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러 - 경계 위의 방랑자 클래식 클라우드 31
노승림 지음 / arte(아르테)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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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서: 말러

저 자: 노승림

출판사: 아르테

 

평소 음악을 잘 듣지 않고 간혹 기분이 울적할 때 찾곤 한다. 음악이 주는 위로는 타인이 주는 것보다 그저 혼자 듣고 있기만 해도 마음에 위로가 된다는 거 놀라운 현상이다. 그렇더라도 여전히 나에겐 어려운 분야이기도 하는 데 오늘음악의 거장인 '구스타프 말러'를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를 통해 알게 되었다. 너무 익히 들었던 음악가와 달리 나에겐 생소한 작곡가이며 지휘자인 데 책을 읽는 동안 음악 보단 그의 생애에서 느껴지는 방황과 갈등을 만날 수가 있다. 그렇다보니 난 그가 심취한 음악 보단 '삶'에 더 초점을 맞추면서 읽었다. 말러는 체코에서 태어났으며 유대인으로 어릴 적 아버지가 운영하는 선술집에서 들려오는 악기 연주에 자연스럽게 음향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교육은 엄격함을 강조했고, 정신적 폭력 역시 흔했으며 더 나아가 성인이 봐도 소름이 끼치는 민담집이 교육용으로 팔려 나갔다는 것 이건, 아무래도 아이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그런 거 같다. 이런 상황에 친모가 낳은 열네 명의 자식 중 병으로 사망한 일도 있었는 데 동생의 시체가 관에 담겨져 가는 것을 본 말러..어린 나이에 이런 충격은 어떤 말로 표현을 할 수 없었을 테다. 음악과 불행이 공존했던 말러의 삶에 유대인이라는 차별에 또 한번 시달리기도 했다. 형편은 어려웠지만 음악에 소질이 있어 음악 학교에 가고 훗날 빈필하모닉오케스트라 감독직과 지휘자를 맡기도 한다. 유대인이라는 인종차별을 넘어 말러의 음악은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는 데 그 이면에는 정말 노력과 완벽함이 밑바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의 선택을 받기 위해 음악을 만들지 않았다. 그는 당시 사회가 존중하던 형식을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파괴했고, 촌부들의 세속적인 권주가 혹은 거리의 노래를 서슴없이 음악적 재료로 사용했다.

-본문 중-

 

앞서 적었듯이 말러의 생은 불행과 음악이 아이러니하게 섞어져 있는 데 여기에 완벽하게 하려는 꼼꼼한 성격이 오케스트라 단원들간의 불화를 낳기도 했다. 당시, 오페라궁정음악은 시민들을 위한 것으로 프란츠 요제츠 2세는 음악에 관심이 없으면서도 이어나갔다. 클래식에 대해 문외한이나 음악은 귀족들 사이에서 당연한 모임(사교계)으로 간주되었고 말러가 감독직을 맡은 후 많은 횟수의 공연을 치렀는 데 그만큼 단원들의 고된 연습도 있었다. 여기서, 저자는 적당주의를 의미하는 '슐람페라이' 를 소개하는 데 당시 빈에서 적당주의가 관례처럼 곳곳에 있었는 데 이건 오스트리아 제국이 여러 민족과 국가가 결합되었기에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자연스럽게 음악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니, 아무리 시민들이 잦은 공연을 보더라도 수준은 이하였다는 것이며 말러가 맡은 후에는 대충주의는 철저하게 뜯어고치게 된 것이다. '구스타프 말러 룸' 라는 공연장에 휴식 공간이 있는 데 명칭과 어울리지 않는 상황으로 말러는 연주가 시작이 되면 누구도 나가서는 안되었고 설령 늦게 들어오고 싶어도 철저하게 금지시켰다. 그러니 1막을 놓치면 끝날 때가지 기다려야했다는 것, 여기에 막간의 휴식도 없애려고 했다가 겨우 타협을 한 것이 바로 '말러 룸'을 만든 것이다. 본인은 원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도대체 음악은 말러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고통의 근원을 치유하는 것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고통을 주기도 했다고 할 수밖에 없는 삶. 그렇다면 그의 개인적인 삶은 어땠을까?



말러의 아내 알마는 남성편력이 심했는 데 그녀의 소개글을 읽을 때면 기함을 멈추지 못했는 데 말러외에 두 명의 남성이 있었다. 알마 역시 유대인이었으나 반유대인처럼 철저하게 유대인을 무시했으며 작곡가로도 능력은 있었다고 한다. 말러를 만나기 전에도 여러 소문이 있었지만 연상인 말러를 만나 8년동안 나름 두 딸을 낳고 가정에 충실했다. 하지만, 첫 딸의 죽음 때문인지 남성편력이 다시 돋아났고 심지어 말러와 사는 동안에 건축가인 내연남을 두었으며 그 남자가 오히려 말러에게 편지까지 섰다. 이 충격으로 프로이트를 찾아가기도 했다는 데 사실, 말러가 아니라 알마가 가야했던 게 아닌가? 하여튼, 아내의 불륜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첫 번째 내연남을 시작으로 소설가인 베르펠과도 염문이 퍼졌다.

 

그런데 왜 이혼을 하지 않았을까? 사실 모르겠다. 가부장적인 말러에게 자유분방한 알마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말러가 죽을 때까지 결혼 관계를 유지했다는 사실이다. 더 충격인 건 말러 사후 알마는 건축가 내연남과 결혼 했다가 베르펠과 여전히 관계를 이어갔고, 심지어 이혼 후 베르펠과 세번째 결혼을 했다. 저자는 알마의 이런 행동(?)에 대해 만약 작곡가로 활동을 했었다면 다른 삶을 살지 않았을까? 라는 의문을 던지기도 한다. 하지만, 알마의 행위를 보면 ... 말러가 사망 후 내연남과 결혼 하고 이혼을 하면 다시 말러의 아내라는 호칭으로 사교계에서 활동을 하고, 다시 결혼을 하고 또 혼자가 되었을 때 다시 '말러의 아내'로 돌아왔고, 천수를 누리고 생을 마감했다는 소개에 정말 화가나기도 했다. 심지어 자신의 묘지에 말러 이름 외에 불륜남의 이름을 새긴 것을 보면 정상적으로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말러에게 알마처럼 힘겨움을 주는 사람이 있는 반면 도움을 주었던 인물도 있는 데 바로 말러의 여동생 유네스티다. 말러는 작곡을 위해 휴양지로 조용한 곳을 자주 찾았는 데 이를 도와준 게 바로 여동생이다. 복잡한 도시보단 시골과 숲을 찾았고 산책길을 걸었던 말러. 저자가 찾은 말러의 흔적은 대부분 한적한 이런 길이었다. 그가 작곡을 할 때면 집안 고요했고, 심지어 식사 역시 그가 나올 때까지 동생들이 기다릴 정도였다. 늘 자연과 함께 했고, 강에서는 수영을, 숲에선 트래킹을 했었는 데 심장에 이상이 생기면서 모든 것을 그만둬야 했다. 여기서 말러의 관한 내용은 오로지 알마가 남긴 책인 데 이 또한 자신 위주로 썼고, 다른 사람들의 증언과 맞지 않아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사실, 여동생이 썼다면 어땠을까? 더 객관적으로 기록되지 않았을까?

 

권위적이지 않고 모두에게 평등한 음악을, 길거리를 비롯해 어느 곳에서든 음악의 원천을 찾은 '구스타프 말러'.  음악가로서 나에겐 여전히 문외한이나 한 인간으로서 사망하는 순간까지 고통과 방황의 경계선을 걸었던 인물로 남겨졌다.

 

말러의 음악에 매료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이런 보이지 않는 저항 정신 때문이다. 그는 고상함의 최고봉을 달리는 오케스트라 무대위에 감히 길거리 집시들이나 쓰는 깽깽이 피들을 초대한다.

-본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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