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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의 연인들 ㅣ 채석장 그라운드 시리즈
이광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월
평점 :
장소의연인들 도서협찬
이광호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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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들의 장소를 지도로 그린다면 등고선은 감정으로 일렁일 것이다. 익숙한 곳은 낯설게, 먼 곳은 가깝게 축적은 알수 없이 달라질 것이다. 장소를 찾아가기 위한 탐색의 지도가 아니다. 장소를 은폐하기 위한 지도다. 장소는 기억을 공유하는 이들의 마음속에서만 재현된다. 그들은 연인들이며 이 책은 연인들이 머물렀던 장소를 찾아 섬세하고 아름다운 지도를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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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어떤 장소가 있는가. 유독 계절의 색이 선명했던 시간들, 우리는 어디에 있었나. 마음은 목적없이 떠돌더라도 '어딘가'에 분명히 있었다. 이 책은 그 장소의 기억들을 익명의 존재로서 재구성한 에세이다. 방, 발코니, 극장, 공항, 운동장, 공터, 서점, 골목 등. 연인들의 이야기는 마치 초점이 흐린 사진의 한장처럼 깊고 섬세한 서사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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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사건이 ‘함께 있음’의 행위라면, 장소는 함께 있음이라는 사건이 그곳에서 벌어졌음을 증거한다.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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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이 장소가 되기 위한 최소조건은 '함께 있음'이다. 그것이 물리적이든 기억에서든 함께한다면 장소의 물성이 변화할 수 있다. 마치 선언과도 같은, 혹은 발명과도 같은 문장을 보면서 이 책의 시선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제 내가 알던 일상의 공간들은 "연인의 장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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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조는 연인들이 가질 수 있는 거의 완벽한 공간이다. 이 공간은 세상에서 가장 좁고 따뜻한 바다로 연인들을 안내한다. 두 사람의 몸이 그 안에 들어감으로써 따뜻한 바다로의 유영이 시작된다. (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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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의 장소에 대해서 말하기 때문에 그들의 행위를 짐작할 수 있으며 에로틱한 순간들도 상상하게 한다. 하지만 인용한 것처럼 문장은 아름답고 문학적 순간들로 포착되어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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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들의 사라진 장소는 날카로운 비문으로 채워져 있지만, 망자의 이름이 없는 묘비이다. 잊지 않기 위해서 비문은 계속 다시 쓰여야 하지만 진정한 문장 같은 것은 없다. 그 비문은 어디에도 귀속되지 못하고 어떤 장소도 규정하지 않기 때문에 물 위에 쓰는 비문과 같다.(1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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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그러나 장소에 대해 쓰는 시점에는 연인의 현재보다는 과거에 있기에 읽으면서 서글프고 처연한 감정이 이어진다. 연인은 장소에 존재했고 그 장소에는 없으며 내 기억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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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공간에서 익명의 연인들이 보여주는 서사는 문학작품과 이어진다. 저자의 전작 #사랑의미래 에서 시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간 것처럼 이 책을 통해 저자가 언급한 책과 소설을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미 읽은 작품이라 하더라도 장소에 주목하기 때문에 새로운 깊이를 느낄 수 있었다. 지적인 문장은 아름답고 사유의 깊이가 느껴져 책을 읽는 내내 사로잡혀 있었다.
언제든 누군가의 기억속에서 재발명되는 장소들을 위한 에세이는 오래토록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