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을 정원에 남겨두었다.
그냥 동성애였다면 고민 없이 그들 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불륜이다. 조심스럽게 예측해보는데, 이시진 씨는 사회의 눈초리를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보다는 사회적 모습을 따르는데 집중했을 것이다. 그러다 살아갈수록 사회가 규정한 모든 것들이 부질없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럼 이 가정의 파탄은 사회의 책임일까, 개인의 책임일까. 나는 사회80 개인 20 정도에 비중을 두고 싶다. 팍스 제도의 도입이 절실히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그들은 정원에 남겨진 게 아니라 정원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다른 세계에서도
생각을 많이 남긴 소설이다. 낙태를 하나의 결정이 아닌 여러 고정관념을 씌워 바라본다. 결정은 사람마다 다른 게 당연하다. 원인도 결과도 가지각색이고 아무도 거기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낙태에는 유독 정해진 원인과 결과가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여러 선택은 다른 세계에서 다채롭게 받아들여진다. 우리 사회가 임신 중단을 그렇게 받아들이는 날이 오길 바란다.
라이파이
살다 보면 내 뜻과 상관없이 목에서 삼켜야 하는 말이, 손끝에서 멈춰야 하는 행동이 참 많다. 대부분은 순간의 분노 혹은 억울함과 함께 잊히는데, 그렇지 못한 것들이 간혹 있다.
조한흠에게는 그 날밤의 일이 그렇지 않았을까. 누군가에게 몇십 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군사 독재 시절, 독재자와 그들 아래에서 집단이란 허울 좋은 명분 아래 수많은 폭력과 살인을 일삼은 이들이 그때 그 시절을 합리화하고 잊었을 거란 확신이 든다. 기억은 참 불공평하다.
나에게는 어떤 일이 그런 일일지 생각해봤는데,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그때 내가 행동했다면 내 인생이 조금 달라졌을까, 매번 후회로 끝나는 생각인데 이 기억이 떠오를 때 마다 참 싫은 게 그때로 돌아가도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선택을 할 게 눈에 뻔히 보인다. 아무 소득 없는 과거의 기억이라 참 싫다. 좋게좋게 넘어가는 게 좋은 거라고 다수가 말했는데, 누구한테 좋은 건지 묻고 싶다. 나는 너무 안 좋았으니까.
과거 얘기만 나오면 좋게좋게 넘어가지 다 지난 일을 왜 들추냐는 사람들이 있다. 니들은 넘어가 지나 본 데 누구는 안 넘어가지나 보지. 도움 안 줄 거면 그냥 구석에 찌그러져 있으라고 말하고 싶다.
부태복
실력이 좋아도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 있다. 생사가 오가는 의료계에서는 그게 특히 심하리라 생각한다.
그런데도 나는 주인공이 부태복을 믿지 못한 건, 부태복이 실수한 '북한' 사람이어서라고 생각한다. 그가 실수한 '남한' 사람이었다면 아마 주인공은 그를 믿었을 것이다. 부태복은 평소에 실력이 좋은 의사였기 때문에.
비단 탈북민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보통의 사회는 조금만 다른 특성, 특히 사회에서 우리보다 못할 것이라는 편견을 가진 특성을 가진 사람을 무시한다. 민족정신이 강한 우리나라는 이게 더 심하다. 그 사람 자체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특성을 가진' 사람으로 인식한다. 그렇게 특성에 사람이 묻힌다.
컨프론테이션
유독 남자들이 그랬다. 뭘 계속 가르치려고 들고, 아는 체하려하고. 내가 운이 없었다고 말하기엔 주변에서 들리는 얘기도 다르지 않아서 뭐... 그들의 사고방식은 사회가 만들어낸 걸까 아니면 그냥 그 사람의 특성이었을까 고민한 적이 있었는데, 여러 직·간접 경험을 통해 사회가 만들어냈다고 결론 내렸다. 그럼 사회는 왜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고,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왜에 대한 대답은 못 찾았는데 어떻게에 대한 답은 어렴풋이 알 듯했다. 존재가치를 끊임없이 인정받는 가정과 환경에서 살아오다 사회로 나오면서 인정받기 위한 수단이 아닐까 싶었는데, 그럼 여자는? 이란 의문이 여전히 남았다.
나에겐 이 현상이 컨프론테이션 속의 얼굴 같다. 가까이서 보면 잘 안 보여서 멀리서 보려고 뒤로 가면 뭔가 보일 듯 한데, 뒤엔 항상 더 갈 수 없게 다른 작품이 버티고 있다.
눈빛이 없어
사람이 계속 다치고 심지어는 죽어 나가는데, 그에 비해 노동 관련 처우가 개선되는 속도는 현저히 느리다. 아마존 물류센터에는 에어컨이 없는데, 에어컨 설치 비용보다 사람이 쓰러졌을 때 구급차를 부르는 비용이 더 싸서 그렇다는 기사를 본 적 있다. 아마존은 여전히 잘 나간다. 기업은 가해자 소비자이면서 노동자인 우리는 방관자이면서 피해자다. 나도 누군가에겐 아마 적극적인 방관자일 거란 생각이 드는데, 참 씁쓸했다.
파업한다는 기사를 보면 머릿속에 '불편함'이 반사적으로 떠오르고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긴 기억이 난다. 갈 길이 멀었다. 곧 내가 만나게 될 노동환경일지도 모르는데 그동안 나는 뭘 믿고 안일하게 장밋빛 미래를 꿈꾼 걸까.
너를 따라가면
설마설마하면서 제발 가상 세계이길 빌었는데, 그 새끼가 또 나왔다.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수많은 핏자국을 남기고 아직까지 뻔뻔스레 고개를 쳐들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든다.
정혜는 그 언니를 따라가다 멈췄고 앞으로도 계속 자신의 자리에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시대 수많은 사람의 꿈, 희망, 인생이 당신에 의해 짓밟힌 걸 본 정혜의 발걸음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참
소아 성범죄자를 내 손으로 죽일 자신과 용기는 없다. 그런데 누가 한다면 기꺼이 눈을 감고 못 본 척 할 수는 있다. 특히 요즘같이 환멸 나는 세상에서는 더. 법에 따라 그들을 심판해야 하는 판사가 아닌 나는, 살인을 정당화할 수 있겠냔 의문이 들 때 저런 인두겁을 쓴 짐승에 한해서는 정당화된다고 본다.
그런데도 선뜻 사형제도에 찬성을 못하는 건 악용될 우려 때문이다.
감상
다양한 사회 문제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책이었다. 단편 소설 하나하나가 끝날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고, 살아갈 현실이 참... 형편없었다. 그 속에서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아왔고, 살아가는지에 대해 자괴감도 들었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를 떠올리면 혼란스럽기도 했다.
회피성 성향이 짙어, 눈앞에 머리 앞은 문제가 보이면 그냥 덮어버리는데 그런 나에게 이 소설은 내가 덮은 대부분을 다시 열었다. 열 뿐만 아니라 그 속을 다 파헤쳤다. 덕분에 평소에 피했던 고민과 마주할 좋은 기회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