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 앞에서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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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하다. 재미 보단 의미를 읽으면 좋다.

그러나 지나치게 묵직하니 조금은 지루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또 그러나 공감, 공유할 수 있는 주제들로만 모여있어 후루룩 읽게 된다.

- 어려서부터 나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솔직하기를 바랐고 그래서 내 존재가 조금 더 가벼워지기를, 더 자유로워지기를 바랐다. 돌아보니 그 소망은 정확하게 내 결여를 가리키고 있었다. 자신이 결여한 부분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인 것일까. 누군가를 진짜로 사랑하며 사는 사람은 사랑이라는 관념을 습관적으로 입에 올리지 않고 용기 있는 사람은 그게 용기인 줄도 모른다. 충만한 삶을 사는 사람은 인생이니 삶이니 같은 말에 관심이 없다. 내가 용기나 자유 같은 가치에 끌렸던 건 내가 비겁하고 부자유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 16

- 나를 추동하고 나아가게 하는 내 안의 이야기,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삶의 방식, 쓰지 않으면 어째서인지 약해지고 마는 나의 존재. 그 모든 것이 나를 다시 백지 앞에 서게 한다. - 49

- 나는 아픔만큼 개인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아픔은 개개인의 가장 깊은 욕망보다도 더 개별적이고 특수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렇지 않을 어떤 말이나 표정 때문에 누군가는 삶을 저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는 것처럼. - 54

- 세상에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머리로는 잘 알았지만 그뿐이었다. 이번 일을 지나면서야 나는 삶이 그저 일시적으로 주어진 것이며 나에게는 바로 지금, 현재밖에 없다는 사실을 깊이 이해하게 됐다. 과거의 성공이나 실패로, 미래에 대한 기대나 불안으로 나는 나의 현재를 무가치하게 대했다. 내 진짜 삶은 언젠가 도래할 것이며, 내가 나로서 온전히 살아가지 못하는 건 어떤 특정한 이유 때문이라고 나를 속이고 길들였다. 하지만 내가 손에 쥘 수 있는 건 오로지 현재뿐이다. 그렇기에 과거에 얽매이거나 미래에 지레 겁먹으면서 현재를 포기할 수는 없다. 내 진짜 삶은 언젠가 어떤 조건이 맞아떨어지면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불완전해 보이는 여기에 있다. - 96

- 과거를 기억하고, 그 기억을 이야기 속에 담아 말하는 것, 그리고 다른 이들의 경험을 듣는 것. 그런 일들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를 감지한다.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에게 낙인을 찍고 경멸하고 조롱하는 정서가 어느 때보다도 만연한 요즘인 것 같다. 프리모 레비는 어떤 사회라도 대화를 포기하고 파시즘으로 흐를 때 언제든 수용소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더 대화해야 한다. 우리의 과거에 대해서, 우리가 겪어온 시간에 대해서 말하고 들을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지기를 바란다. 과거를 바로 세울 때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다. 무책임한 비관주의로 기우는 것을 경계하면서. - 225

- 나는 사람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이 한 사회의 인간성에 대한 척도라고 생각한다. 죽음을 대하는 방식이 곧 인간을 대하는 방식이라고 말이다. 애도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일이자 동시에 인간의 권리이기도 하다. - 237

2026. jun.

#백지앞에서 #최은영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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