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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내에 대하여
라이오넬 슈라이버 지음,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내가 냈던 세금을 왜 아내의 불치병 치료에는 쓸 수 없을까?
영화 <케빈에 대하여>를 기억하는지? 내가 이 영화를 기억하는 건 모성애의 절대 신화에 과감히 돌을 던지며 모독했던 파장 앞에서 강렬한 전율을 느끼게 했던 영상과 이야기도 압권이었지만 원작은 더 어둡다는 말들이 잔상처럼 맴돌았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후유증은 오래 지속되었다. 영화로 먼저 만났지만 기억해두리라는 각오 때문이었는지 이번만큼은 책이다. 첫 인상과 마지막 느낌표까지 과연 만만치가 않다. 분량 때문에, 또 다른 이유는 시니컬하면서도 먹먹하고 짙게 드리우는 여운 때문에라도.
이번에 라이오넬 슈라이버가 관심을 가지고 메스를 들이댄 주제는 미국 의료제도의 모순점이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 의료보험 제도의 가장 큰 특징은 선진국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국민의료보험제도나 국민보건서비스 같은 공공의료보험 서비스 제도가 없다는 것이다. 단지 65세 이상의 노인을 대상으로 하는 노인의료보험 제도와 저소득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국민의료보조 제도만이 최소한의 공공기능을 담당하고 있을 뿐이다. 다수를 차지하는 나머지 계층들은 민간보험회사들에 가입하여 하는데 여기에 상당한 문제점이 있다.
원래 국가가 책임지지 않는 공공서비스를 민간이 운영하게 되면 보험회사들은 사회보장의 성격이 아닌 이윤창출을 본질적인 목적으로 삼기에 납부한 보험료에 비해 의료비 지급률이 턱 없이 낮게 책정되고 그 차액을 고스란히 개인의 주머니에서 부담해야만 한다. 게다가 가입 시킬 때에는 모든 것을 다 보상 지급할 것처럼 꾀지만 정작 보험금을 지급할 경우가 생기면 복잡 미묘한 약관을 들어 지급을 거부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의료의 양과 질은 환자의 선택이 아니라 보험회사의 입맛대로 결정되는 셈이다.
이러한 모순과 문제점을 타파하기 위해 정부와 기업이 의료비를 분담하는 개혁안을 미 정부에서는 도입하고자 하지만 이 또한 각종 문제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결국 돈 없으면 인간다운 권리를 제대로 누릴 수가 없다는 암울한 현실이다. 여기 50대의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세퍼트 암스트롱 내커. 한평생 육체노동자로 성실한 삶을 살아왔고 집 수리회사의 오너의 자리에 올랐지만 자기의 부하 직원이었던 남자에게 경영권을 넘겨주고 그의 밑에서 일하고 있다. 이제 청춘을 과거자락으로 흘러 보낸 세퍼드는 미국이 아닌 제3세계에서 노후를 설계하며 삶을 살고자 한다. 자연을 벗 삼아 물질과 경쟁이 주는 스트레스가 없는 여유로움을 꿈꾸던 그에게 예기치도 못한 상황이 일어난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려는 찰나 아내 글리니스가 불치병에 걸리고 만 것이다. 말 그대로 불치병이라 세퍼드의 낭만적인 꿈은 산산조각 나고 가정 또한 위기의 나락에 떨어지는데 이제 모든 수입은 아내의 치료비로 몽땅 투입된다. 경제력에 대해 별다른 걱정이 없었는데 한순간에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나날이 소진되는 돈 때문에 회사에서 사장에게 온갖 수모와 굴욕을 당하면서도 차마 그만두지 못하는 것이다. 비록 궁핍하게 되고 꿈도 포기했지만 그동안 일 때문에 앞만 보고 달려야했던 중년의 남자와 여자는 비로소 부부 사이가 돈독해지는 계기를 만들게도 된다.
그 와중에 둘은 서로에 대한 오해와 섭섭함으로 갈등도 겪지만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가족들의 외면 속에서도 죽어가는 아내를 마지막까지 책임지고 돌보는 일이야말로 남편으로서 성실히 수행하여야 할 사명으로 간주하고 최선의, 또 최선의 노력과 헌신을 경주한다. 하지만 문제는 돈이다. 병원 측에서는 최신치료방식이라는 대안을 제시하지만 민간보험에서 담보되지 않는 한 개인부담금의 과도한 증가는 세퍼드의 인내에 종지부를 찍는다. 비록 파렴치하고 무책임한 남편으로 비추어지더라도 희망이 없는 치료에 매진하기 보단 처음 꾸었던 제3세계로 부부가 떠나 여생을 정리하기로 한 것이다. 이들 부부의 여생은 과연 행복했던 것인지, 아니면 좀 더 포기 말고 치료하는 것이 최선이었을지 판단하기란 쉽지는 않다.
돈이 없으면 아이들만 병원에서 치료받고 부모 자신들은 아파도 참고 견디는 게 요즘 세태라고 하지 않던가? 더 이상 개인의 고통으로만 떠넘기지만 말고 국가가 나서 아프고 가난한 서민들을 돌보지 않는다면, 내가 피땀 흘려 번 수입으로 낸 세금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막는데 쓰지 못한다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할까? 그래서 끝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더 이상 꺼져가는 불씨를 되살릴 길 없는 한 남자의 허망한 시선이 그렇게 먹먹하도록 한다, 이제 짐을 내려놓았노라고 안도해야만 하는. 어떤 의미에선 가슴 아프지만 최선의 결단이었다고 생각되는 결말이다.
결국은 미국의 한 중산층 부부가 배우자의 불치병으로 몸과 마음이 망가지고 경제적으로 파산되는 과정들을 통해 초강대국 미국 의료제도의 허상을 통렬하게 비판하며 집단적 가치 앞에서 소멸되는 개인적 가치를 심층 조명해보고 있다. 그들의 고통은 남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에게도 언젠가 들이닥칠 일이 될지도 모른다.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살아라. 눈칫밥 먹기 싫으면. 그래서 나도 오늘부터 안하던 운동 좀 해야겠다. 이 책 읽고 나면 그런 생각부터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