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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 콜드 ㅣ 리졸리 & 아일스 시리즈 8
테스 게리첸 지음,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누구에게나 첫인상은 중요하다. 자꾸 만나보면 불퉁한 인상과는 달리 진국인 사람도 있겠지만 그래도 첫인상은 길게 간다. 스릴러에서도 그러하다. 게다가 시리즈물이라면 데뷔작에서 어떠한 인상을 받느냐에 따라 그 시리즈를 계속 탐독할 것이냐 첫 만남이 마지막이 될 것이냐 로 판가름 나게 된다. 형사 제인 리졸리 & 법의관 마우라 아일스 시리즈는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굉장히 불편한 인상을 남겼었다. 독신여성만을 골라 배를 가르고 자궁을 꺼내는 살인마 이야기 "외과의사"는 시종일관 욕구불만에 가득 찬 컴플렉스 덩어리 형사 제인 리졸리의 감정적 과잉에 지나치게 할애하는 바람에 허술한 스토리로 폭망했던 졸작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그랬다는 말이다.
너무 실망이 컸던 나머지 이 시리즈는 두 번 다시 읽을 일이 없을 줄만 알았는데 어떤 계기인지 다시 재회했다. 1편에서 무려 6편을 건너뛴 8편으로 읽게 되었는데 공백기가 컸던 탓인지 그 사이 많은 변화가 있었다. 제인 리졸리는 평생 독신으로 살 것 같더니 짚신도 제 이 있다고 결혼해서 딸도 두고 있는데 거친 야생마처럼 다루기 힘든 존재였던 제인 리졸리는 모성애의 영향인지 상당히 부드럽고 나긋나긋(?)해진 것 같다. 세상에 1편에서 봤던 그 시한폭탄이 이렇게 변하다니. 결혼소식은 들었다만 가정을 꾸린 일이 독신여성에게 가져다 준 변화는 실로 놀랍기 그지없다. 마법 같은 현실일세.
그래도 이번 8편의 주인공은 단연 마우라 아일스이다. 제인 리졸리와 투톱을 이루어 사건을 해결하기 보다는 순전히 마우라 아일스의 개인적 고난과 위기상황들로 채워진다. 제인 리졸리는 원군일 뿐. 그러고 보니 박사님 첨 뵙겠습니다. 1편에 안 나오셔서 이번이 첫 등장이로군요. 후후. 자! 줄거리는 이러하다. 보스턴 경찰국 법의관 마우라 아일스 박사는 의학 컨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 와이오밍에 도착한다. 거기서 그녀는 오랜만에 대학동창인 더그 캄리를 만나게 되고 그의 일행들과 함께 스키여행을 떠나게 된다. 사실 계획에도 없는 일정이었지만 그렇게 동참하기로 결심한데는 남자친구인 대니얼 브로피와의 소원해진 관계에서 기인한 기분전환 차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남자친구가 목회자라니 그것 참 범상치 않은 만남을 유지하고 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사정을 알 리 없으니 두 사람이 연인이 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지금은 그 점이 중요하지 않으니 일단 패스.
추억 가득한 즐거운 여행이 될 뻔 했지만 예측할 수 없는 돌발 변수 발생!!! 엄청난 폭설과 눈보라 속에서 그들의 차는 도로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면서 도보로 산을 걸어 어느 마을에 도착한다. 그런데 이 마을은 어딘가 이상하다. 인적도 끊기고 분명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은 있는데... 개의 사체, 피 웅덩이, 집집마다 걸려 있는 한 남자의 초상화까지. 모두 어디로 사라진 걸까? 의심스럽지만 악천후 속에 중상자가 발생하고 구조는 기대하기 어려운 고립된 마을. 한편 보스턴 경찰국의 제인 리졸리 형사는 대니얼 브로피로부터 마우라 아일스가 컨퍼런스에 참석하러 갔다가 연락두절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남편과 함께 마우라 아일스를 찾아 그 곳으로 떠난다.
분명 내일이면 이곳을 탈출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져 보지만 고립된 마을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일들은 공포스럽게 자꾸 뒤를 돌아보게 만든다. 누군가는 죽고, 또는 실종되고, 또는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그 무언가의 실체에 시시각각 아드레날린이 솟구친다. 뼛속 깊이 파고드는 냉기 속에 긴장감이 넘쳐흐른다. 그리고 누군가를 만나게 되고 또 일단의 무리들이 필사적으로 추적해온다. 이들이 결코 알아서는 안 될 비밀을 목격했다는 이유로. 살려두어선 안 된다고.
그리고 인적이 끊겼던 마을에 숨겨진 미스터리가 조금씩 드러나는데 가히 경악할 만한 진실이 숨겨져 있다. 인간은 때때로 이성보다 광기가 우선시 될 때가 있고 그 광기가 집단을 지배하면 어리석은 인간들은 현명한 판단 대신 통제와 복종이라는 결정에 아무 이의 없이 동참하게 된다. 그 것을 조종하는 자가 종교라는 간판을 내걸었다면 그는 선지가가 되고 신도들은 불 속으로 뛰어들 준비가 언제든지 되어 있다. 설사 자신의 가족이 희생되는 일이 있더라도 전혀 개의치 않고서. 여기서 인간성은 말살되고 눈 뜬 장님들은 인륜을 파괴하고 비극은 시작된다는 것에서 인간이란 어쩌면 이다지도 무지몽매한 존재들인지 섬뜩함에 치를 떨게 한다. 인간은 탐욕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추악한 욕망에는 또 다른 추악함이 구렁이처럼 도사리고 있는데 최악의 경우로 몰아가는 극도의 스릴과 공포는 한 꺼풀씩 벗길 때 마다 오싹한 전율을 선사한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논스톱으로 달리면서 이야기는 폭주하고 순간의 선택이 우리들을 뜻하지 않은 상황으로 몰고 가는데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인생이란 아이러니가 충격적이고 소름끼친다. 마우라 아일스는 그래서 수시로 절망하고 후회한다. 그 때 그런 선택만 안 했으면 지금은 각자의 삶으로 돌아갔을 텐데 라고 말이다. 결코 쉽지 않고 만만치 않은 내일을 우리는 준비한다. 기대가 공포로 변하는 순간, 우리네 인생이 악몽으로 변하면서 아수라장이 되는 건 잠깐이란 사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절망이 희망이 될 계기가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사실, 이 모든 것이 옵션이라는 삶이다. 결말은 훈훈했다.
그렇다면 요즘같이 날이 푹푹 찔 것 같은 밤에 잠도 안 오고 TV 를 켜도 재미를 못 느낀다면 가차 없이 이 책을 펼쳐들어보라. 한 겨울의 냉기가 당신의 무더위를 정면 강타할 것이니 이만한 스릴러라면 오싹함을 느낄 정도로 충분히 짜릿하지 않을까? 그래서 자신 있게 강추한다. 물론 숨 막히는 속도감은 보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