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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물고기
권지예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월
평점 :
품절


 

  <<4월의 물고기>>(이하 <4월>)은 영화나 드라마로 재현될 것을 염두한 소설이 아닐까 한다. 그 이유로 첫째는 아마추어 같은 문장 탓이며, 둘째는 영상으로 재현되면 보기좋을 소재들이 대거 등장했다는 것이며, 마지막으로는 서툴러도 장르의 혼성을 감행한 탓이다.

아마추어 같은 문장, 다시 말해 이상문학상과 동인문학상을 2002년과 2005년에 거머쥔 기성 작가의 글솜씨라고 여겨지지 않을 만큼, <4월>의 글은 대단히 실망스러웠다. 그 한 예로, 이제 이야기가 막 펼쳐지는 초반부의 상황을 조금 옮겨본다.

"영화관은 안은 럭셔리했다. 비행기 일등석 좌석을 연상시키는 안락한 의자에 (...) 생일, 축하해요. 오늘 멋져요. 서인이 속삭이자 그는 와인 잔을 살짝 들어 올리며 윙크를 했다. 나 이뻐요? 오늘 잘 보이고 싶어요. 그런데 이 영화 어떨지 모르겠어요. 난 이 감독 싫어요. 극장의 골드클래스를 예약하려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왜 싫어요? 현실을 너무 까발려서 징그럽고 야비해요. 오늘 같은 날은 낭만으로 싸 발라도 모자랄 텐데 이런 영화를 보다니...... 아직까진 난 연애에 대한 환상을 벗기고 싶진 않거든요. 서인 씨는요? 까서 먹는 재미가 있잖아요. 그가 풋, 하고 웃었다. 서인이 차가운 와인을 입술에 대고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난 오히려 좀 불편한 영화가 좋아요. 그렇고 그런 익숙한 영화는 지루해요. 하여간 서인 씬 쿨해." - 10~11면

아아 쿨해도 너무 쿨한 문장과 묘사가 아닐까? 오래 전에 대형 서점 안에서, 2002년 이상 문학상 작품을 서서 읽었던 기억을 갖고 있던 나에게 <4월>의 초반부가 주는 당혹함과 뜨악함은 어디에서 위로받을 수 있을런지.

어떤 게 좋은 문장인지 단박에 알아볼 수 있는 식견이 있는 사람도 아닌 나조차 의문이 드는 글이다. 그런데 이 상황을 10년이 넘게 글을 써온 작가가 모를 리가 있겠느냐는 거다. 그래서 드는 생각이 <4월>은 글을 읽는 독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마치 드라마의 대사처럼 실제 말을 하는 배우들을 염두하고 쓴 '대본'이라고 여겨진다. 그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수정도 가능하고 '애드립'도 가능한 허술한 대본 말이다.
 

2.
두 번째 이유을 살펴보자. 여주인공인 진서인은 매끈한 몸매가 돋보이는 요가 강사이며, 남주인공인 강선우 역시 키가 크고 마른 몸에 조각같은 얼굴의 사진 작가다. 이들의 사연이 펼쳐지는 장소는 주로 경기도 산속 마을의 호반이라는 호숫가 근처의 펜션, 그리고 이들이 다녀가는 탱고 음악이 흐르는 카페나 요가원은 역시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한다.   

장소뿐만이 아니다. 유부남과의 일탈도 즐길 줄 아는 메이크업 아티스트인 혜경(진서인 친구)과 온몸에 비를 맞고 강선우의 옥탑방에 등장했던 유정이라는 여학생의 존재 등 두 주인공과 함께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조연들의 이미지와 그들이 갖고 있는 사연들은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자극성까지 두루 갖춰있다. 이처럼 <4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 이미지가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물론 작가의 말마따나 "미스터리 스릴러"가 가미된 소설인 만큼 남녀 주인공들에게는 곳곳에 복선이 깔아지지만) 즉, 모호하거나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이미지를 갖고 있는 인물들이 아니라, 제각기 맡은 역할과 성격이 분명해 영상으로 담아내기가 수월해 보인다는 말이다.  

3.  

  이제 세 번째를 이유를 알아보기 전에 작가 스스로 밝힌 <4월>의 장르를 살펴보자. <4월>은 애절한 러브스토리에 근본을 둔, 미스터리 스릴러적 요소를 더한 소설이라고 한다.  <4월>의 뒷표지에 하성란 작가는 "다채로운 기법들은 이질적이되 너무도 자연스러워 재봉선마저 눈에 띄지 않는다" 라고 위와 같은 장르의 혼성과 그 완성도를 극찬했지만, <4월>을 읽은 한 독자의 입장에서는 그와 같은 다채로운 장르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시 말해, 서툰 목수가 짠 가구 같다는 말이다. 통속적으로 진행되던 진서인과 강선우의 "러브라인" 전선에  '미스터리'가 생기면서 진행되는 스릴러적 요소들은 당황스러웠지만 예측이 가능했고 그 결말 역시 이 독자의 예상을 뒤집지 않았다.

여기서 의문이 든 거다. 왜 작가는 이러한 장르의 혼성을 감행했을까? 작가들의 새로운 시도와 모험은 독자의 입장에서는 언제나 환영하지만, 작가의 이력마저 의심이 들게 하는 서툰 시도라면, 득보다 실이 더 클 터인데! 그 이유 중에 하나로, 작가는 독자를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작가의 기존 글을 읽고 그 작가의 새로운 시도를 알고 있는 독자와 그 시도의 결과물로 처음 만나는 독자. 그 차이 속에서 자신의 글을 다시 한 번 더 읽게 되는 독자도 있을 테지만, 두 번 다시 안 읽게 되는 독자도 생길 수 있을 테니까. (물론 반대로 생각하면 독자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도 말한 바가 있지만, 독자나 작가나 어떤 책으로 처음 만나느냐는 서로에게 운이 아닐런지)  아무튼 이런 상황에서 무리수를 띄울 수 있는 것은, <4월>이 글로 남겨지는 책이 아니라 영상으로 남겨지기 위한 책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고 본다. 그리고 한 번 탈고된 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한 번 각색과 수정이 가능한 '이야기'라면 전력을 다해 안 쓰게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 모든 것은 <4월>을 읽은 한 독자의 추측이고 느낌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4월>은 앞서 말한 문장의 미숙함이 느껴져도 가독성 있게 읽혀지는 소설이다. 선명하게 그려지는 영상이 그 이유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남녀 주인공의 운명적인 사랑과 비극적인 결말이 영화나 각종 미니시리즈와 주말 드라마를 통해 한 번쯤은 접해봤을 친숙한 소재였으니까. 그러니까 주인공들과 연루된 각 사건들이나 그들의 사연이 한 번쯤은 각색된 드라마나 영화로 접해봤기 때문에 오히려 잘 읽혀진 것 같다. 즉, 작가는 기존과 다른 새로운 시도와 모험이 들어간 글이였기 때문에 그 스스로 쓴 글이 낯설게 느껴지고 묘한 흥분과 호기심을 일깨웠다고 하던데(358면), 이 독자에게는 너무 친숙한 소설이었다. 다시 말해, 출생의 비밀을 비롯해 운명적인 만남과 우연이 반복되는 <4월>의 이야기는 현실성이 떨어지지만, 드라마 왕국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는 친숙한 소재라는 말이다. 물론, 그 친숙한 소재라도 풀어가는 방식에 따라 "웰메이드"가 될 수 있겠지만, 갑작스런 장르의 변화와 몰입이 불가능한 문장의 안이함과 후반부에 들어 빵빵 터지는 각 사건들은 읽는 이를 무척 당혹스럽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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