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세트 - 전4권 (양장)
이영도 지음 / 황금가지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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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무엇으로 존재해야 하는가" 질문을 던지는 유쾌하고 장대한 판타지 서사.

오랫만에 도파민 최대치의 독서.
재밌고 흥미진진해서 감정의 고양이 일어난다.

이런 옛날 옛날에 스타일의 이야기에 두근대다니 ㅋㅋㅋ

케이건 드라카, 티나한, 비형, 사모 페이, 륜 페이....
정말 잘 만든 캐릭터 아닌지 감탄에 감탄을 했다.

비형.... 너무 취향의 도깨비. 소리 내서 5번쯤 웃었음.

유료 도로당의 뭔가 멋짐에 대해서도. :)

전반부가 지나고 4년이 흐른 시점의 이야기에선 또 다른 무드의 비감이 느껴지는 게 좋았다.

지난하고, 잔혹하다 할 수 있는 광경들을 지나 부서진 이들이 다시 일어서려 하는 노력.
그리고 그들은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게 아니고
결국 또 반목하고 대결하고 견제하는 변하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는 점도.

그냥 그저 판타지 소설이 아닌 현실의 반영 같아서 더 와닿는 서사시.

그리고 얼른 50년 후의 피를 마시는 새를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며 ....

오래전부터 이영도 작가의 작품을 한 번쯤은 읽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이종범의 스토리캠프에서 설명회를 한 영상을 보고
정말이지 대단한 이야기꾼.....
바로 영업당해 결제 클릭클릭하고 순식간에 읽어 내려갔다.

덕분에 7월에 독서량도 평균치를 웃돌았고, 읽는 뇌 세팅에도 무진한 도움이 되었다.

피마새도 바로 읽으려고 했지만.... 조금 아끼는 마음으로 살짝 미뤄본다. 책은 이미 책장에 있음... 든든함... ㅋㅋㅋ

<1권>

- 하늘을 불사르던 용의 노여움도 잊혀지고
왕자들의 석비도 사토 속에 묻혀버린
그리고 그런것들에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생존이 천박한 농담이 된 시대에
한 남자가 사막을 걷고 있었다. - 1권 서문

-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 - 해묵은 금언

- "그런 걱정은 하지 말게. 케이건의 분노는 모조리 나가들에게 돌려져있어. 그리고 그에게 다른 분노를 살 수도 없어."
"분노를 살 수 없다고요?"
"그래. 서신에서 본 것처럼 그에겐 더 뺏을 수 있는 것도 없어. 나가들이 모조리 다 빼앗아갔으니까. 역설적으로 들릴 테지만 나가를 제외한 자들에게 있어서 케이건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분노하게 할 수 없으니까."
"슬픈 말씀이군요." - 51

- <인간들도 꿈을 믿어.>
<그런가? 그럴 수도 있겠지. 어리석기로는 거기서 거길 테니.>
<그리고 나도 믿고 싶은데.>
화리트는 정신을 닫은 채 친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60

- 그제야 케이건은 한계선 이북과 이남이 얼마나 오랫동안 단절되어 있었는지를 절감했다. 수백 년 전 나가들의 폭풍 같은 북진이 기온이라는 절대적 한계에 부딪혀 중단되고 마침내 대확장 전쟁이 끝났을 때 세계는 두 동강이 나버린 셈이다. 나가들의 땅 키보렌과 그 북쪽의 땅. 뒤 쪽의 세계는 산이나 황야, 사막, 초원, 숲, 빙하 등이 있는 정상적인 세계다. 그러나 앞쪽의 세계에는 밀림뿐이다. 키보렌이라는 단 하나의, 세계의 반을 뒤덮은 숲.
케이건은 거기서 희극의 요소를 발견했다. 오직 단 한 사람, 한계선에 가장 근접한 도시 카라보라의 최남단에 나가를 도축, 가공, 요리할 수 있는 시설과 장비를 완비해 두고 매일같이 나가를 잡아먹으며 사는 인간 한 명을 제외한다면, 이제 모든 이들에게 나가들과 그들의 땅 키보렌은 전설 속의 존재나 마찬가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만약 나가들이 그들 이외에 그들을 증거해 줄 자를 찾아내야 한다면 그들은 그들을 가장 증오하는 자를 찾아와야 할 것이다. 대사원의 영리한 승려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증오란 원래 그렇다. - 99

- <나가 살육자?>
나가들 사이에서는 오래전부터 한계선 근처에 출몰하며 나가를 잡아먹는 괴물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그 괴물은 바라기라 불리는 쌍신검을 휘두르며 추위와 함께 나타난다. 그리고 추위 때문에 꽁꽁 얼어붙은 나가를 얼음 깨어먹듯이 씹어 먹는다고 한다. 지금껏 사모는 그 나가 살육자가 한계선의 추위를 상징하는 상상의 괴물일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앞에서는 그 이야기 속에서 묘사하는 것과 똑같은 인간이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은 채 달려오고 있었고 그것은 현실이 아니라고 니르기엔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 - 232

- 사모는 대답하지 않은 채 앞쪽의 어둠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카루는 결국 조바심을 참지 못하고 닐렀다.
<페이. 돌이 식기 전에......>
<이자들이 왜 신을 잃었을까?>
사모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카루는 약간 당황했다.
<에? 자신들의 오만 때문이지 않습니까?>
<그건 나도 알아. 구체적으로 어떤 오만이라는 거지?>
<글쎄요. 신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 것 아닐까요? 혹은 자신들이 신보다 낫다고 생각했다거나.>
사모는 통로의 벽과 천장, 바닥을 죽 둘러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자들이 이런 것을 만들 수 있을까?> - 305

- "네 마리의 형제 새가 있소. 네 형제의 식성은 모두 달랐소. 물을 마시는 새와 피를 마시는 새, 독약을 마시는 새, 그리고 눈물을 마시는 새가 있었소. 그 중 가장 오래 사는 것은 피를 마시는 새요. 가장 빨리 죽는 새는 뭐겠소?"
"독약을 마시는 새!"
고함을 지른 티나한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자 의기양양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케이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물을 마시는 새요."
티나한은 벼슬을 곤두세웠고 륜은 살짝 웃었다. 피라는 말에 진저리를 치던 비형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사람의 눈물을 마시면 죽는 겁니까?"
"그렇소. 피를 마시는 새가 가장 오래 사는 건, 몸 밖으로 절대로 흘리고 싶어 하지 않는 귀중한 것을 마시기 때문이지. 반대로 눈물은 몸 밖으로 흘려보내는 거요. 얼마나 몸에 해로우면 몸 밖으로 흘려보내겠쇼? 그런 해로운 것을 마시면 오래 못 사는 것이 당연하오. 하지만."
"하지만?"
"눈물을 마시는 새가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고 하더군."
륜과 티나한은 알 듯 모를 듯하다는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비형은 환한 표정이 되었다. - 369

<2권>

- 하지만 그 시점에서 사모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은 유료도로당의 사람을 보는 관점이었다.
이곳에서는 사람을 사람으로서 존재하게 하는 모든 요소가 무시되고 있었다. 여행자의 품성과 지성과 감성 따위는 유료 도로당에게 조금도 고려 대상이 되지 못했다. 오로지 여행자가 통행료를 지불하느냐 지불하지 않느냐의 이분법만이 존재했다. 사람에 대한 가장 큰 모욕일 수 있는 그 장면에서, 그러나 사모는 동시에 정반대의 의미도 발견했다. 여행자의 외모와 종족과 고향 같은, 어떤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본질적으로 사람다움과는 별 관련이 없는 것들 또한 유료 도로당의 고려 대상이 되지 않았다.
보좌관은 말했다. '저 두억시니들은 통행료 안 냈다.'
사모는 그 말을 뒤집어 보았다. '통행료를 내면 저들은 여행자다.' - 116

- "여행자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길을 걷는 자들입니다."
"그럼 우리 유료 도로당은 무엇인지 말해 주겠소?"
"우리는 길을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
"누구를 위해?"
"자신의 길을 걷겠다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 - 120

- 철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시구리아트 유료 도로당의 당주 보좌관은 당 일지를 작성하고 있었다.
'사모 페이는 두억시니들의 통행료를 지불한 다음 그들을 유인하며 관문을 통과하였다. 신을 잃은 그들 두억시니들에게 신의 가호를 바랄 수는 없으니, 나는 사모 페이가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의 어진 마음이 저 가엾은 자들을 긍휼히 여기길 바란다.' - 141

<3권>

- 기약 없는 구원이 현존하는 고통의 대가가 될 수 있습니까? 고통을 받는 것은 사람들입니다. 신들이 아닙니다. - 129

- "제 생각에는 그럴 것 같지 않군요. 또 한 명의 케이건 드라카가 겨우 4년 만에 만들어질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군요."
"케이건 드라카를 잘 알아?"
"그분을 잘 아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 140

- 사모는 더 이상 니를 수 없었다. 참으로 거대한 니름이 그녀를 향해 노도처럼 쏟아져왔다.
<살아가, 제발. 살아가!>
거기에 애정이 있었다. 사모는 받아본 적 없는 거대한 애정에 놀랐다. 니름이 담아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애정과 관심이, 그리고 수단이 아닌 목적인 호의가 있었다. 웃음, 즐거움, 사라지는 것에 대한 완전한 기쁨. 사모는 이해할 수 없었다. 멍청한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다가와 그녀를 온통 적셔버리는 환희는 사모마저도 즐거움에 넘치게끔 만들었다. 유해의 폭포는 영원히 사라지지만 그것은 절대로 슬픈 일이 아니었다. 정신적 홍소, 폭소라도 터뜨리고 싶은 기분 좋은 소멸. 유해의 폭포는 마지막으로 농담처럼 닐렀다.
<제발, 자기 완성을 위해 살아간다는 자를 조심해...... 하하하!>
사모는 커다란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지복에 찬 소멸이었다. - 455

<4권>

- 사모는 침묵한 채 나뭇가지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곧 륜을 다시 만날 거야.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언젠가 륜에게 해줬던 일을 다시 해줄 수 있을까."
"공작님을 한계선 북부로 데려가라는 말씀입니까?"
"그래.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요스비에게 해줬던 일을 해줘."
케이건은 말없이 사모를 바라보았다. 사모는 고개를 약간 들어 올려 케이건의 이마 위를 바라보며 말했다. 
"친구가 되어주라고."
"왜 제게 부탁하시는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너보다 더 적격인 자가 없으니까." - 133

- "네가 원했던 것이 무엇이냐?"
"사랑하기 위해 사는 삶."
사모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
"왜 이해할 수 없을까? 입장을 바꿀 수는 없을까? 길지 않은 생, 가슴에서 피비린내를 풍기며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우리의 서로 다른 겉모습은 광적인 증오의 원인이 아니라 다시 없이 커다란 축복이 아닐까? 사람은 새로움 속에 살아간다. 모든 것은 항상 바뀌어 사람들에게 다가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비늘이 덮인 저 남부의 이방인들을 우리의 의식과 지혜를 발전시킬 새로운 자극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그들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 가장 고마운 선물이 아닐까? 대상이 없는 사랑은 없다. 그리고 새로운 대상은 새로운 사랑을 약속한다. 남쪽에서 온, 비늘 덮인 그들은 나의 또 다른 형제며 혈육이다. 그리고 축복이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고 싶다. 그들은 얼마나 고마운 자들인가.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 상대를 하나 더 얻었다."
케이건은 스스로에게 보내는 조소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나는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싶다."
사모는 이런 거대한 사랑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르다는 것이 증오의 원인이 아니라 거대한 축복의 원인이 될 수 있는, 혹은 그러했던 사람이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 294

-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거라는 어떤 가능성도 없다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남을까?"
아이의 말은 케이건이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케이건은 불만스러운 듯이 말했다.
"내일을 계속 오늘로 만들면 돼." - 334


2026. jul.

#눈물을마시는새 #이영도 #황금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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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낙천적인 아이 ㅣ 오늘의 젊은 작가 50
원소윤 지음 / 민음사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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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싸늘하게 관조하는 듯하지만
작가 원소윤은 낙천적인 면도 있고 냉소적인 면도 있는
사랑이 많은 아이인 것 같다.

유년기의 서술들을 따라가다 보면
나의 유년기도 한번 되돌아보게 되는데
유독 과거의 기억 방면에 문제가 있다 보니 
나라면 절대라고 까지는 아니지만 못할 작업이지 싶다.

생전 본적도 없는 이들에게 가족을 맡기는 심정을 서술한 부분에서 한참 멈춰 있기도 했다.
더불어, 세상이 좋아져서 상황이 괜찮아서 나는 누구의 짐도 되지 않고 안녕을 고할 수 있기를.
하는 생각도.

민음 북샵에서 구매해서 작가의 추천 레터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게 또 원소윤 작가의 귀여운 면모를 보여준다.

- 땀을 흘리고 닦는 작가가 될 거야! 죄를 짓고 용서를 구하고 벌을 받는 작가가 될 거야! - 추천 레터 중

- 은행에 도착한 치릴로는 로무알다 손에 통장을 거칠게 쥐여 줬다. 여기 있는 돈을 정리해서 당장 다 가져가라고.
"내 돈 안 뜯어 간 사람 너밖에 없다. 나 죽으면 다 나눠 가질 테니, 그 전에 네 몫 챙겨라."
여기까지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나는 그것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치릴로가 깡패처럼 로무알다를 끌고 갔다는 발단 대목에서는 이건 또 무슨 일인가, 마음을 졸였기 때문이다. 치릴로가 은행을 털러 가는 길에 "아, 맞다! 인질이 필요하지!" 하고 만만해 보이는 로무알다를 고른 것도 아니고 보이스피싱에 연루된 것도 아니니 얼마나 다행인가. 이다음에는 순조로운 전개를 맞겠구먼, 한시름 놓았다. - 21

- 무심한 조명 덕분에 우리에게 일어난 일의 의미를 찾지 못했다. 만일 극복한다면 뭘 극복해야 하는 걸까. 심지어 극복이 무얼 위한 것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 32

- 나는 귀한가. 매 순간 느끼고 있는바에 근거해 말하자면 나는 귀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뿐 아니라 모두가 안 귀해 보였다. 솔직히 그것 자체는 결정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이 겪어 내는 고통의 크기가 측량할 수 없이 크다는 것이었다. - 35

- 사람이 저렇게나 많은데 나는 한 사람과 만났고 오래 이야기했고 그럴 수 있어 기뻤다. 동시에 두려웠다. 살아가는 데에 특별히 필요한 게 없는 사람이 되려 했는데 꼭 필요한 뭔가가 생길 것 같았다. 꼭 필요한 뭔가가 생긴 삶은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지? - 171

- 그러고 보니 기가 찼다. 아까 병원 유니폼 입은 사람들, 그들이 누구인 줄 알고 엄마를 맡긴 걸까. 엄마를 마취하고 피부를 째고 뼈를 맞추도록 맡긴 걸까. 신용을 알 수 없는 이들에게 거금을 넘긴 기분이었다. 시간도 남아나겠다, 기도나 해볼까 싶었지만 신앙심을 잃은 지 오래여서 기도의 샘이 바짝 말라 있었다. 그 누구를 향한, 그 무엇을 향한 어떠한 믿음도ㅗ샘솟질 않았고 가장 믿을 수 없는 건 단연 엄마였다. - 199

- "장기를 줄 수 있는 상황이어야 장기를 줄 수 있는 거야. 나중에 아빠 장기가 기증되잖아? 그럼 참 잘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돼."
놀랍게도 그 얼렁뚱땅한 말이 내게 위안을 주었다. - 207

- 불광천에는 '바르게 살자'라는 구호가 새겨진 비석이 있다. 불광천에 들를 때마다 나는 비석 앞에 서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 비석은 '바르게살기운동중앙협의회'에서 세운 것으로 이 협의회가 '삼청교육대'의 후신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늘 사진을 찍었다. 바르게 살자. 세상에 이보다 와닿는 말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226


2026. jul.

#꽤낙천적인아이 #원소윤 #민음사 #오늘의젊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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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필요한 여자
라비 알라메딘 지음, 이다희 옮김 / 뮤진트리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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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루트 노년 여성 알리야의 삶을 돌아보는 이야기다.

거부할 수도 없이 떠밀려 온 초년의 인생이 다행히도?? 4년 만에 이혼을 해준 남편 덕에... 
그녀만의 삶이 되는 아이러니.

삶에 필요한 것은 그 무엇보다도 '위엄'이라는 점을 일깨워 준다.

비단 여성의 삶 뿐 아니라 베이루트의 남성 역시 끔찍한 선택의 길 뿐이었다는 비극이 담담하게 그려져 더 깊이 있게 다가왔다.

언제 비명횡사해도 이상하지 않은 전시의 베이루트에서 늙음이라는 결코 우아하지 않은 삶의 과정을 되뇌이며 자신만의 세계로 침잠하던 사람이 주변의 사람들에게 조금씩 열리는 과정을 보는 일도 작은 행복을 준다.

삶은 그렇게 외롭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알려주는 적당히 거리를 두는 적당히 참견쟁이에 적당히 다정한 사람들이 둘러보면 늘 주변에 한 둘은 있는 것이다.

세 마녀 만세!

노년 여성의 내면, 여성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문화권에 대한 깊은 이해, 여성들 간의 연대를 그려내는 시선이 너무나도 여성적이라서 작가 라비 알라메딘이 59년생 남성이라는 사실이 놀랍다고 느껴졌고, 다른 책들이 더 없는지, 작가는 어떤 사람인지 검색을 해보다 그림을 포함한 다양한 예술 활동, 성적 지향이 이런 깊이 있는 이해가 아마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다른 작품을 더 읽어보고 싶은데, 2009년 출간된 적 있는 하카와티는 이미 절판된 것 같고, 다른 책은 더 없다는 게 조금 아쉽다.
진짜로!! 아쉬워!!


- 책을 읽고 쓰는 일은 아마도 인간의 존엄성에 남은 마지막 무기일 것이다.
신마저 증발하고 없는 이 끝없는 굴욕의 시대 이전에
신이 우리에게 일깨워주었던 사실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사실. 우리에게 영혼이 있다는 사실.
더욱이 그뿐만이 아니라는 사실. 아니면 말고. - 리처드 플래너건, <굴드의 물고기 책>

- 정신이 팔린 이유에 대해 가벼운 변명을 해보자면 이렇다. 연말이 되면, 나는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그해 완성한 번역본을 읽어본다. 최종적으로 소소한 수정작업을 하고 페이지를 순서대로 놓은 뒤 상자에 넣는다. 레드 와인 두 잔을 마시며 치르는 일종의 의식이다. 고백하자면, 마지막으로 다시 읽어보면서 비로소 나 자신을 격려하고 작업을 잘 끝낸 것을 자축한다. 올해에는 소설 <아우스터리츠>를 번역했다. W.G.제발트의 작품은 두 번째다. 오늘 원고를 읽으면서 어떤 이유에서인지, 아마도 주인공의 고독한 절망 때문이었겠지만 한나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 14

- 성인이 된 후 거의 매해, 정확히는 스물두 살 이후로 거의 매년 1월 1일 번역을 시작했다. 이날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공휴일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해 첫날 일을 하지 않는 쪽을 택한다는 것을 나도 물론 알고 있다. 하루는 베토벤 소나타 필사본을 뒤적이는데, 끝에서 두 번째 작품인 작품 번호 110, 가장 훌륭한 내림 가장조 소나타에만 우측 상단에 날짜가 적혀 있는 게 보였다. 마치 작곡가가 1821년 성탄절에 일을 하느라 바빴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리고 싶어 한 것 같았다. 나 또한 공휴일에도 일을 하는 편을 택한다. - 15

- 책을, 묶이지 않은 상태의 번역본을, 상자에 넣는 일. 그것이 내 삶이다. -16

- 나는 이미 오래전에 글에 대한 맹목적인 갈망에 나를 맡겼다. 문학은 내 모래 놀이터이다. 나는 그 안에서 놀고, 요새와 성을 쌓고, 황홀한 시간을 보낸다. 날 힘들게 하는 것은 놀이터 바깥의 세상이다. 나는 눈앞의 세상에 온순하게, 그러나 관습적인 방식과는 다르게 적응해왔다. 내 안의 책 세계에 큰 불편 없이 은거하기 위해서였다. 모래의 비유를 변형해 보자면 문학은 내 모래 놀이터, 현실 세상은 나의 모래시계이다. 모래는 한 톨 한 톨 빠져나간다. 문학은 내게 삶을 주고, 삶은 나를 죽인다. 하긴 삶은 누구든 죽인다. - 16

- 나는 혼자다.
이것은 내가 내린 선택이지만, 다른 선택지도 거의 없었다. 당시 베이루트 사회는 아이가 없는 이혼녀에게 그다지ㅣ 다정하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누울 자리를 보았고 다리를 뻗었다. 소박하고 편안하고 적당한 자리였다. - 20

- 쿠란의 내용이 유치하고 고압적이라고 조롱할 수는 있지만, 쿠란의 문체는 다르다.
내 눈을 뜨게 한 것은 결국 시였다. 쿠란이 아닌 시가, 보옥을 다듬는 그 기술이 나의 머릿속에 깊이 새겨졌다. 사랑의 발견이 꼭 시의 발견보다 더 아름다운지 나는 잘 모르겠다. 더 관능적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 같다.
그 불을 붙인 시인을 기억한다. 새카만 전사 시인 안타라였다. 죽을 위기의 언어가 소생되던 순간의 충격을 기억한다.
너를 기억했다 창끝이 내 안에서 갈증을 해소하고
흰 칼이 내 피를 뚝뚝 떨어뜨릴 때
나는 간절히 칼날에 입 맞추고자 했다
네 미소처럼 번득이던 그 칼날에 - 23

- 아버지는 나에게 줄 가르침이 없었다. 가족 누구도 나에게 건넬 말이 없었다.
나는 우리 집안의 맹장이다. 불필요한 부속 기관이다.
이 집안은 나를 열여섯에 시집보냈다. 학교를 유일한 보금자리로 삼았던 나를 설익은 상태로 따다 몸도 마음도 작은 사람에게 주었다. 청소년에게 결혼만큼 불쾌한 제도는 없다. 신혼집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아파트였는데, 남편은 4년도 채 지나기 전에 내 앞에 서서, 법의 요구에 따라, 그 무엇보다 짜릿한 선언을 했다.
"당신과 이혼한다."
이혼은 남편이 결혼 생활을 통틀어 보여준 가장 자기다운 결정이었다.
그 불능충은 문지방을 넘어 나갔고, 그 이후로 이 집 바닥에는 한 번도 그 자의 발이 닿은 적이 없다. 나는 어렸지만 눈물 한 방울 떨구지 않았다. 천성이 시키는 대로 했다. 밀고 닦고 치우고 살균해서 그 어떤 흔적도, 그 어떤 냄새도, 머리카락 한 올도, 손자국 하나도 남겨놓지 않았다. 그가 중후해 보이려고 피우던 냄새 지독한 파이프와 더러운 모자를 걸어두던 못들도 벽에서 뽑았다. 파이프 재에 그을려 여기저기 구멍이 난 장식용 깔개들은 바늘과 실타래로 빠짐없이 손질했다. 모기장은 표백제에 푹 담갔다.
나는 그의 냄새가ㅏ 저절로 빠지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싹 없애버렸다. - 27

- 수년 뒤인 1982년, 그 모든 것이, 문을 두드리고 욕을 하며 집을 내놓으라던 동생들의 외침이, 이스라엘의 베이루트 포위 공격과 함께 멈추었다. - 36

- 마침 주인이 짙은 색이 칠해진 거대한 참나무 책상에 앉아 있었는데, 바로 이것이 부싯돌이 되어 내 안에 불길을 지폈다. 빈털터리나 다름없는 스무 살 이혼녀에게 그런 책상 뒤에 앉는 것은 정말 위엄 있고 호화로운 일, 꿈꿀만 한 일로 여겨졌다. 내 삶에는 위엄이 필요했다. - 41

- 한나는 나에게 용기를 주려고 나타났는데, 나는 한나의 겉모습을 걱정하고 있었다. 부끄러웠다. 난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 많은 사람이다. 코앞에서 꽃 피는 기적도 놓치곤 한다. 흐릿한 별에 집중하느라 별자리를 놓친다. 빨래를 널어두었는지 걱정하느라 휘황한 폭풍우를 못 보고 지나간다. - 76

- 나는 읽는 사람이다. 그렇다, 성가신 허리 통증을 견디며 읽는 사람이다.
뼈가 쑤시거나 허리가 반항하면 수년 동안 몸을 소외시킨 데 대한, 심지어 멸시한 데 대한 처벌이라고 생각한다. 젊은 시절 나는 나의 육체를 개탄했고 이제 나의 육체는 나를 개탄한다. 나이가 들수록 몸은 나로부터 정당한 관심을 요구한다. 권리를 주장한다.
한때는 몸보다 정신이었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높은 데 있는 알리야. 딸로 있는 알리야.
알리야, 만물의 위에 있는 알리야.
슬프도다, 슬프도다, 슬프도다. - 80

- 파디아를 향한 나의 감정의 매듭을 푸는 일은 프쉬케의 그 어떤 과업보다 힘들지만, 나를 향한 파디아의 감정을 이해하는 일은 더 어렵다. 이 아이는 어린 신부였던 나를 우러러보았지만 이혼녀가 된 나를 혐오했다. 그러나 함께 나이가 드는 동안, 저도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면서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나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혐오하지도 않는다는 듯 예의를 갖추어 나를 대했다. 그리고 가끔은 매우 깊은 친절과 관용을 베풀어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전쟁으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타인으로 살 수가 없었다. 전투가 이어지는 동안 서로 돕고 지지해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관계가 익숙한 우정 같은 것으로 변하지는 않았다. 예의를 차려 무의미한 말을 나누는 것 이외에는 대화도 거의 하지 않았다. 드문드문 한 마디씩 섞을 뿐이었다. - 120

- "전쟁 중에 어떻게 그 오랜 시간을 혼자 보내셨는지 항상 궁금했어요. 아, 그렇구나. 레바논 사람들이 피에 굶주렸을 때 책에 굶주리셨군요." 파디아의 웃음소리가 냇물처럼 졸졸 흐른다. 내가 웃어주지 않자 덧붙인다.
"인정하세요. 재치 있었잖아요."
"그래." 나는 인내심을 갖고 고개를 끄덕인다. - 133

- 살을 대고 있는 두 청소년은 더할 나위 없이 살아 있고 더할 나위 없이 밝다. 그 앞으로, 유리창에 창백한 은백색으로 반사된 나의 모습이 겹쳐진다. 나는 움찔한다. 불멸의 청춘 곁에 선 불멸의 노년.
그러나 당신께서 보낸 강력하고 성난 세월은 뜻대로 했고,
나를 쓰러뜨리고 망치고 야위게 했습니다. : 알프레든 테니슨, <티토노스> - 139\

- 나는 출간이 아닌 번역에 목숨을 건다.
이제, 작업이 끝나면 별 관심을 두지도 않으면서 왜 그토록 열심히 번역을 하는지 궁금할 것이다. 뭐랄까, 나는 최종적인 결과물이 아닌 과정에 헌신한다. 난해하게 들릴 수 있고 그렇게 들리는 것도 싫지만, 어쨌든 내게 영감을 불어넣는 것은 그 행위, 작업 그 자체이다. 일단 책 한 권을 끝내면, 경이로움이 사라지고 수수께끼는 풀린다. 그러면 별로 관심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불안의 서>에서 페소아는 이렇게 말한다. "탁월한 인간에게 어울리는 태도는 오로지 이것, 스스로 쓸모없다고 여기는 활동을 지속하는 것, 무익한 질서를 유지하는 것, 지극히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특정한 철학적, 형이상학적 사유의 규범을 적용하는 것."- 165

- 갓 태어난 희망찬 조국이 독립 첫해를 맞은 1944년도 후반에 이르자, 한나는 계속 집에만 있지는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 시대의 젊은 중산층 여성이 뭘 할 수 있었을까? 학교를 나왔고 아랍어와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영어로도 "하우 두 유 두?"라고 인사할 줄 아는 여성이? 고등학교 때에는 철학을 사랑하고 또 잘했던 여성이 뭘 할 수 있었을까?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
학교를 나왔고 두 개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세 번째 언어도 기본 정도로는 할 수 있는, 고교 시절 철학을 사랑하고 잘했던 젊은 중산층 여성은 병원은 어디에 배치했을까?
당연히 식당에서 배식을 하게 했다. - 203

- 아침은 지나갈 것이다. 슬프고 느린 걸음으로 지나가겠지만 지나갈 것이다. 내일과 내일, 또 내일도 이같이 하찮은 걸음으로 다가온다. - 241

- 내 무덤의 비석에는 어떤 내용이 담길까? 너무나 많은 가능성, 선택지가 있다.
"여기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한, 이제는 죽고 없는, 여전히 홀로이고 여전히 두려움 가득한 알리야가 잠들어 있다."
"죽음이여, 자만하지 말지어다. 그대가 정복한 것은 작은 점 하나." - 259

- 가령 결혼하면 학교에 다닐 수 없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다. 알았다면 수업 시간에 질문을 훨씬 더 많이 했을 것이다. 나는 강제로 번데기에서 분리되어 세상의 모진 빛과 위협적인 폭풍우와 마주해야 했던 나방이었다.
나에게 어떤 선택지가 주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알았다면 더 주의를 기울였을 것이고 그 얼간이에게 좀 더 많은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놈이 거들먹거리며 피우던 그 담뱃대를 목구멍으로 쑤셔 넣어 버렸을 것이다. - 303

- 나는 무해함의 화신이다. 나는 사람들로부터 사랑이나 애정을 바라지 않고 어떤 감정도 기대하지 않는다. 적이 생길 만큼 눈에 띄는 존재가 되길 바란 적도 없다. 태생적으로 수줍은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늘 외톨이 신세지만 언젠가 참나리로 꽃 피어 요란하고 화려한 향기를 뿜고 싶다는 깊은 욕망을 품고 있는 사람도 아니다. 나는 단지 타인이 내 삶을 방해하길 바라지 않기 때문에 나 또한 타인의 삶을 방해하지 않고 살고자 한다. - 319

-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늘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무엇이 되고 싶다고 바랄 수조차 없다.
그와 별개로, 내 안에는 온 세상의 꿈이 다 있다. - 409



2026. may.

#불필요한여자 #라비알라메딘 #강력추천도서
#anunnecessarywoman #rabihalameddine #뮤진트리 #이다희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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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26-08-19 1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너무 좋았던! 하카와티 중고책 사놓긴 했어요.

hellas 2026-08-19 14:36   좋아요 1 | URL
다른 책도 읽고싶어요 :) 올해의 책 중 하나
 
당신의 독자가 될게요 - 혼란을 끌어안는 쓰기에 대하여
정세랑 지음 / 마음산책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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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는 조언.

예상보다도 훨씬 더 글쓰기 독려의 글이다.
망설이고 있다면, 한 글자를 써 내려가기 어렵다면 그러지 말아요 라는 친절한 권유.

정세랑 작가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보다는 이런 류의 일을 더 하고 있는 시기인가 싶다.
작가도 외부 활동 같은 것이 더 필요한 시기가 있을 수 있으니까.

말했듯 꽤 강연류의 산문이라 후루룩 (조금 설렁설렁) 읽었다.

- 존재하는 책들이 존재하지 않는 책들을 초대해 오기를 바랍니다. - 들어가는 말

- 뇌과학에 관련된 책들을 즐겨 읽는 편인데, 글쓰기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잘 제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고도 한다. 불안과 우울에 특히 효과가 있다고 읽었다. 돌이켜보니 나도 정신 건강에 상당한 도움을 받은 것 같다. 글을 쓰기 전보다 밝아졌다는 평을 자주 듣고는 한다. - 31

- 책에서 책으로 점프하다가 며칠이 사라져 버렸다? 시간 낭비를 한 것이 아니다. 당신 안에 다른 사람에게 없는 정보의 사슬이 생겼을 테다. 딴 생각으로 두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한심한 게 아니라 창작자로서의 가능성을 보인 것이다. 흥미를 끄는 분야가 계속 나타난다? 산만하다는 비난을 튕겨내야 한다. 머릿속 기동력이 좋은 것이다. - 36

- 때때로 장르문학이나 대중문학을 대놓고 멸시하는, 여성서사나 소수자서사에 덮어놓고 거부감을 보이는 이들도 마주쳐야 했는데 지나고 보니 무언가를 덩어리로 뭉쳐 사고하는 사람에게 굳이 모멸감을 느낄 필요는 없었구나 싶다. 성긴 평에서 드러나는 것은 저쪽의 바닥이며, 다행히 정교한 쪽이 비교할 수 없이 다수다. - 70

- 읽고 쓰는 사람들 사이는 밖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가깝다. 한 번 만난 적 없이도 매일 만나는 이들보다 가깝다. 온기도 떨림도 전해지는 그 가까움 속에서, 독자라는 상대를 궁금해하며 쓴다. - 150

- 쓰는 삶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는 '주섬주섬'인 듯하다. 기대만큼 멋들어진 모습은 아니겠으나 헤매고 주워 모으며 우리 발걸음이 그리는 점선이 종종 겹치면 좋겠다. 서로의 채집통을 들여다보고 환히 놀랄 수 있도록. - 202

2026. jul.

#당신의독자가될게요 #정세랑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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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 앞에서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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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하다. 재미 보단 의미를 읽으면 좋다.

그러나 지나치게 묵직하니 조금은 지루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또 그러나 공감, 공유할 수 있는 주제들로만 모여있어 후루룩 읽게 된다.

- 어려서부터 나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솔직하기를 바랐고 그래서 내 존재가 조금 더 가벼워지기를, 더 자유로워지기를 바랐다. 돌아보니 그 소망은 정확하게 내 결여를 가리키고 있었다. 자신이 결여한 부분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인 것일까. 누군가를 진짜로 사랑하며 사는 사람은 사랑이라는 관념을 습관적으로 입에 올리지 않고 용기 있는 사람은 그게 용기인 줄도 모른다. 충만한 삶을 사는 사람은 인생이니 삶이니 같은 말에 관심이 없다. 내가 용기나 자유 같은 가치에 끌렸던 건 내가 비겁하고 부자유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 16

- 나를 추동하고 나아가게 하는 내 안의 이야기,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삶의 방식, 쓰지 않으면 어째서인지 약해지고 마는 나의 존재. 그 모든 것이 나를 다시 백지 앞에 서게 한다. - 49

- 나는 아픔만큼 개인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아픔은 개개인의 가장 깊은 욕망보다도 더 개별적이고 특수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렇지 않을 어떤 말이나 표정 때문에 누군가는 삶을 저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는 것처럼. - 54

- 세상에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머리로는 잘 알았지만 그뿐이었다. 이번 일을 지나면서야 나는 삶이 그저 일시적으로 주어진 것이며 나에게는 바로 지금, 현재밖에 없다는 사실을 깊이 이해하게 됐다. 과거의 성공이나 실패로, 미래에 대한 기대나 불안으로 나는 나의 현재를 무가치하게 대했다. 내 진짜 삶은 언젠가 도래할 것이며, 내가 나로서 온전히 살아가지 못하는 건 어떤 특정한 이유 때문이라고 나를 속이고 길들였다. 하지만 내가 손에 쥘 수 있는 건 오로지 현재뿐이다. 그렇기에 과거에 얽매이거나 미래에 지레 겁먹으면서 현재를 포기할 수는 없다. 내 진짜 삶은 언젠가 어떤 조건이 맞아떨어지면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불완전해 보이는 여기에 있다. - 96

- 과거를 기억하고, 그 기억을 이야기 속에 담아 말하는 것, 그리고 다른 이들의 경험을 듣는 것. 그런 일들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를 감지한다.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에게 낙인을 찍고 경멸하고 조롱하는 정서가 어느 때보다도 만연한 요즘인 것 같다. 프리모 레비는 어떤 사회라도 대화를 포기하고 파시즘으로 흐를 때 언제든 수용소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더 대화해야 한다. 우리의 과거에 대해서, 우리가 겪어온 시간에 대해서 말하고 들을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지기를 바란다. 과거를 바로 세울 때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다. 무책임한 비관주의로 기우는 것을 경계하면서. - 225

- 나는 사람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이 한 사회의 인간성에 대한 척도라고 생각한다. 죽음을 대하는 방식이 곧 인간을 대하는 방식이라고 말이다. 애도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일이자 동시에 인간의 권리이기도 하다. - 237

2026. jun.

#백지앞에서 #최은영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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