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성수나 멸균 처리된 밍밍한 물로는 비극을 쓸 수 없다.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비극은 눈물과 피로 쓴다.
이 글에서 나는 신념윤리가 아닌 책임윤리가 어떻게 후회의 정치의 토대가 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았다. 곧, 보복을 위한 보복이 아니라 앎과 인정이 이룬 조화 속에서 희생자와 가해자가 아닌 그 자손들 사이의 화해의 토대를 쌓을 수 있는지를 말이다.
이제 세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단 세 시간, 시간이 다 지나면 끝이다. 그러면 엠마는 죽고 그녀도 함께 죽게 될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마찬가지다. 다니엘이 그랬던 것처럼. 이제껏 목숨을 잃은 모든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기네스처럼. 충직한 친구였던 반려견 역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