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 1984Books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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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일상의 빵을 얻기 위해 글을 쓴다.

 절대로 거저 주어지지는 않는 빵이다. 

잉크라는 말로 빚은, 빛과 침묵의 빵"


프랑스의 대표 시인 크리스티앙 보뱅의 산문인 [작은 파티 드레스]는 단편으로 이뤄진 책이다. 두껍지 않는 페이지에 각 산문마다 던지는 느낌은 뭐랄까? 여성스러운 느낌이 든다. 또한, 책을 읽는 것에 대해 언제부터 시작이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부분과 인생의 큰 고난을 겪은 한 여인이 죽기 직전에 글을 씀으로써 다시 생명을 갖는 것은 글이란 타인을 위한 것만이 아닌 자신을 위한 존재다. 누구도 찾지 않는 한 편의 글을 언젠가 당신이 볼 수도 있다는 것. 아니, 어떻게서든 세상에 나오게 됨을 보았다. 


그 후 이어지는 여러 산문들은 전쟁과 신들의 이야기를 비추어 써 내려간 내용과 한 소녀가 자연과 현실을 두고 선택하는 갈등은 인간이 자연에서 벗어나 살아갈 수 없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언젠가 소녀가 어른이 된다면 자연에서 멀어지지 않을까? 모든 것은 변한다 소녀가 사랑했던 모든 것이 풀밭으로 가 잠을 자듯이 모든 생명은 사라진다. 또한, 산문은 '당신'이라는 호칭을 쓰다보니 화자인지 아님 독자인지(나인지) 어색하다. 그러니 아예 나를 중심으로 누군가의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하면서 읽어내려니 한 편의 편지를 읽는거 같다. 


한 여인이 있다. 오직 밤에만 글을 쓰는 여인은 아이의 숙제를 봐주고 저녁 식탁을 치우고 난 뒤에야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게 된다. 이 순간에만 글을 쓸 수 있다는 것 영원 앞에 나와 앉은 가난한 여자라고 표현한 저자의 말에서 느껴지는 것은 외로움과 고독이며, 웅크리고 앉아 쓴 글은 대부분 출간이 되지 않는다라는 문장은 결국 여성에게 글은 세상에 보여주기 위함보단 자신을 위한 글이라는 것을 더 각인하게 되며, 여기서 그녀가 글을 쓰는 것은 그 삶을 가지기 위해서라는 저자의 문장이 더 확고한 다짐을 주었다.


'글을 쓰기 위해선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순간, 무슨 의미이지? 하지만, 이 가난은 물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소음과 소란스러운 삶이 있는 것과는 반대되는 인생을 말한다. 더 나아가 무용한 삶과 날 것인 삶에 독서도 가담하는데 사랑,놀이,기도처럼 독서 또한 무용한 행위이기 때문이란다. 그렇기에 시련 속에서 고요함을 찾아 글을 쓰게 되었고 오로지 자신만의 시간속에서 스스로를 찾을 수 있기에 글을 쓰는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책은 산문이라고 하지만 한 편의 소설을 본 듯하며 부드럽게 또는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문장엔 어쩔 수 없는 씁쓸함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점이 오히려 더 끌리게 되었는지 모른다. 너무나 더 현실적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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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의 쓸모 - 흙 묻은 손이 마음을 어루만지다
수 스튜어트 스미스 지음, 고정아 옮김 / 윌북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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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은 빠르게 반응하지 않으며,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방식으로 움츠리거나 웃거나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언제가 책을 통해 식물이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줄어들게 한다는 글을 읽었다. 그러나 식물을 키우면 그린핑거가 아니라서 금방 죽어버린다. 그렇다보니 주말마다 순례길를 나서게 되었던거 같다. 집에서 가까운 산으로 주말마다 다니고 겨울엔 잠시 쉬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주춤해졌다. 그렇지만 굳이 숲이 아니어도 공원이나 산책로를 걸어도 기분이 풀리는 것은 같으니 근래에 와서 공원으로 가게 되었다. 오늘 읽은 [정원의 쓸모]는 인가에게 정원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려주는 책이다. 제목을 보고 단지, 식물과 나무 등 원예에 관한 내용으로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전혀 아니다. 저자는 정신과 의사이며 심리치료사다 그녀가 어떻게 정원과 관련되어 치료를 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원예는 고대부터 존재했었다는 점이다. 생각해보면 인간은 자연과 같이 시작했고 살아왔지만 점점 문명이 발달하고 과학이 생겨나면서 자연과 멀어졌다. 덩달아 인간역시 자연에서 느끼는 위로와 평안을 누릴 수 없게 되었다. 

책은 원예로 사람들을 치료했던 내용을 담고 있다. 저자의 할아버지는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했다. 전쟁을 다녀온 사람들은 그 후유증에 인생의 절반을 고통속에 사는데 이들을 상대로 원예 치료를 했고 짧은 기간은 아니었지만 치료가 되었다. 그렇다면 원예는 인간에게 무엇을 주는 것일까? 먼저 항상 그 자리에 있고 인내를 기르게 한다. 또한, 환작 직접 가꾸고 돌보면녀서 첫 열매를 맺을 때 스스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은 정신을 끊임없이 활용하고 운동하게 하고, 진정과 고양을 시킨다는 사실이다. 시인인 릴케 역시 식물에 중요성을 알았고 심리학자인 프로이트 역시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심리를 파악했었다. 프로이트가 죽는 그 순간까지 늘 정원을 갔었다는 일화는 자연이 인간에게 더 많은 것을 주고 있음을 보여준다. 

수렵채집 시절 인간은 자연과 함께였다 그러나 현대는 그렇지 않는데 도시 공원에만 가더라도 정신적 공감이 넓어지고 문제에서도 구애를 덜 받게 된다. 이는 두뇌의 전두엽 피질로 흐르는 혈류가 감소하면서 진정 효과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답답하거나 화가 날때 공원이라도 가면 뭔가 해소되는 느낌이 들었는데 오늘에서야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에, 유럽은 영국과 이탈리아 등은 원예 심리치료를 꾸준히 하고 있다. 19세기에는 나무와 꽃 등 식물들을 병원에서 자주 보게 되었으나 20세기가 들어서면서 딱딱한 시멘트 벽이 병원에 있을 뿐이다. 뚜렷한 연구결과가 없었기에 반박할 수 없었으나 오늘날 식물을 비롯한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것은 단지 편안함이 아닌 삶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약물중독자, 전쟁 후유증, 교도소에 있는 사람들, 빈곤 지역에 사는 아이들 등 원예는 차별없이 누구나 받아들이고 변화를 시켜준다. 여기서 저자는 한가지 조언을 하는데 처음 원예를 시작할 때 쉽게 키울 수 없는 식물도 있으니 해바라기나, 무 등 먼저 무난하게 자라는 종류부터 시작하라고 한다. 또 사람들은 땅을 파고 심고 하는 것은 인간의 파괴와 관련됨을 말하는데 무엇인가를 무너뜨리고 그곳에서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 자체로 이 또한 심리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말한다.물론, 개인의 문제에 따라 다르겠지만 모종 돌보기는 자신이 돌돔을 받지 못했는지를 깨닫게 해주고, 잡초 뽑기는 유독한 감정을 드러내는 내적 과정을 추동하며, 퇴비 더미를 만드는 일은 나쁜 일 다음에 반드시 좋은 일이 올 수 있다는 믿음을 키워준다. 지금은 작고했지만 신경학자였던 올리버 색스 역시 비약물 치료로 음악과 정원을 말했고, 나이팅게일 역시 자연이 환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는 것을 알았다. 

인간의 두뇌는 자연 세계를 바탕으로 진화했는데 현재 우리는 도시 환경에서도(비자연적) 두뇌가 잘 기능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한다. 산업혁명 이후 도시에 인구가 순식간에 늘어났고 이에 질병과 사회성 문제도 늘어났다. 공원과 나무 있는 곳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는 사람들의 심리는 확연하게 차이 나는 것을 연구에서 확인이 되었는데 식물과 나무가 있는 곳에선 사람들은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서로와 더 많이 소통한다는 점을 몇 번의 연구로 여러 차례 증명 되었음을 말한다. 더 나아가 인간이 가장 무서워 하는 죽음에 대해서도 죽음을 회피하는 것이 아닌 인생과 자연의 일부라는 점을 인식하게 되면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해 준다.

마지막으로 책을 읽는 내내 식물이 인간에게 주는 것이 비록 물질은 아니지만 이보다 더 큰 중요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한편으론 마음이 심난할 때 본능적으로 숲이 있는 곳을 찾아헤맸던 것이 자연에서 치유와 위로를 받고 싶은 행동임을 알게 되었다. 


< 위 도서는 네이버독서카페 컬처블룸에서 무료로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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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올드 코리아 세트 (완전 복원판 + 원서 복원판) - 전2권
엘리자베스 키스.엘스펫 키스 로버트슨 스콧 지음, 송영달 옮김 / 책과함께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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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조선의 모습을 보기 시작한 것은 아마 tv에서 부터다. 자연스럽게 공중매체를 통해 알게 되었던 역사의 한 부분을 오늘 국내도 아닌 한 영국 화가를 통해 다시 한번 만나게 되었다. 처음 이 책을 봤을 때 외국인의 시선에서 조선을 보고 그린 그저 그림이라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전혀 아니었다. 기쁨 대신 불안함과 동시에 감사함이 느껴진 책이다. 책은 엘리자베스 두 자매가 한국에서 잠깐 머물렀던 그 순간에 그린 그림들이고 배경은 3.1운동이 전후여서 긴장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키스는 일본에서 머물렀다 한국에 오게 되었는데 한국에서 일본인들이 행한 만행을 보고 비판을 서슴치 않았다. 키스가 한국에서 몇 달 동안 머물면서 서양 선교사들을 만나고 독립운동을 하는 학생들을 볼 때 느끼는 그 감정은 타인이 아니었다. 당시, 선교사들도 더러 있었기에 사람들은 간간히 도움을 받았는데 이들의 존재는 일본인들에게 그리 좋은 모습은 아니었을 테다.


하여튼, 키스는 잠깐 머문 그 순간에 자신의 능력을 발휘했다. 곳곳을 다니면서 그림을 그렸고 목판화로 남겨놓았는데, 비록 일본의 목판화였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자료를 볼 수 있다는 것에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평생 독신으로 살다간 엘리자베스 키스의  몇몇 작품의 원판이 없어져 아쉽기도 했다. 또 키스가 그린 그림들을 보면 애정이 보인다 아이들과 여인들 그리고 선비 등 키스의 그림은 섬세하면서도 작품 속 인물들의 감정까지 표현한거 같다. 문득, 한복을 입고 있는 조선의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 있는지 의문이 든다. 왜 외국의 시선으로 조선을 바라봐야 하는지 묘한 감정이 들은 반면  좀 더 자세하게 객관적으로 이 책을 바라보지 않았나 싶다. 


그림은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전이라 평양 강변을 그림으로 만날 수 있고, 함흥 여인을 볼 수도 있고,서울에서 아이들이 연을 날리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요즘 아이들은 연을 날리는 것이 무엇인지 알까? 전통놀이로만 생각할 뿐 쉽게 접할 수 없는 점에 아쉬움이 든다. 또, 이 외에도 독립운동과 3.1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데 선교사들이 만세운동으로 잡혀간 학생들을 구하려고 했지만 그렇지 못했던 부분에 키스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더 나아가 한국이 일본에 강제합병이 되면서 궁중 음악이 사라질 무렵 이들을 찾아가 마지막으로 궁중 음악가들을 그렸다. 비록 추정이나 거문고 연주자는 함화진이며 피리 연주자는 이수경 선생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어쩌면 전통이 이어졌을지도 모르는 역사의 한 부분이 이렇게 사라지는 것을 보니 마음이 텅 비는 거 같다. 


그리고 무인이라고 그린 작품이 있는데 이건 목판화가 아닌 수채화로 남겨져 있다가 경매로 옮긴이(송당열선생님)가 수집하게 되었다. 아래 그림이 바로 'The Warrior'로 단 작품인데 여기서 키스는 사실화를 그린 화가라고 한다. 그러니, 이 그림 역시 어느 것을 보고 그렸을 것이라고 하는데 이를 <이순신 장군 초상화>일 것이라 추측한다. 정확한 제작 연도가 없어 모르나 당시 추측을 통해 키스가 일본 식민지로 전략한 그 상황에 옛 무인의 모습을 남기는 것에 뜻을 두었다는 설정이다. 또 앞선 적은 목판화가 아닌 수채화라는 점에서 더욱 기울이기도 했는데 이는 목판화를 만든 일본인이 조선 무인의 그림을 판화로 만들기란 쉽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좌: 엘리자베스 키스 / 우: 이순신 장군 초상화(추정)>

마지막으로 <Old Korea> 책을 다 읽고나서 아니 그림을 감상하고 나서 마음이 무거워진 것은 어쩔 수가 없었으나 이 책을 만난 것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다 소개 할 수는 없었으나 엘리자베스 키스의 작품을 보면서 조선이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였는지 대중매체와 학습을 통해 알게 된 것 외에 다른 모습을 알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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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거울 - 바로크 미술에 담긴 철학의 초상
유성애 지음 / 미진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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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대상을 온전하게 보려면 자기 관점의 편견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편견에 흐려진 눈은 볼 수 있어도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과 같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글쎄 딱히 무엇이라고 말해야할지 모르겠지만 난 자신을 먼저 알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오늘 읽은 [철학자의 거울]은 단지 글로만 보여주는 것이 아닌 바로크 미술과 함께 철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요즘 미술 관련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알지 못했던 작품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데 이 책에서 철학과 관련된 작품을 보여주니 한 번 더 사색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책은 어떤 내용으로 되어 있을까?


책은 먼저 '누더기 철학자'라는 주제로 시작한다. 철학자 하면 보통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그리스 철학자가 떠오른다. 그러니 누더기 철학자라는 단어가 생소했고 첫 사진으로 보여준 후세페 데 리베라의 '데모크리토스' 작품은 그동안 알고 있었던 철학자들과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남루한 모습으로 있는 데모크리토스 그런데 리베라는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화려함 대신 너절한 옷과 어둠에 젖은 분위기를 보여준다.왜 리베라는 이런 모습으로 철학자들을 그렸을까? 하지만, 리베라 외에도 누더기 철학자 그림은 17세기 유럽 예술가 애호가 사이에서 인기를 누렸다. 그건 현실을 냉혹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또한, 푸생의 작품은 철학자가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묻는 그림이었으며 <물 뜨는 사람이 있는 풍경>은 깨달음의 독특성을 보여준 사례다. 


하나의 작품을 통해 보여준 철학자의 다양한 모습은 그림을 보고 있으면 이해를 할 수 없다. 작품 속에 그려진 작은 사소한 것이라도 그 그림에 큰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인데, 마네의 <굴 옆의 걸인>에서 굴은 성욕과 식욕을 상징하는데 이 그림 속에 남자는 굴을 외면하고 있다 이런 쾌락적 삶에 비켜 서 있기에 그를 철학자 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시대는 변한다 산업혁명 이후 물질을 따라 갈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오로지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은 쉽지 않다. 정직한 인간을 찾는 디오게네스를 그린 야콥 요르단스의 작품속에 여러 인간상이 들어있다. 시장을 배경으로 그린 그림으로 시장 사람들은 디오게네스를 오히려 비웃고 있으며 그는 그럼에도 정직한 인간을 찾기 위해 등불을 들고 있다. 


그리고 철학자가 있을 곳을 포착한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 <달빛과 지는 해에 빛나는 철학자>는 맨발에 남루한 옷차림에 얼굴 또한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인물보다 오히려 배경에 눈길에 더 끌리는데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무엇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해와 달이 뒤섞어져 어느 것이 시작인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저자는 상상의 향락, 타오로는 분노, 혁명의 유혹, 소비의 위안으로 하루를 보내는 곳이 철학자의 삶이 있다고 전달한다. 여기서, 문득 왜 철학자들은 대부분 남성인 것일까? 물론, 지금은 배움이 누구에게나 공평하나 과거엔 남성 위주로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 또한, 저자는 작품 속에서 여성이 등장하는데 대부분 유혹을 하는 욕망의 화신으로 이미지로 덧씌워졌다고 지적한다.



대표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내 크산티페가 남편에게 물을 붓는 작품은 왠지 여성의 무지함을 보여주는 듯했다. 하지만, 17세기 네덜란드는 다른 유럽과 다르게 교양 여성이 많았다고 한다. 지성은 꾸준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적 능력이 권력으로 인해 특권층만 소유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여기에 여성이 배제가 되었고 오로지 가정에 편입되면서 생존을 위한 일에 국한 되어버렸다. 이런 규범으로 그린 작품 <깨진 계란>이 대표적 그림인데 자세히 보면 한 쪽에 있는 아이가 눈치를 보면서 계란을 다시 붙이려는 모습이 보인다. 아이지만 아이답지 않는 눈치는 이미 깨진 계란은 순수성을 잃었고, 또는 아이는 의도치 않는 잉태를 보여주는 것인데 여하튼, 아이의 정체는(?)여성의 일탈이 불러온 파국임을 설명한다. 음, 그러나 반대로 지혜의 여신으로 여성을 보여주는 작품들도 있음을 알아두자. 


철학자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다 대립되는 두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와 헤라클리이토스로 전자는 웃는 철학자 후자는 우는 철학자다. 동시대 사람이 아님에도 많은 작가들은 두 철학자를 대립하는 이미지를 많이 그렸다. 웃는 철학자여도 그 웃음은 즐거움이 아닌 비웃음에 가깝다. 마치 인생의 덧없음을 비웃는거 같다. 인생의 덧없음을 그림으로 나타낸 비웃방울을 타고 아슬하게 있는 꼬마의 모습은 천진하면서도 불안한 느낌을 전달한다. 도대체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책 속에 소개된 작품을 보면서 고뇌하고 때로는 허무함을 보여주는 그림을 보니 더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인생 또한 그렇지 않는가. 책을 덮고서도 한동안 기분이 현실에서 벗어나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 다시 한번 이 책을 읽어보고 싶다. 왠지 그림을 좀 더 깊이 있게 보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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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마감 - 일본 유명 작가들의 마감분투기 작가 시리즈 1
다자이 오사무 외 지음, 안은미 옮김 / 정은문고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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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보고 무조건 끌리던 도서다. 또한, 일본의 유명 작가들의 마감 분투기라고 하니 어느 누가 궁금해 하지 않을까? 과거와 달리 방송매체가 전파가 되면서 이제는 작가들의 마감 분투기에 대해 종종 보곤 한다. 마감이 끝나면 자유가 아닌 다음을 준비하는 과정이 또 있으니 잠깐의 자유에서 안정을 취하고 다시 시작해야한다. 오늘 읽은 [작가의 마감]은 이런 소소한 일상들을 소개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근래가 아닌 고전 작가들이라는 점이다. 그 중에 나쓰메 소세키, 다자이 오사무,아쿠타카와 류노스케 등 익히 들은 이름도 있고 때론 낯선 저자의 이름도 보인다. 


책은 큰 제목으로 쓸 수 없다, 그래도 써야 한다, 이렇게 글 쓰며 산다 마지막으로 편집자는 괴로워로 나위어지고 그 안에서 다시 세분화 되어 작가들의 일상을 담고 있다. 당시엔 신문에 연재글이 실었던지라 꾸준하게 글을 써야하지만 마감이란 것이 아니 글 쓰는 것 자체가 술술 풀리지 않는다. 물론, 잘 써지는 날이 있지만 마감 시간에 쫓겨 쓰는 것이 대부분이 아닐까? 원고 열 매 내외를 쓰는데도 사흘이나 끙끙 앓았던 다자이 오사무. 당시, 수필을 써야했던 저자에게 '작가의 언어도 날것이기에 조심해서 써야한다'고 했는데 누구도 믿지 않았으나 자신에게는 이 부분이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러니, 많은 원고가 아니어도 그렇게나 글이 써지지 않았나 보다. 


때론 아픈다는 핑계로 편집자에게 말하는 작가도 있고, 방바닥에 누워 생각하고 다시 책상에 앉아 고민하는 저자, 하루종일 연필과 종이를 붙잡고 씨름하지만 한 글자도 써내려가지 못하다 한밤중에 흥이 솟아나 홀로 일어나 펜을 잡는 작가, 어떤 이는 아침에만 일을 할 수 있다고 하는 등 작가들의 글을 읽으니 낯설지 않는 행동들이라 절로 웃음이 나와버린다. 즉, 예나 지금이나 마감게 대한 분투는 같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작가들은 글을 계속 써내려가는데 책에서 좋았던 한가지가 있다면 바로 '작가의 이력'도 같이 설명한 부분이다. 


앞서 적었듯이 낯선 작가들이 많았는데 그들의 생애를 적어놓은 한 페이지를 읽을 때면 왜 그렇게들 힘들게 살았는지...시대가 불안정하니 그럴수도 있겠다 싶으면서도 한 작품을 빚내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처럼 이들의 말년은 그리 좋지 않았다. 거의 병으로 생을 마감했는데 그 중엔 30대, 40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여성 작가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다. 읽다보니 유난히 남성 작가가 많아서 답답했던 찰나 몇몇 여성 작가를 보게 되었다. '하야시 후미코'는 힘든 상황에서 글쓰기를 하면서 성공을 했는데 너무 무리한 탓에 이른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후미코가 남긴 '어느 하루'는 일기로 청탁을 받아 글을 쓰는데 새벽 4시에 기상해서 시작하는데 자신이 글 쓰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어 힘들어하는 내용이다. 조금만 자신에게 자유(?)를 주었다면 더 많은 작품들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까? 


그리고 프롤레타리아작가 동맹, 일본공산당 가입과 검거와 석방, 집필 금지를 겪었던 미야모토 유리코. 남편 역시 투옥되었는데 석방될 때까지 많은 편지를 보냈다. 이 책에는 남편에게 보낸 편지 내용을 모은 것 중에서 발췌한 글이다. 남편을 향한 그리움과 그럼에도 번역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 심정을 적어 놓았다. 모든 작가들에게도 공통점인 어떤 고통이 따라도 그럼에도 글을 써야하는 숙명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편집 후기에 '재밌어서 견딜 수 없는 잡지'를 만들었다던 [반장난] 월간지를 소개한다.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성적 표현의 자유는 위험한 도박이었는데 용감하게도 에로소설을 실었고 결국 화제가 되었다. 결국 폐간이 되었지만 책에 실린 빈 페이지에  원고가 도착하지 않아 백지 그대로 내보내게 되어 사과한다는 문구가 대신 실려있다. 이 페이지를 본 순가 어라? 나도 모르게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분명 누군가는 글을 기다리고 있었을텐데 말이다.


마지막으로 작가들에게 있어 글쓰기는 살아가는 원동력이다. 어찌되었든 글을 씀으로써 자신을 다듬어가는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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