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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잠, 봄꿈
한승원 지음 / 비채 / 2013년 4월
평점 :

역사는 흔히 수레바퀴 같아서 흥했다 망했다 하는 흥망성쇠를 반복하는 일련의 과정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미래를 준비하지 못한 나라는 망국의 길을 필연적으로 걸었고 미래를 준비한 나라는 부국강국의 길을 역시 필연적으로 걷게 된다. 이것은 수천 년 인류역사를 통해 확인한 진리이자 교훈이다. 그렇다면 한국 근대사에 있어 동학혁명은 어떤 위치에 놓여있는 걸까? 올해로 혁명 발발 119주년을 맞이하는 현 시점에서 말이다.
나 자신도 간과했던 그리고 우리들도 결코 그 의의에 스스로 빛을 가렸던 동학혁명은 의외로 세계사에 있어 보다 큰 의의와 가치가 부여되고 있음을 뒤늦게 알 수 있다. 19세기 중 일어난 세계 민중혁명 중 최대 규모이고 프랑스 시민혁명, 독일 농민혁명, 중국 태평천국의 난과 함께 세계 4대 근대시민혁명의 하나로 당당히 꼽힌다는 역사적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 정도였던가? 그래서 동학혁명이 내건 '보국안민'과 '제폭구민' 같은 기치를 필두로 외세 배격과 신분제도 철폐를 주창하면서 우리나라 근대 민주주의의 출발을 알렸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우리는 동학혁명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참담한 실패라는 결과를 낳았는지 이미 역사시간에 배웠으니 이 소설에서 정말 그려내고 싶었던 시간적 배경은 봉기과정도 우금치 전투에서의 패전도 아니요, 탄압 속에서 전국에 퍼져 나갔던 동학 이념을 구체적으로 설파하고 있지도 않는다. 단지 패전이라는 참담한 겨울잠 이후 얼어붙은 이 땅에 봄이 찾아들기를 갈망했던 녹두장군 전봉준의 일대기를 봄꿈이라는 상징성을 빌어 그려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은 쓰리고 눈물이 나려 한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녹두장군을 그리는 노래도 참 애달프지만 왜 녹두장군이라고 불렸는지도 모르고 있었다니 새삼 부끄러운 역사인식 앞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콩 중에서도 작은 녹두는 체구가 남달리 작지만 다부졌던 전봉준을 일컫는 별칭이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이 노래를 부르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다니 약소국의 설움이 아니었겠는가? 그러한 배경을 뒤로 한 채, 녹두장군 전봉준이 우금치 전투의 패전으로 거사에 실패하고 부하 김경천의 밀고로 일본군에 체포되어 한양까지 압송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때까지의 마지막 119일에 대한 고난의 기록이 여기 있다.
당시 조선인으로 태어났지만 일본인으로 귀화해 이토 히로부미의 양자가 되어 일본인보다 더 뼛속 깊이 일본인이 되어버린 이토 겐지의 회유는 그야말로 마지막까지 귓속을 간질이고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깊고 질었다. 이미 저물어가는 동방의 나라 조선의 백성으로 살다 죽을 것인가? 새로운 개화문물을 받아들여 강국으로 새로이 거듭나고 있는 일본을 제2의 모국으로 감아 이 더러운 세상을 갈아엎는 길을 택할 것인가?

아직 죽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다. 전봉준은 마음이 흔들린다. 그러면서 한양으로 압송되는 와중에 일본군들이 수시로 부상당한 가마꾼들과 백성들을 기밀유지를 빌미로 무참히 학살하는 만행을 목격할 수밖에 없는 암담한 현실에 좌절하고 치를 떨며 그들에 하늘의 천벌이 내리기를 소망한다. 그러면서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을 내려야한다. 이토 겐지의 말 대로 이토 히로부미의 양자로 입적되어 또 다른 방식으로 구국운동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 자신의 피를 뿌려 조선민중들에게 화약심지에 불을 붙일 도화선이 될 수만 있다면 기꺼이 한 목숨을 바치고자 하는 결심은 더없이 숭고하다. 무엇을 주저하랴? 늦으면 늦을수록 후회만 있을 뿐이다. 그것이 비록 한낱 봄꿈일지라도
밥이 하늘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모두 밥을 만들려고 산다. 밥을 쟁취하려고 싸운다. 더러운 밥이 있고, 깨끗한 밥이 있고, 떳떳한 밥이 있고, 부끄러운 밥이 있다. 내가 일어선 것, 고부 사람들이 관아로 몰려가 사또에게 대든 것, 아버지가 사람들의 소두로서 항거하다가 곤장을 맞고 장독으로 죽은 것, 호남 일대의 사람들이 죽창을 들고 일어선 것이 다 이 밥 때문이었다. 일본 사람이 조선 땅에 들어온 것도 조선 사람의 밥을 빼앗아 가려고 온 것이다. 나는 죽을 때 죽더라도, 그 슬픈 밥에 대하여 모두 말하고 나서 죽어야 한다.(본문 중에서)
그렇다. 중요한 것은 밥이다. 백성들에게는 먹고 사는 문제만큼 중요한 건 없다.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든 민씨 일파가 정권을 잡든, 탐관오리가 부정부패를 저지르든, 열강이 조선의 국권을 집어삼키든, 그런 거창한 대의명분보다 굶지 않고 배불리 먹고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더 절실했다. 그것을 위정자들은 허울좋은 이념을 앞세워 눈 가리고 아웅하고자 할 뿐이다. 누가 알아주기만 바랄 세월의 넉넉함이 없었기에 분기탱천했다. 전봉준의 삶은 그렇게 불꽃같이 피어올랐다가 사그라들었다. 한승원 작가가 전봉준의 고뇌를 따라가는 과정들은 그래서 고통스럽다. 결말을 알지만 그의 목숨을 구명하고 싶은 안타까운 열망을 한 폭의 수묵화처럼 구슬프게 그려낸다. 그 빼어난 서정성을 무엇에 비유할까?
역사는 굴러가는 수레바퀴라고 서두에서도 밝힌 바 있다. 이 뜻 깊은 역사적 사실에 대해 아직도 기념일로 제정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잊지 않기 위해서도 역사에 대한 오판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한시바삐 기념일이 제정되어 현재를 바삐 살아가느라 옛 일을 돌아다 볼 겨를이 없는 우리 후손들에게 교육의 장이 되었으면 한다. 그런 차원에서 한승원 작가의 "여름잠, 봄꿈"은 한국인이라면 반드시 읽어야할 필독서가 될 것이다. 아니 되었으면 한다. 전기물로 받아들이기에 앞서 한 인물의 삶을 흐드러진 봄내음으로 담아내며 문학성이라는 빈자리를 지켜내고 있는 탁월한 소설이기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