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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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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읽고.

"고도를 기다리며" "데미안"을 넘어 "좁은문"을 지나 "토지"를 밟고나오자 "설국"이었다.
(그 유명한 책의 첫 문장을, 한 달간 내가 읽어온 문학 작품의 순서대로 패러디해봤다. 의미없음.)

얼추 파악했다고 생각한 스토리, 난 그것이 책의 마지막까지 지속될 줄은 미처 몰랐다. 내심 어떤 사건을 기대했고 그러는 와중에 긴장까지 했다. 어떤 복선이 그려지지 않나 싶어 작가가 묘사하는 자연의 풍경이라든지 여자들의 행동과 말에서 단서를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런 사건도, 아무런 갈등도 없이, 그렇게 밋밋하게 책은 마침표를 찍어버렸다. 추운 날 겨울, 휑하니 스쳐지나 가버린 기차처럼 마흔이 되어서야 처음 맛본 "설국"은 그렇게 내게 왔다가 가버렸다.

한참 동안 책 앞 표지를 바라보며 "설국"이 남긴 잔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책 제목이 왜 "고마코"나 "요코", 아니면 "게이샤"가 아니라 "설국"인지 알 것 같았다. 내 몸과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책의 스토리가 아니었고 눈의 나라, 설국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descriptive하기만 한 책도 아니다. 잔잔한 여운이 남기 때문이다. "이상한 사람", "싫어요", "가세요", "어머"를 연발하는 고마코의 모습이 그려지고, 그와 묘하게 반대 이미지를 가지는 듯한 요코의 모습도 하얀 눈 고장에서의 찬 기운과 나도 한번 들어가고픈 여관 온천의 더운 증기와 함께 떠오른다. 책의 끝부분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듯한 요코의 모습에서조차 작가는 그다지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죽음도 그냥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단편들일 뿐이라는 걸 말해주는 것 같았다. 시마무라가 다시 도쿄로 돌아가서 정상적인 가정 생활을 할 수 있을지도 궁금해 하지 않는다. 고마코와의 관계가 어떻게 이어질 지에 대해서도 별 말이 없다. 그저 일상이다. 그렇다. "설국"은 그렇게 일본의 눈 고장에서의 일상을 허무하리만큼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게 남은 여운은 글이 아니라 그림에 가까운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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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명한 피
플래너리 오코너 지음, 허명수 옮김 / IVP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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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너리 오코너의 “현명한 피”를 읽고.

평소 같았으면 방금 읽은 책의 잔상에 의지하여 노트북 앞에 앉아 감상을 써내려 갔을 것이다. 그러나 어젠 그러지 못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어젯밤, 플래너리 오코너의 “현명한 피”는 내게 뭐라 정의할 수 없는 잔상을 남겼다 (그래서 그랬는지 밤엔 불쾌한 꿈을 꿨다. 개운하지 않은 기분으로 오늘을 맞이했다). 어떤 흥미진진한 스토리도 아니었고, 교훈을 얻을만한 잠언집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설국"이 남겨준 것처럼 그림 같은 이미지도 아니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리 복잡하지도 않다. 등장인물은 박경리의 “토지”에 비하면 그 수가 십분의 일도 안되었고, 책에서 설정한 시공간의 단순함, 결코 많지 않은 대화, 그리고 불과 200페이지 정도의 분량 때문인지 플롯 자체도 단순했다. 그러나 기승전결이 분명하지 않았을 뿐더러, 인물들 사이의 갈등 구조도 특별한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머릿속은 다른 책을 읽었을 때와 달리 복잡하기만 했다. 왜 그랬을까?

이 책은, 읽는 내내 느껴지는 묘한 긴장이 있다. 이는 추리소설이나 스릴러물을 읽을 때와는 다르다. 사건 전후를 관찰하여 단서를 찾아내고 또 그 다음을 예측해 나가며 과연 내가 맞을까 틀릴까 하는 기대와 조바심이 전혀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러한 예측 자체를 거부했거나, 예측을 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거나, 아니면 적어도 나에겐 그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무섭다는 표현도, 기괴하다는 표현도 이 책의 느낌을 표현하기엔 적당하지 않다. 책 소개에 사용된 단어가 그나마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그로테스크. 그렇다. 플래너리 오코너의 “현명한 피”는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조용하지만 강렬하게 던져주는 책이다.

총 14장으로 쪼개져 있는 전체 스토리는 장과 장 사이의 연결고리가 존재한다. 스토리도 잘 연결이 되는 편이다. 그러나 그 어떤 장도 내게 명확한 메시지를 던져주지는 않았다. 매 장마다 남는 알듯말듯한 그 찜찜함은 뭔가 나중에 큰 사건이 일어날 복선 같기도 하고, 큰 사건이 터지기 직전과 같은 폭풍 전 고요 같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느낌이 지속되다가 책은 마지막에 주인공을 죽이고서야 끝이 난다.

기독교 예수의 의미를 상식적으로나마 모르는 사람은 아마 이 책을 이해하긴 힘들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예수를 깊이 알고 있는 사람조차 이 책을 이해하기에 힘들어 하긴 마찬가지일 것 같다. 뭔가 숨겨져 있는 의미를 완전히 찾아내려고 맘먹는다면 말이다. 이 책에는 기독교에서 정의하는 인간의 죄와 구원에 대한 개념이 바닥에 깔려 있다. 그 개념을 정의하거나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독자들에게 기괴한 느낌의 답 없는 수수께끼를 툭 던져놓는다. 예수는 구원자, 그리스도, 자기 몸을 희생하여 모든 인류의 죄를 없앤 존재 정도로 그려져 있다. 심각한 기독교의 교리나 사상을 적어도 나는 이 책에서는 감지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지속적으로 맡은 것은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진하게 가미된 광신적인 냄새였다. 그것은 무지와 맞닿아 있는 것 같았고, 영과 진리의 밸런스가 깨어진 채로 감각적이고 주관적인 종교로 그려져 있었다. 사기도, 절도도, 폭력도, 살인도, 그리고 자학도 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사람들의 의식 너머에 존재하는 잠재의식과 무의식의 차원까지 깊숙이 새겨진 그 어떤 힘이었다.

주인공인 헤이즐 모츠는 진리가 없다는 게 진리라며, 그리스도 없는 교회를 전한다며, 죄와 구원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없었던 거라며, 정통기독교에서 말하는 사상에 반대되는 생각을 하고, 그것이 자신을 이끌고 가는 힘이 될 정도로 그에게선 중심사상이 되어가지만, 자신이 어릴 적에 각인된, 순회 설교자였던 할아버지에 대한 이미지에서 그는 끝내 벗어나지는 못했다. 전하는 내용은 정반대라고 할 수 있으나, 결국 할아버지가 했던 방식, 차 옆에 서거나 위에 올라 순회 설교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그나마 그리스도인 예수를 전했지만, 그는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를 전하기 시작했고, 신성모독이야말로 진리로 가는 진정한 길이라고까지 설파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나는 맹인이 보지 못하고 절름발이가 걷지 못하고, 죽은 자들이 죽은 채 있는 교회의 성도이자 목사입니다.” 이 얼마나 그로테스크한 궤변인가.

그는 책이 거의 끝나갈 무렵, 사기꾼 설교자가 그의 외모를 모방하여 예수가 아닌 새로운 선지자로 사람들 앞에 세운 폐결핵 환자를 계획적으로 뒤쫓아 죽이고야 만다. 이 장면에서 더욱 간담이 서늘하게 느껴졌던 까닭은 그에게서 일회의 망설임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차에 깔려 죽어가는 그 폐결핵 환자에게 이렇게까지 말했다. "내가 못 참는 것 두 가지가 있어. 진짜가 아닌 사람과 진짜를 흉내 내는 사람. 방금 당신이 당한 것을 피하고 싶었다면 나를 절대로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어." 그리고 그는 차 범퍼에 묻은 핏방울을 태연하게 헝겊으로 닦은 뒤 마을로 돌아가 잠을 자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새로운 곳으로의 여행을 떠날 준비를 했다 (완전 싸이코 드라마의 한 장면 같지 않은가!). 그러나 자신의 유일한 희망이라고도 할 수 있었던 차가 폐차 직전까지 고장이 났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되고, 고속도로에서 만난 또 다른 느낌으로 폭력적인 순찰 경찰관에 의해서 그의 차는 마침내 파괴되는 상황에 맞닥뜨린다. 차가 없는 헤이즐 모츠는 걸어서 마을로 돌아오게 되는데, 그의 손에는 생석회 한 봉지가 들려 있었다. 눈을 멀게 할 작정으로 사온 것이었다.

결국 생석회를 눈에 발라 자기 눈을 못 쓰게 만들고 맹인이 된 헤이즐은 고행의 길을 스스로 마다하지 않고 걸어가게 된다. 이 갑작스런 행동의 변화는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 살인에 대한 죄책감으로 스스로에게 벌을 가했던 것일까, 아니면 마지막 희망과도 같았던 자동차가 어이없는 경찰관의 폭력으로 인해 파괴되어 버렸기 때문일까. 여관집 여주인의 질문에 그는 그저 대가를 치르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설교를 할 수 없고,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신발 안에 작은 돌을 일부러 넣어두어 보이지도 않는 길을 걸어갈 때조차 발에서 고통을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했으며, 가슴에는 철사를 휘감아서 그 뾰족한 부분 때문에 피가 나게까지 했다. 그는 살인을 하기 전에는 예수가 아닌 새로운 선지자는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된다고 설교했으나 결국 그 자신이 스스로 피를 흘리는 고행을 함으로써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은 대가를 치른다고 하는 것이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정말 그로테스크한 느낌이었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무엇을 전달하려고 했던 것일까. 내가 읽으면서 느끼고 상상했던 것만 원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 안에 숨겨진 무언가 깊은 뜻을 파악하길 바랬던 것일까. 과연 헤이즐 모츠는 구원을 받았을까. 그가 활동했던 그 마을의 광기어린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헤이즐은 그저 광기어린 싸이코 집단의 일부, 그러니까 대표성을 띠는 한 사람이진 않을까. 그리고 그가 설파했던 그리스도 없는 교회라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그저 그 시대적 상황을 대변하는 신비주의적이고 광신적인 기독교의 모습을 보여주려 했던 것일까. 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이 이어진다.

이해할 수 없고 말이 별로 없는 어둡고 칙칙한 흑백으로 만들어진 유럽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 그리고 종교적인 색채가 가해진 새롭고도 낡은 스타일의 그로테스크를 느껴보고 싶다면 난 자신 있게 이 책을 권한다. 그러나 어떤 교훈을 얻고 싶거나 정해진 범위 안의 답에 만족하고 그것 때문에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물론 내가 피카소의 그림을 피카소의 그림으로 느끼고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내 수준이 저렴해서 이런 감상을 끄적거리는 것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별로 권하고 싶진 않다. 나처럼 불쾌한 꿈을 꾸게 될 것 같기 때문이다.

내일부턴 좀 개운하고 밝은 책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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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ax 2019-11-29 07: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이리뷰를 읽으면서 책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에 대해 이렇게도 잘써진 리뷰가 없을 정도로 글을 잘읽었습니다. 오히려 책을 쓰셔도 될듯한 작가로서의 자질이 보이네요. 이 책을 읽어볼까하는 망설임을 주며, 찜찜한 글을 통해 마음이 무거워지는 하루가 되지 않기 원하네요. 좋은 책이라 소개되어 읽고 싶었는데 일단 밝은 책을 읽고 더 읽고 시간되면 봐야겠네요.

Youngwoong Kim 2019-12-08 10:13   좋아요 0 | URL
도움이 되었다니 영광입니다. 과찬 감사합니다.
 
즐거운 나의 집 - 개정판
공지영 지음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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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 저, "즐거운 나의 집"을 읽고.

오랜만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책을 읽었다. 21세기 현재, 나와 동시대를 살며, 같은 하늘과 같은 해와 달을 보며 아침과 밤을 맞이하는, 게다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작가의 글이어서 그랬는지, 문학 고전을 읽을 때나 신학이나 철학 책을 읽을 때와는 책이 성큼 내게 다가오는 느낌이 달랐다. 결코 크진 않았지만, 소신이 뚜렷한 움직임이었다고 해야 할까. 공감해 달라고, 감동해 달라고, 아니면 교훈을 발견하라고, 은유 속에 숨겨놓은 깊은 뜻을 찾아내라고 하는 요구도 없었다. 그냥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고 내게로 성큼 다가왔다. 마치 그 어느 것보다 내가 더 공감할 거라는 걸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그랬다. 정말 그랬다. 별 생각 없이도 뭘 말하는 지 알 것 같았다.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반응했다.

이 책은 그냥 일상의 한 토막을 담담히 이야기한다. 어느 가정에서 일어나는 딱히 특별하지도 않은 일들이다. 이혼을 세 번이나 한 여자가 엄마로 등장하지만, 책을 우리에게 들려주는 화자는 위녕이라는 딸이다. 작가는 위녕이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다분히 여성스러운 색채가 진하지만, 담담히 그려낸다. 우리 시대에서 일상 속에 깊숙이 만연해 있는 암묵적이고 구조적인 부조리로 책 곳곳에 은근히 드러내기도 하고, 또 그것 때문에 갈등이 생기고 상처도 받고 아파하는 모습도 보여주지만, 가족의 의미와 사랑의 의미를 깨달음으로써 견뎌내고 극복해내며 그 일상을 다시 성실히 살아가는 한 소녀의 이야기다.

다 읽고 나서 책을 덮고 책이 남겨 준 잔상을 음미하려니 내 얼굴에선 웃음이 번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내가 이 책을 공감하며 위로도 받았다는 것이다. 지금 이렇게 곧 흩어져버릴 잔상을 붙잡아 두려고 노트북에다가 글을 써내려 가고 있지만, 확실히 다른 책과는 다름을 또 느낀다. 분석할 차가운 머리가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는 그다지 소용이 없는 것 같다. 그저 읽고 반응할 (때론 눈물도 함께 흘릴) 따뜻한 가슴만 있으면 된다.

왜 이 책이 따뜻할까 생각해 보니, 요즘 있었던 나의 존재 가치에 대한 회의와 어쩌면 내게 부족했던 사랑이나 어떤 감정 같은 것이 이 책을 다른 책보다 더 가깝게 느끼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내 마음이 위로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즐거운 나의 집", 내겐 때맞춰 찾아온 고마운 선물 같은 책이다. 추천해 주신 ByungJoo Kim 집사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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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의 아이 (양장) - 정답 없는 삶 속에서 신학하기
스탠리 하우어워스 지음, 홍종락 옮김 / IVP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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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초월일까, 독선일까, 아니면 그저 무관심일까. 이유가 무엇이든 그런 행동에는 결과가 따른다. 그런 사람은 교만하다든지, 반항적이라든지, 아니면 무책임하다는 말을 각 진영으로부터 듣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런 자세가 진리를 향한 것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특히 기독교 안에 있는 교파들과 기독교가 말하는 진리와의 관계에 대해서라면 진지하게 생각해볼 문제다.


예수님은 기독교라는 종교의 창시자도 아니고, 그럴 의도조차 없으셨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서 전해온 약속의 성취요, 메시야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께서 죄와 악으로 물든 창조세계를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 시작하신, 열방에 복을 주시는 구원 계획의 완성이시다.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복음이 아니던가.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 인정하는 그 동일한 복음을 신학자들의 해석에 따라, 특히 루터로 시작된 종교개혁으로 개신교가 생겨난 이후, 동일하게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기독교 내부에서도 여러 교파가 생겨났고, 서로 분쟁까지도 일으키며 여러 조각, 여러 모양으로 분리되었다 (이 부분에선 교회 일치 운동을 생각해 볼 여지를 남김, 스탠리 하우어워스도 지지하는 입장임).


우리 주위엔 예수님의 탄생과 죽으심과 부활에 대부분의 초점을 맞추어 개인구원론에 치중하는 우파의 신앙도 있으며, 예수님의 신성에 관련된 부분보다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의 삶의 모습과 자세에 초점을 맞추어, 예수님처럼 사는 것만이 기독교의 핵심이라는 자유주의적인 좌파의 신앙도 생겨났다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20세기 중 후반에 일어난 이러한 미국 기독교 내부 변화의 산 증인이다).


카톨릭, 성공회, 감리교, 침례교, 장로교, 성결교, 루터교, 초교파 교회... 이러한 굵직굵직한 이름들 아래는 또 수많은 작은 가지들이 있다. 본의 아니게 여러 교단을 접해봤지만, 솔직히 말해서 각 교단이 왜 다른지, 왜 달라져야만 했는지, 난 그 이유를 잘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모두 예수님의 복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강조하는 부분이 다를 뿐, 모두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을 이야기한다.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그의 책 '한나의 아이'에서 밝힌다. 자기는 어느 교파나 교단에도 속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고 말이다 (그러나 나중에 가서 그는 자신이 개신교도이며 감리교 소속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런 조각들에 관심을 가지는 것보단 그것들의 공통분모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에 의미를 둔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답 없는 시대에 살아남는 법이라고까지 말한다. 책의 마지막 이야기에서도 자신이 '한나의 아이'를 쓰면서 배운 것은 바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라고 밝힌다. 그것이 얼마나 흥미로운 일이냐며 감탄하면서 말이다.


그는 또한 신학자로서 자신을 규정하면서도, 신학이 할 일은, 인생의 복잡성에 대해 정직하게 말하려면 하나님에 대해 말해주는 단어들이 필요함을 보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신학자들이 그런 단어들을 쓰기 두려워하거나 불필요하다고 여긴다면 그들의 소명을 배신하는 거라고 하면서 말이다. 신학의 핵심은 하나님임과 동시에 인생의 복잡성이라고 하면서, 근대주의 신학자들이 '하나님에 대한 발언'과 '인생의 복잡성'을 분리하려고 시도한 것에 일침을 가하기도 한다. 그 분리 시도의 결과 그들 신학의 핵심이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되었고, 그런 일이 벌어지면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정말 필요한지 불분명해진다고 역설하면서 말이다.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기독교 윤리학 전공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윤리학이란 신학적 진술의 실천적 특성을 드러내는 학문일 뿐이라고 정의한다. '한나의 아이'가 그의 회고록이라는 점에서 나는 책을 읽어 내려가며 하우어워스 내면에 자리잡아 가는 신앙의 변화와 성장과정을 볼 수 있었는데, 이는 너무나 솔직 담백하여 (어떻게 보면 신비감 완전 제로), 아무런 군더더기가 없고 가식이 없었다. 그는 특권층에 속하길 거부한다. 그가 신학대학원에 간 이유도 목회자가 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저 하나님을 좀 더 알고 신학을 공부하고 싶은 순수한 마음이 그 이유였다. 교수가 되거나 학과장이 되거나 총장이 되는 명예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이 텍사스 플레전트그로브 출신이자 벽돌 쌓는 노동자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는 듯) 생각까지 긍정적으로 승화시켜 겸허히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회고록은 보통 자기가 주인공이 되는 법인데, '한나의 아이'는 그런 면에선 '정통' 회고록이 아니다. 왜냐하면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자신의 과거 인생을 온통 친구들과 가족들의 이야기로 도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그는 관찰자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가짜' 주인공들과 함께 모든 곳에 존재했고, 모든 것을 경험했으며, 모든 것을 종합해냈다. 그 종합은 어떤 이미 유명해진 회고록 저자의 모습이 아니라, 옆집 아저씨 같은 느낌으로 글 읽고 쓰는 걸 좋아하며 어느 진영에도 정치적으로 속하지 아니하며 끝까지 진리를 추구하는 겸손한 신학자의 모습이다.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배우게 되었다는 그의 고백은 미국 최고의 신학자로 선정되기도 했었던 그의 내면세계를 잘 반영하는 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고백이 고스란히 담긴 이 책은,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큰 일을 해내고 그 결과로 인류에 공헌까지 해서 자타가 인정하는 유명인이 되고 난 이후에 하는 영웅담과도 같은 과거 완료형의 간증이 아니라, 그저 끊임없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사명을 진지하게 사유하고 하나님에 관한 언어로 일상을 설명해내려는 의지를 가지고 본인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직접 끊임없이 설명해 내고 있는,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현재진행형의 친근한 일상의 간증이다.


이러한 면에서 나는 오히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감사할 수 있었으며, 내가 틀린 길로 가고 있는 게 아니라는 위로도 받을 수 있었다 (영웅담 간증은 싸구려 자기계발서와 같다고 생각한다). 의심이 생기고 그래서 질문하고 생각하고 답을 구하기 위해 읽고 어느 답이 맞는지 알기 위해 발표와 토의를 경험하는 방법이 결코 믿음 없음을 드러내는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오늘날처럼 답 없는 (어쩌면 답이 넘쳐나는) 삶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아주 정상적이며, 나아가 아주 바람직하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는 것도 난 스탠리 하우어워스 덕분에 깨닫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과 그리스도인이 점점 되어간다는 것이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매력적인 일이라는 사실도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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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에 대하여 - 용서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강남순 지음 / 동녘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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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순 저, “용서에 대하여”를 읽고.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존 바턴의 “온 세상을 위한 구약 윤리” 다음으로 읽어서 그런지 존 바턴이 강조했던 '자연법’이라는 개념과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개념이 이 책 “용서에 대하여”에서도 나에겐 읽혀졌다.

진정한 용서는 단지 신의 명령에 순종함도 아니고 조건적이지도 않다. 책 전체에 흐르는 자크 데리다의 용서에 대한 사유가 말해주듯, “진정으로 가능한 용서는 불가능한 용서”라는 말이 내겐 첨엔 아이러니하게만 들렸지만 책을 읽어내려가며 내 가슴에 깊이 박혔다.여러가지 상황과 조건을 고려하여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행하는 사랑의 행위 정도로 난 용서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여기엔 나도 인지하지 못했던 위계질서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피해자가 가해자로부터 당한 그 특정한 사건을 통하여 갑자기 위상이 뒤바뀌어 (심지어 난 그것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인지하고 있었다!) 마치 판사가 재판 결과를 선언하듯, 마치 갑자기 가해자보다 우위에 서서 가해자를 판단하고 가해자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 것처럼 이해하고 있었던 나를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무조건적인 용서와 조건적인 용서, 즉 용서의 윤리와 용서의 정치 사이의 긴장을 늦추지 않고 지속하여 이상적이고 불가능해 보이는 무조건적 용서를 추구하는 것. 이것은 인간의 존재에 대한 성찰이 없인 불가능하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불완전한 피조물인 인간. 그래서 실수를 할 수 밖에 없고 그 결과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밖에 없으며, 따라서 용서와 마주할 수 밖에 없는 프레임 속에 갇힌, 그렇다, 우리는 인간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피해자와 가해자의 신분을 왔다갔다하며 얽히고 섥혀서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도 지녔다.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 즉 존 바턴이 얘기한 인간의 존엄성이 용서를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준다는 점을 난 이 책을 통해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용서는 앞서 얘기했듯이 누군가의 명령이나 해야만 하는 의무라고만 해석해서도 안된다. 그건 인간이라는 존재와 그 공동체들 사이에 무언으로 존재하며 동시에 모두가 선행 학습 없이 인지하고 있는, 마치 C.S. 루이스가 그의 책 “순전한 기독교”에서 말하는 ‘절대선을 추구하는 인간 본성’이나 ‘도덕률’과도 같은, 또 마치 존 바턴이 강조했던 ‘자연법’과도 같은, 어떤 보이지 않는 공감대가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비단 용서라는 개념은 기독교와 같은 종교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며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개념이라고 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진정한 용서는 진정한 선물과도 같은 것”이라는 본문 속의 문장도 맘에 와닿았다. 이어서 “값싼 용서”라는 가슴 아픈 용서에 대한 오용에 대해서도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나 내겐 한편으론 기독교인으로서 내가 받은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점을 상기할 때, 그리고 구원받았다고 해서 아무렇게다 살아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소위 칭의와 성화의 개념을 따로 떼어놓는 식의 믿음과 구원에 대한 오용에서 등장한 개념이자 디트리히 본회퍼가 사용한 “값싼 은혜”라는 개념과 함께 “값싼 용서”를 사유할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은혜라는 것이 수혜자의 공로가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할 때, 진정한 은혜는 진정한 선물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진정한 용서는 진정한 은혜”라는 말도 가능하지 않을까.

복음의 핵심은 용서에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내가 받은 구원이 하나님의 진정한 선물이자 진정한 은혜라는 사실, 그리고 또한 그것은 진정한 용서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깊이 묵상할 수 있어서 아주 나에겐 유익한 책이었다. 좋은 책을 써주신 강남순 교수님께 감사를 뒤늦게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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