

괴롭다 괴롭다 마라

 






- 이별

무지무지한 천둥번개가 있어야겠다
여름이다
완전무결한 이별이 있어야겠다
가을이다

낙엽아
낙엽아
낙엽아
낙엽아
낙엽아 너처럼 너 잘 가라

 






- 구름 해설

술 깼어 2천년이나 묵은 동아시아 넋두리 하나 있어

생야 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
사야 일편 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

더러 내 입에도 발려나와
이것으로 제법 세상을 얼러보았어
과연 그렇까
태어남이 살아옴 살아감이
한 조각 이는 구름이요
억울하게시리
세상살이 작파해야 하는 것 그것이
한 조각 구름 사라짐인가

상여 나갈 때 상여 앞귀에 내건 구름 운(雲)자도
황천길 가 저승 구름 되었다가 이승의 비로 내려온다는 그것인가
구름이라
구름이라
한 조각 구름이라
때론 상서로운 구름 자색 구름
때론 이팔청춘 푸른 구름
때로는 미친 구름
때로 달 묻어
흉흉한 밤
대궐에 무슨 변고 있을 구름이라

 

동아시아나

서아시아나

유라시아나

이따위 제 앞가리기 구름 노릇이다가

 

19세기쯤

한 허름한 영국 촌 녀석이

하도 하도

구름에 들린 나머지

날이 날마다

구름 보다가

구름 일어나는 것

구름 스러지는 것 보고 보다가

서른 살에 이르러

대오각성

마침내 구름 이름 하나하나 지어내느니

 

낮은 구름 층운이라

높은 구름 권운이라

무슨 구름 적운이라

무슨 구름 적란운이라

이토록이나 구름 이름 지어놓으니

그 숱하디숱한 구름들이 감응하여

꿈속에서도 두둥실 나타나

나 적운이야

권운이야

층운이야

 

이로부터 나라마다

그 이름 불러주느니

사람들도

층운 장녀

권운 차남

적운

적란운 이종사촌으로 태어나더군

 

나도 덩달아 한마디 어깃장 놓아보니

 

생야 일편부운멸(生也一片浮雲滅)이요
사야 일편 부운기(死也一片浮雲起)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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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ce 2016-06-02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편의 시를 옮기다 보니 욕심이 생긴다.
필사할까? 내 것으로 하나 만들고 싶다는!

2016-06-01 1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01 1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01 1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