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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나 희망하고 있지 않나요 - 나로 살아갈 용기를 주는 울프의 편지들
버지니아 울프 지음, 박신현 옮김 / 북다 / 2024년 9월
평점 :
타인이 받은 편지를 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 일이지만 호기심을 끄는 건 사실이다. 더군다나 유명작가가 지인들과 나눈 사적인 편지는 좀더 흥미가 생긴다. 작가가 생전에는 허락하지 않았을 사적인 이야기는 그녀가 세상을 떠나고 그녀의 유명세 덕에 만천하에 공개되어 독자들의 읽을거리가 되었다. 편지에는 작품 밖 작가의 일상과 작품 탄생 배경 등 작가를 더 잘 이해할 수 요소들이 담겨있다.
'자기만의 방'으로 잘 알려진 페미니즘 비평가이자 소설가인 버지니아 울프는 생전 지인들에게 편지 쓰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4천여 통의 편지가 남아 있다고 하니 그 이상을 썼을테니 엄청난 양이다. 하긴 그 시절 사람들은 전화나 메신저도 없었으니 멀리있는 사람과 하고 싶은 말을 나누는 수단은 편지가 유일했을 것이다. 그 편지 중 96통을 엮은이가 연대별로 선별하고 중심 문장을 골라 책을 내놓았다. 편지 수령인도 다양하고 상대의 편지내용은 게재되지 않아 다소 헷깔렸지만 엮은이의 코멘트와 각 인물 설명, 작가가 처했던 상황 설명은 버지니아가 어떤 시기, 어떤 목적으로 쓴 편지인지 이해를 돕는다.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관심을 가졌지만 책을 완독해 보지는 못했기에 이 책을 통해 작가에 좀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어 반가웠다. 편지에서 가져온 한 문장으로 정한 제목도 좋다. <우리는 언제나 희망하고 있지 않나요>
책은 버지니아울프가 작가가 되기 전인 1882년부터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1941년까지 총 3파트로 나뉘어있다. 편지는 문학적, 사상적, 또 심리적 교류를 나누었던 지인들이 수령인이다. 친언니인 바네사, 17살의 나이차가 나지만 자신을 돌봐주고 글쓰기를 격려해줬던 언니 바이올렛 디킨슨, 글쓰는 후배나 시인, 또 동료 소설가, 여성 작곡가 에델스미스, 남자친구였고 후에 남편이 된 레너드 울프, 조카인 줄리언 벨, 작가이자 정원디자이너고 창작에 영향을 끼쳤던 연인 비타 색빌웨스트, 여성 사회운동가 마가릿 데이비스, 여성 인권옹호자인 재닉 케이스, 남편과 함께 꾸려간 호가스 출판 경영에 관여한 존리먼, 호거사 출판사에서 책을 펴낸 변호사, 자신의 독자와 팬 등 다양하다.
1부 자유(1882~1922년)는 위대한 아름다움의 성취를 거두는 글쓰기를 통해 자유를 찾고 훌륭한 소설을 써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작가의 갈망이 드러난 시기다. 타인의 비판과 평가에 민감하게 대응하고 여성의 글쓰기가 폄하되는 가부장적인 시대에 등장한 부정적인 글들에 조목조목 상대하며 다음 세대를 위해 더 나은 글쓰기에 불타는 의지를 표출한다. 결혼에 흥미없는 듯하다가도 레너드의 청혼에 결혼이라는 제도의 유익함을 누리는 데 동의하면서도 성적인 관심을 느끼는 것은 아니라며 솔직히 고백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한다. 주변의 많은 지인들과 문학과 예술 등에 뻗어가는 다양한 관심사에 대해 나누는 대화를 보면 결혼이나 남편은 그녀의 삶 중 지극히 적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 같긴 하다.
2부 상상력(1923~1931년)에서는 결혼 후 <델러웨이 부인>이나 <등대로>, <올랜도> 같은 작품들을 창작하고 출간하고 찬사와 비판을 들으며 사람들과 교류하고, 호가스출판사를 운영하며 책을 만들며 사람들과 즐겁게 작업한 시절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작품을 통해 성이분법을 넘어 남성성과 여성성 사이를 오가는 다양하고 복잡한 성정체성이나 젠더의 다양성, 양성적인 이상성을 그렸다. 화가나 소설가 등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그들이 작품에서 천착하는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성정체성에 대한 견해와 비밀스러운 호기심도 거리낌없이 털어놓는다. 소설을 두고 자신의 독자와도 깊이있는 대화를 나누고, 사랑하는 비타에게 자신의 호감과 관심이 묻어나는 편지를 보낸다. 언니인 바네사 벨과도 문학과 작품내 표현된 가족 관계나 대해 깊이있게 의견을 나누는데 버지니아가 아닌 편지로 유일하게 실려있는 언니 벨의 답장은 버지니아의 편지 만큼 진지하고 세심하다.
3부 평화(1932~1941년)에는 2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고 포탄이 오가는 런던에서 불안감과 공포감에 사로잡힌 그녀가 지인들과 전쟁의 두려움이 드러나는 편지를 주고받는다. 계속된 창작 활동을 이어가는 가운데 제국주의와 가부장제가 쇠퇴하고 페미니즘과 민주주의가 확산하지만 전체주의와 전쟁으로 위협받는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인 '세월', 페미니스트 선언문 '3기니'를 쓰고 작품에 반응하는 독자나 여성운동가 등 여러 사람과 교류하며 여성참정권 운동 등에도 관심을 피력한다. 또한, 스페인내전으로 아들을 잃은 언니를 위로하고, 파시즘과 나치즘을 경계하고 민주주의적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바람을 반영한 작품 '막간'을 쓰며 전쟁 종식과 평화를 염원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한다. 하지만 편지 곳곳에 드러나듯 가까이서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며 그녀의 정신적 불안도는 심해지고 결국 언니와 남편, 출판경영자에게 유서를 남기고 자살을 택한다.
책에는 부록으로 그녀의 에세이와 강연록으로 보이는 '몽테뉴: 여성의 자유', '여성의 직업', '평화에 관한 생각들' 3편의 글도 실려있다.
버지니아 울프가 지인들과 나누었던 사적인 편지로 그녀의 생애를 좀더 가까이 들여다 본 느낌이다. 수령인을 특정해 보낸 편지들을 유명작가라는 이유로 이렇게 우리 모두가 봐도 예의상 괜찮은지 모르겠다만 사람과 사회, 문학, 사상에 대해 그녀가 보여준 진심은 잘 다듬어진 허구의 소설에서보다 좀더 애틋하게 가깝게 다가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녀는 좋은 글을 쓰는 작가가 되기위해 염려하고, 작가가 되어서는 작품 평가에 조목조목 반응하고 대응하며 할말이 많았던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결혼과 사랑, 성정체성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게 고백하며 가부장제와 전쟁을 비판하고 여성의 권리증진과 성이분법을 벗어난 젠더 다양성에 대한 견해도 펼친다. 오해했던 그녀의 자살도 솔직하고 자유로웠던 그녀가 전쟁의 공포와 트라우마가 죽음을 선택하게한 원인이었을 것이라 편지들을 통해 깨닫게 되는데, 물론 엮은이의 선별된 편지만으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니 앞으로 그녀의 작품을 제대로 읽어볼 기회를 가져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막연하게만 알고 있던 버지니아 울프의 인간적인 고민과 생각을 가까이서 들여다 보고 이해할 수 있게 되어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