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집의 기록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19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덕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유와 돈, 그리고 인간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죽음의 집의 기록‘을 다시 읽고


4년 만에 재방문한 ‘죽음의 집의 기록’은 여전히 서사가 부재했다. 게다가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기구한 삶을 모르는 독자가 아니었다. 내게 호기심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죽음의 집에서 보낸 4년이라는 시간이 도스토옙스키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는지 잘 아는데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병렬식으로 감옥 생활을 소개하는 이 책을 끝까지 집중해서 다시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열 시간 정도 이 책과 씨름하면서 드디어 어젯밤 마지막 페이지를 탈환했다. 진정 도스토옙스키 마니아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호기심이 사라진 내 눈에도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어쩌면 호기심이 사라졌기 때문에 더 선명하게 보인 건지도 모른다. 간단히 말하자면 ‘인간’이고, 이 작품의 맥락에 비춰본다면 ‘자유’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작품 초반부터 등장하는 ‘돈은 주조된 자유’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 도스토옙스키는 자유와 돈을 직접적으로 연결시킨다. 우선 자본이 중심이 된 사회에서 돈이 차지하는 비중을 단적으로 표현한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재독 하는 내 눈에는 조금 다르게 읽혔다. 자유를 누린다는 것과 돈을 가진다는 것 사이의 틈이 더 크게 보였다. 요컨대 돈은 어떤 형태의 자유일 수 있지만, 자유는 결코 돈일 수 없다는 것. 자유를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돈과 연결된 자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타자와 나를 비교하는 인간의 본성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이 말이 나오게 된 콘텍스트를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는 것.


돈이 많다는 말의 의미를 먼저 짚어본다. 많다는 건 주관적이다. 그러나 나보다 적은 돈을 가진 사람과 비교할 땐 객관적이 된다. 또한 많다는 건 상대적이다. 그러나 나보다 못 가진 사람과 비교할 땐 절대적이 된다.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개념을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 때 인간은 희열을 느낀다. 힘을 느낀다. 을은 갑이 되고, 인간은 신이 된다. 그러나 그 신은 반쪽짜리다. 언제나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신은 다시 인간이 되고, 갑은 다시 을이 된다. 마침내 복잡한 사다리 꼴의 위계질서 속으로 편입된다. 이런 무한반복 속에서 많은 경우 인간은 자기 객관화에 이르기도 하고, 그 반복이 인생 자체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체념하고 어느 정도 초월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소수의 인간들은 그 무한반복을 끝내기 위해 극단으로 나아간다. 그 누구보다도 많이 가지면 된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개념은 한낱 약한 인간의 합리화일 뿐이라고 단정하고 절대 강자의 자리를 향해 나아간다. 이것이 바로 돈의 논리이고 돈의 힘이며 돈의 세상이다. 


그렇다. 돈은 비교할 수 있는 물질이다. '돈은 주조된 자유'라는 말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에서 나온 게 아니라 시베리아 옴스끄 감옥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되짚을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텍스트가 아닌 그 텍스트가 나온 콘텍스트를 살펴봐야 한다는 말이다. 감옥 안에서 돈의 소유는 불법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덧 관습이 되어버렸고 죄수들은 법이 아닌 그 관습에 따라 유형 생활을 해나간다. 감옥에 갇혀 있다는 자체가 자유를 박탈당한 상태라는 점도 간과하면 안 된다. 바로 그런 상태에서 나오게 된 문장이 '돈은 주조된 자유'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자유는 이미 자유가 억압당한 상황에서 유형수들이 불법적으로 간신히 누릴 수 있는 손바닥만한 자유에 해당될 뿐이다. 그러므로 돈과 자유의 관계를 맥락과 상관없이 우리들의 평범한 일상에 곧바로 적용하게 되면 뜻하지 않은 오해는 물론 과장되고 불필요한 사유까지 하게 되는 역효과를 낼 수 있을 것 같다는 게 내 지론이다. 


돈과 달리 자유는 물질이 아닐뿐더러 물질로 변환할 수도 없다. 즉 살 수도 팔 수도 없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옴스끄 감옥 안에서는 자유가 돈으로 측정이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돈을 많이 가진 자는 남들보다 더 많은 자유를 누리는 것처럼 묘사된다. 그들은 목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감옥 밖에서의 삶과 그리 다르지 않은, 나름대로의 위계가 잡혀 있었던 것이다. 감옥 밖에서는 그렇게 목에 힘을 주는 자를 상대하지 않으면 되고 피할 수 있으면 피하면 되지만, 감옥 안에서는 불가능했다. 다른 선택권이 박탈당한 상태에서 인간의 본성은 더욱 선명해지고 단순하게 보일 정도로 정직하게 드러나게 된다. 화자는 그런 유형수들로부터 허세를 읽어낸다. 강한 자존심도 읽어낸다. 실제로 그들은 가혹하고 무자비함을 겸비한 채 덜 가진 자들, 힘없는 자들을 착취했다. 손바닥만한 자유를 가진 자들이 모였는데도 그들은 상석을 차지하고 더 많은 자유를 누리기 위해 상대적 약자를 더욱 짓밟았다. 감옥 안이나 밖이나 인간이 모인 자리는 결국 인간이 모인 자리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인간의 한계랄까 하는, 그리고 나도 결국 같은 인간이라는, 낯 뜨거운 민낯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나를 더욱 넋이 나가게 만드는 사례도 보았는데, 마치 자기는 당연히 강자의 억압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당연히 누군가를 위해 일을 해야 하는 것처럼, 당연히 자유라는 것은 자기에게 허락된 게 아닌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의 존재였다. 화자는 그들로부터 지속적으로 도움을 받아가며 상대적으로 대접받는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그 역시 그들의 심리를 다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들을 움직이는 건 노예근성인 것 같았고, 그들에게 필요한 건 친절과 돈이 아닌 듯했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자유란 어떤 것인지 등의 기본적인 계몽이 필요한 것 같았다. 뼛속까지 스며든,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세계관에 함몰된 인간의 모습을 나는 보았던 것이다. 화자는 책의 곳곳에서 언급한다. 과연 유형 생활이 죄수들의 교화를 얼마나 이뤄낼지 의문스러워한다. 많은 부분 공감이 갔지만, 특별히 우려 깊은 마음으로 공감할 수밖에 없었던 부분은 바로 이들의 존재였다. 이들은 과연 감옥 밖으로 다시 나간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지, 교화라는 단어가 이들 앞에서는 아무런 힘이 없는 껍데기의 말일뿐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무기력함을 느꼈다. 자기 객관화를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을 한 곳에 가두어두고 자유를 억압해 가며 중한 노역을 부과하고 의식주의 기본적인 생활에 제한을 주는 조치들이 과연 무엇을 이루어낼 수 있는지조차 나는 알 수 없게 되었다. 


도스토옙스키에겐 이 죽음의 집에서의 경험이 평생 만나지 못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알게 되는 소중한 가치를 부여해 주었을 것이다.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사람을 관찰하는 화자는 곧 도스토옙스키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일 텐데, 그의 후기작에서 빛을 발할 여러 등장인물들의 캐릭터와 심리 묘사가 깊어지고 예리해진 시기가 아이러니하게도 감옥 안이었다는 사실은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때론 원하지 않는 순간들이 그토록 원하던 것들을 우습게 가져다주곤 하는 것이다.  


화자는 벽돌을 나르는 일을 하며 이르띠쉬 강변에 머무는 것을 좋아했다. 그 강변에서만이 신의 세계가, 순결하고 투명한 저 먼 곳이, 황량함으로 신비스러운 인상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라 했다. 아마도 화자는 그곳에서 예기치 못한 자유와 구원의 순간을 예감하고 미리 경험하지 않았을까 싶다. 눈을 감으면 이르띠쉬 강변에 서서 비스듬한 오후 햇살을 맞으며 생각에 잠겨 있는 도스토옙스키가 보이는 것 같다. 그 틈새의 순간들은 그의 인간 본성에 대한 탁월한 통찰력을 다듬고 단단하게 만들고 있었을 것이다.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690

2.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696

3.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39

4.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44

5.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761


* 도스토옙스키 처음 읽기

1.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811

2.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815

3.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879

4. 미성년: https://rtmodel.tistory.com/928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rtmodel.tistory.com/1068

6.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087

7.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153

8.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159

9.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171

10.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174

11.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https://rtmodel.tistory.com/1077

12.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177

13.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by 이병훈): https://rtmodel.tistory.com/1194

14. 매핑 도스토옙스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58

15.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62

16.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by 도제희): https://rtmodel.tistory.com/1388

17.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396

18.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429

19. 악몽 같은 이야기: https://rtmodel.tistory.com/1435

20. 악어: https://rtmodel.tistory.com/1436

21. 인간 만세!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488

22.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by 슈테판 츠바이크): https://rtmodel.tistory.com/1625

23.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by 조주관): https://rtmodel.tistory.com/1644

24. 백야: https://rtmodel.tistory.com/1659

25. 뽈준꼬프: https://rtmodel.tistory.com/1702

26. 정직한 도둑: https://rtmodel.tistory.com/1703

27. 크리스마스 트리와 결혼식: https://rtmodel.tistory.com/1704

28. 꼬마 영웅: https://rtmodel.tistory.com/1706

29. 약한 마음: https://rtmodel.tistory.com/1707

30.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 https://rtmodel.tistory.com/1711

31. 농부 마레이: https://rtmodel.tistory.com/1717

32. 보보끄: https://rtmodel.tistory.com/1719

33. 백 살의 노파: https://rtmodel.tistory.com/1721

34. 우스운 사람의 꿈: https://rtmodel.tistory.com/1722

35. 온순한 여자: https://rtmodel.tistory.com/1723

36. 예수의 크리스마스 트리에 초대된 아이: https://rtmodel.tistory.com/1724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설 읽는 그리스도인 - 소설은 한 사람을 알게 하는데 그게 나일 수 있다
이정일 지음 / 샘솟는기쁨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학은 신앙을 더 깊고 풍성하게 만든다

이정일 저, '소설 읽는 그리스도인'을 읽고

두 전작 ‘문학은 어떻게 더 신앙을 깊게 만드는가‘, ’나는 문학의 숲에서 하나님을 만난다‘와 함께 이 책 ’소설 읽는 그리스도인‘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동일하다. 제목에서 문학이 소설로 바뀌었을 뿐 저자의 메시지는 반복된다. 문학이 기독교 신앙을 더 깊고 풍성하게 만든다는 것. 그리스도인이자 아마추어 문학도, 그리고 본업인 과학 만큼 문학을 사랑하는 나는 이런 반복된 메시지가 여전히, 항상 반갑다. 저자와 같은 이유로 나 역시 진지한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속적으로 성경 읽기와 더불어 문학 (그중에서도 고전문학) 읽기를 적극적으로 권장한다. 작년부터 지속되고 있는 도스토옙스키 전작 읽기 모임 ‘도스토옙스키와 저녁식사를’도 이와 궤를 같이 한다.

저자의 첫 저서를 손에 들고 읽었을 때가 기억난다. 그 책이 출간되기 전부터 저자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그 책이 나왔을 때 나는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만 해도 전율과 희열을 느낄 수 있는데, 저자는 나와는 달리 문학박사에다가 목사이기에 문학과 신학에서 아마추어에 불과한 나는 저자의 깊고 풍성한, 그리고 간결하고 정리된 목소리에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 저서인 이 책에서도 나는 같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문학에 대한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통찰, 그리고 먼저 맛본 자의 혜안이 그의 신앙과 함께 여과 없이 잘 드러나 있다. 저자의 첫 저서를 첫사랑처럼 사랑하는 나에게는 두 번째 저서와 세 번째 저서가 부록으로 여겨지지만, 그 어느 책에서도 같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에 문학이 기독교 신앙을 더 깊고 풍성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체험하는 시작점으로 이 책을 삼아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저자의 궁극적인 바람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저자의 메시지에만 귀 기울이는 게 아니라 실제 삶에서 문학을 읽어나가면서 신앙의 깊이와 풍성함을 직접 맛보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정일 읽기
1. 문학은 어떻게 신앙을 더 깊게 만드는가: https://rtmodel.tistory.com/1167
2. 나는 문학의 숲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https://rtmodel.tistory.com/1444
3. 소설 읽는 그리스도인: https://rtmodel.tistory.com/1754

#샘솟는기쁨
#김영웅의책과일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4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입맛에 맞지 않은 새로운 음식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저,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읽고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모두 찾아 일독 및 재독 하는 방법도 권장할 만하지만, 경험해보지 못한 작가의 작품을 용기 내어 한두 권 읽어보는 것도 절대 게을리하지 말라고 나는 문학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곤 한다. 전자는 깊이를, 후자는 풍성함을 배가시키는 훌륭한 방법이라 믿기 때문이다. 깊이와 풍성함, 이 두 가지는 문학의 본질과 맞닿아 있으며, 문학이 추구하는 것뿐 아니라 문학으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까지도 포괄한다는 게 내 지론이다. 


'안토니오 스카르메타'라는 칠레 작가를 처음 만났다. 이런저런 루트를 통해 이 작품을 들었고, 작품 제목에 나온 '네루다'라는 이름이 내 입에 착 감기기도 했으며, 내가 알고 있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칠레 시인이었던 '파블로 네루다'와 동인인물인지 궁금했던 차에 마침 중고책을 구할 기회가 주어졌었다. 부담 없는 분량은 물론 첫 몇 페이지에서 느껴지는 작가의 문체가 매력적이어서 두 시간 정도에 다 읽어버렸다. 


감명 깊었다는 평은 하지 못할 것 같다. 비록 실존 인물이었던 파블로 네루다와 실제 칠레 역사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 이 책의 무게를 더하긴 하지만, 깊은 공감을 할 수는 없었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네루다와 칠레를 이름으로만 듣고 교과서 지식으로만 알고 있던 나의 좁은 지경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을 거꾸로 읽으면 이 작품을 좀 더 깊이 감상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방법을 알 수 있게 된다. 네루다와 칠레에 대한 정보를 미리 공부를 하고 이 책을 시작한다면 적어도 나보다는 공감의 한도가 높을 거라 생각한다. 네루다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시를 썼는지, 20세기 중반 칠레의 정치, 문화, 사회적인 변화 등을 시간 내어 살펴본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배경 지식을 차치하고 이 책을 문학작품만으로 한정하고 볼 때 나의 관심을 끌었던 부분은 작가 스카르메타의 문체였다. 어찌 보면 조금은 품위가 떨어지는 듯하고, 또 어찌 보면 서민들의 말투와 생각을 박제라고 한 듯 사실적으로 옮겨놓은 것 같은 문장들이 내겐 낯설기도 했고 신선하기도 했다. 특히 성적인 부분에 관련된 묘사들 앞에서 나는 굳이 이럴 필요가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작가의 의도가 있었을 것이고, 그저 내가 가진 이해의 한계 때문일 것이다. 줄거리에 대해서는 딱히 나의 버튼을 누른 장면이 없었기 때문에 여기엔 적지 않도록 한다. 이야기 진행이 특별하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내겐 진부하기만 했다. 영화로 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든다. 두 시간 정도 새로운 음식을 먹은 것 같은 기분이다. 그저 내 입맛에 맞지 않았을 뿐.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믿음을 묻는 딸에게, 아빠가 - 기독교에 회의적인 교양인과 나누고 싶은 질문 25가지
정한욱 지음 / 정은문고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상식과 교양을 갖춘 정직한 신앙


정한욱 저, '믿음을 묻는 딸에게'를 읽고


제목 (믿음을 묻는 딸에게)과 함께 부제 (기독교에 회의적인 교양인과 나누고 싶은 질문 25가지)만 읽어도 짐작할 수 있듯, 이 책은 딸이 질문하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을 빌려 저자가 기독교에 관련된 25가지 주제들을 선별하고 일반교양 수준에 맞춰 풀어쓴 글의 모음이다. '시작하며'에 이어 차례를 보면 저자가 다루는 주제들이 기독교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기독교 신학 혹은 신앙을 전제로 하지만 (저자는 기독교인이다), 그것을 넘어 인문학, 철학적인 내용까지 두루 섭렵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기독교인뿐 아니라 비기독교인에게도 열려있다. 부제에 등장한 '기독교에 회의적인 교양인'이라는 표현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차례를 다시 살펴보면, 25가지 질문들은 진지한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고민하고 갈등하는 주제들임을 깨닫게 된다. 또한 기독교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보였던 주제들도 기독교가 다뤄왔고 다루고 있으며 다뤄야만 하는 것들임을 깨닫게 된다. 


이 책을 읽고 나는 기독교인의 교양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저자의 독서의 양과 폭, 지식의 양과 깊이, 그리고 관찰과 성찰에 이은 탁월한 통찰은 나를 충분히 압도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매 꼭지는 간결하고 이해하기 쉽게 쓰여 가독성도 좋은데, 그 꼭지를 쓰기 위해 동원된 참고 서적들을 보면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성경과 신학을 성실하게 읽고 연구하는 평상시 저자의 내공이 잘 드러난 책이라 생각한다. 또한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잡힌 관점, 딸에게 알려주듯 애정과 이해와 배려가 담긴 문체 등을 보며 나는 보수적인 신앙인의 모델을 본 것 같았다. 


'교양인'이라는 단어 선택이 탁월했다는 생각이다. 기독교인 중에도 교양인이 좀 더 많아지길 고대한다. 질문하고, 답하려고 애써보고, 모르면 모른다고 정직하게 말할 줄 아는 상식적인 기독교인이 많아지면 좋겠다. 옹졸하고 편협하고 반지성적이고 비겁하기까지 한, 우물 속에 갇힌 이기적인 신념을 정통이나 순수라는 단어로 포장하여 기독교를 부끄럽게 만드는 기독교인들이 이해를 추구하며 끊임없이 공부하는 신앙인으로 거듭나길 간절히 소원한다. 이 책은 그런 면에서 충분히 변화의 마중물이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이다.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일독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덧. 그나저나 내 아들은 언제 이런 질문을 하게 될까. 나는 그 질문들에 답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정은문고

#김영웅의책과일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긴긴밤 - 제2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83
루리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혼자가 아닌 함께, 내가 아닌 우리


루리 글, 그림, '긴긴밤'을 읽고


밤의 길이는 영혼의 상태를 반영한다. 짧은 밤은 단잠과 함께 치유와 회복을 의미하는 반면, 긴 밤은 불면에 시달리거나 선잠을 자면서 피폐해진 몸과 마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긴긴밤을 통과했다는 것은 생사를 오가는 삶의 극한 순간을 간신히 넘어섰다는 표현이리라. 작품 속 주인공 코뿔소 노든과 펭귄 치쿠는 이러한 긴긴밤을 숱하게 통과한다. 이 작품의 방점은 단순히 고난과 역경을 극복했다는 데에 있지 않다. 그 긴긴밤 모든 순간을 함께 했다는 데에 있다. 혼자가 아닌 함께 말이다. 같은 코뿔소끼리도, 같은 펭귄끼리도 아닌, 코뿔소 한 마리와 버려진 알을 든 펭귄 한 마리가 함께 하는 공동체. 이 작품이 단순한 성장소설이 아닌 이유다. 


코뿔소와 펭귄의 연대는 강자와 약자의 연대다. 이들은 어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잠시 연합한 계약 관계가 아니다. 코뿔소는 화염 속에서 무너진 철조망을 넘어 그가 원하는 천국으로 뛰어갈 수 있었다. 바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말이다. 그러나 노든은 그러지 않았다. 버려진 알이 담긴 양동이를 물고 졸졸 따라오는 치쿠를 모른 체하지 않았다. 그는 치쿠의 느린 걸음에 기꺼이 보조를 맞추어 얼마나 더 걸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한 채 하염없이 걸어야만 하는 긴긴밤을 선택한다. 그에게 천국인 곳이 아닌 치쿠와 알에게 천국인 바다를 향해서 노든은 혼자가 아닌 함께를 선택한다. 이 동화를 읽으며 내겐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그리스도인인 나는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뛰노는 천국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노든도 치쿠도 부모가 누군지 모르는 고아로 성장했다. 노든은 야생 생활에서 인간의 폭력 때문에 아내와 딸을 잃기도 했다. 죽기 직전 구조되어 잠시 살게 된 동물원에서 그는 앙가부라는 친구도 잃었다. 역시 인간의 폭력 때문이었다. 생존자였던 노든은 인간에 대한 복수로 동물원을 떠났다. 그런 상황에서도 노든은 치쿠를 모른 체하지 않았던 것이다. 노든은 조그맣고 약한 치쿠와 치쿠가 들고 품고 다니는 알을 위해 그의 유익을 기꺼이 포기하고 그들을 보호하며 돕기로 했던 것이다. 아름다운 선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만약 노든이고 치쿠가 곁에 있다면 과연 나는 노든과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치쿠가 죽고, 다행히 때맞춰 태어난 아기 펭귄 '나'는 (이 작품의 화자다) 노든의 목숨 건 도움과 희생으로 혼자 마침내 바다에 다다른다. 험한 절벽을 혼자 넘으며 '나'는 '나'를 살게 하고 여기까지 있게 한 많은 이들의 진정성 어린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나'의 천국은 공짜가 아니었다. '나'를 사랑했던 이들의 땀과 눈물과 피의 열매인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단순한 성장소설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나'의 천국 입성이 이 작품의 화룡정점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일지 모른다. 여기서도 연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나'의 바다 도착이 이루지 못한 목적으로 작품이 끝났다 하더라도 이 작품의 메시지는 약해지지 않는다. 천국에 먼저 간 치쿠와 저 멀리 초원에서 늙어가는 노든의 마음에 안타까움이 더해질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작품을 읽고 뻔한 격언 하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혼자라면 빨리 갈 수 있지만, 함께라면 멀리 갈 수 있다.' 천국은 빨리 갈 수 있는 곳이기보다는 멀리 가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라 믿는다. 혼자가 아닌 함께, 내가 아닌 우리에게 허락된 곳일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나를 돌아본다. 나에게 노든이나 치쿠와 같은 존재가 있는가. 나는 혼자인가, 함께인가. '우리'라고 말할 수 있는 동지가 있는가. 소중히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내 것을 기꺼이 내려놓고 그 사람을 위해 모든 걸 내놓을 수 있는 사랑을 하고 있는가.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