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내에 대하여
라이오넬 슈라이버 지음,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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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냈던 세금을 왜 아내의 불치병 치료에는 쓸 수 없을까?

 

영화 <케빈에 대하여>를 기억하는지? 내가 이 영화를 기억하는 건 모성애의 절대 신화에 과감히 돌을 던지며 모독했던 파장 앞에서 강렬한 전율을 느끼게 했던 영상과 이야기도 압권이었지만 원작은 더 어둡다는 말들이 잔상처럼 맴돌았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후유증은 오래 지속되었다. 영화로 먼저 만났지만 기억해두리라는 각오 때문이었는지 이번만큼은 책이다. 첫 인상과 마지막 느낌표까지 과연 만만치가 않다. 분량 때문에, 또 다른 이유는 시니컬하면서도먹하고 짙게 드리우는 여운 때문에라도.

 

 

이번에 라이오넬 슈라이버가 관심을 가지고 메스를 들이댄 주제는 미국 의료제도의 모순점이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 의료보험 제도의 가장 큰 특징은 선진국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국민의료보험제도나 국민보건서비스 같은 공공의료보험 서비스 제도가 없다는 것이다. 단지 65세 이상의 노인을 대상으로 하는 노인의료보험 제도와 저소득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국민의료보조 제도만이 최소한의 공공기능을 담당하고 있을 뿐이다. 다수를 차지하는 나머지 계층들은 민간보험회사들에 가입하여 하는데 여기에 상당한 문제점이 있다.

 

 

원래 국가가 책임지지 않는 공공서비스를 민간이 운영하게 되면 보험회사들은 사회보장의 성격이 아닌 이윤창출을 본질적인 목적으로 삼기에 납부한 보험료에 비해 의료비 지급률이 턱 없이 낮게 책정되고 그 차액을 고스란히 개인의 주머니에서 부담해야만 한다. 게다가 가입 시킬 때에는 모든 것을 다 보상 지급할 것처럼 꾀지만 정작 보험금을 지급할 경우가 생기면 복잡 미묘한 약관을 들어 지급을 거부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의료의 양과 질은 환자의 선택이 아니라 보험회사의 입맛대로 결정되는 셈이다.

 

 

이러한 모순과 문제점을 타파하기 위해 정부와 기업이 의료비를 분담하는 개혁안을 미 정부에서는 도입하고자 하지만 이 또한 각종 문제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결국 돈 없으면 인간다운 권리를 제대로 누릴 수가 없다는 암울한 현실이다. 여기 50대의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세퍼트 암스트롱 내커. 한평생 육체노동자로 성실한 삶을 살아왔고 집 수리회사의 오너의 자리에 올랐지만 자기의 부하 직원이었던 남자에게 경영권을 넘겨주고 그의 밑에서 일하고 있다. 이제 청춘을 과거자락으로 흘러 보낸 세퍼드는 미국이 아닌 제3세계에서 노후를 설계하며 삶을 살고자 한다. 자연을 벗 삼아 물질과 경쟁이 주는 스트레스가 없는 여유로움을 꿈꾸던 그에게 예기치도 못한 상황이 일어난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려는 찰나 아내 글리니스가 불치병에 걸리고 만 것이다. 말 그대로 불치병이라 세퍼드의 낭만적인 꿈은 산산조각 나고 가정 또한 위기의 나락에 떨어지는데 이제 모든 수입은 아내의 치료비로 몽땅 투입된다. 경제력에 대해 별다른 걱정이 없었는데 한순간에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나날이 소진되는 돈 때문에 회사에서 사장에게 온갖 수모와 굴욕을 당하면서도 차마 그만두지 못하는 것이다. 비록 궁핍하게 되고 꿈도 포기했지만 그동안 일 때문에 앞만 보고 달려야했던 중년의 남자와 여자는 비로소 부부 사이가 돈독해지는 계기를 만들게도 된다.

 

 

그 와중에 둘은 서로에 대한 오해와 섭섭함으로 갈등도 겪지만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가족들의 외면 속에서도 죽어가는 아내를 마지막까지 책임지고 돌보는 일이야말로 남편으로서 성실히 수행하여야 할 사명으로 간주하고 최선의, 또 최선의 노력과 헌신을 경주한다. 하지만 문제는 돈이다. 병원 측에서는 최신치료방식이라는 대안을 제시하지만 민간보험에서 담보되지 않는 한 개인부담금의 과도한 증가는 세퍼드의 인내에 종지부를 찍는다. 비록 파렴치하고 무책임한 남편으로 비추어지더라도 희망이 없는 치료에 매진하기 보단 처음 꾸었던 제3세계로 부부가 떠나 여생을 정리하기로 한 것이다. 이들 부부의 여생은 과연 행복했던 것인지, 아니면 좀 더 포기 말고 치료하는 것이 최선이었을지 판단하기란 쉽지는 않다.

 

 

돈이 없으면 아이들만 병원에서 치료받고 부모 자신들은 아파도 참고 견디는 게 요즘 세태라고 하지 않던가? 더 이상 개인의 고통으로만 떠넘기지만 말고 국가가 나서 아프고 가난한 서민들을 돌보지 않는다면, 내가 피땀 흘려 번 수입으로 낸 세금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막는데 쓰지 못한다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할까? 그래서 끝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더 이상 꺼져가는 불씨를 되살릴 길 없는 한 남자의 허망한 시선이 그렇게 먹먹하도록 한다, 이제 짐을 내려놓았노라고 안도해야만 하는. 어떤 의미에선 가슴 아프지만 최선의 결단이었다고 생각되는 결말이다.

 

 

결국은 미국의 한 중산층 부부가 배우자의 불치병으로 몸과 마음이 망가지고 경제적으로 파산되는 과정들을 통해 초강대국 미국 의료제도의 허상을 통렬하게 비판하며 집단적 가치 앞에서 소멸되는 개인적 가치를 심층 조명해보고 있다. 그들의 고통은 남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에게도 언젠가 들이닥칠 일이 될지도 모른다.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살아라. 눈칫밥 먹기 싫으면. 그래서 나도 오늘부터 안하던 운동 좀 해야겠다. 이 책 읽고 나면 그런 생각부터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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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고전 : 한국편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김욱동 지음 / 비채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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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자연과 관계하게 되면 자연은 어디에서나 아름답겠지만 사람들의 기준에 따라 순간적으로 변화했다가 사라져버리는 단계들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감상은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대체로 우리는 자연에 화답하기 보다는 반목하며 살아왔다. 이에 저자는 지구라는 함선이 침몰하고 있다며 발을 동동 구르며 손을 놓기보다는 문학가의 역할에 알맞은 환경운동에 동참할 것을 촉구한다. 문학이 가진 감성의 힘, 녹색문학을 통해 독자들의 생태의식을 고취하고 있는 셈이다. 그 전달방식은 우리의 고전과 현대를 아우르는 문학작품에서 찾고 있는데 각 작품들 속에 담긴 만물평등과 생태주의는 현대를 살고 있고, 자연을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문학을 새롭게 해석하고 즐기면서도 환경위기를 극복하는 일에 늦지 않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우선 삼국유사에 실린 원광법사의 세속오계를 살펴보자.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끈 원동력에는 화랑이 뒷받침되고 있는데, 화랑의 신조이자 수양으로 힘쓰게 한 세속오계 또는 화랑오계는 유교에서 이미 가르쳐온 충의, 우의, 효에 관한 덕목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대목이지만 생태주의 관점에서 가장 눈여겨 볼 대목은 바로 살생유택이겠다. 살생을 가려서 하라는 가르침이아마도 환경운동 수행에 가장 큰 선행과제가 아닐까 싶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싹 갈아엎어 버리기는 사실상 불가능한데, 대신 점진적으로 변화라는 시도가 필요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각 민족에 따라 다양한 식성으로 지구상의 생물들을 닥치는 대로 씨를 말리고 있다. 먹기 위해서, 아니면 박제로, 그것도 아니면 가죽과 상아를 얻기 위해서... 실로 인간만의 욕심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희생당하고 있으니 멸종이라는 막다른 골목에 내몰지 않기 위해서라도 선택적 살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말릴 수 없는 살생이라면 그것의 부작용을 최소화해보자는 것이다. 산란기에는 잡지 말며, 어린 생물들은 놓아주고, 대량 불법 포획은 지양하자는 실천부터가 환경운동의 시발점이 된다. 한번이 아닌 조금씩, 주기를 두면서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우매하고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착각에 빠진 사람들은 하고 싶은 대로만 폭주하려들지 자연에 대한 배려나 호소 등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다. 단단히 귀를 막은 사람들에 대한 자연의 통렬하고 준엄한 꾸짖음은 연암 박지원의 <호질>에서 가장 돋보이는 메시지이자 경고이다. 비단 양반계급의 위선에 대한 풍자만이 아니라 사람중심의 가치관을 비판하고 멸종을 부채질하는 우리들의 생태질서 교란 행위가 악순환에 악순환을 낳으며 오염된 지구에 인간만이 살아남는 목불인견을 목도하지 않아야 함을 또 강조함에도 있다.

 

 

그러면서 이양하의 수필 <나무>와 작자미상의 고려가요 <청산별곡> 등은 모두 학창시절 교과서에 실려 있던 작품이라 반가운 마음이 앞섰지만 역시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생태주의적 관점임을 덧붙인다. 사람과는 달리 안분지족으로도 충분한 나무의 삶이나, 후렴구인 얄리얄리 얄라셩의 경쾌하면서 흥겨운 리듬감 못지않게 사람과 자연이 하나 되어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살고 싶어 하는 그 소망에 상상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하지 아니할까?

 

 

이제 종이에 글을 써서 남기고 감상하는 문학적 행위만으로 현재의 위기에 눈을 감고 외면하기에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다. 울창한 나무와 숲이 어우러져 공해에 찌든 사람들의 지친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대자연이 선물하는 각종 혜택과 축복에 감읍하며 마음 설레는 소박하고 행복한 삶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대안적인 환경운동의 실천방안을 모색해야 할 때이다. 사람은 결코 자연의 지배자가 아닌 생태구성원이자 가족임을 자각한다면 자연과의 관념 속 대립과 장벽을 허무는 일은 불가능만은 아니리라. 또한 고전작품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재해석하는 시도는 고전읽기의 또 다른 즐거움이라는 일깨움도 물론 잊지 말아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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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이 나를 밀고 간다 - 지상의 아름다움과 삶의 경이로움에 대하여, 개정증보판
헤르만 헤세 지음, 두행숙 옮김 / 문예춘추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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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는 아마도 괴테와 더불어 독일인들의 내면정신을 가장 잘 대변하는 대문호이자 다른 한 편으로는 문명정신과는 이질적인 이상주의자일지도 모르겠다. 유년시절부터 헤세의 인간 본성을 꿰뚫는 통찰력을 키워준 힘은 그가 자란 독일의 산간도시와 알프스 산맥의 산간마을의 자연에서 자연스레 형성되었으니 개인적 삶과 체험에서 축적된 세계관에는 그를 독일스러움과 그렇지 않은 면을 동시에 갖춘 상대성이 깊이 서려있다 봐야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출간된 <그리움이 나를 밀고 간다.>는 예전에 이미 국내에 선보인 적 있으나 누락된 분량의 한계를 복원하여 새롭게 개정판으로 다시 소개된 셈인데 산문집의 형식을 빌려 자연과 예술에 대한 개인적 감성을 응축한 문체로, 조화와 이상을 꿈꾸는 현대인들을 과거로의 향수에 젖게 만든다. 그 운치와 푸근함이 진정 세련되었으니 깊이를 논해서 무엇 할까?

 

 

그리고 원래 국내제목은 <그리움이 나를 밀고 간다.>가 아니었다고 얼핏 들은 것 같은데 차라리 잘된 일이다. 내가 떨쳐버리려고 해도 어느새 그리움이 나를 밀고 간다는 그 표현이 얼마나 감성을 자극하는 지, 그리움이 동반하는 외로움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런데 글로만 빛나는 것이 아니더라. 헤세가 직접 그린 그림들이 글과 어우러져 한 편의 수채화로 거듭나고 있는데 글만 잘 쓰는 줄 알았던 그에게 이런 화가로서의 재능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작가가 아니라면 화가 겸업도 가능할 그 비범함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따로 전시회로 만나고 싶을 정도로 세상을 보는 순순한 심성이 보석같이 반짝이는 색채로 붓이 캔버스에 펼쳐놓은 낙원인 듯하다. 

 

 

결국 글과 그림을 통해 삶을 살고 사랑하는 일에는 여러 경로가 있음을 그는 말한다. 만남과 작별, 탄생과 사멸, 자연이 빚어낸 꽃망울과 새들의 노래 소리를 들으며 나그네를 숭고한 고향으로 이끈 세상만물의 공로에 예찬을 늘어놓으며 경이로움에 젖는다. 맹목적인 소유욕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헤세의 지혜 앞에서는 성숙된 인간만이 꿈꿀 수 있는 단순함이 그저 부러울 뿐이다. 욕망에게 속박되어 있는 나, 그리고 현대인들이 새삼 자유로운 영혼 속에서 살지 못하는 이 순간에도 시간은 무의미하게 소모되고 있음이 안타까워 그렇게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자연과 인간, 예술을 이해하려 고뇌했던 헤르만 헤세만의 치열한 여정은 모든 사소한 일에도 애정과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조국 독일이 저지른 반인륜적 행위에는 분명한 반대의사를 표명하며 따뜻한 시선과 온기가 시간을 초월한 시공간 속에서 여전히 공감과 안도감을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해준다. 그 섬세함에 마음은 무장해제 되어 버리니 헤세의 글과 그림이 인도하는 대로 눈을 감고 마음을 열어보자. 슬그머니 추운 겨울 옆구리를 녹이는 감동이라는 환희에 온 몸이 떨려올 테니. 이것이 헤르만 헤세 식 미학적 진수이다. 동경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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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 도조 겐야 시리즈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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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불가해한 상황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기우제가 몇 년 만에 나라 지방의 산골마을에서 행해지는 모양이야.”

 

괴담을 수집하며 전국을 방랑하는 환상 소설가 도조 겐야에게 이러한 정보는 자다 가도 벌떡 일어나 문제적 장소로 달려가게끔 만드는 마력의 주술이었을 것은 당연하다. 괴담이라면 밥보다 더 좋아하는 괴짜인 그가 괴상사 편집담당자인 소후에 시노 양과 함께 당도한 곳은 물의 신 미즈치 님을 숭배하는 어느 마을이었다. 하미라는 그 마을은 산으로 둘러싸여 동서로 된 분지에 마을 네 개가 모여 사는 곳이다. 각각 사요 촌, 모노다네 촌, 사호 촌, 아오아 촌 순서로 자리 잡기 시작한 전형적인 논농사 마을이다.

 

벼농사를 지을 시기에 가뭄이 들어 순서를 정해 마을마다 번수를 실시하는 수리조합이 있고 미즈치 님을 모시는 신사가 각 마을마다 있는 곳이다. 그런데 미즈치 님을 모시는 기우제를 관장하는 신사들에게는 암묵적으로 서열 내지 우열 같은 자존심 싸움이 존재한다. 토착세력으로 권력이 되고 전승이라는 이름의 기우제는 비가 많이 올 때 감의‘, 가뭄일 때 증의라는 형식으로 나뉘면서 지금까지 계승되어 왔다. 문제는 과거에 기우제 도중 기우제를 집전하는 역할을 맡은 신관 두 사람이 빠져 죽거나 심장마비로 죽는 사고가 있었는데 십 삼년 만에 다시 기우제가 열리게 된 것이었다. 본의 아니게 가는 곳 마다 괴이한 살인사건과 맞닥뜨려 명탐정 역할을 수행해야 했던 도조 겐야에게 여지없이 참극이 발생한다. 역시 그는 불길함을 몰고 가는 먹구름 같은 존재였나 보다. 이번만큼은 기우제를 관람하는 제3자의 입장에 서려 했지만 꺼림칙한 그의 경력들을 이번에도 활용할 시점이 돌아온다.

 

모두가 지켜보는 호수 한 가운데 무대가 있었고 공물을 물에 빠뜨리는 집전을 담당하는 집배에서 신관이 흉기에 찔려 살해된다. 외부에서 집배로 몰래 들어 갈 루트도, 물 밖으로 빠져나간 그 누구도 목격되지 않은, 말 그대로 완벽한 호수 밀실사건이었던 것이다. 정말 특이한 살인사건이다. 흔히 밀실 살인이라고 한다면 건물이라는 유형화된 공간을 의미하는 데 이곳은 물이라는 형태이다. 물을 관리하고 물에 경외하고 물에서 참극이 발생함으로서 모든 일이 한 번에 이루어진 특정한 공간이 된 셈이다.

 

그러면서 이야기의 시점은 과거와 현재가 번갈아가며 살인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비극은 괴이라는 모습으로 이미 예견되기 시작했음을 알려주는데 살인범이 살인방법으로 이용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어떤 수단을 간접적으로 지칭하기 위해서라도 군국주의 일본이 자국민에게 영향을 미친 특정 세계관을 통해 일본이란 나라가 원래부터 끔찍하고도 어리석은 인습에 매어 많은 희생을 낳은 우매한 마을이라는 점을 우화적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전쟁 중의 일본이 미쳐 돌아갔던 것처럼 가족이 죽어도 나라를 위해 죽었다고 기뻐했던 반응들이 이 마을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전승되고 있지 않나 싶다. 개인 의사로 스스로를 희생한 것이 아니라 제3자에 의해 의문사를 맞이했다면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란 점에서 국가와 개인 모두에게 반성과 각성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도조 겐야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듣는다.

 

또한 이번 작품은 그간 악몽처럼 되풀이 되면서 심령공포의 진수를 보였던 것에 비추어보면 특유의 괴이는 여전하나 등장하는 빈도 수 라든지 그 공포의 강도가 현저히 낮아졌음이 확연히 드러난다. 읽으면서 전신을 휘감던 오싹함이 많이 가시는데 괴이를 자연현상으로 풀어내던 과정과 전개들도 이번에는 석연치가 않다. 그동안 완전한 해소까진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선에선 분명한 해법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냥 괴이현상을 보여주는 것에만 그친 이번 설정은 좀 아쉽기는 하다. 아니면 나 자신이 힌트 내지 정답을 보고서도 이해를 못한 탓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자꾸 속편 이야기가 슬슬 흘러나오는 이유가 그런 부분에 대한 보충설명이 차후에 제대로 실현되기 위한 사전포석이 아닌가하는 의구심도 해당될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반면 축소된 공포대신 눈에 자꾸 밟히는 것은 뜻밖에도 달달한 로맨스이다. 도조 겐야가 비록 민속학과 괴담에 정통한 전문가라지만 가까이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혜안은 없다는 점을 누군가도 지적하고 있지만 나 자신도 그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면 그도 나도 다를 바가 없나 보다, 연모의 징후가 노골적으로 곳곳에서 포착되지만 도조 겐야는 추리에만 정신이 팔려 있을 뿐, 정작 여자의 마음은 몰라준다. 철저히 그런 방면에선 둔하다. 왜 여태 몰랐던 것일까? 그래서 무심한 남자를 악마라고 원망하는 그녀의 투정은 정말 사랑스럽고 귀엽기만 하다. 몇 차례 스킨십의 기회가 있었지만 매몰차게 내쳐버려 안타깝지만 향후 이 시리즈를 즐기기 위한 또 다른 깨소금 같은 역할이 되지 않을까라는 즐거운 상상을 잠시 해 본다. 히죽거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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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일리의 사람들 판타스틱 픽션 골드 Gold 3
존 르 카레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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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첩보스릴러의 대가 존 르 카레의 '조지 스마일리 시리즈' 7번째 작품이자 카를라 3부작의 마지막 편인 <스마일리의 사람은>은 냉전시대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이데올로기라는 강박관념에 쓸쓸한 퇴장을 고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냉전(COLD WAR)’이라는 용어는 1945년 가을부터 미국과 소련이라는 강대국을 축으로 하여 두 진영 간에 새로 팽배하기 시작한 긴장상태를 표현한 것으로 1989년까지를 그렇게 불러왔다. 혹자들은 냉전은 전쟁이 아닌 평화라고 주장한다. 긴장과 대립은 있었지만 전면은 없었으니까. 대신 보이지 않는 장막 뒤에서는 스파이라는 척후병이자 불침번을 내세워 휴식 없는 상호감시와 정보전의 우위를 점하기 위한 과대망상에 빠진 또 다른 전쟁이었던 것이다. 교착 상태에 놓인 이 무의미한 소모전은 기만과 교란이라는 선동적인 형태를 통해 각자가 신경쇠약에 빠지도록 만든 것에 그치지 않고 견고한 내부단속에 따른 체제결속을 유지하는 또 다른 임시방편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그래서일까, 스마일리가 은퇴라는 뒤안길에서 다시 첩보전의 현장으로 소환되어 평생의 숙적이었던 늙은 여우 카를라와 벌이는 마지막 대결은 젊고 날렵한 최첨단 첩보물에서는 맛볼 수 없는 진한 숙명과 회자정리라는 개념이 차별화된 요소가 아니었을까 싶다. 진정한 은퇴식을 지금에서야 다시 열었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도 있을 것 같고. 서커스(영국 정보부)에서 은퇴한 늙은 스파이 스마일리에게 블라디미르 장군의 사망의 진상을 밝혀낸다는 것은 일종의 과업이자 묵은 빚을 청산해야만 하는 의무였을 것이다. 블라디미르 장군은 에스토니아 출신 망명자로서 자신과 함께 이념과 사상이라는 기치 아래 보이지 않는 전쟁을 함께 수행하였던 동지이자 이용당하다 버려진 스파이들의 고독과 비참한 노후를 대변하는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어 결코 간과할 수 없었던 인물이다.

 

 

그런 그의 죽음은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외면될 뻔한 처지에 놓였다가 스마일리에 의해 정식으로 조사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블라디미르가 죽기 전 스마일리와 만나고자 했고 샌드맨을 잡을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 정황도 포착한다. ‘샌드맨은 바로 스마일리의 영원한 숙적이자 모스크바 센터(KGB)의 총 책임자 카를라를 말하는 것이었는데 그에 대한 치명적인 단서를 알아보던 중이었고 그 사실로 인하여 암살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죽은 스파이들과 재회할 수 있는 별도의 저 세상이 있다면 못 풀었던 오해를 풀고 싶었다는 스마일리. 다시 현장으로 복귀하여 늙은 여우 카를라를 포획할 마지막 덫을 설치한다. 이제 여우 한 마리가 덫으로 걸어 들어오기만을 초조하기만을 기다리면서도 그의 마음은 엉켜진 실타래처럼 복잡하기도 하다.

 

 

적수로서 분노라는 감정을 품고 있지만 야만적인 관료 시스템을 거부한 채, 24시간 동안 생존이라는 서바이벌을 달성하기 위해 신념과 기지로 살아남아야 했던 카를라에게서 그도 한낱 인간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동병상련의 심정을 느끼기 시작했던 것이다. 모스크바의 무기였고 잔혹한 살인마라고 불렸던 블라디미르의 죽음이 한낱 치정 따위도 아닌 이유로헛된 선택을 했으리라고 평가 절하된다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이유와도 일맥상통하는 지점이다. 그들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조국의 이름을 걸고 최선을 다했었다. 이렇게 쓸모없는 소모품처럼 폐기되는 처사가 비정하면서 인간성과 신념이 희생당하는 현장에서 모두가 거울처럼 닮아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스마일리와 카를라가 시선을 교환하는 장면에선 상대방으로부터 자신의 처지를 엿보았을 것이라 짐작되기에 세월은 숙명을 뛰어넘어 승자도 패자도 없는 서글픈 송별식으로 시대의 종말을 고하고 막을 내리게 되었다. 첩보스릴러의 클래식으로 기억될 만한 애잔하고 서정적인 엔딩이자 인생을 처연하게 함축시킨 드라마였다. 가을에 더 기억에 남을 만한 작품!!

 

 

다른 한편 적수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분명하게 인간의 얼굴을 드러냈다. 지금껏 스마일리가 죽어라 추적했던 야수도 광인도 로봇도 아니었다. 그도 분명한 인간이었다. 스마일 리가 조금만 손을 내밀어도 절박한 사랑 따위에 무너지고 말 그런 인간... 그건 스마일리 자신이 실타래처럼 꼬인 삶을 통해 터득한, 누구보다 잘 아는 약점이기도 했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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