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과 사랑의 대화
김형석 지음 / 김영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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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제일교회에서 김형석 교수님의 강의가 있었다.

100세 노인의 모습이 아니라,

100세 노교수의 모습이었다고 말하는게 더 나를 흡족하게 하는 표현일 것 같다.

어쩌면 그리도 당당하신지, 어쩌면 그리도 말씀이 바르고, 진솔하신지,

어쩌면 그리도 흐트러진 모습 하나 없으신지,

자신의 제자들을 이를때는 꼭 "내 사랑하는 제자가~~"라고 말씀하실 때는

제자를 향한 스승의 사랑이 그대로 내게 다가왔다.

앞으로의 나의 인생에 귀감이 되실 분 같았다.

독서하라, 일하라, 이 두가지 외에도 내 가슴을 울리던 말씀은,

나를 위해서 한 일은 남는게 없더라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내 선한 이웃을 위해서 하라는 말씀은

무척 귀한 것이 되어서 나의 가슴을 채웠다.

 

교회에 모인 대부분의 청강자들은 노인들이었는데, 내 보기에 이런 강의는 노인들을 위한

것이기 보다는 30 ~ 60대의 사람들이 들었으면 더 좋을 것 같았다.

 

오래 전에 김형석 교수님의 책 제목들에 이끌렸던 적이 있었으나

책읽기로 이어지지는 못했는데, 이번을 계기로 그의 책들을 읽게 되어서

여간 고맙고 기쁘지 않다.

 

이 책, <영원과 사랑의 대화>는 무척 재미나게 읽었다.

아쉬운 점은 각 수필마다에 그 글을 적은 연도를 표시해두었더라면

시대나 상황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더 많이 되었을텐데 라는 것이다.

또한 마지막에 넣어 두신 어느 지인의 사랑이야기는,

이 책 전체의 교수님의 잔잔하지만 울림있는 수필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것이어서

없는 편이 나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으나,

그 지인을 생각하는 교수님의 마음을 헤아려보자니, 충분히 이해가 됨직도 했다.

 

오래 전,

자신의 종교인 기독교를 어떻게 표현하셨을까,

신앙을 어떤 시각으로 보셨을까가 무척 궁금했었는데,

역시 교수님은 시대의 본보기이자 귀감이신 분이시며,

말씨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강의하시던 모습에서,

자신의 학생들에게도 높임말을 사용하는 것에서,

거듭 어떤 100년의 삶을 보내고 계시는지 느껴졌다.

 

내 앞에 거대한 산이 있어서,

거센 태풍은 막아주고,

사시사철 아름다운 풍광은,

부드러운 미풍은,  

나를 더 즐겁고 건강한 삶으로 이끌어주며, 격려해주며, 위안을 준다.

오늘도 그 큰 산 하나를 가슴에 품었다.

 

 

 

 

 

 

*종교계의 성자들은 문제 삼을 필요가 없이 인류의 벗이라고 곧 느껴진다. 저물어 가는 저녁,

석가님의 옆에 서서 이야기를 들으며 산 밑의 마을로 걷고 있는 자신을 생각해보라.

공자님을 모시고 식탁에 둘러앉아 잔을 나누며 그 원만한 인품에 접하고 있는 위치에

스스로를 놓아보라. 감람산 웅기중기 솟은 바윗돌 모퉁이에 가지런히 누워, 들려오는

그리스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잠드는 제자들의 한 사람으로 자처해보라.

 

*"무엇을 그렇게 걱정하나? 옳다고 믿는 대로 살면 곧 뜻대로 될텐데!"

 

*청년기는 근면과 더불어 활동의 기간이다. 가장 많은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가장 큰 수고와

노력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그래서 청년기는 언제나 분투와 고생의 기간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것이 삶의 목적인가?' '이러기 위하여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악을 이겨나갈 수 있는가?' (...) 사람의 일생을 등산에 비교한다면 정신적인

면에서는 등산의 수고가 곧 악에의 항쟁인 것이다. 높은 산정에서의 즐거움과 행복,

그것은 악과 싸워서 승리한 사람에게 주어진 만족과 행복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건강한 삶이 중요하다는 사실에는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건강이

유일한 조건도 아니며 절대의 여건도 못 된다는 사실을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병을 통하여 인생의 뜻을 깨닫기도 하며, 건강치 못한 사람은 모두가 불행해진다는

이론도 성립되 못한다. 건강은 소망스러운 조건이다. 그러나 절대의 유일한 조건과 목적은

되지 못한다.

 

*인간은 결국 자기 인격의 성장만큼의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인격이 50이면 그 사람은

모든 면에서 50의 생활 이하에 머문다. 인격 이상의 삶을 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릇의 크기만큼 물건을 담을 수 있다는 이치와 마찬가지다.

 

*이렇게 해서 나는 남이 소유하는 것은 다 버려도 남이 자기의 것으로 할 수 없는 것은

모두 내 것으로 하자고 마음에 타일렀다.

 

*오늘 우리는 전 세계의 기독교 특히 카톨릭교회의 초대 대표자인 예수의 제자 베드로를 안다.

베드로는 어부였다. 고기를 잡아 몇 식구의 식생활을 해결해야 하는 초라한 늙은이였다.

이미 수십 년을 물고기잡이에 다 허송해버린 인생의 찌꺼기에 지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남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을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 그리스도를 발견했다. 그의 늙은 육체, 보잘것없는 심중에는 새로운

불길이 타올랐다. 그는 마침내 전 세계를 불사르는 새로운 역사의 혁명을 이룩하고야 말았다.

(...) 공연히 불필요한 후회로 한숨을 지을 때가 아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우리 인생의

게임을 다시 시작하자. 최선의 노력으로 다시 출발하자. 역사는 언제나 이런 인간을 찾는

것이며 신은 항상 이러한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제3의 부류가 있다. 그들은 늙음을 모르는 사람들이며 죽음이 눈앞에 당도

할 때까지 젊은이다운 신념과 희망을 가지고 꾸준히 일하는 사람이다. 노년기에 이를수록

더욱 성스러워지며 나이와 마찬가지로 인생의 의의를 보다 깊이 발견해 나아가는 사람들

이다. 항상 어린이 같은 고운 마음씨와 무엇인가 한 가지라도 더 남겨주고 싶은 심정에서

노년기를 보내는 이들이다. 이런 사람의 수가 아주 많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실망할

정도로 그 수가 적은 것도 아니다. (...) 그러나 지금 이야기한 제3의 노년기를 맞이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가? 송죽과 같이 항상 푸르며 노년기를 가장 충만한 행복과 영광으로

맞이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거기에는 앞에서 말한 두 종류의 노년과 근본적으로 다른 조건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종교와 신앙, 내세관의 유무인 것이다. 이것이 있고 없음이, 그것을 가지고 못 가짐이 인생의

노년기를 절대적으로 지배해버리는 것이다. (...) 신앙과 내세관을 확고히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라도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는 아침을 맞이하는 즐거움이 있다. 기대를 가지고

노년을 준비하기 때문에 보다 귀한 업적을 남길 수 있는 기간을 보내게 된다.

 

*"(...) 나는 이런 체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내세를 아무리 얘기해도 필요가 없다고 봐요.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또 이미 체험하고 믿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설명도 필요가 없을 거에요.

그래서 파스칼이 '세상 사람들은 철학자를 보고 놀라나 철학자들은 기독교인을 보고 놀라게

된다'고 말한 것이 아닐까요. 내 이성이 내 신앙에 놀라는 때가 있으니까요!

이런 체험을 한 사람에게 내세를 의심하라는 것은, 물건을 사다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돌아옴을 기다리는 아들에게 어버지의 약속을 믿지 말라는 것과 같지 않을 까요.

(...)"

나는 지금도 종교는 체험이라고 믿는다. 체험에 의한 내적 확증이 없는 곳에 신앙적 진리는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 종교를 생각 속에서 비판만 하는 사람은 어는 종교든 택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을 체험하는 사람은 하나의 종교를 택하게 마련인 것이다.

그러므로 파스칼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철학자나

학자의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진정한 종교와 참다운 신앙을 위햐여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건전한 인격과 무게 있는

이성이다. 먼저 신념 있는 도덕적 주체성을 지닌 이성인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인간이 스스로의 전 인격과 삶의 과제를 가지고 종교의 문을 두드리며 신과의

관계를 맺게 되었을 때 비로소 신앙은 자라는 것이며 신은 우리들의 인격적 호소와 관심에

응해주는 실재로 나타난다. 진정한 종교는 이렇게 자라왔으며 앞으로도 그 생명은 이러한

위치와 사실을 통하여 계승 발전될 것이다.

진정한 이성인의 체험이 못되면 타당성을 가질 수 없으며, 완전한 인격적 사실이 아니면

신앙의 내용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신적 위치에서 신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만

있다면 그 얼마나 행복스러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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