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삶의 나침반이 있다
법상 지음, 용정운 그림 / 아름다운인연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그 분이다>,  카르투시오 수도원에 대한 영화 <위대한 침묵>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구절이다.

<내가 '깨달음'을 찾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 내가 바로 깨달음이다. p300> 라고 이 책에서는 말한다.

 

결국 내 안의 진실한 <나>를 만나는 것이 이 모든 것의 진리인 것일까?

하느님, 하나님, 예수님, 불성, 우주, 이 모든 것은 결국 같은 것을 이르는 말일까? -  바로 <나>!

 

kbs 다큐 <세상 끝의 집>을 보았다. 어떤 이들은 그런 봉쇄수도원에서 침묵과 묵상으로 神<나>을 찾고,  어떤 이들은 산사에서, 어떤 이들은 임사체험을 통해서, 어떤 이들은 자연 등등에서 각자의 신<나>을 찾고 있는, 또는 찾은 것인가 싶다.

 

그렇다면 세상의 진실은 바로 <나>인 것일까!!

 

 

 

 

 

 

*완벽하지 않은 당신, 그래서 다행이다.

 

*그들에게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나를 대해 주기를 바라지 마라. 그들이 바뀌기를 바라기보다 내가 어떻게 바뀔 것인가를 살피라. 그들은 어지간해서 바뀌지 않는다. 그가 나를 찾아온 사명이 있기때문이다. 사실은 내 안에 어떤 문제를 해결해 주고, 삶의 지혜를 주기 위해 그들은 나를 찾아온 것이며, 근원에서는 내 안의 어떤 문제들이 그들을 내 삶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그들이 내게 온 이유는 전적으로 내게 있다. 그들은 내가 변화됨으로써 나의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혹은 지혜를 얻고 성장할 때까지 그들의 고집을 꺾지 않을 것이다.

 

*바로 그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 그 부분이야말로 내가 그를 통해서 배우고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는 귀중한 힌트다.

 

*모든 괴로움은 언제나 깨달음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찾아 온다. 또한 당신을 돕기 위해 찾아온다. 당신이 죄 지은 것이 많아서 그 죄를 응징하려고 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자비), 당신을 깨어나게 하기 위해서(지혜) 오는 것이다. 즉 모든 괴로움은 곧 '지혜'와 '자비'를 품고 온다.

 

*사실 이 세상에는 절대적으로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없다. 그렇기에 아무리 옳은 것이라도 거기에 지나치게 집착하면 그것은 옳지 않은 것이 되고 만다. 어떤 것이 좋을 때 '나는 그것이 좋아'라고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이 좋아'라고 할 때 우리는 자동적으로 그것이 아닌 것들을 좋지 않은 것으로 만든다. 둘로 나누어 차별하는 분별심이 작동하는 것이다. 분별심은 우리를 중도의 지혜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 절대적으로 옳다고 확신하는 생각이야말로 정확히 틀렸다는 것을 기억하라.

 

*안 되면 어쩌지 하는 부정적인 생각이 바로 그 일이 안 되는 방향으로 에너지를 흐르게 한다. (...) 부정적인 생각 없이, 망설임이나 주저함 없이 근원에서 턱 내맡기고 저질러 보라. 결과는 아예 생각지도 말고 다만 행하라. 잘되고 안 되고는 우주의 뜻이라 생각하고 내맡기면 오로지 힘을 한 방향으로 쓰게 된다. 그때 우주의 전적인 지원을 받는다. 결과는 시작하는 마음 안에 이미 담겨 있다. 첫 마음이 전부다.

 

*육식보다는 채식을, 대자연에 가까운 음식을, 때에 맞춰 먹고, 조금씩 먹으며, 천천히 먹으라.

 

*'주는 마음'을 연습하면, 계속해서 더 줄 수 있는 상황, 즉 부와 풍요가 넘쳐나게 된다. 계속 줄 수 있는 현실이 창조되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을 먼저 상대방에게 주라. 성공하고 싶다면 남의 성공을 도와주라. 진급하고 싶다면 남의 진급을 도와주라. 사랑받고 싶다면 먼저 상대를 사랑하라. 부자가 되고 싶다면 먼저 베풀어 주라. '주는 것'은 곧 '받는 것'이다. 상대방은 곧 나 자신이다. 근원적으로 너와 나라는 분별은 없다. 그렇기에, 너에게 주는 것은 곧 나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

 

*만약 붙잡고 있는 것이나 사로잡혀 있는 것이 있다면, 대상을 실체화시키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그 어떤 대상도 실체는 없다. (...) 그저 오고 가는 모든 것을 붙잡아 집착하지 말고 오고 가도록 내버려 두라. 그것이 '놓아버림'이다. 버리려고 애쓰라는 것이 아니라 그저 붙잡지만 말라는 것이다.

 

*앞으로 내 인생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삶 자체에 전부 '내맡겨' 보라. 우주법계의 큰 질서에 완전히 내맡겨 보라. 내맡기고 가볍게 살아가라. '내가' 잘 살아 보려고 애쓰는 것은 아상에 휩쓸린 어리석은 삶일 뿐이다. 나는 없다. 내가 있다고 여기면서 내가 어떻게 해 보려는 마음이 모든 괴로움을 만들어 낸다. 그러니 나에게 삶을 맡기지 말고 그저 삶 그 자체에 모든 것을 내맡기고 마음 편히 살라.

 

 

 

*지금 이대로의 현실이 바로 진실이요 진리다. (...) 그런데 이처럼 이대로가 바로 진리라면 왜 내 인생은 괴로운 것일까? 그것은 바로 분별심 때문이다. 분별심이란 지금 이대로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고, 자기 식대로 해석하고 분별하면서 좋다거나 나쁘다는 등으로 판단하는 것을 뜻한다.

 

*극과 극은 통하는 법이다. 어느 한쪽에 극단적으로 집착하면 그 반대편도 상승한다. (...) 참된 자비는 둘 중 어느 하나만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둘로 나누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나뉘지 않은 전부를 평등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이것은 둘로 나누지 않는 不二의 방식이고,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취하거나 버리지 않는 방식이다. 그 구체적인 방법이 바로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다만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받아들임'과 '알아차림'이라는 놀라운 연금술이다.

 

*不二法, 나와 둘로 나뉜 존재는 없다.

 

*삶을 앗아가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내 안의 생각과 판단들이다. 생각이라는 허망한 환상 속 세상에서 사느라, 생생한 현실을 죽이지 마라. 매 순간을 생생히 경험하고 누리고 느끼며 온전히 살아 내라.

 

*직관력은 삶에서 힘을 빼고, 유연해져서 그 모든 것이 들어오도록 자신을 활짝 열어 자연스러운 삶에 자신을 내맡길 때 드러나기 때문이다.

 

*참된 고요함은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는 생각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다. 생각이 일어나도 일어난 바가 없어지는 것이다. 주인이 되어 생각을 필요할 때만 쓰라.

 

*불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을 뿐이지 불완전한 사람은 없다. 불행하다고 판단하는 사람이 있을 뿐 불행한 삶은 없다.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지언정 부족은 없다.

 

*어떤가? 분별하지 않고 안심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공연히 힘들여 분별해 놓은 그 환상에 빠져 제 혼자 허우적거리고 살 것인가? 그것은 단순한 자신의 선택일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