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계의 트렌드를 선도하는 김영하 작가도 SF소설을 쓴 걸 보니 역시 SF가 출판계의 자극이 되어줄 트렌드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타 장르보다 매니아들이 선호하는 SF소설이라는 장르가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은 김영하 작가에게 괜찮을까 염려했다. 하지만 우리를 지루하게 방치할 리 없는 이야기꾼인 작가는 영화 AI에서처럼 본인이 로봇이라 의심하지 않고 살아온 휴머노이드 소년의 화자를 내세워 설득력있는 이야기로 좀더 또렷하게 파고 들어와 질문을 던진다.
인공지능 기술은 날로 진화해 인간에 가까운 휴머노이드가 개발돼 인간과 함께 살며 통일을 이룬 미래의 한국, 또래보다 성숙한 것처럼 보이는 열일곱 살 소년 철이는 미등록 휴머노이드 수용소에 끌려간다. 거기서 클론인 소녀 선이와 휴머노이드인 민이와 지내며 여러 휴머노이드의 피폐한 삶을 목격하며 존재에 혼란을 느낀다. 인간의 삶이 휴머노이드로서의 삶보다 낫다는 전제는 누가 내린 것인가라는 질문이 갑자기 들었다.
통일 이후 이를 반대하는 세력과 전투용 휴머노이드는 내전을 꾀하며 정부는 혼란에 빠진다. 그리고, 인간들이 활용 후 처치곤란해 요양원에 버린 휴머노이드 가운데 일부는 의식을 백업해 전세계 네트워크에 올려 공유하며 스스로 진화를 거듭해 인간의 개입없이 인간보다 우수한 세계를 이룬다.
철이는 자신을 저지하는 여러 방해 요소를 물리치고 휴먼매터스랩 연구원인 아빠에게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는데 아빠를 다시 만나는 것만으로는 안일한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 없다. 어차피 인간은 죽음을 맞닥뜨려야 하는 유한한 존재이고, 혹 영원한 삶을 원한다면 의식 상태로 선택이 가능한 세상에 이른다.
어릴 적 보았던 '은하철도 999'에서 결국 기계인간이 되는 것을 포기한 철이와 이 책의 주인공 철이가 같은 이름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영화 'AI'에서 부모가 결국 내다버렸던 휴머노이드 꼬마 아이를 향한 죄책감을 가진 채 이 책을 읽게 되는 것도 피할 수 없다. 주인공 철이는 의식으로 떠도는 삶 대신 인간처럼 육체를 가진 삶의 형태로 세상과의 작별인사를 원했다.
하지만 육체를 가진 유한한 삶이 의식으로만 존재하는 자유로운 삶보다 더 나을꺼라는 판단은 아직 그 기술에 닿지 못한 인간들의 쉬운 자포포기 결말이 아닐까.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으니 선택도 다양할 수 있고 유한한 '인간적인' 삶이 더 나을꺼라는 판단도 보류해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 전에 인공지능 윤리적 문제에 대해서는 현재 칼자루를 쥐고 있는 인간들이 겸허히 고민해야 할 부분이지만.
삶이 지긋지긋해서 다시 돌아보고 싶은 경우가 아니라면, 이 세상을 떠난 후 의식의 상태로 떠돌아다니다 사랑하는 이들을 다시 만나고 웃을 수 있다면 작별인사라던가 헤어짐, 죽음, 소멸 이런 것을 아파하지 않아도 되어 나는 차라리 좋을 것 같다.
SF소설이라는 것조차 잊고 읽는 재미 자체로 충분히 즐기게 해주고 생각할 기회도 주는 김영하 작가를 응원하지 않을 수 없다. 김영하 작가는 이 책을 '밀리의 서재'를 통해 발간해 '오리지널 종이책 정기구독' 가입자를 늘리는 비즈니스 모델을 실험하고 있다. 일반 서점을 통해서는 몇달이후에 유통된다고 한다. 꾸준히 책읽는 독자를 확보하기 위한 출판시장의 새로운 비즈니스모델에 동참한 작가의 시도가 독서인구 확대에 기여하기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