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위대한 질문 - 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위대한 질문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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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종교가 어떻게 시작이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시작은 있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종교를 가지 자로써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깨달아야 한다는 점이다. 과학이 발전하고 과거와 다르게 신비롭다 하는 것을 인간을 그 실체를 파헤치기 시작한다. 어쩌면 내버려 둬야 할 것 조차 인간의 호기심으로 드러나 버릴 수 밖에 없다는 것. 그렇지만,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풀 수 없는 '신' 이라는 존재다.

<인가의 위대한 질문>은 예수를 통해 인간의 신앙를 보여주고 있는 반면 <신의 위대한 질문>은 인간에게 질문을 던짐으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질문과 함께 설명한다. 아브라함은 기독교에서 복의 근원이라고 할 정도로 하나님에게 순종했던 인물이다.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후손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이건 아브라함이 살아생전에 누릴 수 없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그 말씀에 순종했고, 임신할 수 없었던 아내 사라에게서 이삭이 태어나고 그 후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면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점차 늘어났다.

인간이 신을 믿는 다는 것은 어떤 의식일까? 부족함이 없이 살았던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 새로운 땅으로 가라 명령했을 때 이는 순종하며 아내 사라와 떠났다. 그리고 이삭을 주고 제물로 바치라 했을 때에도 오로지 순종했다. 그런데, 여기서 두 화가의 그림으로 해석을 달리 말하고 있다. 렘브란트와 카라바조의 그림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지만 렘브란트는 성서의 이야기대로 반면 카라바조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으로 보여준다. 새로운 해석으로 바라보니 흥미로우 면서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또한, 신은 어디든 존재한다고 한다. 이 말은 낯선자에서 그리고 가난한 자 안에도 있다고 말한다. 신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이방인이라도 구원을 해주신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후손이며 히브리인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신으로 강조하며 성을 쌓고 그안에만 존재한다고 믿어버리는 실수를 저지른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 가인과 아벨, 모세 그리고 여러 선지자를 통해 '어디에 있느냐고' 메세지를 전달한다. 단지, 어디에 있다라는 것이 아닌 더 깊이 들어가보면 중심을 본다는 애기이다. 그리고 가인과 아베를 인간 최초의 살인사건이며 비극의 시작이다. 여기서 저자는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지냈음에도 아벨의 제사만 받아들이게 됨으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을 인간이 가진 본성이라 말한다.

상대방에 내 선물을 받지 않았다 하며 과연 그게 다른이에게 해를 가해야 했던 것일까? 그럼, 다윗은 어떠한가? 이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순종했던 인물로 성겨속에서도 유명하다. 그가 목숨이 위태로울 때에도 원망대신 찬양했고 매사에 기도를 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한 여인으로 인해 죄를 짓게 된다. 이 상황에 대해서도 더 깊이 설명을 하는데 과연 다윗과 정분이 난 밧셋바는 어떠한 인물이었을까? 어느 화가의 그림을 통해 보면 밧셋바 스스로의 길을 선택했다고 말한다. 성서에서는 간략하게나마 설명을 하고 있어 여성의 위치는 보여지지 않지만 다윗과 밧세바의 아들 솔로몬이 왕이 된데에는 확실히 영향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윗을 보면 하나님을 섬겼자만 죄를 지었다 이건, 인간이기에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며, 더 나아가 중요한 것은 잘못을 인정하고 변하하려는 했다는 점을 말한다.

신이 인간에게 원하는 것은 '선'이다. 선은 상대방이 느끼기에 좋은 것, 즉 상대방에게 달려있다고 하는데..참 어렵다.

어디에든 존재하는 신을 볼 수도 없고 오로지 믿음으로 봐야하는데 말이다. 선지자 엘리야, 요나,바울 등 하나님의 말씀으로 길을 갔던 사람들이며 원망도 하고 도망가기도 했으면 이스라엘 백성을 학대하기도 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이제는 목숨을 내놓는다. 특히, 요나는 소설 <모비딕>의 모티브가 되었는데 적국에게 예언을 전달하라는 신의 뜻을 어기고 바다로 도망을 가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풍랑을 만나 고래 배 속에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신으 ㅣ경외심을 알게 되면서 신의 뜻대로 움직인다.

'경외한다'는 어느 것에 깊은 통찰을 통해 그것들에 대해 자신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는 깨달음 이라한다. 즉, 무지를 알게 된다고 할까? 요나는 자신의 지식을 가지고 절대 적국에 갈 수 없었지만 경외심을 갖게 되면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 삶 역시 그러하다.아무리 책으로 고전으로 온갖 지식을 갖추었다고 하지만 다 헛되다는 사실이다. 더불어, 자신이 맡은 달란트(임무)를 알고 수행해야하는 것이 신과의 만남 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신에 대해선 정말 알 수 없다. 유대인들이 홀로코스트를 겪으며 나치에 의애 죽임을 당하고 그러는 가운데 신은 무엇을 했단 말인가...엘리 위젤이 쓴 자전적 소설<흑야(한국에서 출간된 제목)>에서 나치로 인해 모든 가족을 잃고 혼자 살아남은 자의 신앙에 대해 절실히 보여주고 있다. 고통 가운데 에서 희망을 놓치 않으려는 것...사탄이 욥에게 고통과 시련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신의 허락이 있었고 그 후 곱절의 축복 역시 신의 허락이다.

인간은 결코 인간의 지식으로 신을 증명할 수도 없고 찾을 수도 없다. 무슨 종교든 간에 말이다...단지, 선과 정의를 이루고 낯선 자에게 신을 볼 수 있는 그러한 마음이 존재하기만을 바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성서의 인물들 처럼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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