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의 피아노 -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 일기
김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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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퍼하지 말고 더 사랑하기


김진영 저, '아침의 피아노'를 읽고


"김진영 선생님은 임종 3일 전 섬망이 오기 직전까지 병상에 앉아 메모장에 '아침의 피아노'의 글들을 쓰셨다." 

이 책의 첫 문장이다. 한 장을 더 넘기면 차례가 나온다. 2017년 7월부터 2018년 8월까지의 시간이 덩그러니 적혀있다. 1952년생인 저자 김진영은 2017년 7월 암 선고를 받는다. 그리고 2018년 8월 향년 66세로 세상을 떠난다. 암 선고를 받았을 때 그의 간은 이미 암덩어리가 장악하고 있었다. 병원에서 공식적인 진단을 받았던 그날 그는 암 환자가 되었다. 그 후, 1년 하고도 1개월. 비록 건조한 문자로 적혀 있지만, 이 책의 차례는 저자가 암 환자가 되고 암에게 육체를 내어주기 직전까지 그의 숨과 그의 정신을 오롯이 담아내고 있다.


"내 마음은 편안하다." 

'작가의 말'을 제외한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읽고 나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잠시, 마음이 다시 무너졌다. 나는 죽기 3일 전에 과연 이런 문장을 쓸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더 무거워진다. 


암 환자로 지낸 1년 1개월간 저자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책은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였던 것 같다. 총 234편의 짧은 일기 가운데 수 차례 언급되기도 했고, 이 책의 부제도 같은 제목이기 때문이다. 아직 바르트의 '애도 일기'를 읽어보지 않은 나로선 면밀한 비교가 불가능하겠지만, 저자가 스스로 바르트와 비교한 바에 따르면, 바르트의 일기는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글인 반면, 저자의 일기는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글이다. 즉, 바르트는 '사랑하는 대상'을 잃어버린 상황을 애도한 반면, 저자는 '사랑하는 주체'를 잃어가는 상황을 애도한 것이다. 요컨대, 사랑의 객체와 주체의 차이. 저자는 부끄러움과 괴로움을 느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신은 바르트보다 지극히 행복한 처지라고. 자신은 죽어가고 있지만, 사랑의 대상들은 생생하게 현존하기 때문이라고. 그것들을 사랑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고. 


아, 이런 사유라니! 죽음을 앞둔 철학자의 사유를 따라가다 보면, 감정은 벅찬 가슴을 무너뜨리고, 이성은 맑은 상태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타자의 상실을 저울에 올려놓을 수는 없겠지만, 사랑하는 주체의 상실보다 사랑받는 객체의 상실이 내게도 더 묵직하게 다가온다. 나는 나를 잃어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기는 싫은 마음. 공감이 된다. 특히 한 여자의 남편이자 한 아이의 아빠라는 존재자로서 나는 이 마음을 더 공감하게 된다. 죽음이라는 존재론적 불안의 근원 앞에 단독자로 서게 되면 사람은 이타적이 되는 걸까. 


이어령 선생님은 88세로 세상을 떠나기 6개월 전에 사랑을 언급한다. 복막에서 시작된 암세포가 맹장과 대장, 간으로 전이되어 두 번째 수술을 받은 후 치료 중단을 선언하고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면서 친필로 쓰신 글의 요지가 '사랑'이었다. 마지막까지 사랑할 수 있는 것들을 사랑하자고 했다. 김진영 선생님 역시 이 책에서 사랑을 언급한다. 이 세상을 마지막까지 사랑할 거라고, 그것만이 자기의 존재이고 진실이고 의무라고. 그런데 가만히 다시 보니, 이 다짐이 적힌 204번째 일기는 "병원에 다녀왔다. 결과가 안 좋다."로 시작한다. 그럼에도 그는 세상이 여전히 아름답다고 하면서 그 세상을 끝까지 사랑하겠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아, 나는 나의 미래의 죽음 앞에서 이렇게 사랑을 노래할 수 있을까.


이것 말고도 이 책에 담긴 문장들은 간결하고 함축적이며 깊다. 활자보다 여백이 더 많은 이 책의 바른 독법은 여백을 읽어내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시간이 더는 추상적인 의미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체험적인 질량이고 무게이고 깊이로 다가간 순간들을 살아내는 저자의 일상도 활자가 아닌 여백에 더 많이 담겨있을 것이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든 나날 가운데 매일 같이 도래한 아침의 숭고함을 알고 그 하루를 정중하게 환대하는 저자의 몸과 마음도 활자로 쓰인 문장이 아닌 쓰이지 않은 문장들에 훨씬 더 많이 녹아있을 것이다. 책을 덮었지만 여운이 오래 남을 듯하다. 그러나 죽음을 깊은 묵상한 자로서 나는 다가오는 '오늘 하루'를 더 감사하며 더 소중하게 살아내리라. 슬퍼하지 말고 더 사랑하리라.


#한겨레출판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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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 성경을 읽다
이상환 지음 / 도서출판 학영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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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해석의 또 하나의 좋은 안내서


이상환 저, 'Re: 성경을 읽다'를 읽고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안내서로 나는 그동안 여러 번 더글라스 스튜어트와 고든 D. 피가 쓴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와 김근주 교수가 쓴 '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를 추천하곤 했다. 이제 한 권 더 늘었다. 바로 이 책, 이상환 목사가 쓴 'Re: 성경을 읽다'이다. 이 세 권을 읽고 본격적인 성경 읽기에 들어간다면 주문 외우듯 수십 번 성경만 통독한 어르신들이 닿지 못한 깊이까지 이해하고 건전하고 건강하게 하나님을 더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가족과 함께 최근 4년간 성경을 세 번 통독하고 나니 올해부터는 약간의 갈증이 생겼었다. 내년부터는 조금 더 깊고 넓게 성경을 읽고 싶어서 최근에 나는 그 해결책으로써 스터디 바이블 하나를 구매했다. 가족과 함께 읽어나가는 성경 읽기도 지속하겠지만, 내년엔 혼자서 매일 스터디 바이블을 통해 하나님을 더 알아가려고 애써볼 작정이다. 이런 상황에 때마침 이 책을 읽게 되어 감사하다는 생각이다. 역시 하나님은 나의 시간표를 잘 아신다. 


이 책은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안내서다. 쉽고 간결하여 신학서적이라는 분류가 무색할 만큼 읽어나가기가 수월하다 (나는 3시간 채 걸리지 않아 다 읽어버렸다). 무엇보다 이 책의 장점은 해석학이라는 어려운 학문의 진입 장벽을 낮춰 쉽게 설명한다는 것이다. 나 역시 프로 생물학자라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전공 지식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의 진입 장벽이 낮다는 말은 결코 이 책이 가벼운 책이란 말이 아니다. 오히려 저자의 하나님 말씀에 대한 사랑과 열정과 오랜 연구가 만들어낸 열매일 것이다. 독자들은 그저 이 단 열매를 따먹으며 성경 해석에 대한 바르고 건전한 자세를 배우기만 하면 된다.


저자가 짚어 주듯이 성경은 양면성, 즉 역사성과 초월성을 가진다. 특정한 시대에 만들어진 역사적 문서이면서 동시에 그 시대에만 귀속될 수 없는 의미를 지니는 초월적 문서다. 초월적인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였지만, 유한한 인간을 통해 쓰였기 때문에 역사성을 띨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성경 해석을 위해서는 이 양면성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접근하려고 애써야 한다. 저자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써 의사소통 모형을 소개한다. 이 책의 목적은 의사소통 모형을 통해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방법을 쉽게 풀어내는 일이다. 


의사소통 모형은 전통적인 해석학의 세 가지 접근법인 (1) 저자 중심 (텍스트 뒤에서 해석), (2) 텍스트 중심 (텍스트 안에서 해석), (3) 청중 중심 (텍스트 앞에서 해석)을 절충한 모형이다. 저자 중심으로만 성경을 해석하면 텍스트와 청중이 배제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특히 저자가 미상인 경우엔 곤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텍스트 중심으로만 성경을 해석하면 저자의 의도를 놓치거나 그것과 무관한 해석을 하는 위험이 커진다. 무엇보다 텍스트 안에 갇혀 콘텍스트를 놓치기 쉽다. 청중 중심으로만 성경을 해석하면 고정된 의미는 사라지고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해석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얄팍한 상대주의로 흘러갈 위험이 커진다. 그러므로 건전하고 온전한 성경 해석을 위해서는 이러한 세 가지 접근법의 장단점을 고려하여 절충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저자가 소개하는 의사소통 모형인 것이다. 


다행히도 내가 수년 전부터 읽어온 성경 해석에 관련된 신학 서적들은 이미 이러한 의사소통 모형을 이용하여 집필된 것이다. 크리스토퍼 라이트나 김근주 교수, 톰 라이트나 스캇 맥나이트의 책들을 떠올려보면 저자나 텍스트나 청중 중심으로만 치우쳐 쓰인 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의사소통 모형은 이미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서 사용되고 있는 모형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특별하다기보다는 너무나 합리적이고 너무나 당연한 성경 해석 접근법인 것이다. 


자주 들었던 말이지만 들을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성경은 우리를 위해 쓰였지 우리에게 쓰이지 않았다."는 문장은 성경 해석학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해준다. 일차 독자와 이차 독자 사이의 간격, 즉 수천 년 전의 원청중 (일차 독자)과 현재 우리 같은 이차 독자의 사이에는 수많은 차이가 존재한다. 저자와 일차 독자 사이에서는 특별한 설명이 없어도 통하는 단어들이 시공간이 다른 이차 독자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 타임머신을 타고 원청중 혹은 일차 독자에게 가서 저자가 쓴 단어의 의미와 맥락을 물어보면 쉽게 해결되는 문제일 수 있겠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차 독자인 우리들에게 완전한 성경 해석은 현실에서 구현할 수 없는 이상에 머물 수밖에 없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완전한 성경 해석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성경 텍스트만 공부하는 바이블 스터디를 넘어 성경의 다층적 측면까지 살피는 비블리컬 스터디즈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그리고 절대적 확실성을 지양하고 합리적 확실성을 지향해야 한다고. 웨슬리안 사변형의 네 요소인 성경, 경험, 전통, 이성 중 으뜸이 성경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말라고. 마지막으로 목회자나 신학자가 아닌 모두가 평신도 신학자가 되길 요구하는 저자의 바람에 나는 아멘으로 화답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성경 공부와 신학 공부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믿기 때문이다. 


#학영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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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사자 2024-03-13 04: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 정말 좋네요. 리뷰 참 잘 쓰십니다. 감사합니다.
 
보통 이하의 것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호영 옮김 / 녹색광선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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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작가를 처음 만나는 문으로 녹색광선 책이 탁월하다는 생각입니다. 소장용으로라도 구매할 가치가 충분합니다. 읽고 감상문 남기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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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남편 열린책들 세계문학 119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정명자 외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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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를 향한 도스토옙스키의 시선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예수의 크리스마스 트리에 초대된 아이‘를 읽고


1876년 '작가 일기'에 실린 이 짧은 소설은 어린아이를 향한 도스토옙스키의 따스한 시선을 담고 있다. '뭐라고? 도스토옙스키의 따스한 시선이라고?!', 하며 놀랄지도 모르겠다. 늘 광인의 변주곡 연주하길 즐기며, 지극히 통속적인 상황에서 지극히 심오한 인간의 본성을 파헤쳐내는 그에게서 외과의사의 메스 같은 날카로움이나 냉철함이 아닌 햇살 같은 따스함이라니.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그건 도스토옙스키를 절반도 모르기 때문에 넘겨 짚은 성급하고 경솔한 추측일 뿐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만약 도스토옙스키가 외과의사의 메스이기만 했다면, 그가 아무리 러시아 대문호라 하더라도 결코 200년이라는 시간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이렇게까지 강렬하게 알려지진 않았을 거라고. 그렇다.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의 어두운 민낯을 해부하기만 한 게 아니다. 구원도 이야기한다. 진창과도 같은 참혹한 현실에 따스한 햇살 같은 구원의 빛을 비춘다. 이러한 면모는 후기작으로 갈수록 도드라지는데, 그가 시베리아 유형을 다녀온 이후라는 점, 그리고 그 이후에도 수많은 경제적, 정신적, 육체적 어려움을 극복해내며 꿋꿋이 작가이길 고집해왔다는 점이 이를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말했다시피, 이 작품은 그가 마지막 대작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만을 남기고 있던, 그가 타계하기 5년 전에 발표된, 그의 철학과 신학이 무르익은 시기에 탄생한 소설이다.


어린아이를 향한 도스토옙스키의 시선을 가장 강렬하게 느낄 수 있는 작품은 아무래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지 않을까 한다. 카라마조프 가의 둘째 아들 이반은 무신론을 대변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가 무신론의 근거로 들고 있는 강력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무고한 어린아이의 고통'인데, 어른들의 죄로 인해 아무런 잘못도 죄도 없는 어린아이들이 고통받고 죽임을 당하는 현실 앞에서 기독교는 철저히 무능할 뿐이라는 논리였다. 이런 끔찍한 현실을 무방비 상태로 놓아두면서 기독교가 구원을 이야기하는 건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무고한 어린아이의 고통과 죽음을 묵인한 천국 따윈 거부하겠다는 게 이반 카라마조프의 입장이었다. 아마도 기독교인을 포함하여 이 대목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장면이 아니었을까 한다. 기독교인인 나 역시 하나님의 섭리라든지, 우린 하나님의 일부만 알뿐 다 알지 못한다는 인간의 한계를 내세워 설명하는 궁색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피부로 와닿는 현실적인 부조리에 대해 기독교는 '궁극적인' 답이 될 수 있을지언정 '즉각적인' 답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사탄이 사십 일 금식한 예수를 시험할 때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한 요구와도 일맥상통한다. 이반이 지어낸 대서사시 '대심문관'을 빛나게 만드는 대심문관의 치명적인 논리와도 결을 같이 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반의 논리를 통해 역설적으로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순수함을 고결한 가치로 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도스토옙스키가 급작사를 하지 않았다면 가능했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2부에서 알료샤와 함께 본격적인 등장인물이 될, 일류샤의 죽음이 남긴 열매라고 할 수 있는, 열두 명의 소년들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도 어린아이를 향한 도스토옙스키의 따스한 시선을 관찰할 수 있다. 그에게 있어 어린아이는 미래이자 희망이자 순수함이었고, 이는 예수가 어린아이를 대하는 자세와도 동일했던 듯하다. 


이러한 시선이 이 짧은 작품 속에서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작품 속 어린아이는 가난하고 헐벗은 홈리스다. 술과 폭력과 음란에 사로잡힌 더러운 어른들의 손아귀에 붙잡혀 강제로 추운 겨울날에도 여름옷처럼 얇은 옷만을 걸친 채 밖에서 구걸이나 좀도둑질을 하도록 희생당하고 있는 불쌍한 생명이다. 이 아이를 묘사하고 있는 도스토옙스키의 마음과 생각을 짐작해보면, 이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태어난 게 죄라도 된단 말인가, 가장 고결하고 순수한 생명이 저토록 유린당하는 현실에 과연 희망이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하는 등등의 의문을 저절로 품게 된다. 


결국 이 아이는 동사하고 만다. 죽어서 천사가 되어 꿈을 꾸게 되는 장면이 제목 '예수의 크리스마스 트리에 초대된 아이'가 뜻하는 바다. '예수의 크리스마스 트리'에 초대된 아이들은 모두 주인공처럼 그 어디에도 초대받지 못한 채 떠돌다가 객사하거나 동사한 생명들이었다. '성냥팔이 소녀'처럼 크리스마스에도 선물이 주렁주렁 달린 트리가 놓인 따뜻한 집안이 아닌 지독히 추운 바깥에서 그 집안을 들여다보며 신기해하고 부러워하고 슬퍼하다가 육체적 한계에 다다라 생을 마감하게 된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이 끔찍한 현실을 묘사한 부분은 아래에 옮겨본다.


"어떤 아이들은 뻬쩨르부르그의 관리들이 현관 계단에 내버린 광주리 속에서 얼어 죽었고, 어떤 아이들은 형편없는 영아원에서 굶어 죽었으며, 어떤 아이들은 사마라의 기근 때에 자기 엄마의 말라붙은 젖에 매달려 죽었고, 또 어떤 아이들은 3등 열차 칸의 악취에 질식해서 죽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다시피 도스토옙스키는 이러한 참혹한 현실을 르포르타주처럼 보고하고 끝내지 않는다. 나는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에서 이 작품의 메시지를 찾는다. 


"이들 모두는 지금 여기에서 천사들로서 예수님 곁에 있으며, 아이 또한 이들 가운데 하나로 있으면서 이들과 이들의 죄 많은 엄마들을 축복하며 팔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이 아이들의 엄마들 또한 한쪽에 비켜서서 울고 있다. 모든 엄마들이 자신의 아들 딸들을 알아보고 이들에게로 날아와서 입 맞추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아이들의 눈물을 닦아 주면서 여기는 좋은 곳이니 이제 울지 말라고 달래고 있다……"


물론 여기서도 참혹한 현실에 대한 '즉각적인' 해결책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도스토옙스키가 그리는 천국의 단면을 살짝 보여줬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기독교가 할 수 있는 담백한 대답이라 생각한다. 이반 카라마조프처럼 '즉각적인' 해결책을 원하는 자들에게는 이 대답이 가소롭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린 여기서 이반 카마라조프의 말로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악마에게 사로잡혀 스스로 붕괴되고 마는 그의 말로를 말이다. 또한 이반 역시 스스로가 기독교에게 원했던 ‘즉각적인’ 답을 갖지 못했다는 점 역시 기억해야 한다. 참혹한 현실은 가시적인 육신의 문제가 아니다. 기독교는 영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그 이면의 근원적인 문제를 인간의 타락에서 찾는다.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는 바로 이 문제로부터 인간을 포함한 창조세계를 구속하기 위한 창조주 하나님의 궁극적인 해답이다. 무고한 어린아이의 고통이 동반되는 참혹한 현실의 문제는 빵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육신의 빵은 곧 배고픈 상태를 유도하기 마련이다. 영원히 배고프지 않는 빵만이 유일한 해결책이 된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처럼 영원히 배고프지 않는 빵, 곧 그리스도 예수다. 인간에겐 ‘즉각적인’ 답이 아닌 ‘궁극적인’ 답이 필요한 것이다. 전자는 일시적인 반면 후자는 영원하다. 물론 후자는 전자를 무시하지 않는다. 인간은 유한한 육신을 입고 있는 한계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의 근원을 가시적인 육신의 문제에 두고 그것만을 해결하려고 하는 인간의 한계를 그 누구보다도 명징하게 간파했을 뿐이다. 인간의 본성은 결국 신의 존재와 연결되기 마련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도스토옙스키가 그 어느 작가보다도 인간을 잘 이해한 결정적인 증거라 생각한다.


* 도스토옙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811

2.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815

3.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879

4. 미성년: https://rtmodel.tistory.com/928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rtmodel.tistory.com/1068

6.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087

7.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153

8.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159

9.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171

10.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174

11.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https://rtmodel.tistory.com/1077

12.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177

13.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by 이병훈): https://rtmodel.tistory.com/1194

14. 매핑 도스토옙스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58

15.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62

16.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by 도제희): https://rtmodel.tistory.com/1388

17.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396

18.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429

19. 악몽 같은 이야기: https://rtmodel.tistory.com/1435

20. 악어: https://rtmodel.tistory.com/1436

21. 인간 만세!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488

22.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by 슈테판 츠바이크): https://rtmodel.tistory.com/1625

23.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by 조주관): https://rtmodel.tistory.com/1644

24. 백야: https://rtmodel.tistory.com/1659

25. 뽈준꼬프: https://rtmodel.tistory.com/1702

26. 정직한 도둑: https://rtmodel.tistory.com/1703

27. 크리스마스 트리와 결혼식: https://rtmodel.tistory.com/1704

28. 꼬마 영웅: https://rtmodel.tistory.com/1706

29. 약한 마음: https://rtmodel.tistory.com/1707

30.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 https://rtmodel.tistory.com/1711

31. 농부 마레이: https://rtmodel.tistory.com/1717

32. 보보끄: https://rtmodel.tistory.com/1719

33. 백 살의 노파: https://rtmodel.tistory.com/1721

34. 우스운 사람의 꿈: https://rtmodel.tistory.com/1722

35. 온순한 여자: https://rtmodel.tistory.com/1723

36. 예수의 크리스마스 트리에 초대된 아이: https://rtmodel.tistory.com/1724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690

2.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696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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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남편 열린책들 세계문학 119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정명자 외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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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를 파괴하는 구원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온순한 여자‘를 읽고


도스토옙스키의 기발함이랄까 기괴함이랄까. 도대체 어떻게 이런 상상을 할 수 있는 걸까. 이번엔 창 밖으로 몸을 던져 자살한 아내를 테이블에 올려둔 채 상념에 잠긴 한 남자의 이야기다. 섬뜩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 소설이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이라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언제나 그렇듯, 이 작품도 결코 호러물로 전개되지 않는다. 상황보다 사람, 그리고 사람의 외면보다 내면에 초점이 맞춰진다. 다행스러운 건, 적어도 이 작품 속 주인공은 '분신‘이나 ’약한 마음‘의 주인공처럼 정신병원으로 끌려가진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중증의 정도는 약한 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자기 안에 갇혀 있다는 점에서 이 남자 역시 ‘분신’의 주인공이자 모든 도스토옙스키 작품 속 광인의 원형인 골랴드낀의 연장선에 있다. 한 가지 큰 차이라고 한다면, 주인공이 가진 파괴적인 자폐 기질의 총구가 자신이 아닌 아내를 향한다는 점이다. 이 독특한 부분에 대해선 조금 더 풀어볼까 한다.


먼저 주인공의 자폐 기질에 대해서 짚어볼 필요가 있다. 참고로, '자폐'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자폐증 환자를 떠올리면 곤란하다. 차라리 사회로부터 고립되고 병적일 정도로 자기중심적인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을 머릿속에 그리면 얼추 비슷하게 우리 주인공의 캐릭터에 접근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우리가 숨 쉬고 있는 현실에서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는, 아니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인물, 아니 어쩌면 내 모습일지도 모른다. 


주인공이 자기 안에 갇히게 된 근원적인 이유는 알 수 없다. 언제나 그렇듯, 도스토옙스키 작품을 읽을 때 우린 프로이트가 될 필요가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들러가 될 필요도 없다. 그저 도스토옙스키가 창조한 작품 속 인물의 개별적인 내면으로 들어가 두 눈을 뜨고 조용히 그 까발려진 민낯을 관찰한 후 나를 포함한 보편적인 인간의 본성과 심리를 고찰하는 데까지 천천히 나아가면 된다. 


작품 속에서 드러난 자폐의 이유는 그가 장교였을 때 벌어진 한 사건과 관련이 있다. 그는 그 사건 때문에 은퇴하게 되는데, 요컨대 체면 혹은 자존심을 지키려다가 내면의 깊은 상처를 받게 되는 일이었다. 적어도 19세기 러시아 제국 시대 남자들에겐 명예가 굉장히 중요했던 것 같다. 푸시킨이나 톨스토이 작품에서도 명예라는 단어는 심심찮게 다뤄진다. 20세기말에 한국에서 태어나 21세기를 살아가는 내 눈에는 조금 유치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 당시 러시아 남자들은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는 상황을 극도로 거리꼈고, 그런 상황이 실제로 벌어지면 당당히 목숨을 걸고 결투를 신청하는 게 남자다운 행동으로 여겨진 듯하다. 이 작품 속 주인공의 과거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은 결투를 신청하지 않았고, 이는 은퇴 이후에도 사람들 사이에서 부정적인 이미지로 회자되었다. 그는 결투를 신청하지 않았던 결정에 대한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이유를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사건 이후 스스로를 사회로부터 고립시킨다. 


은퇴 이후 그는 전당포 주인이 되었다. 그는 이 직업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는 소신 있는 인물인 듯하다. 과거에 결투 신청을 하지 않아 사람들로부터 부정적인 이미지를 입었을 때에도 스스로를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점이 도스토옙스키의 다른 작품에 등장하는 골랴드낀의 여러 분신들과의 차이라고 볼 수 있겠다. 남의 시선에 맞춰 살아가며 자아의 분열과 상실을 겪는 인물들과는 달라 보인다. 물론 이래도 저래도 결국 자기 안에 갇히는, 즉 병적인 자폐의 기질을 보이는 건 매한가지이지만 말이다. 어찌 보면 이 작품 속에선 주인공의 이러한 소신이 아내의 자살을 유도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장이 열등감의 표출이듯, 자존감이 바닥인 사람들은 소신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 역시 자존심을 부리는 과도한 몸부림의 일환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문제는 소신이 있냐 없냐가 아니다. 그 소신이란 게 객관성과 합리성을 보유하고 있는지, 얼마나 건강한지가 관건이다. 


어느 날 전당포에 한 여자가 찾아온다. 제목에서 가리키는 '온순한 여자'이자 머지않아 그의 아내가 되어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될 인물이다. 가난한 이유로 가치 없는 물건까지 들고 와 돈으로 바꾸려는 그 여자에게 주인공은 마음을 두게 된다. 뒷조사를 하여 그녀의 생활 사정을 알게 된다. 이미 두 아내를 저승으로 보내고 세 번째 아내로 그녀를 점찍고 접근하는, 나이 쉰 살의 한 뚱뚱한 상인이 그녀에게 사탕 한 근을 사가지고 찾아가던 날 저녁, 우리의 주인공은 호기롭게도 그녀의 하녀를 불러 그녀를 그 자리로부터 빼낸다. 그리고 청혼을 한다. 스스로의 말을 비굴할 정도로 과도하게 반추하면서 말이다. 그녀는 의외로 (주인공 생각에는 그녀가 고민할 가치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상인과 자기를 감히 비교하다니,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승낙해 버린다. 우리의 주인공은 이 가난한 여자에게 나름대로의 구원을 베푼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구원이 과연 누구를 위한 구원이었던가?, 아니 누구를 구하기라도 했단 말인가?,라고 묻는 듯하다. 차라리 그녀가 그 상인과 결혼했더라면 자살로 생을 마감하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상인이 그녀를 찾아갔던 날, 그가 그녀를 빼낸 행동은 결국 구원의 손길이 아니라 파멸로 가는 샛길을 터준 셈이지 않았을까. 이렇게 보면, 작품 도입부에서 주인공이 방금 전에 자살한 아내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생각에 빠져있는 장면이 비로소 이해가 된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설명할 수 없었다.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방금 겪은 아내의 자살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는 알지 못했다. 아마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결혼 후 그는 아내가 된 그녀에게 냉담하게 대한다. 그녀를 대할 때 그는 주로 침묵으로 일관하기도 하고, 스스로가 다른 류의 사람이자 수수께끼 같은 사람임을 알리기 위해 어리석은 수작도 부리는데, 이상하게도 그는 그렇게 하는 행동이 지혜롭다고 여기는 듯하다. 마치 그녀를 앞에 두고 원맨쇼를 하고 있는 듯해 보일 정도다. 자존감이 극도로 낮은 자에게서 곧잘 나타나곤 하는 행동양식, 즉 허세일 것이다. 이 허세의 일부는 아마도 그가 그녀에게 구원자였다는 전적이 스스로에게 훈장으로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 그녀는 거의 노예 같은 존재여야 한다고 여기지 않았을까 싶다. 


그녀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느닷없이 전당포 일을 마음대로 처리하기도 하고 외출을 오래 하기도 한다. 대화가 차단된 마당에 그녀가 조용히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런 것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 역시 그에 대한 뒷조사를 해서 그의 과거를 알게 된다. 비겁자로 회자되기 시작했던 그의 이력을 알게 된다. 그녀는 그가 자는 동안 권총으로 그를 살해하려는 시도도 한다. 둘 중 누군가가 죽어야만 모든 것이 끝난다는 생각에서였을까. 아마도 그녀는 갈 데까지 간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가 그녀는 결국 자신을 죽이게 되지만 말이다. 그녀는 점점 창백해져 갔고 또 쇠약해져 갔다. 


어느 날 예기치 못한 순간에 우리의 주인공은 자기 눈앞에의 장막이 걷혔다고 고백한다. 그녀가 혼자 흥얼거리며 노래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직후였다. 그는 그녀에게 곧장 다가가서 정신 나간 사람처럼 그녀 옆에 앉아 드디어 대화를 건넨다. "우리……저……뭐든 이야기를 합시다!" 그리고 그녀의 발 밑에 허물어져 발에 입을 맞추는 등 환희에 찬 상태로 말한다. "……이렇게 일생 동안 당신을 숭배하게 해주오……" 그는 히스테리 같은, 혹은 열병에 걸린 것처럼, 혹은 광기에 찬 상태로 그녀를 놀라게 했던 것이다.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에게 무심결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나는 당신이 그렇게 날 내버려 두리라고 생각했어요." 그 말은 마치 단검으로 그의 가슴을 도려내는 것 같았다!


다음 날, 그녀는 그에게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 그동안 괴로웠다는 것, 지금도 괴롭다는 얘기를 했다. 다음과 같은 말도 한다. "나는 당신의 충실한 아내가 되겠어요…… 나는 당신을 존경할 거예요……" 그는 미친놈처럼 그녀를 포옹한다. 그리고 그가 잠시 볼 일을 보러 잠시 집을 비우게 되는데, 그가 집에 돌아오기 10분 전쯤에 그녀는 손에 성상을 쥐고서 돌연 창밖으로 뛰어내려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의 회심 (?)은 너무 늦었던 것이다.  


자살한 아내를 테이블 위에 두고 있는 주인공. 그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내를 눈먼 여인이라고 부르면서 그가 그녀에게 어떤 천국을 가져다주려 했는지 아냐고 묻는다. 그는 스스로 죄가 없다고 믿는 것이다. 죽은 사람에게 어리석었다는 말을 퍼붓고, 자신의 진심을 왜 이해하지 못했냐고 말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나는 묻고 싶다. 누가 진정 어리석었는지, 누가 진정 눈이 멀었던 것인지 말이다. 또한 아내가 자살한 상황에서 어떻게 자기 자신에 대한 죄책감이나 아내에게 잘해주지 못한 것들에 대한 후회와 반성이 아닌 아내를 향한 원망으로만 가득 찰 수 있는지 나는 그를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가 아내의 발아래에 엎드려 키스를 하며 사랑을 맹세하는 행동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도 나는 의심스럽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내라는 사람을 품지 못하고 오로지 자기 안에 갇혀 있을 뿐이지 않았을까 싶다. 자기 안에 갇힌 사람이 고백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나는 주인공이 그녀와 결혼한 사건이 비극의 시작이라고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그녀가 유일하게 잘못한 게 있다면 온순했다는 점일 텐데, 온순하다는 게 잘못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 도스토옙스키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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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690

2.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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