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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소녀 - 개정판
델핀 드 비강 지음, 이세진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세상을 산다는 것은 길을 걷는다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다. 출발점에 서서 도착지점에는 해피엔딩일지 새드엔딩일지도 알 수 없고 제대로 찾아갈 수 있을지, 중도에 포기하게 되지는 않을지 그 누구도 자신 있노라 호언장담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모르기 때문에. 더군다나 십대 시절에는 모든 게 불확실하고 모호해서 누군가와 함께 동행해준다면 더 이상 바랄게 없겠지만 온전히 혼자만의 힘으로 헤쳐 나가기엔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아 주저하고 또 주저하게 된다.
그런데 시간이 약이라고 했던가. 결국 우리는 성장통을 거쳐 어떤 식으로든 어른이 되기 위한 관문을 이미 통과해 버렸다. 훌륭한 성장소설은 그래서 애틋하고 오랫동안 기억 속에서 잊혀 지지 않나 보다. 어른은 그렇게 되는 것이고. 여기 한 소녀가 있다. 열세 살의 루 베르티냐크는 천부적 재능이 있어 월반하고 지금은 그 나이에 벌써 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인 소녀이다.
이런 유형의 아이들이 흔히 그런 것처럼 나이 많은 같은 반 친구들과 융화되지 못했고 우연히 수업시간 발표 과제 때문에 노숙자를 입에 올린 것은 순전히 순간을 모면하기 위함이었다. 평소 발표하는 것을 싫어하던 루가 노숙자 여자를 인터뷰하겠다고 수업시간에 말한 것을 두고 아차하고 후회했을지는 두고 볼일이다.
어쨌든 공언한대로 실행에 옮겨야 하기에 퍙서 자주 찾던 기차역에서 열여덟의 소녀인 노를 만나게 되는데 처음에는 과제 때문에 필요했던 노가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마음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자신과는 다른 길에 서 있다고 생각했던 노가, 아니 이런 생각이야말로 우리들의 일반화된, 고착화된 편견이겠지만 자신과 더불어 어느 공간에 소속된 것 같다는 동질감이 들었다.
사실 노가 현재 노숙자로 살고 있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녀의 엄마는 성폭행 당해 원치 않게 출산한 탓에 딸에 대한 애정이 전혀 없었다. 대신에 조부모님이 맡아 키워 주셨고 사람들의 따가운 눈초리 속에서도 노는 부모님처럼 따르며 자랐지만 언제까지 부모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었기에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살러간 엄마를 찾아 떠난다. 하지만 엄마는 여전히 눈길조차 주지 않고 냉랭했다. 그리고 노는 집을 나가 노숙자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다.
나이차와 상관없이 두 소녀는 금세 친해져 어울리게 되고 같은 반의 문제아인 뤼카라는 소년과 함께 세 사람은 어른들의 간섭과 무지, 무간섭, 그 어떤 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신들만의 독립된 나날들을 보낸다. 그 순간들의 시간들이 이대로 멈췄으면 했던 이유가 루와 뤼카에게도 가족이라는 가슴 아픈 개인사가 각각 자리하고 있다.
루의 엄마는 동생을 낳았으나 아이가 갑작스레 사망한 이후 사고가 정지한 것 마냥 피폐해지기 시작해서 루에게 엄마로서의 애정을 보여주지 못했고 아빠는 그런 아내를 돌보느라 힘겨운 사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뤼카의 경우 부모님의 결별하신 상태여서 집을 나간 엄마가 보고 싶을 뿐이다.
이렇게 애정과 관심이 결핍된 아이들은 교집합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하며 그들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동안 일자리를 구해 보통사람처럼 살려고 했지만 사회부적응자로 낙인찍히고 만 노와 계속 그런 동거관계를 유지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동안 부모님을 속여 왔지만 이런 생활을 들켜 버렸으니까. 아빠에게 부모님들은 어차피 나 같은 아이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지 않느냐며 울부짖던 루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직접 본 것 마냥. 세상은 나에게 노라는 소중한 친구를 선물해 주었고 루와 함께 머나먼 아일랜드로 떠나고 말테다.
처음으로 자신의 인생목표, 인생의 방향 같은 게 생겼던 루에게 가고자 했던 그 길이 행복했을지는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서두에서처럼 그렇게 어른이 된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성장소설로는 더없이 뭉클하고 잔잔한 감동이 흐르는 <길 위의 소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