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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자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크리스티나 달처 지음, 고유경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2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단어의 뜻이 그것을 악용하는 이들에 의해 그 뜻이 혼탁해지거나 오히려 반대의 의미로 사용되는 것을 목격할 때가 있다. 번지르르한 말로 본질을 흐리고 사람들을 호도시키는 일은 역사와 함께 쭉 있어왔지만 근래에는 신천지나 극단적인 보수단체에서 사용하는 태극기나 자유수호, 평화, 통일 같은 단어들이 그렇다. 이 책에서는 여성혐오자인 세력들을 위시한 대통령과 보수적인 목사가 권력을 장악하고 모든 여성에게 전자팔찌를 채우고 하루에 100단어만 말하도록 통제한 사회 시스템을 '순수'운동이라 부른다. 순수라는 단어가 여성의 목소리나 글, 의사 표현을 옥죄는 장치가 되었고 근본주의 기독교식 교리 아래 동성애나 혼전관계 등은 중범죄가 되는 세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여자들은 침묵하지 않았다>의 영어제목은 VOX다. 사전을 보니 대문자 VOX는 송신·수신 전환이 음성에 의해 작동 제어되는 장치이고, 소문자 vox는 소리, 음성, 말을 뜻한다는데 아마 이 책에 등장하는 100단어 카운터 팔찌인 대문자의미인 것도 같다. 영어 제목보다는 애거스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강렬한 이미지가 연상되는 한글 제목이 더 잘 지은 것 같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역시 100단어 카운터를 팔에 차고 불합리한 생활을 버텨가는 주인공인 신경학과 언어학의 박사였던 진은 정부로부터 대통령 형의 실어증 치료제를 개발해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처음에는 그 제안에 부정적이었으나 정부에 협조적인 프자신의 아들과 데이트하던 평범한 이웃집 여자아이, 여성운동을 하던 대학친구 재키, 동성애자인 의학박사 동료 등 본인들 기준에 벗어나는 여성들을 범죄자인양 처단당하는 현실을 목격하고, 실수로라도 100단어를 넘어 말을 뱉으면 전자충격이 가해지는 팔찌로 여성의 표현을 억압당하는 부당한 세상에 괴로워하며 이를 수락한다. 제안을 허락하는 대신 자신과 자신의 딸을 치료제 개발 기간동안 카운터로부터 벗어나는 혜택을 얻고, 다섯살인 자신의 딸과 딸일 수도 있는 임신한 뱃속 아기를 떠올리며 근본적으로 이 불합리한 시스템을 벗어나기 위한 모색을 위한 계기로 삼는다. 특히, 그녀 팀이 개발한 '베르니케 혈청’이 단순히 실어증치료제가 아니라 여성들을 언어세상을 교란시키기 위한 정부의 악독한 계획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며 주변 반정부 사람들과의 연대로 기회를 잡아 정권 협조자를 처단을 시도한다.
이 책의 가장 공포스러운 대목은 하필이면 나의 아들이 정부의 교육에 세뇌돼 정부를 대변하는 말을 서슴치 않고 전한다는 것이다. 여성에게 강요당했던 신화, 여자는 신성한 가정의 수호신이며 집안의 천사이며 여왕같은 존재이므로 더 높은 어떤 것에 대한 야망을 버려야 한다고 말하며 엄마인 주인공을 심판하는 말들을 내뱉아 가슴을 철렁하게 만든다. 다행인지 여자친구와의 문제로 방황하던 아들이 위기에 처하고 엄마가 구해냄으로써 아들은 다시 의사소통이 가능한 상식적인 아이로 자랄 수 있을 것이다.
제목에서 기대했던 진취적인 페미니즘의 대안이나 의지를 느낄 수 있는 책이라기 보다는 투표하지 않고 의견을 피력하지 않아 처해질 수 있는 가상세상에 대한 경고와 흥행 요소를 섞은 한 편의 미국 영화를 본듯 했다.
네 아이의 엄마지만 아슬아슬 선을 넘는 사랑을 저지르는 거침없는 주인공은 참고만 사는 게 미덕이 아니라는 듯 도덕적이지 않고 거침없이 사랑을 따른다. 여성의 권한을 빼앗은 세상이 기본 설정이다 보니 여성을 억압하는 세상을 바로잡는 데 연인이나 남편, 경호요원, 우체부, 과학자 등 현 정부에 반하는 의견을 가진 남성들의 도움을 받아 균열을 내는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반드시 여성이 주도권을 가지고 이런 문제 해결을 스스로 해야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좀더 적극적이고 독립적인 여성들이 움직임을 주도했다면 연애문제에 휘둘리지 않는 주인공이었다면 더 매력적으로 보였을 것 같다.
이 책의 설정처럼 여자만 아니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국민들을 입다물게 하고 눈가리게 하는 시대를 우리도 살았다. 그리고 현재도 누군가의 의견은 폭압적으로 저지당하며 짓밟힌 채 죽어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나와 다른 누군가를 배제하고 권력을 세습하며 그들만의 논리에 세뇌당하지 않으려면 계속 레이더를 켜고 국민의 주권을 바로 행사하며 현명한 국민으로 살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우리가 혹시 그 약자에 속하지 않는 경우라 해도 부당한 현실을 지적하고 바로잡으려 애쓰며 손잡을 책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