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창비시선 449
안도현 지음 / 창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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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그 풍경을 나는 이제 사랑하려 하네>에서 그 이름, 안도현을 익혔네.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라는 제목에 현혹이 되어 보니 익히 익혀두었던 오호라, 그 안도현 이다.


제목이 너무나 시스러워 몇번이나 되뇌어 보게 된다.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반갑고 기쁘게, 기대에 차 시들을 읽어 나간다.


이런, 낭패다...

뭔말이지?

뭔말이야?

두 번, 세 번 거듭 읽어보다가 에라, 모르겠다, 내쳐 그냥 읽어나가 버리기로 한다.

대체로 우울스럽고 무겁다. 그러다, 


"고모"에서 트였다, "임홍교여사 약전"에서 확 열렸다, "식물도감"에서 모든 경계가 허물어졌다.










-귀띔

길가에 핀 꽃을 꺾지 마라

꽃을 꺾었거든 손에서 버리지 마라

누가 꽃을 버렸다 해도 손가락질하지 마라





-장마

창턱으로 뛰어든 빗방울의 발자국 몇개나 되나 헤아려 보자


천둥 번개 치면 소나기를 한 천오백근 끊어 와 볶는 중이라고 하자


침묵은 입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비명이거나 울음 같은 것


가끔은 시누대숲의 습도를 재며 밥 먹는 직업이 없나 궁리해보고


저녁에 저어새 무리가 기착지를 묻거든 줄포만 가는 이정표를 보여주자





-식물도감

*

사무치자

막막하게 사무치자


매화꽃 피는 것처럼 내리는 눈같이


*

녹색 머플러 두르고 등교했구나

부안시장 가서 샀니?


중학교 1학년

변산바람꽃


*

노루귀만큼만 물을 마시고

노루귀만큼만 똥을 싸고

노루귀만큼만 돈을 벌자


*

편두통으로 뒤척이다가

알약 몇개로 버틴 게 틀림없다

으아리꽃 향기 한숨 뱉듯


*

내내 엎드려 있었다지

꽃다지


평생 곷다지처럼 납작

살았다 어머니


*

호박씨 한알 묻었다


나는 대지의 곳간을 열기 위해

가까스로 땅에 열쇠를 꽂았다


*

두 눈이 있느냐

개불알풀꽃 들여다보아라


*

3월 말쯤 오너라

어머니가 나락나물이라 부르는 

전주 근방에서는 벌금자리라 부르는

벼룩나물 비빔밥 해 먹자


*

산괴불주머니꽃이 지지직거린다

마당에 전기가 들어온 거다


*

김일성종합대학 캠퍼스에 살구꽃이 피었다

평양 주재 중국대사관 가는 길에 살구꽃이 피었다

보통강 강둑에도 살구꽃이 피었다


*

살구꽃 한잎

천지를 들었다가 놓는 밤이다


상상력이 봄밤을 통치하는 마을이다


*

시멘트 브로꾸 담장 안에서

진달래가 서서 울고 있다


*

봄을 떼메고 가는

송홧가루

송홧가루


*

나는 앵두꽃에 입을 맞추었다


여자가 몸을 떨었다


*

아들아,

여자 친구에게 혹여 점수 따고 싶거든

제비꽃 꽃반지 만드는 법 배워두거라


*

할아버지 무덤에서 걸어나오시었다

휜민들레 피어나시었다


*

자운영, 그 이름이 간지러워

오랫동안 곁에 두지 않았다


*

당신 잇몸에 

껍질 벗긴 찔레 새순 닿으면

당신 치아에 찔레가 길어 올린 연둣빛 물줄기가 감기면 참 좋겠다


*

화살나무 새잎 따고 찔레나무 새순 꺾고 버들개지 몇 손가락 얹고 더덕 잎사귀 두엇 제비꽃 서넛 민들레 잎 대여섯장 보태고 골담초 꽃망울 몇 뿌리고 조물조물 기름소금에 무쳐 먹었다


*

산수유 가지에 개가 앉았다가

골똘히 무슨 생각 하더니 날아간다

꽃 이름을 몰라서 갸웃거렸을까


새야,

다음에 올 때는 식물도감 들고 오너라


*

벚꽃 진다고 아쉬워하지 말자

벚꽃 지면 아까시꽃 피니 괜찮다


*

벚꽃이 매달렸던 그 자리에

벚꽃을 잊지 않으려고

버찌가 열렸다


*

작년에 죽은 친구야,

벚나무 아래 놀던 사진 속에서는 빠져나가지 말아라


*

연두가 초록으로 넘어가기 전에,

연두의 눈에 푸르게 불이 들어오기 전에,

연두가 연두일 때,

연두가 연두였다는 것을 잊어버리기 전에,


모과꽃이 핀다


*

귀룰나무 꽃 질 때

나무 아래 몰통을 갖다 놓으리

지는 꽃을 받아서

지는 꽃의 향기를 츠랑츠랑 엮으리


*

모란 잎에 편지를 써서 보내면

죽은 누나 살아와서

설거지하느라 바쁠까


*

오동꽃 핀 줄 모르고

5월이 간다


*

얼레,


발랑 까진 딸이거나

속 뒤집어진 엄마거나

산비탈 얼레지


*

둥글레 겨드랑이에

둥글레꽃 피었다


겨드랑이에 털 나면

너도 꽃이 된 줄 알아라


*

이층 창가에 인동초 덩굴 오를 때까지

가지 말아라

꽃 피어 내 귀를 간질일 때까지

울지 말아라


*

펼친 꽃잎

접기 아까워

작약은 종일 작약작약 비를 맞네


*

천안에서 전주를 가려면

차령터널을 통과하면서부터

밤꽃냄새군대의 저지선을 돌파해야 한다


*

함박꽃 열리기 세시간 전쯤의 

꽃봉오리 주워 와서

빈 참이슬 병에 꽂아두었네


*

지리산 노고단 가서

물매화 보지 못했다면

하산하지 마시게


*

꽝꽝나무

그 작은 이파리마다

찰랑찰랑 자지러지는

붉은 달 뜬다


*

찔레꽃 피면

찔레꽃 발등에

보나 마나 뱀이 산다


*

6월에 제주 여행 가서

멀구슬나무 꽃 핀 것 보지 못했다면

김포공항으로 돌아오지 말 일이다


*

북에 피면 목란꽃 

남에 피면 함박꽃


*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

철둑길 강아지풀

기차 타러 나왔다

박용래 시인의 마을까지 가는 

기차가 끊겼다


*

갯메꽃처럼 바닷가에 살자

바닷물에 발은 담그지 말고

바닷물이 모래알 만지는 소리나 들으며 살자


*

참새떼가 찔레 덤불로 스며든다


*

수크렁 묶어놓고

네 발목 걸리기를

기다린 적 있었지

나 열몇살 때


*

이층 치과 창가에

능소화 입 냄새


*

길가 도랑 풀숲에 처박힌 트럭 바퀴 하나


물봉선이 귀를 대고

엿듣고 있다


*

당신은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온다고 썼지

나는 갯메꽃과 갯마을은 멀다고 쓴다


*

백지동맹 주도하다가 들킨 옛날 고등학생처럼

은사시나무들이 엎드려뻗쳐 자세로 단체 기합 받고 있다


*

잔디 깎다가

방아깨비 두어마리 허리도 잘랐다

그러고도 나 저녁밥 잘 먹었다


*

채송화 연립주택 입구에

점방을 차리려고

나비들이 분주하게 드나들고 있다


*

봉숭아 꽃씨는 

꽃이 떠나온 집,

꽃이 돌아가야 할 무덤,

꽃의 화력발전소


*

아버지 한여름에 돌아가셔서

해마다 참비름나물에

밥을 비벼 드시게 되었다


*

왼쪽으로 감고 오르는지

오른쪽으로 감고 오르는지

다투다가 능소화는 폭염을 맞닥뜨렸다


*

후박나무 잎사귀 반짝거린다

곧 바다에 닿는다


*

까마중 익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간다


*

인동 꽃잎 노랗게 변하면

신혼여행 다녀왔다는 거다


*

물봉선 피는 곳에 

모기 많아요


*

마타리꽃 피었다

곧 개강이다

나는 망했다


*

붉나무 잎사귀에 비가 내린다


빗소리로 조기를 굽고

빗소리로 누에를 키우고

빗소리로 쌀을 씻는다


*

고수꽃이 지고 나서

꽃자리 동그랗게 배가 부풀어 오르고 있다

요놈들 첫날밤을 다들 잘 보낸 모양이다


*

시누대 잎사귀는 빗방울 튕겨내는 솜씨가 다들 달라서 어스름이면 그리하여 잎사귀 아래로 다스리는 어둠의 농도도 제각각 달라서


*

산수국 헛꽃 들여다보면

누군가 남기고 싶지 않은 발자국 남겨놓은 거 같아서 발소리 가벼워질 때까지 가는 것 같아서


*

튀기 위해 끈질기게 붙어 있다


강아지풀


*

참새 한마리 발톱으로 흔들리는 강아지풀 줄기를 잡아누르고

또 한마리가 부리로 강아지풀 끝자락을 거머잡으니까

참새떼가 우르르 날아왔다


강아지풀 씨앗들 부리나케 참새의 입속으로 뛰어들어갔다


*

전주 향교 은행나무 밑둥치에

은행나무도 보습학원을 차렸다


*

오동나무가 던져주니 감나무가 받는다

감나무가 던져주니 가죽나무가 받는다

가죽나무가 던져주니 또 살구나무가 받는다


까치 한마리를 

받는다


*

화엄사 뒷산 단풍 나 혼자 못 보겠다

당신도 여기 와서 같이 죽자


*

바랭이풀은 몸에서 씨앗들 다 떼어 낼 때까지 버텼다

서리 내리자 과감하게 

무릎 꿇었다


*

백두산 천지 갔다가 구절초 씨앗 몇 받아 왔다

박성우 시인에게 주었더니 

기어이 모종판에 묻었다 한다


*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일제히 고개 돌려 눈 내리는 걸 바라보는 억새들


*

꽃무릇 이파리 저마다 푸른 치마를 펼치고

내리는 눈을 받는다


*

먹쿠슬낭 열매

자랑자랑


*

더이상 시큰거리지 않게

미나리는 발목을 얼음장 속에 넣었다


*

나무의 정부에서는 

금강소나무가 대통령이다


*

두릅 새순 위에 진눈깨비, 진눈깨비

맨발로 다니다가

가시에 찔릴라


*

복수초에게도

설산이 있었지


*

이름에 매달릴 거 없다

알아도 꽃이고 몰라도 꽃이다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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