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국사는 없다 - 더 넓은 시각으로 바라본 우리 역사
유성운 지음 / 페이지2(page2) / 2024년 8월
평점 :

한국사는 없다
제목이 좀 특이하다. 한국사가 왜 없지? 외국의 역사보다 짧아서 아님, 역사의 내용이 부실해서 그런가? 곰과 호랑이 이야기로 시작을 하면 5천 년이 이 넘는데 말이다. 학교 수업에 역사 공부를 하면서 왕의 순서 그리고 그 왕 업적을 암기한다고 고생을 좀 하였다. 조선 시대는 태정태세문단세로 이어지고 27 대까지의 왕의 성격과 이룩한 과업을 공부했었다.
우리나라 역사의 기록 중 조선 시대는 자료는 많이 남아 있지만, 삼국 시대인 고구려, 백제, 신라에 대한 기록이 없어 인접 국가 중국에서 많이 따와 추측의 근거로 작성을 해 놓았다. 이때는 아직 우리의 글인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으로 한자 문화인 중국의 영향을 받아 사극을 보면 좀 초라한 면이 자주 나온다.
후삼국에서 가장 카리스마가 있었던 군주로 궁예를 들 수 있다. 궁예는 신라 왕족의 서자로 태어나 언제 죽음을 당할지 몰라 스님으로 변신하여 강원, 함경도에서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정치를 하면서 신임을 얻게 된다. 오래전 TV 사극 드라마에서 관심법으로 인기를 인기를 누린 적이 있었다. 관심법은 불교에서 수련, 참 선의 의미가 있는데, 궁예는 이것을 이용하여 자기 맘대로 사람을 처형하여 폭군으로 변하면서 군주의 자격을 잃어간다. 공포 정치로 인해 부하 중 똑똑한 왕권에게 되치기를 당하고 막을 내린다.

언제나 역사는 승자의 원칙으로 전개가 되기에 궁예의 조명은 좀 더 역사를 연구하고 파헤쳐 정확한 결과물을 찾아야 하는 것이 우리 후세의 과제며 숙제로 남아 있다. 지금도 우리는 강대국인 중국, 미국, 일본의 눈치를 보면서 불합리한 처사에 강력하게 대처를 하지 못하고 그러니 하고 미온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한국사가 없다는 것은 늘 강국의 그늘에서 조공을 바치면서 폐하가 아닌 한 단계 낮은 추상으로 이어져 힘을 펴지 못했음을 알려준다. 지금도 삼국이나 조선 시대 때와 다를 바가 없다. 큰 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숨죽이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시진핑, 바이든, 푸틴, 기사다에게 씨의 씨에, 땡큐, 스마 시바, 아리가토 외치면서 받들어 모신다. 이유는 그들보다 힘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주변국과 싸우고 있는 이스라엘을 보면 기죽지 않고 대단한 민족임을 느낀다. 사람들은 우리 민족과 비슷하다고 하는데, 전혀 아니다. 자국을 지키기 위해 국민들이 똘똘 뭉쳐 주변의 힘센 나라와 싸워 전혀 기가 죽지 않고 잘 이겨 나간다. 이스라엘 사람을 잡아가 인질 극을 벌리는 하마스의 수장도 날려 버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 나라가 우리와 비슷한 민족이라고 지나가는 개가 웃지 않을까요?

조선 시대나 지금이나 허구한 날 당파 싸움으로 나라가 어떻게 되던 관심이 없는데, 하마스 같은 사람을 잡는다고 개 등에 뿔이 나는 것을 기다리는 게 빠를 것 같다. 조선 시대 사대부들은 왜 노비를 늘리려고 했을까. 특히 지폐 천 원에 인쇄된 퇴계 이황은 청렴하기로 유명한데 거느리고 있는 노비가 300여 명이라고 하니 이게 청렴한 것이 맞나 싶다.
이 책은 한국사를 세계사와 비교를 해서 설명을 해 놓았으며 해상 무역 즉 뱃길이 발달하게 된 이유와 역사는 역사 그대로 보존을 하며 그때의 상황이 힘이 없고 초라하였지만 변질 시키지 않고 그대로 보전을 하는 영국을 볼 때 선진국의 자격이 있음을 보여준다.
한양의 집값이 조선 시대에도 인기가 있음을 알려 준다. 1719년 160냥에 거래가 되었는데, 지금 돈으로 환산, 1냥에 2만 원을 대입하면 320만 원, 100년 후인 1800년에는 1,500냥으로 거래가 되어 10배 가 오른다. 정도전 조선을 세울 때 한양의 인구를 10만 명으로 잡았는데, 지금은 1,000만 명이니 인구는 100배 늘어났다.

다산 정약용도 전남 강진에서 유배 생활 중 아들에게 편지를 자주 보냈다. 벼슬은 하기 힘들지만, 항상 수도 즉 한양 주위에서 살아야 한다고 하였다. 어디 촌에 묻혀 살면 경제의 흐름을 모르기에 사람이 많이 사는 수도권 주위에서 거주를 해야 세상 돌아가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책을 많이 읽어 경제에 눈을 뜬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의 역사를 어디 자랑할 수는 없지만, 역사의 사실은 왜곡하지 말고 있었던 그대로 잘 보존을 하고 알리는 것이 후세에 사는 사람들이 할 일이다. 지금에 와서 과거의 일을 들어내서 심판을 할 일 도 아니고 과거 잘 못한 일을 다시 재현을 하는 일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게 과거의 역사가 주는 교훈이다. 감사합니다. (제네시스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