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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라고 불리고 있는 김영하의 신작
<살인자의 기억법>을
읽었다.
한국문단 역사상
처음으로 귀고리를 하고 시상대에 올랐다는 도시적 남자 김영하에 대한 잔상은 몇 가지로 압축
정리하게 된다.
그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소설제목으로,
다음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던 <위대한 개츠비>의
역자로,
마지막이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너의 목소리가
들려>를
발견하면서이다.
혹시 얼마 전에
종방되었던 TV드라마의 원작인
것일까?
아니었구나.
나만 그런
착각을 한 것은 아니었어.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이미 많은 추측들이 후후...
하지만 의혹은
말끔히 걷히지 않았다.
제목을 김영하의
소설에서 따온 건 아닐까 하는, 확인할 길이
없으니 그냥 넘어가자.
이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을 읽고 난
지금 이 순간의 기억이 중요하니까.
사실 많은
분들이 <살인자의
기억법>을 읽으시고는
추천도 많이 하시고 이미 베스트셀러의 위치에 올라있는데 단순히 재미있다는 일반적인 느낌만이 다는 아닐 거라는 예상을
해보았다.
김영하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라는 평은 누구나 쓸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단순하면서도 최대의 효과를 끌어내는 찬사의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30년 동안 살인을
저지르다 25년 전에 은퇴한
연쇄살인범 김병수가 70세 노인이 되어
알츠하이머에 걸려서 점차 사라지는 기억과 사투를 벌이는 이야기이다.
그가 살해했던
숱한 희생자들 중에는 현재 같이 살고 있는 딸 은희의 친부모도 포함되어 있다.
단기 기억이나
최근 기억부터 없어지다가 과거의 먼 기억까지 지워지는 과정에 놓여있음에도 은희의 친부모를 살해했던 기억만은 어찌된 영문인지 아직 생생하게 잊지
않고 있다.
차마 은희에게는
사실을 얘기하지 않고 자신이 데려다 키운 양부라고만 했다.
은희는
박주태라는 남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려고 소개하고 그 자에게서 연쇄살인범의 기운을 감지한 김병수는 은희를 지키기 위해 박주태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여생의 마지막 목표로 설정하는데....
살인에 대한
모든 과정과 느낌들을 복기하기 위해 일지를 썼던 김병수에게 기록이란 과오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오답노트이면서도 희노애락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어 안타까운 기분의 표출이기도 하다.
시를 읽고
금강경 같은 것을 읽기 시작한 이유도 문학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이나 열정이 아니라 살인이라는 작업을 온전한 감정을 담아 문장으로 표현하고
싶었다는 왜곡된 심상에서 비롯된다.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인간은
시간이라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
치매에
걸린 인간은 벽이 좁혀지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숨이
막힌다.”
<본문 중에서>
알츠하이머에
걸린 양부를 봉양하느라 심신이 피폐해진 은희는 그런 환자에게도 감정은 남아있다는 말로 자신의 역할에 당위성내지 위안을 부여하고자 하지만 정작
김병수는 망각의 강을 건너며 육체와
정신이 파괴되는 중이다.
과거의 기억이든
미래에 해야 할 일에 대한 기억 모두 지금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달려가고자 하는 결단력이지만 레일 끊긴 기차처럼 영원한 현재는
없다.
이미 김병수는
도시를 싫어했고 조용한 세상에서 세상에 뒤섞여 사는 일에 두려움을 느끼며 살아오면서 타인에 대한 공감에서 실패해왔으니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난
만물을 파괴하는 행위에 어떠한 기쁨마저 느낀다.
연쇄살인마들이
느끼는 전형적인 쾌감이라는 흥분상태를 엿볼 수 있기에 그에게 죄책감이라는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박주태가 은희를 살해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딸을 보호하겠다는 김병수의 마음을 파악한 독자들은 촉수에 걸려 마비된 상태로 무섭도록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의심 않고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예상했던
대결구도로 흘러가겠거니 했는데 아뿔사,
이 소설에 담긴
사전경고를 간파했어야 했다. '단숨에 읽힌다면 반드시 경계하라, 그랬다면 이 소설을 잘못 읽은 것'이라는 경고문은 반전에 도달해서야 의미를 파악하게
되었다.
김병수가
알츠하이머에 걸려 정상이 아니라는 상태는 이미 인지하고 있는 정보이다.
만약 그가
정상인이었다면 결말의 반전을 결코 인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깜짝쇼에
불과했을 테니까 말이다.
오히려 비정상에
익숙해있을 때,
아니 방심하고
있을 때 정말 예상치 못한 결말을 떡 하니 내놓았다.
순간 당황하기도
했고 어찌 보면 슬프다고 해야 할 목매임에 숨이 막히기도 했다.
기억을 잃는다는
사실만 해도 이렇게도 안타까운데 실제보다 더한 고독이 있었다는 진실에 가슴이 저려온다.
물론 허무한
결말로 치부하는 이도 있겠지만 소설을 쓰는 것이 한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작가의 의도대로 마치 영화 <파이트
클럽>의 결말처럼
거대한 세트가 일시에 무너져 내리는 섬뜩한 공포를 나는 받아들였다.
이것은
악몽이다.
현대소설이
구축할 수 있는 최상의 시스템에 나는 진정 완패했으니 김영하라는 이름 석자를 반드시 각인시키겠다.
알츠하이머
예방에는 독서가 최고라고 하지 않나?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그의 다른 작품들도 찾아 읽어보려 한다.
진심으로
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