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잠, 봄꿈
한승원 지음 / 비채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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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흔히 수레바퀴 같아서 흥했다 망했다 하는 흥망성쇠를 반복하는 일련의 과정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미래를 준비하지 못한 나라는 망국의 길을 필연적으로 걸었고 미래를 준비한 나라는 부국강국의 길을 역시 필연적으로 걷게 된다. 이것은 수천 년 인류역사를 통해 확인한 진리이자 교훈이다. 그렇다면 한국 근대사에 있어 동학혁명은 어떤 위치에 놓여있는 걸까? 올해로 혁명 발발 119주년을 맞이하는 현 시점에서 말이다. 

 

나 자신도 간과했던 그리고 우리들도 결코 그 의의에 스스로 빛을 가렸던 동학혁명은 의외로 세계사에 있어 보다 큰 의의와 가치가 부여되고 있음을 뒤늦게 알 수 있다. 19세기 중 일어난 세계 민중혁명 중 최대 규모이고 프랑스 시민혁명, 독일 농민혁명, 중국 태평천국의 난과 함께 세계 4대 근대시민혁명 하나로 당당히 꼽힌다는 역사적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 정도였던가? 그래서 동학혁명이 내건 '보국안민' '제폭구민' 같은 기치를 필두로 외세 배격과 신분제도 철폐를 주창하면서 우리나라 근대 민주주의의 출발을 알렸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우리는 동학혁명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참담한 실패라는 결과를 낳았는지 이미 역사시간에 배웠으니 이 소설에서 정말 그려내고 싶었던 시간적 배경은 봉기과정도 우금치 전투에서의 패전도 아니요, 탄압 속에서 전국에 퍼져 나갔던 동학 이념을 구체적으로 설파하고 있지도 않는다. 단지 패전이라는 참담한 겨울잠 이후 얼어붙은 이 땅에 봄이 찾아들기를 갈망했던 녹두장군 전봉준 일대기를 봄꿈이라는 상징성을 빌어 그려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은 쓰리고 눈물이 나려 한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녹두장군을 그리는 노래도 참 애달프지만 왜 녹두장군이라고 불렸는지도 모르고 있었다니 새삼 부끄러운 역사인식 앞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콩 중에서도 작은 녹두는 체구가 남달리 작지만 다부졌던 전봉준 일컫는 별칭이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이 노래를 부르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다니 약소국의 설움이 아니었겠는가? 그러한 배경을 뒤로 한 채, 녹두장군 전봉준 우금치 전투의 패전으로 거사에 실패하고 부하 김경천의 밀고로 일본군에 체포되어 한양까지 압송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때까지의 마지막 119일에 대한 고난의 기록 여기 있다.

 

당시 조선인으로 태어났지만 일본인으로 귀화해 이토 히로부미 양자가 되어 일본인보다 더 뼛속 깊이 일본인이 되어버린 이토 겐지 회유는 그야말로 마지막까지 귓속을 간질이고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깊고 질었다. 이미 저물어가는 동방의 나라 조선의 백성으로 살다 죽을 것인가? 새로운 개화문물을 받아들여 강국으로 새로이 거듭나고 있는 일본을 제2의 모국으로 감아 이 더러운 세상을 갈아엎는 길을 택할 것인가?

 

 

 

 

아직 죽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다. 전봉준은 마음이 흔들린다. 그러면서 한양으로 압송되는 와중에 일본군들이 수시로 부상당한 가마꾼들과 백성들을 기밀유지를 빌미로 무참히 학살하는 만행을 목격할 수밖에 없는 암담한 현실에 좌절하고 치를 떨며 그들에 하늘의 천벌이 내리기를 소망한다. 그러면서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을 내려야한다. 이토 겐지 말 대로 이토 히로부미 양자로 입적되어 또 다른 방식으로 구국운동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 자신의 피를 뿌려 조선민중들에게 화약심지에 불을 붙일 도화선이 될 수만 있다면 기꺼이 한 목숨을 바치고자 하는 결심은 더없이 숭고하다. 무엇을 주저하랴? 늦으면 늦을수록 후회만 있을 뿐이다. 그것이 비록 한낱 봄꿈일지라도

 

밥이 하늘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모두 밥을 만들려고 산다. 밥을 쟁취하려고 싸운다. 더러운 밥이 있고, 깨끗한 밥이 있고, 떳떳한 밥이 있고, 부끄러운 밥이 있다. 내가 일어선 것, 고부 사람들이 관아로 몰려가 사또에게 대든 것, 아버지가 사람들의 소두로서 항거하다가 곤장을 맞고 장독으로 죽은 것, 호남 일대의 사람들이 죽창을 들고 일어선 것이 다 이 밥 때문이었다. 일본 사람이 조선 땅에 들어온 것도 조선 사람의 밥을 빼앗아 가려고 온 것이다. 나는 죽을 때 죽더라도, 그 슬픈 밥에 대하여 모두 말하고 나서 죽어야 한다.(본문 중에서) 

 

그렇다. 중요한 것은 이다. 백성들에게는 먹고 사는 문제만큼 중요한 건 없다.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든 민씨 일파가 정권을 잡든, 탐관오리가 부정부패를 저지르든, 열강이 조선의 국권을 집어삼키든, 그런 거창한 대의명분보다 굶지 않고 배불리 먹고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더 절실했다. 그것을 위정자들은 허울좋은 이념을 앞세워 눈 가리고 아웅하고자 할 뿐이다. 누가 알아주기만 바랄 세월의 넉넉함이 없었기에 분기탱천했다. 전봉준의 삶은 그렇게 불꽃같이 피어올랐다가 사그라들었다. 한승원 작가 전봉준의 고뇌를 따라가는 과정들은 그래서 고통스럽다. 결말을 알지만 그의 목숨을 구명하고 싶은 안타까운 열망을 한 폭의 수묵화처럼 구슬프게 그려낸다. 그 빼어난 서정성을 무엇에 비유할까?

 

역사는 굴러가는 수레바퀴라고 서두에서도 밝힌 바 있다. 이 뜻 깊은 역사적 사실에 대해 아직도 기념일로 제정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잊지 않기 위해서도 역사에 대한 오판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한시바삐 기념일이 제정되어 현재를 바삐 살아가느라 옛 일을 돌아다 볼 겨를이 없는 우리 후손들에게 교육의 장이 되었으면 한다. 그런 차원에서 한승원 작가"여름잠, 봄꿈"은 한국인이라면 반드시 읽어야할 필독서가 될 것이다. 아니 되었으면 한다. 전기물로 받아들이기에 앞서 한 인물의 삶을 흐드러진 봄내음으로 담아내며 문학성이라는 빈자리를 지켜내고 있는 탁월한 소설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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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미상, 미스터리 작가가 읽는 책 - 상 미쓰다 신조 작가 시리즈 2
미쓰다 신조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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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께끼의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추리하는 사람이 시점을 어디에 놓느냐애 따라, 어떤 정보를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해석은 천차만별로 바뀌어. 따라서 내가 밝혀낸 진상은 어디까지나 어떤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해석에 불과해. 아무 증명도 되지 않는다고." (P.341)

 

'미쓰다 신조' '작가 시리즈' 두 번째 작품 "작자미상, 미스터리 작가가 읽는 책"을 읽었다. 올해 들어 세 번째로 읽게 되는 '미쓰다 신조' 작품이니 내게는 확실히 대세 중의 대세이며 그 흐름은 하반기에도 주욱 이어질 것 같다. 앞서 방랑 환상소설가 '도조 겐야' 시리즈랑 현대물을 읽었는데 작가 본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가 시리즈' 이번이 처음이다.

 

'미쓰다 신조' 친구 '아스카 신이치로' 나라 현 안라 시의 안라 초라는 마을에 들렀다가 '후루혼도'라는 헌 책방에서 "미궁초자"라는 동인지를 구입하게 된다. 그 후에 '미쓰다 신조' '아스카 신이치로' "미궁초자"를 함께 읽으면서 기괴한 체험을 하게 되는데 기억의 봉인을 풀기라도 하 듯 첫 번째 수록작 "안개 저택"을 읽은 후 엄청나게 짙은 안개의 습격을 받게 된 것이다. 안개는 오로지 두 사람만 겪게 되는 초자연적 현상이었고 소설 속 살인사건에 얽힌 수수께끼를 해결하자 이제야 안개는 종적을 감춘다. 이건 무슨 현상이지? 두 사람이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때 두 번째 수록작 "자식귀 유래"를 읽으니 이번에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주위를 맴도는데....

 

이제 두 사람은 알게 된다. "미궁초자"의 수록작을 읽게 되면 어떤 괴이 현상이 발생하고 수록작의 수수께끼를 해결하지 못하면 둘의 생명은 장담하지 못하게 된다는 점을... 이미 먼저 이 정체모를 동인지를 입수해서 읽었던 사람들 모두 알 수 없는 방식으로 행방불명되었단 사실에 더욱 두려움이 커지면서 살아남기 위해서 목숨 건 독서가 논스톱으로 진행되는데, 마지막에 도달할 때까지 멈출 수 없다. 괴이 현상의 근원은 무엇이며 동인지를 발간한 '미궁사'란 어떤 곳이며. 일곱 작품의 작가들은 당췌 누구란 말인가?

 

제1화 "안개 저택"이 죽은 소녀의 정체성 문제와 착시로 추정되는 괴이를 '도조 겐야'식으로 풀어내었다면 제2화 "자식귀 유래"부터는 난이도와 호러가 본격적으로 상승되는 구조로 진행되는데 마지막 단편까지 읽고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다면 두 사람은 실종될 수도 있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또 다른 독자가 될지도 모를 시점의 변화 가능성이 공존한다는 점이 신선한 발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작품들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갈 때 마다 독자들은 또 하나의 사실을 눈치 채게 된다. 탐정과 조수의 관계처럼 수수께끼의 단서를 찾아 실마리를 풀어내는 일은 전적으로 '아스카 신이치로' 주도하에 진행되고 '미쓰다 신조' 괴이 현상을 직접 체험하거나 '아스카 신이치로' 추리과정에 독자의 의문사항을 개입시켜서 논리적 모순의 해결을 돕는 보조적 역할로 각각 분담되고 있다.

 

또한 사건현장에 직접 출두하여 단서를 포착하는 방식이 아니라 오로지 동인지라는 기록의 근거에서 추론해야만 하기에 이 모든 것이 진실인지 허구인지 그 경계마저 불명확하다. 인간의 합리적 이성에 의한 논리적 해결은 어느 단계까지는 가능하지만 초자연적 현상까지 완벽하게 설명되는 것은 아니란 것이다. 그러한 설정은 '미쓰다 신조' 작품들을 읽을 때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개인적 호불호가 발생한다고 생각된다.

 

또한 '미쓰다 신조' '아스카 신이치로' 각 수록작들의 수수께끼를 풀어야만 하는 이유는 직업적 소명도 아니요, 지적 호기심 충족은 더욱 더 해당되지 않으며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해결해야만 하는 숙제 같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점에서 "제5화 슈자쿠의 괴물"을 가장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옛날에 한 여행자가 산을 넘으려고 언덕을 오르고 있는데 문득 한기가 들어 돌아보니 한 남자가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따라오고 있었다. 말을 시켜도 대꾸하지 않자 그냥 무시한 채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데 어디선가 "어이"라고 부르는 소리가 남자의 뒤에서 들려오고 있지만 그 남자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으로 나아갈 때 마다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참다못한 여행자가 "누구냐?"고 외쳤더니 뒤돌아선 남자의 뒤통수가 괴물로 변해 이 남자를 삼켜버렸다는 게 "슈자쿠의 괴물" 이야기이다.

 

여기서 재밌는 건 '미쓰다 신조'식 호러에는 혼자 산길을 걸으면 뒤에서 누군가가 "어이"하고 부르며 쫓아온다는 방식이 자주 차용된다는 점이다. 그것이 "산마"이거나 "슈자쿠의 괴물"일 때도 있지만 익숙하고 반복적인 설정임에도 항상 그 점이 등골을 오싹하게 할 만큼의 기묘한 공포가 배어있다. 그리고 좋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번에도 나오셨군요."라고 말이다. 게다가 이 수록작은 슬래셔 무비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스타일리시하다. 우리나라로 치면 "분신사바"에 해당되는 "곳쿠리상"을 불러내는 의식 또한 무척 긴장감 있으면서 즐거운 게임(?) 한 판을 구경하는 재미까지 모든 것이 신선했다.

 

"곳쿠라상, Y를 죽인 사람은 누구입니까?"

...... 고요한 거실에.

"너야........."

나직한 목소리가 흘렀다. (P.49)

 

차용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열 꼬마 인형 미스터리'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애거서 크리스티'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같이 기본적으로 주요 등장인물들이 모두 살해당한다는 플롯의 고전도 해당된다. 그래서 "슈자쿠의 괴물"에 대한 대입은 물론이거니와, 다수의 인물이 등장했다면 각자가 사건에 대해 독자적 거리를 두는 일이 가능했겠지만 한정된 두 사람의 등장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싫든 좋든 "미궁초자"가 펼쳐놓은 덫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수수께끼를 풀어낼 수밖에 없는 운명적 상황이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새삼 고전은 영원불명하고 시대를 초월해 통용되기에 무척 인상 깊은 설정이다.

 

이제 '미쓰다 신조'의 추리소설에서 호러의 역할은 싱거운 음식의 간을 맞춰주는 조미료나 향신료 같은 역할을 충실히 재현하고 있어 그 맛에 점차 중독되는 과정에 놓여있다. 그러한 요소들이 정신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알 길 없으나 들어가 있지 않으면 얼큰한 맛이 살지 않는다. 오죽하면 역자는 후기에서 양화대교에 만난 괴이 현상을 언급하겠는가? 그것이 진실이든 허구이든 아무런 상관은 없다. 남 걱정할 때가 아니라 '미쓰다 신조' 수수께끼를 제대로 풀지 못했으니 그 괴이가 나 자신을 찾아올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그것의 습격이 계속 기다려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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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와 몬스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8
가이도 다케루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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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도 다케루의 소설들은 흔히 메디컬 엔터테인먼트라는 장르로 흔히 불리고 있는데 솔직히 그 의미랄까 정의에 대해서는 확고한 정립이 되어있지 않는 상태이다. 작년에 <울트라 황금지구의>로 그의 소설을 처음 만나보았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항상 오해를 먼저 하고 읽게 된다. <울트라 황금지구의>만 해도 그랬다. 그냥 의학소설이겠거니 했는데 왠걸 가상의 도시 "사쿠라노미야"에서 벌어지는 코믹 범죄극이었다. 작가 스스로도 가볍게 쓴 소설이라고 했는데 한없이 대중적인, 그야말로 엔터테인먼트적인 가치관에 부합하는 소품 같은 느낌이어서 의외라는 생각을 했었다. 이제 두 번째로 읽은 <나니와 몬스터>는 또 한 번 나의 오해를 불러일으키며 시작해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끝맺음을 했다는 점에서 또 당했구나, 라며 쓴웃음마저 짓게 된다.

 

몇 년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신종 인플루엔자 AI에서 착안했다는 이 소설, 아프리카 대륙의 남쪽에 자리 잡은 사막 공화국 "노르가르 공화국"에서 발생된 캐멀은 낙타를 변이의 숙주로 한 신종인플루엔자로서 전 세계로 확산되기 시작한다. 일본은 "캐멀"의 국내 유입을 차단하기 위해 공항을 차단방역하고 혹시라도 모를 사태방지에 총력을 기울이는 가운데 "캐멀파인더"라고 하는 신속 검출 키트가 몇 개 지역에 한해서 배분된다. 일본에 들어오지도 않은 질병에 대해 정보가 이상한 방향으로 나도는 것도 수상한데다 키트가 전국에 배분되는 것도 아니고 일부 지역에 배분된 점도 어딘지 수상하다.

 

그런데 안전지대라고 판단되었던 일본에도 이윽고 감염자가 발생된 것으로 밝혀지는데 그것도 인구 8백만을 자랑하는 일본 제2의 도시 "나니와"시에서 말이다. 도시는 이제 격리되고 도시의 생사여탈권을 두고 중앙정부와 지자체, 의료계간의 위험한 딜이 시작되려 한다. 일반시민들은 알지 못하는 뒷거래와 그 배후가....

 

"그래. 신은 지구에게 바이러스 같은 존재인 인간을 진압하기 위해서 여러 실험을 하고 있어. 그 항인간약제 개발을 위한 모르모트로 하늘을 나는 새와 사람 가까이에서 식량이 되어주는 충실한 돼지를 선택했지. 그리고 이번에는 사막의 배라고 불리는 낙타를 매개체로 선택했어.

신은 사막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지." (p.180)

 

해외여행객이 아닌 순수 국내거주민에게서 "캐멀" 1호 환자가 나니와 진료소에서 발견된 이후 나니와 검역소의 검역관 기쿠니 다다요시와 신입직원 모리 도요카즈나니와 부의 지사 무라사메 고키의 호출을 받아 간 저리에서 사쿠라 TV의 인기프로그램 <싹둑 베어버릴테다>에 출연해 나니와 대학 부교수 혼다 미쓰코의 폭주에 제동을 걸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나니와"를 경제적으로 붕괴시키려는 저의를 격리라는 방식으로 확대시키고 있는 그녀의 주장을 두 콤비는 멋지게 한 방 먹이고 반론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하는데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전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캐멀"로 인한 논쟁은 사소한 미끼였을 뿐 무라사메 고키 지사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세력은 도쿄 중심의 중앙 통치 방식에 반발해 일본 광역 지방자치단체의 대통합이라는 일단계를 넘어 일본 삼분할이라는 계책을 수립하게 된다. 행정적인 독립을 통해 진정한 의료 입국을 꿈꾸는 이들의 발상은 전적으로 중앙정부에 대한 극도의 불신에서 발로된다. 삼국지에서 제갈공명이 주장한 것으로 전해지는 이 발상은 실제로도 일본에서 논의된 적이 있다고 하니 소설 속 표현처럼 역도들의 반란음모 정도로 치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자유로운 활동을 저해하는 것은 늘 전례에 따라 일을 처리하려는 관료들입니다. 그들은 비굴하고 독창성이 없어요.

애당초 성격이 그렇게 형성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게까지 심하게 말씀하실 것까지야.”

무라사메가 반론을 제기하려고 하자 히코네는 시니컬한 웃음을 지었다.

그건 그 사람들 잘못이 아닙니다. 관료들은 그렇게 되지 않을 없는 구조에 짓눌려 있을 뿐입니다. 전례에 따라 처리하는 방식은 새로운 방식을 가로막죠. 선배에게 칼날을 들이대지 않으면 낡은 것을 깨부술 순 없어요.

관료 시스템의 폐악입니다.” (p.467)

 

메이지 유신 시절 료마 같은 유신지사처럼 근대화 이후 새롭게 고개를 쳐들고 있는 변혁의 꿈은 이론의 도입으로만 우선 간만 보고 이야기는 끝난다. 본격적인 실천과 그 행보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향후가 궁금하기만 한데 <울트라 황금지구의>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출발과 지향점은 사쿠라노미야 시에서 시작되는 것, 그것이 가이도 다케루가 주장하는 "사쿠라노미야 월드"의 핵심사상인 듯하다. 비록 완결되지 못한 이론이지만 마치 정치·경제이론 입문서를 보는 것 같은 명쾌하고 장대한 이들의 사상은 가상이지만 충분히 흥미로워서 귀가 솔깃해지는 대목도 분명 있다.

 

그렇지만 가이도 다케루가 지향하는 의료입국은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일본이라는 외국의 현실에 대한 공감과 이해가 전무한 상태에서 전적으로 동조하기란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고 특히 작가가 의료인이라는 직업적 특성에서 바라보는 의료 개혁은 그것이 진정 환자들을 최우선적으로 배려한 정책인지 관료에게서 주도권을 쟁탈하기 위한 밥그릇 싸움에 불과한 이기주의인지는 판단하기는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의료계의 부정부패에도 과감히 메스를 들이대는 자기반성적 성찰도 있었으면 더 없이 공정했을 것 같다는 아쉬움도 있다 모든 책임을 한 쪽으로 전가하는 것 같은 뉘앙스가 그리 편안하게 다가오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런 만큼 의료현장에서 출발해 정치계로까지 스펙트럼을 확장한 가이도 다케루의 주장은 급진적이면서도 현실이 낳은 불합리함을 개혁하고자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한 방편으로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인데 그가 과연 공명정대한 이론가인지는 메디컬 엔터테인먼트에 대한 이해도를 넓히기 위해서라도 그의 나머지 작품들을 더 찾아 읽어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아직 가이도 다케루에 대한 호불호의 판단은 유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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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1 -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 : 착수 미생 1
윤태호 글.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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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추리/스릴러 소설만이 아니라 만화도 무척이나 좋아하는 장르인데 최근 웹툰에도 점차 관심을 늘리고 있다. 종이 책에서 e-book이라는 제본형식의 점유율이 변화하고 있는 이유는 판매량의 감소와 함께 원자재 상승도 무시할 수 없기도 할 것인데 빌려 본다는 인식이 더 강한 만화에서는 웹툰은 일반 장르소설에 비해 온라인이라는 공간이 더욱 선호될 수밖에 없는 구조이자 현실일 것 같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 지도 모른다. 인기 웹툰들은 한해에 수억 회의 조회 수를 기록할 정도고 연재된 작품은 책으로 묶어져 베스트셀러가 된다. 이 가운데 초대형 히트작들은 드라마, 영화나 연극 혹은 뮤지컬로 각색되면서 콘덴츠 고갈에 시달리는 대중문화계에 소중한 자양분을 구축한 것이다.

 

"슬램덩크"의 단행본을 모으던 시절은 더 이상 도래하지 않을 것이며 그 당시의 기쁨과 설레임은 과거 속의 추억일 뿐이다. 물론 지금도 만화방은 출입하고 있다. "더 파이팅", "열혈강호", "사상 최강의 제자 켄이치"같은 작품들이 현재 열렬히 애호하고 있는 만화들인데 웹툰으로 관심을 돌리자면 매주 금요일에 업데이트되는 "쌉니다 천리마마트"에 지금 언급하고자 하는 여기 소개하는 "미생"이  역시 애호하는 웹툰들이다.

 

윤태호 작가의 "미생"은 헌혈 상품으로 받았다. ABO Friends회원으로 가입하면서 정기적으로 헌혈에 참여하고 있는데 컬처 피크닉 시즌4 이벤트에 당첨되어 받고 보니 헌혈에 대한 보람은 물론이요, 작가와의 두 번째 만남에 대한 인연도 되새겨 보게된다. 영화 "이끼"를 먼저 본 후에 웹툰을 정 주행했는데 강우석 감독의 연출력이 구린 탓도 있었지만 확실히 원작이 더 강렬하고 후덜덜 했었다. 이후 작가와 웹툰에 대한 관심이 생기면서 다른 작품들도 찾아보고 싶다는 열망이 있던 차에 이번에 본 "미생"은 역시 명불허전이라는 느낌이 팍 팍 오더라.

 

인생은 거대한 바둑판

그 위에 던지는 오늘의 한수!

 

새벽같이 일어나 기보 책을 보며 혼자 바둑돌을 놓아보던 아이는 열한 살의 나이에 한국기원 연구생으로 들어가 프로기사를 꿈꾸지만 7년 만에 입단에 실패하고 ‘회사’라는 전혀 새로운 세계로 나서게 된다. 인생 제2막의 시작!!

검정고시 출신 고졸이 후견인의 백으로 취직하여(낙하산이란 말씀) 특기도 없지만 박 터지는 업무를 수행하며 숨 가쁘게 돌아가는 종합상사의 인턴사원으로, 그리고 계약직이지만 정식 사원이 되기 위해 경쟁이라는 전투를 치르고 있는 청년 장그래의 입사기를 담고 내고 있는 것이 이번 1권이다.

 

장그래는 한국기원 연구생 출신이라는 경력 말고는 가방끈도 짧고 일반직으로 들어가기에는 자격미달이라고 할 수 있다. 특기가 있다면 그에 합당한 보직에 적재적소 배치되겠지만 하이얀 백지상태의 사원은 모두에게 낙하산이란 딱지가 붙는다는 뼈아픈 지적은 장그래에게 처음의 호의는 의구심으로 차차 불편한 편견으로 이어질 수밖에는 필연의 과정들이다. 그 점을 모를 리 없는 장그래가 이제 더 이상 바둑처럼 실패하지 않겠노라고 자신에 허락된 불빛이 있다면 책임지겠다는 다짐 앞에서 응원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그를 본받으라며 무언의 독려를 보내고 싶다.

 

그가 가진 장점이라면 우유부단해 보일지도 모를 신중함과 통찰력, 그리고 바둑을 통해 배운 집중력이다. 장그래가 만난 상사들은 다행히도 합리적이고 부하직원에 대한 배려를 할 줄 한다. 욕 먹어가며 일을 배우면서 동료인턴들과 정식 입사를 놓고 경쟁을 벌이는 피 튀기는 입사 P·T 시험을 거치는 중이다. 세상은 훨씬 따뜻하고 인간적이고 친절하다고 오산했지만 곧 그것이 차갑고 냉정한 현실이 뒷통수를 치고 있음을 깨닫고 맘을 고쳐먹는다. 한석율 같은 캐릭이 그랬다.

 

자신은 회사에서 절대로 필요로 하는 유능한 인재라서 합격은 따 놓은 당상이라며 큰 소리치고 있지만 실제로는 동료들에게 폭탄 취급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분이다. 심지어 사장이랑 밥도 같이 먹은 사이라고 떠벌이는 한심한 존재이다. 팀 P·T 발표를 같이 할 파트너로서 모두가 만만한 장그래에게 접근해 환심을 사고 그와 한조가 되어 상대적으로 돋 보이고자하는 꿍꿍이가 한석율이라고 다를 바가 없다.

 

이런 녀석은 자신의 부족한 능력을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가로채서 자신의 것으로 보충해 살아남고자 하는 더러운 기생충 같은 놈이다. 장그래가 만든 PT를 보고 다시 하라고 말한 이유는 그런 불순한 의도가 숨어있기에 장그래는 바둑의 정석대로 선수를 치기로 한다. 어찌 보면 모순이라고 할 수 있지만 경쟁해야 할 상대가 어떡하든 내게 배신을 때리고자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믿는다. 상대의 행보가 수 읽기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면 소탐대실의 우를 범하는 대신 균형을 유지하며 자신의 영역을 점차 키운다. 조화를 중시하여 순리대로 흘러가며 앞날을 대비하되 발톱을 숨기는 것, 바둑에서 배운 행마를 가져가는 방식을 장그래는 선택한다.

 

"그리고... 너 몇 살이냐?"

"네...?"

"말 안 할래?(이 좀만이가...)"

 

- 처음으로 제 목소리를 낸 장그래의 반격. 멋지다. -

 

그래서 모두가 뒤에서 비웃고 쑥덕거리는 누클리어 밤 조화가 어떠한 산물로 빛을 발할 지, 장그래는 이러한 악조건을 딛고 아직 살아있지 못한 자에서 살아남은 자 될 것인지(당연히 되겠지만...) 차후 행보가 궁금해진다. 기대가 크다. 그리하여 바둑과 직장생활의 교집합이라는 이색설정을 통해 기대했던 것 이상의 재미와 교훈을 전달하는 "미생"은 현존 최고의 웹툰임에는 분명하다. 인생이라는 백지를 그려낼 장그래!!!  여성인턴 안영이도 속을 알 수 없지만 은근 매력있는 인물중 한 명인데 설마 러브라인은 없겠지. 어쨌거나 인터넷에서 계속 정주행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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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 라이트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9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9
마이클 코넬리 지음, 이창식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어느 순간에도 나의 사명은 간섭받지 않는다.

 형사이든 아니든 이 세상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죽은 자의 편에 서는 것이다."

 

그에겐 더 이상 총도, 배지도, 뒤를 받쳐줄 동료도 존재하지 않는다.

4년 전 미해결 사건으로 남은 살인 사건을 뒤짚어가는

탐정 해리 보슈의 첫 번째 이야기

 

가끔씩 드는 생각이지만 크라임 소설의 마스터 마이클 코넬리"해리 보슈" 시리즈를 아직도 읽어본 적 없거나 잘 모르겠다는 독자 층들을 보면 어떻게 이런 쿨한 작가를 외면할 수 있을까라며, 속으로 비난 아닌 비난을 할 때가 있다. 특정작가에 대한 고유의 취향은 개인의 선택이지 그 누구도 강요할 일이 아님을 너무나도 잘 알면서도 마이클 코넬리라면, 해리 보슈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의 반사신경을 나타내고 있으니 아무래도 단단히 빠져있는 듯하다. 그런 마음에도 불구하고 작년 "탄환의 심판" 이후로 해리 보슈는 구경하기 힘들어졌고 그 텀이 상당히 길어져서 애태우더니 결국에는 새색시 마냥 수줍게 문을 열고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아 ! 어찌나 그리웠고 반갑던지... 그 설레이는 맘을 무엇으로 표현해야 할까? 그런 흥분들을 점차 가라 앉혀본다. 해리 보슈 시리즈로만 따진다면 아홉번째에 해당되며 전작 "유골의 도시" 이후 해리 보슈가 경찰을 그만두고 독자적인 수사활동을 벌이는 시기를 담고있는 이번 이야기는 조직이라는 울타리 밖에서 맴도는 그가 어딘가 연약해 보이면서 쉽지않은 결단을 내리는 강단 또한 확인할 수 있다. 부러질지언정 결코 꺾이지 않겠노라는....

 

들라크루아 가의 한 어린 소년의 유골이 발견된 비극적 사건을 해결하면서 무고한 용의자를 희생양 삼아 공적에 이용하려는 무능한 경찰조직에 대해 한계를 느끼고 악에 대한 승산없는 승부 속에서 자신의 소신과 양심에 떳떳하고 싶어했던 해리 보슈는 출세라는 동아줄을 잡지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악을 처단하기로 결심한다. 그간 자신이 수집해둔 과거 미결 사건들 중에서 해리 보슈는 4년 전 발생했던 영화사 여직원 살인사건을 다시 수사하기로 하는데 강도에게 성폭행 당해 살인당한 것처럼 보였던 그 사건은 얼마 후 마피아의 검은 돈을 훔친 여성도둑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영화촬영 도중 일어난 현금강탈 사건과 연계된 것으로 의혹을 받았던 적이 있다.

 

가짜 돈 대신 리얼함을 극대화시키고 싶었던 감독이 진짜 현금 2백만 달러를 은행에서 빌려 촬영 후 반납하기로 약정되어 있었는데 갑자기 강도단이 들이닥쳐 총격전 끝에 돈을 들고 달아났던 것이다. 두 사건의 고리를 찾아보던 해리 보슈에게 동료경찰들과 FBI까지 그의 수사를 방해하고 손을 뗄 것을 강요한다. 탄압이라는 압박.....

 

30년 가까운 세월을 국가 조직 안에서 살면서 외부 세계와의 고립을 심화시켜왔고 '우리와 그들'이라는 윤리관을 발전시켰다.

정의 실현 광신도 집단이었던 나는 거기서 잘려나와 바깥 세계의

일원이 되었다.

이젠 더 이상 '우리'의 일원이 아니라 '그들'의 일원인 것이다. (P.30)

 

 

 

 

경찰배지를 반납한 해리 보슈에게 LA경찰의 일원이 아니라는 현실은 공권력에 기대지 못하게 된 한 남자의 험난한 분투가 생각만큼 쉽지않은 일임을 깨닫게한다. 관용차량도 제공받을 수도 없고 수사를 위한 주요정보에 접근하는 일도 사실상 불가능하니 땅 짚고 헤엄치기 식이란 이런 상황일 것이다. 확실히 어딘가에 소속되지 못한 자가 겪게되는 정신적 고립상황은 해리 보슈와 옛 동료들과의 관계에서 잘 드러난다. 오랫만에 재회하게 된 후배 키즈민 라이더의 등장은 반가운 일이었지만 강력반 파트너라는 관계와 진로방향이 해리 보슈의 독단으로 깨어진 것에 분노를 표시하는 그녀에게서 영리하고 똑 부러져서 호감이었던 과거 속의 참한 이미지가 사라져버리고 이해득실에 집착하게 된 세속적인 면이 두드러진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너무나도 미약한 실날로 지탱되고 이어져있음을 되새겨보는 게 그리 놀랄 말한 일은 아닌가보다. 그렇게 변하는 게 사람, 사람이다. 그래서 안타깝다. 누구보다도 환상의 복식조로 거듭날 것으로 기대했던 해리 보슈키즈민 라이더의 날선 관계가 다시 원만해졌으면 좋겠는데... 당장은 아니더라도 해리 보슈의 심경변화와 그녀에 대한 진심어린 설득만 있다면 가능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돌아 선 키즈민 라이더의 마음을 온전히 되돌리는 건 순전히 해리 보슈의 몫이니까.

 

나는 단발이론의 신봉자다.

우리는 누구나 사랑에 빠져 여러 번의 정사를 가질 수도 있지만,

자기 이름이 새겨진 사랑의 총알에 피격될 기회는 딱 한 번 뿐이다.

이 총알에 맞은 행운아는 영원히 아물지 않는 영광의 상처를

누린다는 것.

이것이 소위 단발이론이다. (P.144)

 

"트렁크 뮤직""보이드 문"이 에피소드처럼 은근슬쩍 소개되는 소설 속 사건은 애초에 인간의 헛된 망상에서 비롯된 예견된 위협이었고 돈을 두고 저지르는 배신의 난무와 한순간에 행복이라는 열차에서 굴러 떨어져야만 했던 안타까운 죽음도 있는가하면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지 못한 채 타인을 도구로 이용만하려는 편협된 이기심까지, 모든 것이 빛이 없는 동굴 속이다. 그렇게 절망이라는 어두운 시궁창을 허우적거리기만 하다 끝에 가서는 달관하고 자조하게 되리란 것이다.

 

해리 보슈에게는 이러한 사건들이 언제나 그를 기진맥진하게 만들면서 상처와 회한만을 남게 할 뿐이었다. 이 세상이 잃어버린 빛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제목이 의미하는 "로스트 라이트"이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그래서 해리 보슈는 언제나 외롭고 고독했다. 3인칭 시점이 아니라 1인칭 시점으로 그려지는 해리 보슈를 제일 힘들게하는 건 언제나 전처 엘레노어 위시와의 단절된 관계였고 그를 끊임없이 시험하게 만든다.

 

 

하지만 다행히도 신은 그동안 그에게 내린 처사가 가혹했었다는 후회가 있었을까? 이전에도 스쳐간 여자들이 있었지만 사랑이라는 총알 한 방이 깊숙이 관통한 해리 보슈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한 축복이자 선물이 마지막을 후끈한 감동으로 달군다. 어둠 속 동굴에서 분노의 감정을 밀어내고 따스한 물결로 상처를 씻어내고 그가 잃어버렸던 빛으로 되돌아 온 것이다. 그 순간 어느 길을 택해야할지 알았고, 마음 속에 다함이 없다는 걸 알았다고 고백하는데 얼마만에 찾아 온 행복이련가, 악마가 시샘하여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앗아가지나 말아야 할텐데.... 지금까지 해리 보슈의 여정을 빠짐없이 따라왔던 독자라면 정말 잊지못할 엔딩이 될 것이다.

 

그는 미소짓고 마침내 구원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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