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거울 - 바로크 미술에 담긴 철학의 초상
유성애 지음 / 미진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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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대상을 온전하게 보려면 자기 관점의 편견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편견에 흐려진 눈은 볼 수 있어도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과 같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글쎄 딱히 무엇이라고 말해야할지 모르겠지만 난 자신을 먼저 알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오늘 읽은 [철학자의 거울]은 단지 글로만 보여주는 것이 아닌 바로크 미술과 함께 철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요즘 미술 관련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알지 못했던 작품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데 이 책에서 철학과 관련된 작품을 보여주니 한 번 더 사색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책은 어떤 내용으로 되어 있을까?


책은 먼저 '누더기 철학자'라는 주제로 시작한다. 철학자 하면 보통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그리스 철학자가 떠오른다. 그러니 누더기 철학자라는 단어가 생소했고 첫 사진으로 보여준 후세페 데 리베라의 '데모크리토스' 작품은 그동안 알고 있었던 철학자들과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남루한 모습으로 있는 데모크리토스 그런데 리베라는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화려함 대신 너절한 옷과 어둠에 젖은 분위기를 보여준다.왜 리베라는 이런 모습으로 철학자들을 그렸을까? 하지만, 리베라 외에도 누더기 철학자 그림은 17세기 유럽 예술가 애호가 사이에서 인기를 누렸다. 그건 현실을 냉혹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또한, 푸생의 작품은 철학자가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묻는 그림이었으며 <물 뜨는 사람이 있는 풍경>은 깨달음의 독특성을 보여준 사례다. 


하나의 작품을 통해 보여준 철학자의 다양한 모습은 그림을 보고 있으면 이해를 할 수 없다. 작품 속에 그려진 작은 사소한 것이라도 그 그림에 큰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인데, 마네의 <굴 옆의 걸인>에서 굴은 성욕과 식욕을 상징하는데 이 그림 속에 남자는 굴을 외면하고 있다 이런 쾌락적 삶에 비켜 서 있기에 그를 철학자 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시대는 변한다 산업혁명 이후 물질을 따라 갈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오로지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은 쉽지 않다. 정직한 인간을 찾는 디오게네스를 그린 야콥 요르단스의 작품속에 여러 인간상이 들어있다. 시장을 배경으로 그린 그림으로 시장 사람들은 디오게네스를 오히려 비웃고 있으며 그는 그럼에도 정직한 인간을 찾기 위해 등불을 들고 있다. 


그리고 철학자가 있을 곳을 포착한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 <달빛과 지는 해에 빛나는 철학자>는 맨발에 남루한 옷차림에 얼굴 또한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인물보다 오히려 배경에 눈길에 더 끌리는데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무엇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해와 달이 뒤섞어져 어느 것이 시작인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저자는 상상의 향락, 타오로는 분노, 혁명의 유혹, 소비의 위안으로 하루를 보내는 곳이 철학자의 삶이 있다고 전달한다. 여기서, 문득 왜 철학자들은 대부분 남성인 것일까? 물론, 지금은 배움이 누구에게나 공평하나 과거엔 남성 위주로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 또한, 저자는 작품 속에서 여성이 등장하는데 대부분 유혹을 하는 욕망의 화신으로 이미지로 덧씌워졌다고 지적한다.



대표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내 크산티페가 남편에게 물을 붓는 작품은 왠지 여성의 무지함을 보여주는 듯했다. 하지만, 17세기 네덜란드는 다른 유럽과 다르게 교양 여성이 많았다고 한다. 지성은 꾸준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적 능력이 권력으로 인해 특권층만 소유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여기에 여성이 배제가 되었고 오로지 가정에 편입되면서 생존을 위한 일에 국한 되어버렸다. 이런 규범으로 그린 작품 <깨진 계란>이 대표적 그림인데 자세히 보면 한 쪽에 있는 아이가 눈치를 보면서 계란을 다시 붙이려는 모습이 보인다. 아이지만 아이답지 않는 눈치는 이미 깨진 계란은 순수성을 잃었고, 또는 아이는 의도치 않는 잉태를 보여주는 것인데 여하튼, 아이의 정체는(?)여성의 일탈이 불러온 파국임을 설명한다. 음, 그러나 반대로 지혜의 여신으로 여성을 보여주는 작품들도 있음을 알아두자. 


철학자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다 대립되는 두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와 헤라클리이토스로 전자는 웃는 철학자 후자는 우는 철학자다. 동시대 사람이 아님에도 많은 작가들은 두 철학자를 대립하는 이미지를 많이 그렸다. 웃는 철학자여도 그 웃음은 즐거움이 아닌 비웃음에 가깝다. 마치 인생의 덧없음을 비웃는거 같다. 인생의 덧없음을 그림으로 나타낸 비웃방울을 타고 아슬하게 있는 꼬마의 모습은 천진하면서도 불안한 느낌을 전달한다. 도대체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책 속에 소개된 작품을 보면서 고뇌하고 때로는 허무함을 보여주는 그림을 보니 더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인생 또한 그렇지 않는가. 책을 덮고서도 한동안 기분이 현실에서 벗어나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 다시 한번 이 책을 읽어보고 싶다. 왠지 그림을 좀 더 깊이 있게 보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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