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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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책,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은 내게는 참 어려웠다.

 

"그러나 심미적 판단을 야기하는 그러한 즉시성이 우리를 속임으로써 마치 그런 판단의 기원이

전적으로 자연스럽고, 또는 그런 판단의 평결이 변경 불가능하다고 간주하게끔 만들어서는 안 

된다."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中에서)

 

위와 같은 문장이 많아서 이해 할려면 몇 번을 읽어야 하는, 내게는 쉽지 않은 알랭 드 보통

이어서 2016년 1월에 그를 잊었다.

그러다 최근 그를 TEDTALK과 유튜브에서  "status anxiety"라는 제목으로 보고는 상당히

솔깃했다. 단지 제목만 솔깃했을 뿐이며, 그의 빠른 영어를 알아들을 도리는 전혀 없었는데,

댓글은 또 읽을 수 있는지라, 그 댓글들이 그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이고, 우호적이어서 다시금

그를 찾게 된 것이 이 책, <불안>이다.

 

<홍승찬>의 음악 이야기가 그렇게 재미있더라.

<한젬마>의 미술 이야기도 재밌더라. 비록 그녀의 "그림읽어주는 여자"가 대필이든,

아니든 간에 그 책은 재밌더라.

<박종호>의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 1, 2, 3"는 내 온 몸의 벅찬 피를 음표로 바꾸어주는 듯한, 

그러면서 음표의 밤하늘에 영롱한 별같은 그런 책이었다.

<이덕일>의 "조선왕을 말하다"에서 이야기가 있는 역사는 참 재밌구나를 알았다.

<오주석>의 "한국미 특강"에서 받은 감동은 그야말로 최고였다. <마상청앵도>, <송하맹호도>,

<소림명월도>의 아름다움을 이 책이 아니었으면 어찌 알았겠는가.

 

나에게 음악, 미술, 철학, 역사 등등은 호락호락한 분야가 아니어서, 특히 역사는 나에게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고등학교때 역사선생님 탓을 하고 싶다), 그래서 사극조차도 싫어하는

분야인데, 이러한 것들을 옆에서 이야기 하듯 풀어서 알려주니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더라.

그래서 "스토리텔링", 이 말을 참 좋아한다.

이 책, <불안>도 내게는 어쩌면 "스토리텔링"이 되어 주는 듯 하다. 내가 느끼는 시대사조적인

이야기가 제일 좋더라. 몇몇 소설과 그림에 대한 설명은 솔깃하게 읽었으며, 능력주의나

보헤미아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있었다.

그러나 내게는 쉽게 술술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더라.

기승전결이 워낙 분명한 것들에 익숙하다 보니, 마치 이 책은 결론없는 프랑스 영화를 보고

난 듯한 느낌?, 작게작게 울림이 있는 듯 한데 다 읽고보니 무엇을 읽었는지 잘 모르겠는.

다음에 한번 더 읽게 되면 지금의 독후감에서 보다는 <불안>에 대해 할 말이 더 많아질려나..

 

유튜브에 올라 온 그의 강의들에서, 청중을 웃게 만드는 그의 유머가 어떤 것들인지 몹시 궁금

한데 영어가 너무 짧아서 안타깝다. 그 청중들이 웃을 때, 나도 웃을 수 있을 그 날을 간절히

소망한다. 그의 깨끗하고 선한 눈빛, 유머러스할 듯한 표정이 참 좋다.

 

 

 

 

 

 

*속물의 독특한 특징은 단순히 차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인간의 가치를

똑같이 본다는 것이다.

 

*결국은 두려움이 모든 일의 근원이라는 느낌이 든다. 자신의 자리에 확신을 가지는 사람은

남들을 경시하는 것을 소일거리로 삼지 않는다. 오만 뒤에는 공포가 숨어있다. 괴로운 열등감

에 시달리는 사람만이 남에게 당신은 나를 상대할 만한 인물이 못 된다는 느낌을 심어주려고

기를 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같다고 느끼는 사람들만 질투한다.

 

*자존심=이룬 것/내세운 것

 

*발전한 사회는 역사적으로 볼 때 전보다 높아진 소득을 제공하기 때문에 우리를 더 부유하게

해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과를 놓고 볼 때 우리를 더 궁핍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무제한의 기대를 갖게 하여 우리가 원하는 것과 얻을 수 있는 것, 우리의 현재의 모습과 달라

졌을 수도 있는 모습 사이에 늘 간격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원시의 야만

인보다 더 심한 궁핍을 느낄 수도 있다.

 

*철학자들은 우리의 지위가 장터의 감정이나 변덕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지적인 양심에

의지하여 안정을 얻을 수 있는데, 이것은 이성 덕분이라고 보았다. 이성적으로 검토해보았을 때

공동체로부터 불공정한 대접을 받은 것이라면 공동체의 판단에 흔들릴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망상에 사로잡혀 2 더하기 2는 5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한다 한들 흔들릴

필요가 있겠냐는 것이다.

 

*샤르댕이나 존스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쾨브케의 예술에도 무엇이 중요한가에 대한 지배적인

물질적 관념에 도전하는 태도가 자리 잡고 있다. 세 화가는 여름날 저녁의 하늘, 햇볕에 달구어

진 얽은 벽, 환자를 위해 달걀 껍질을 까는 미지의 여자가 우리 눈이 보고 싶어 하는 가장 아름

다운 광경에 끼지 못한다면, 우리가 존중하고 갈망하도록 배워온 많은 것의 가치를 의심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 일상생활을 묘사한 위대한 화가들은 제인 오스틴이나

죠지 엘리엇처럼 세상에서 무엇을 존경하고 존중할 것인가에 대한 속물적 관념을 교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농담은 비판의 한 방법이다.

 

*이상적인 지위는 오래전부터 계속 바뀌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바뀔 수밖에 없다.

 

*어떤 것에 계속 눈이 가는 상태에서 벗어나는 가장 빠른 방법은 그것을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

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불안을 극복하거나 욕망을 채우려고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노력은 하더라도 우리의 목표들이 약속하는 수준의 불안 해소와 평안에 이를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선망을 멈추지 못한다면, 엉뚱한 것을 선망하느라 우리 삶의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비할 것인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에 저항하고 싶다는 어렴풋한 충동, 늘 억눌러

왔던 그 모호한 충동이 어쩌면 정말로 중한 것이며, 나머지는 모두 진짜가 아니었는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공적 의무, 생활방식, 가족, 사교계와 자신의 분야에 속한 사람들이

고수하는 가치, 이 모든 것이 진짜가 아닌지도 몰랐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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