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즐거움 (양장)
히로나카 헤이스케 지음, 방승양 옮김 / 김영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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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기쁨이란 무엇인가'(김병완)에서 이 책을 보고 구입했다.

많은 부분에서 줄을 쳤고 고개를 끄덕였으며 감탄을 했다.

학문이란 진정 즐거운 것임을 내 인생을 통해서 알아가고 싶은 마음 간절하나

나의 끈기와 인내는 학문을 즐거움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의 것에 턱없이 모자랄것이다.

그러하더라도, 내것이 턱없이 모자라더라도 나는 그렇게 그들을 흉내내며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겠다.

두고두고 펼쳐보고 싶은 훌륭한 양서이다.

 

 

 

 

*왜 배워야 하는가? 지혜를 닦기 위해서이다. 지혜에는 넓이가 있고, 깊이가 있고, 힘이 있다.

지혜의 힘이란 결단력을 말한다.

 

*사람은 어떤 길을 가든지 때때로 쾌감과 만족감을 맛보는 일이 필요하다. 늘 고통과 좌절만을

겪는다면 계속 그 길을 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면 이 쾌감과 만족감은 어디에서 생길까?

작은 일이라도 그 일에 성공하는 데서 생긴다 작으나마 그 일에서 성공을 거두고, 그것으로 인해

만족감을 느끼고 이런 체험이 쌓이면서 비로소 그 길이 자신의 길로 여겨지며 계속 걸을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와같이 한 가지 일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노력하는 힘과 끈기가 필요

하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가 하는 것보다는 끝까지 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게 나의 신조이다.

이런한 신조가 몸에 베어서인지 나는 한 가지 문제를 택하면 처음부터 남보다 두세 배의 시간을

들일 각오로 시작한다.

 

*살아 있다는 것은 부단히 무엇인가를 배우고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바로 그 배우고

노력한 것이 인생을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절실히 하게 된다.

 

*하여간 인생에서 남의 눈을 너무 의식하다가는 비약하지 못할 때가 있다. 누가 어떻게 생각하든

이것만은 해내야 한다는 결심을 하기 위해서는 배짱이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인생을 돌이켜보면, 어떤 경우에도 마음이 맞는다든가, 의기투합할 수 있다든가

하는 것으로 친구를 선택하는 기준을 삼지 않았던 것 같다. 나에게 없는 것을 갖고 있는 친구,

무엇인가 배울 수 있는 친구를 의식적으로 선택하여 사귀어 왔다. 그 때문에 아주 친해지더라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내 안에 있는 작은 세계에 친구가 들어오려고 할 때에는 단호히 배격하려고

노력해 왔다. 이러한 교우 방법을 냉정하고 계산적이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나는 이것을

지켜 왔기 때문에 남에게서 한 번도 배반당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잘난 척하는 것 같아

약간 쑥스럽지만 내 사전에 '배반당한다'하는 말은 없다. 왜냐하면 나는 누구하고도 친근하게

지내고 때로는 속마음까지 털어놓고 개방적으로 대하기도 하지만, 나의 제일 중요한 주체성

까지 영향을 받음으로써 나중에 후회하게 된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즉 아무리 친하고

존경하는 친구더라도 그 친구에게 홀딱 빠져서 나 자신을 잃어버렸던 경험은 한번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적어도 loneness를 확고히 갖고 있으면, 좋아하는 사람이나 싫어하는 사람, 어떤 삶과 어떻게

접하더라도 loneliness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신조이다. 편견에서 벗어나 친구들이 가진

중요한 것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배우기 위해서도 자기 자신의 loneness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는 선생님이라고 불릴 만한 사람인가?

 

*'발명광'이라고 불리는 프랭클린은 번개가 칠 때 연을 날리는 실험을 함으로써 번개가 전기임을

증명하여 피뢰침을 발명한 것으로 유명하다. 어느날 그는 또 하나의 발명을 하여 친구 집에 뛰어

가 자랑스럽게 그것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 계속되는 그의 발명에 약간 싫증이 난 친구는 '도대체

그렇게 유치한 것을 만드는 게 뭐가 대단하며, 무슨 소용이 있나?라고 말했다. 그러자 프랭클린은

옆에 누워있던 갓난아기를 가리키며 이렇게 반문하였다. '그렇다면 이 아기는 무슨 쓸 데가 있는가

?'.............................창조하는 것은 출발점에서는 모두 유치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창조의

원형은 아기와 같고 그것이 충분히 성장해야만 비로소 이용 가치가 밝혀지는 것이다.

 

*'상대가 안 돼서 포기했어요.'하고 포기하고, '난 바보니까요.'하고 바로 앉아 보는 자세는 학문을

떠난 일상행활 속에서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와같은 체념의 기술이나 바로 앉는 지혜는 큰

실수를 범한 충격에서 다시 일어서게 하는 데에도 효과적이다.

 

*"아름답다(beautiful)!" 수학자에게 이것을 능가할 만한 찬사는 없을 것이다. 영국의 수학자 러셀

은 전에 수학의 미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수학은 진리뿐만 아니라 숭고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그 아름다움은 조각처럼 차갑고 엄숙하며 사람에게 호소하는 것도 아니고 그림이나

음악처럼 화려한 장식도 없다. 그러면서 장엄하리만큼 순수하며, 최상의 예술만이 제시할 수 있는

엄격한 완벽에 도달할 수 있다."

'아름답다'라는 말은 수학에서는 최고의 찬사를 뜻하는 것이다.

 

*어디까지가 사실이며 어디까지가 희망적 관측 또는 억측인지를 확실히 인식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학문을 하는 데 있어서 또 한 가지 대단히 중요한 것이 '목표'를 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목표가

없으면 앞으로 밀고 나갈 정신 에너지가 만들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목표를 확실히 갖고 있는지

아니지에 따라 사람의 성장은 상당히 달라진다. 그 목표에 도달하는 자체가 중요해서가 아니라

목표가 그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되어, 일을 하게 하고 발전, 진보시키기 때문이다.

 

*목표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 목표를 향하여 밀고 나가는 에너지가 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가설을 세워서 열심히 연구하는 사이에 생각하지도 않았던 발견이 생긴다. 따라서 나는

잘못된 가설일지라도 가설을 먼저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뜻에서 젊은 독자 여러분이

앞으로 창조적인 일을 하려고 한다면 가설을 세워서 연역하는 사고방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

도록 권하고 싶다.

 

*인간의 두뇌에는 140억 개의 뇌세포가 있다. 그 140억 개의 뇌세포를 다 쓰려면 234세라는

긴 수명이 필요하다고 한다.

 

*인생에서도 물론 즐거움을 체험할 수 있겠지만 내 경험을 통해 볼때 자기의 새로운 일면을 발

견하여 '나에게 이런 면도 있어구나!'라고 자기 자신을 보다 깊이 이해하는 기쁨이 훨씬 크다고

생각한다.

 

*미국사람들은 좋은 질문이나 시시한 질문에 상관없이 모르는 것은 무엇이든지 질문하고 할 수만

있다면 질문만으로 다 배워 보겠다는 자세가 있다. 일류대학의 학생이라면, 이 이학만으로 단기간

내에 상당한 수준까지 배울 수가 있다. 가령, 3, 4백 페이지 분량의 책에 씌어진 내용을 배우려고

할 때, 학생은 교수에게 가서 '이 책에는 무엇이 씌어져 있습니까?'하고 일본의 대학에서는 상상

도 할 수 없는 질문을 한다. 다소 유치하고 대략적인 질문이지만, 질문 받은 교수는 그에 대해서

학생에게 열심히 설명한다. 그러면 그 설명에 대해서 또 질문하고, 그것을 몇 시간에 걸쳐서 되풀

이하는 동안에 학생은 그 책의 요점을 파악해 버린다. 두꺼운 책을 몇 페이지 읽다가 이해하지 못

해 포기하는 것보다 질문을 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좋은 효과를 내는 셈이다.

 

*자기 스스로도 생각해 보고 책을 일고 배워야 한다. 가르치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 바꾸어 말하

면 배우기 위한 방법의 하나는 남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서양문명의 몰락은 죽은 사람을 장식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시작했다.'라고 말한 사람이 있다.

그는 큰 절의 스님이면서 대학에서는 철학을 가르친다. 이 말은 아이들에게 부모나 조부모의

임종을 보여 주지 않고, 꽃으로 장식한 관에 유해를 담은 후에 비로소 보여 주는 습관이 생기고

나서부터 서양 문명이 계속 쇠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가족의 죽음에 직면한다는 것은

확실히 아이들에게는 일시적으로나마 대단히 충격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은 그것이 인간의

욕망을 자각하는 데 큰 힘이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죽음이 없으면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삶이 존재한다. 그 철학자가

말했듯이 장식된 관만을 보게 되는 서양의 아이들은 확실히 삶과 그 뒷면에 존재하는 죽음을

모르기 때문에 삶의 가치를 인식할 기회를 빼앗겼다고 말할 수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대단한 것이다. 그 값진 삶을 보다 멋지게 사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의 특권이다. 그 특권을 포기

하는 것은 어떤 뜻에서는 죽은 사람에 대한 모독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자기가 가르치던 아이가 전날 배운 것을 몰라서, 벌써 잊어버렸느냐고 꾸짖었을 때 '나는 바보

니까요'라는 아이의 대답은 저자가 불필요한 경쟁이나 목표에 맞지 않는 난해한 일을 피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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