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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관의 살인 ㅣ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5년 8월
평점 :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계기는 <관 시리즈> 전 권 인증 이벤트였던 걸로 기억한다. 이전에도 "신본격 추리"의 기수중 한 명으로 아야츠지 유키토의 명성은 익히 들어 왔으나 당시에는 읽어보고 싶다는 간절함은 들지 않았던 것이 시리즈 전 권 인증샷 응모 열기를 확인하고 나니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될, 지금이 적기라는 신호에 올초 <기면관의 살인>으로 드디어 <관 시리즈>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우선 신간으로 만나보고 맘에 들면 나머지 시리즈도 차근차근 찾아 읽어보자는 계획이었다. 그런 기대감을 안고 읽은 <기면관의 살인>은 나카무라 세이지의 기이한 건축물에서 벌어지는 악몽같은 상황들에 눈을 뗄 수 없을 정도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고 그런 호감도를 바탕으로 이 시리즈의 실질적인 최고작이라고 인정받고 있는 <시계관의 살인>을 읽었다.
대츠노시마에서 벌어진 <십각관의 살인> 이후, 가와미나미는 가마쿠라에 있는 "시계관"이라는 저택에서 소녀의 원혼이 출몰한다는 소문을 듣고 정체를 파악하고자 월간지 "카오스"의 직원들과 W 대학 초자연 현상 연구회 회원들, 초능력자 고묘지 마코토와 함께 시계관으로 초대받아 들어간다. 우연의 일치인지 "십각관"의 악몽이 잊혀지기도 전에 "시계관" 역시 나카무라 세이지가 지은 건축물이었던 것. 시계바늘이 없는 시계탑, 구관과 신관으로 구성된 시계관, 죽은 소녀의 원혼과 교신하는 교령회가 열릴 장소는 그 중에서도 구관이다. 108개에 달하는 많은 시계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시계의 시간대를 상징하는 12개의 방과 시계추의 모양같은 "진자의 방"이라는 특이한 방을 갖춘 곳이다. 그런데 교령회가 종료된 후, 일행 중 실종자가 발생하고 참관자들은 차례 차례 시체로 발견된다.
<시계관의 살인>을 읽고난 소감은 <기면관의 살인>보다는 몰입도 면이나 트릭, 반전, 그리고 뒷 이야기까지 모든 면에서 더 재미있었다는 확연한 느낌이다. 조금 미적지근하게 사건이 중단되고 만 것 같았던 <기면관의 살인>과는 달리 <시계관의 살인>은 일단 살인이 최대한 발생 가능한 부분까지 진행된다는 점에서 두터운 페이지를 의식하지 못할 만큼의 충분한 즐거움을 준다. 그것은 나카무라 세이지가 각처에 지어놓은 기괴한 건축물들이 구조자체도 놀랍고도 기이하지만 그 건축물들의 설계를 의뢰한 소유주들이 하나같이 숨겨진 사연들이 많고 병적인 집착이랄까 소유욕 또는 망상 같은 증상을 앓고 있던 인물들인지라 그들의 내면 속에 잠재되어 있는 욕망을 일정부분 해소하고 분출하는 무대같은 개념을 건축물들에 심어 놓았기 때문이다.
항상 피비린내는 사건이 벌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들은 악몽이 되어 실현되니 보이지 않는 원념들이 운명처럼 덫을 치고 참관자들을 사육하고 있는 가축처럼 영문도 모른 채 도살장에 끌고 갈 준비를 하나보다. 애시당초 발을 들여 놓지 말았어야 했거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카무라 세이지의 건축물들에 기묘한 끌림을 느끼고 있는 시시야 가토미만큼은 이 초대장은 거부할 길 없는 강렬한 유혹이다. 이번 <시계관의 살인>의 등장인물들에 담긴 사연들은 인간적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드는 면이 많은데 시계관의 선대 주인 고가 정계사 회장 고가 미치노리는 시계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괴인같으면서도 가족에 대한 애정만큼은 다른 가장들과 결코 다를 바가 없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자가 누리지 못한 가정이라는 행복을 물리적으로, 인위적으로 연장하고 싶어하는 욕망에 왠지 이 남자는 무척 가슴 따뜻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내와 딸의 죽음에 얽힌 사연들은 그래서 동정과 연민들이 들지만 반전이라는 키워드를 쥐고 있는 은밀한 카드이기도 하다. 살인마는 살인동기를 추측컨대 두 사람으로 압축, 추정되지만 살인동기의 발단으로 알고 있는 일련의 사고는 세간의 이목을 호도할 뻔한 절묘한 눈가림으로 이용되면서 범인의 정체는 예상을 보기좋게 빗나간다.
살인수법에 대한 트릭은 또 어떠한가? <관 시리즈>를 두 번째 만나면서 이제는 이 시리즈에서 패턴화된 트릭을 어렵지않게 눈치채게 된다. 논리가 아닌 어떠한 물리적 안배는 독자와의 공정한 두뇌게임이 아닌 변칙플레이라는 깜짝 카드가 되면서 혹자에 따라 실망과 반발, 나머지 시리즈의 전개에 대한 예측가능이라는 자충수가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요인들을 감안하더라도 충분히 즐기기엔 문제가 없겠다.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적재적소에서 익숙한 패턴을 어떤 매뉴얼로 활용했는지에만 관심을 두면 되니까. 또한 예상했던 인물이 아닌 다른 사람이 범인이었다는, 범인의 의외성은 당연히 또 다른 트릭에 기반을 두고 있다. 모를 때는 갑갑하지만 알고보면 기발하면서도 시계관의 특성을 감한하면 충분히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이라 감탄스럽다.
어쩌면 아무 일도 아닌, 염두에 둘 필요도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항상 일정한 속도로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 되었고 인간의 하루는 그것의 엄격한 지배를 받게 된다. 인간은 이 메커니즘을 측정하고 지배하고 있단 생각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 반대이다. 오히려 그것의 활용방식이 인간의 정신과 육신을 모두 구속하고 지배하고 있다는, 이 트릭이야말로 착각을 역이용하고 있는 멋진 시도다. 그리고 마지막에 고가 회장이 시계관에 배치해둔 안배의 실현과정들은 여타 일본 추리소설에서는 좀처럼 보기힘든 스펙터클한 스케일이 장관이라 눈 앞에서 그 장면들이 웅장하게 펼쳐지는 것 같은 환상에 사로잡힌다. 모든 면에서 추리소설을 읽는 기쁨을 배가시키는 각종 시도와 장치들은 충분하다. 쓸만하다. 사건을 직접 해결하기 보다는 인물의 사연을 뒤따라가면서 사건의 트릭에 치중하는 시시야 가토미식 추리는 지적인 게임을 선호하는 독자들을 최적으로 만족시키는 야심찬 시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