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다시 읽고 싶은 명작 2
엔도 슈사쿠 지음, 김윤성 옮김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2009년 1월
평점 :
품절


표지의 왼쪽 윗부분에 <다시 읽고 싶은 명작 2>라고 되어 있다.

내가 명작을 알아보기야 하랴만 

명작의 대열에 선 두번째 책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글 중 통역의 말이다.


"(...) 용기도 때로는 남에게 폐가 되오. 

우리는 그것을 맹목적인 용기라 말하고 있소이다.

대체로 신부들 가운데는 이 맹목적 용기에 사로잡혀 우리나라에

폐를 끼치고 있다는 것을 잊은 자가 많소."


"받기 싫은 물건을 강제로 떠맡기는 것을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바로 이렇게 강요된 물건과도 같습니다.

우리에겐 우리의 종교가 있습니다.

이제와서 외국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생각은 없소.

나도 신학교에서 신부들의 학문을 배웠지만, 

생각하건대 지금에 와서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는 도무지 생각되지 않소."


전도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들이 나에게 전도라는 목적으로 다가올 때마다 

내가 느끼는 것은

그들에게 좋은 것이 다른이에게도 반드시 좋을 것이란 

믿음에서 출발한 전도는 올바른 전도가 아니지 싶다는 것이다. 


지쿠고노가미의 치를 떨게 하는 극악무도한 고문이 있는 이런 곳으로

그것도 몰래 잠입해서,

나의 생명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의 생명까지 담보로 해가며

선교를 해야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도 들어서 

통역의 말도 일리는 있겠다 싶었다. 


아름다운 것은 멀리멀리 퍼져나가는 것이 아닐까.

그들이 자신의 나라나 그 주변부터 

서서히 그들의 선과 사랑을 퍼트리다보면 

언젠가는 모두에게 가 닿게 되지 않을까.

그 시기가 좀 늦는다고 하여 하느님이 역정을 내실 분은 아니지 않나.

무고한 죽음이 많아서 이런 생각도 해보게 된다. 

그것을 순교라는 이름으로 영광스럽게 생각한다면 할말이 없기도 하다. 


고난과 역경이 올 때마다 신부는 예수님 삶의 수난을 떠올리고,

그분의 얼굴을 떠올리며 용기를 내는 장면은 나를 경건하게 만들었다.

구원이 어디 달리 구원이겠는가!



책의 마지막 장에서

나는 하느님의 침묵을 마음으로는 이해하게 되는 듯도 해서 뭉클했다.


"(...) 성직자들은 모독적인 행위를 몹시 책할 테지만, 

나는 그들을 배반했을지 모르나 결코 그분을 배반하지 않았다.

지금까지와는 아주 다른 형태로 그분을 사랑하고 있다.

내가 그 사랑을 알기 위해서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이 나라에서 지금도 최후의 그리스도교 신부다.

그리고 그분은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설령 그분은 침묵하고 있었다 해도 

나의 오늘날까지의 인생이 그분에 대해 얘기하고 있으니까."




아주 오래 전에 본 영화 <미션>이 떠오른다.

그 내용은 너무 오래여서 대부분 잊었지만 

그때 밀려오던 그 숭고한 감동만은 기억에 생생하다.

이 책을 읽고 보니 다시한번 그 영화가 보고싶다.







* 신앙은 결코 한 인간을 이런 겁쟁이나 비겁자로 만들지 않습니다.


* 수많은 일본 신자와 신부가 같은 기분으로 자기 발 앞에 놓인 성화를 대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이 불쌍한 세 사람에게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밟아도 좋아요. 밟아도 좋아요."

이렇게 소리친 뒤에야 나는 내가 신부로서 입 밖에 내서는 안 될 말을 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 (...) 당신은 그들에게 용기를 주시지 않고 이 어둠처럼 왜 그저 침묵만 지키고 계셨습니까? 왜?


*욕설과 모멸에 견디는 얼굴이 인간의 표정 중에서 가장 고귀하다는 것을 그에게 가르쳐 준 것은 그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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