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멘타 하인학교 (무선) - 야콥 폰 군텐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
로베르트 발저 지음, 홍길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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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이 세상에는 소위 발전이라는 것이 존재하긴 하지. 하지만 그건 좀 더 뻔뻔하게, 그리고 가차 없이 대중들에게서 돈을 뜯어내기 위해 장사꾼들이 퍼뜨리는 무수한 거짓말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야. 대중, 그것은 현대퍈 노예다. 그리고 개인은 그 굉장한 집단사고의 노예지. 이제 아름답고 훌륭한 것이라고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아름다움과 선함과 정의로움은 꿈에서나 찾아야 해. 말해봐라, 꿈꾼다는 게 뭔지 알고 있냐? 많은, 많은 돈을 벌려고 노력해라. 모든 것이 엉망이지만 돈은 아직 건재하다. 모든 것, 모든 것이 파괴되고, 반쪽이 나고 우아함과 화려함을 빼앗겼다. 우리의 도시들은 흔적 없이 사라져가고 있다. 집과 궁궐들이 있던 자리를 그루터기들이 차지한다. 사랑하는 동생아, 피아노, 그리고 서투른 피아노 연주! 연주회와 연극은 한 계단 한 계단씩, 점점 더 낮은 곳으로 추락하고 있다. 물론 큰소리를 치는 상류층 같은 존재들이 여전히 존재하기는 하지. 하지만 그들에겐 더 이상 품격과 섬세한 감각을 표출할 능력이 없다. 책들이 있었지...... 한 마디로 말하지만, 절대로 겁 먹지 마라. 가난하게 경멸 받으면서 살아. 사랑하는 친구야, 돈 생각일랑 떨쳐버려라. 그것이 가장 아름답고, 가장 승자다운 것이다. 인간은 정말 불쌍하기 그지없는 존재다. 부자들은 말이다, 야콥, 불만에 가득 차 있고 불행하단다. 오늘날의 부자들은 더 이상 가진 것이 없단다. 그들이야말로 진정 굶주린자들이란다. 


* 하지만 나는 엄밀히 말하자면, 나의 생각하는 능력을 전부 경멸한다. 나는 경험들만을 존중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경험들은 모든 사고와 비교로부터 자유롭다. 그래서 나는 내가 문을 여는 방식이 소중하다고 여긴다. 문을 여는 그 행동 속에는 하나의 질문에 담겨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은밀한 삶이 들어 잇다. 하긴, 지금은 모든 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질문하고, 비교하고, 그리고 기억하게끔 만들고 있다. 물론 생각도 해야만 할 것이다. 그것도 아주 많이. 하지만 순응하는 것, 그건 생각하는 일보다 훨씬, 훨씬 더 고상한 일이다. 생각을 하면 저항하게 된다. 그래서 생각하는 것은 항상 꼴사납게 일을 망쳐버린다. 철학자들, 그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많은 것을 망쳐놓았는지를 알기나 할까. 의도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무언가를 행한다. 그러니까 말이다, 그게 훨씬 더 필요한 일이라는 말이다. 이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머리들이 쓸데없이 일하고 있다. 그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다. 학술적으로 다루고, 이해하고, 지식을 갖게 되면서 인류는 삶에 대한 용기를 서서히 잃어버리고 있다


* 이곳 벤야멘타 학원에서는 상실감을 느끼는 법과 견디는 법을 배운다. 나는 그것이 일종의 능력, 훈련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훈련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유능하고 아니고를 떠나서 그저 덩치 큰 아기, 칭얼대기만 하는 울보로 남을 것이다. 우리 훈련생들은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 삶의 희망들을 가슴속에 품는 것이 우리에게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더할나위없이 느긋하고 밝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가지런히 빗질된 머리 위로 수호천사라도 날아다닌다고 느끼는 것일까? 뭐라 말하기는 힘들다. 어쩌면 우리는 어리석기 때문에 밝고 걱정 없이 지내는지도 모른다. 그럴 수도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가진 마음의 밝음과 건강함의 가치가 떨어지는가? 우리가 정말 어리석은 걸까? 우리 몸은 진동하고 있다. 외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우리는 많은 것에 조금씩 주의를 기울이고 있으며, 때때로 이성적이 되기도 하고, 또 바람이 부는 모든 가능한 방향으로 감각들을 날려 보내서 경험과 관찰을 모은다.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것들은 많다. 그것은 우리가 대체로 매우 열성적이고 진취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겸손할 줄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을 너무 높이 평가하는 사람은 자신감을 잃게 되거나 모욕을 당하게 될 때 위태롭다. 자의식에 찬 사람들은 의식에 적대적인 무언가를 끊임없이 맞닥뜨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 생도들에게 아무런 존엄성도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매우 매우 유동적이고, 작고, 유순하고, 순응을 잘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필요에 따라 우리의 존엄성을 보이기도 하고 접어두기도 한다. 우리는 보다 고상한 문화의 산물일까?아니면 자연의 아이들인가?이것 또한 대답하기 힘들다. 한 가지는 확실히 알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우리가 지닌 가치이다. 그래, 우리는 기다린다. 말하자면 저 인생의 소리에, 사람들이 세계라고 일컫는 저곳에 폭풍우 몰아치는 저 바다에 귀 기울인다. 


* 생각하는 삶일랑 이제 집어치운다. 나는 벤야멘타 씨와 함께 사막으로 간다. 보고 싶다. 황야에도 삶이라는 것이 있는지 보고 싶다. 호흡하고, 존재하고, 정직하게 선을 추구하며 살게 되지는 않을지 보고 싶다. 밤에 잠을 자고 꿈을 꿀 수 있는지도 알고 싶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건가. 이제부터 나는 그 무엇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신에 대한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인가? 그렇다! 신은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신에 대한 생각을 한단 말인가? 신은 생각하지 않는 자와 함께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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