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미상, 미스터리 작가가 읽는 책 - 상 미쓰다 신조 작가 시리즈 2
미쓰다 신조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수수께끼의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추리하는 사람이 시점을 어디에 놓느냐애 따라, 어떤 정보를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해석은 천차만별로 바뀌어. 따라서 내가 밝혀낸 진상은 어디까지나 어떤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해석에 불과해. 아무 증명도 되지 않는다고." (P.341)

 

'미쓰다 신조' '작가 시리즈' 두 번째 작품 "작자미상, 미스터리 작가가 읽는 책"을 읽었다. 올해 들어 세 번째로 읽게 되는 '미쓰다 신조' 작품이니 내게는 확실히 대세 중의 대세이며 그 흐름은 하반기에도 주욱 이어질 것 같다. 앞서 방랑 환상소설가 '도조 겐야' 시리즈랑 현대물을 읽었는데 작가 본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가 시리즈' 이번이 처음이다.

 

'미쓰다 신조' 친구 '아스카 신이치로' 나라 현 안라 시의 안라 초라는 마을에 들렀다가 '후루혼도'라는 헌 책방에서 "미궁초자"라는 동인지를 구입하게 된다. 그 후에 '미쓰다 신조' '아스카 신이치로' "미궁초자"를 함께 읽으면서 기괴한 체험을 하게 되는데 기억의 봉인을 풀기라도 하 듯 첫 번째 수록작 "안개 저택"을 읽은 후 엄청나게 짙은 안개의 습격을 받게 된 것이다. 안개는 오로지 두 사람만 겪게 되는 초자연적 현상이었고 소설 속 살인사건에 얽힌 수수께끼를 해결하자 이제야 안개는 종적을 감춘다. 이건 무슨 현상이지? 두 사람이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때 두 번째 수록작 "자식귀 유래"를 읽으니 이번에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주위를 맴도는데....

 

이제 두 사람은 알게 된다. "미궁초자"의 수록작을 읽게 되면 어떤 괴이 현상이 발생하고 수록작의 수수께끼를 해결하지 못하면 둘의 생명은 장담하지 못하게 된다는 점을... 이미 먼저 이 정체모를 동인지를 입수해서 읽었던 사람들 모두 알 수 없는 방식으로 행방불명되었단 사실에 더욱 두려움이 커지면서 살아남기 위해서 목숨 건 독서가 논스톱으로 진행되는데, 마지막에 도달할 때까지 멈출 수 없다. 괴이 현상의 근원은 무엇이며 동인지를 발간한 '미궁사'란 어떤 곳이며. 일곱 작품의 작가들은 당췌 누구란 말인가?

 

제1화 "안개 저택"이 죽은 소녀의 정체성 문제와 착시로 추정되는 괴이를 '도조 겐야'식으로 풀어내었다면 제2화 "자식귀 유래"부터는 난이도와 호러가 본격적으로 상승되는 구조로 진행되는데 마지막 단편까지 읽고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다면 두 사람은 실종될 수도 있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또 다른 독자가 될지도 모를 시점의 변화 가능성이 공존한다는 점이 신선한 발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작품들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갈 때 마다 독자들은 또 하나의 사실을 눈치 채게 된다. 탐정과 조수의 관계처럼 수수께끼의 단서를 찾아 실마리를 풀어내는 일은 전적으로 '아스카 신이치로' 주도하에 진행되고 '미쓰다 신조' 괴이 현상을 직접 체험하거나 '아스카 신이치로' 추리과정에 독자의 의문사항을 개입시켜서 논리적 모순의 해결을 돕는 보조적 역할로 각각 분담되고 있다.

 

또한 사건현장에 직접 출두하여 단서를 포착하는 방식이 아니라 오로지 동인지라는 기록의 근거에서 추론해야만 하기에 이 모든 것이 진실인지 허구인지 그 경계마저 불명확하다. 인간의 합리적 이성에 의한 논리적 해결은 어느 단계까지는 가능하지만 초자연적 현상까지 완벽하게 설명되는 것은 아니란 것이다. 그러한 설정은 '미쓰다 신조' 작품들을 읽을 때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개인적 호불호가 발생한다고 생각된다.

 

또한 '미쓰다 신조' '아스카 신이치로' 각 수록작들의 수수께끼를 풀어야만 하는 이유는 직업적 소명도 아니요, 지적 호기심 충족은 더욱 더 해당되지 않으며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해결해야만 하는 숙제 같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점에서 "제5화 슈자쿠의 괴물"을 가장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옛날에 한 여행자가 산을 넘으려고 언덕을 오르고 있는데 문득 한기가 들어 돌아보니 한 남자가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따라오고 있었다. 말을 시켜도 대꾸하지 않자 그냥 무시한 채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데 어디선가 "어이"라고 부르는 소리가 남자의 뒤에서 들려오고 있지만 그 남자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으로 나아갈 때 마다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참다못한 여행자가 "누구냐?"고 외쳤더니 뒤돌아선 남자의 뒤통수가 괴물로 변해 이 남자를 삼켜버렸다는 게 "슈자쿠의 괴물" 이야기이다.

 

여기서 재밌는 건 '미쓰다 신조'식 호러에는 혼자 산길을 걸으면 뒤에서 누군가가 "어이"하고 부르며 쫓아온다는 방식이 자주 차용된다는 점이다. 그것이 "산마"이거나 "슈자쿠의 괴물"일 때도 있지만 익숙하고 반복적인 설정임에도 항상 그 점이 등골을 오싹하게 할 만큼의 기묘한 공포가 배어있다. 그리고 좋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번에도 나오셨군요."라고 말이다. 게다가 이 수록작은 슬래셔 무비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스타일리시하다. 우리나라로 치면 "분신사바"에 해당되는 "곳쿠리상"을 불러내는 의식 또한 무척 긴장감 있으면서 즐거운 게임(?) 한 판을 구경하는 재미까지 모든 것이 신선했다.

 

"곳쿠라상, Y를 죽인 사람은 누구입니까?"

...... 고요한 거실에.

"너야........."

나직한 목소리가 흘렀다. (P.49)

 

차용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열 꼬마 인형 미스터리'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애거서 크리스티'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같이 기본적으로 주요 등장인물들이 모두 살해당한다는 플롯의 고전도 해당된다. 그래서 "슈자쿠의 괴물"에 대한 대입은 물론이거니와, 다수의 인물이 등장했다면 각자가 사건에 대해 독자적 거리를 두는 일이 가능했겠지만 한정된 두 사람의 등장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싫든 좋든 "미궁초자"가 펼쳐놓은 덫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수수께끼를 풀어낼 수밖에 없는 운명적 상황이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새삼 고전은 영원불명하고 시대를 초월해 통용되기에 무척 인상 깊은 설정이다.

 

이제 '미쓰다 신조'의 추리소설에서 호러의 역할은 싱거운 음식의 간을 맞춰주는 조미료나 향신료 같은 역할을 충실히 재현하고 있어 그 맛에 점차 중독되는 과정에 놓여있다. 그러한 요소들이 정신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알 길 없으나 들어가 있지 않으면 얼큰한 맛이 살지 않는다. 오죽하면 역자는 후기에서 양화대교에 만난 괴이 현상을 언급하겠는가? 그것이 진실이든 허구이든 아무런 상관은 없다. 남 걱정할 때가 아니라 '미쓰다 신조' 수수께끼를 제대로 풀지 못했으니 그 괴이가 나 자신을 찾아올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그것의 습격이 계속 기다려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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