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잡이는 꿈을 잘 기억한다
김성중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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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동화의 변주 같은 단편들이다.

불안과 혼돈이 공포와 좌절로 결론지어지지 않고 조금은 그래도 조금은 나아진 어떤 상태로(그러나 미처 행복이라는 결말에는 미치지 않는) 귀결되는 그런 느낌.

토종 환타 지랄 수 있는데, 세계관은 광활하게 다가온다. 

이야기 속 다수 인물들에서 중년의 정체성이 느껴지고 그것이 나와 호흡을 같이 가져가는 흡인력이 있다.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작가와 함께 세월을 헤쳐 나오고 있다는 동지의식.. ㅋ 나 홀로 동지의식이랄까 :)

- 아이들은 자기에게 꼭 맞는 관을 도처에서 찾아낼 수 있다.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니 그때와 똑같은 느낌이 든다. 나는 보이지 않는 성냥을 켠다. 탁탁. 기억의 불꽃을 점화하기 위해. 숨바꼭질을 할 때마다 우리는 죽은 존재였다. 웃음도 숨소리도 누른 채 부활을 위한 작은 죽음에 들어가는 것. 세상 구석구석에서 아이들은 이 짜릿한 틈새를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 9, 유령들

- "도서관 책은 공공기물이잖아요."
나도 모르게 공격적인 말투가 나왔다. 자기 책도 아닌데 줄치고 메모하는 인간은 내 평생 혐오하던 치들로, 그들이 표시한 부분은 도무지 동의가 되지 않을뿐더러 끄적거린 내용 역시 유치한 감상일 때가 태반이었다. 그런데도 앞선 독자의 필기는 묘하게 텍스트를 건드려서 자주 걸려 넘어지게 만든다. 정말 쓰레기 같은 짓이다. - 19, 유령들

- 살아 있는 사람도 책에 몰입하는 동안 반쯤은 유령처럼 변하기에, 그들 속에 섞여 책장을 넘기고 있으면 생사의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면 다 읽을 수 없을 수많은 장서들이 미래의 약속처럼 빽빽하게 펼쳐져 있었다. - 23, 유령들

- 우리는 반박함으로써 영리해진다. 달리 말해 반박할 것이 없으면 비평적 총기를 잃어버린다. 사실상 총명함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것으로 우리에게는 상상의 도약을 위해 부수어야 할 낡은 토대가 필요하다. - 28, 유령들

- 새로운 인생이란 달리 말하면 '진정한 인생'이 아닐까? 중년을 통과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고작'이라는 허들과 만나게 되기 마련이다. '고작해야 이거였나? 이게 내 인생의 전부란 말인가?' 이런 식으로 절망 어린 축소 과정을 겪게 되는 것이다. 그때 고기를 드는 것이 나만을 위해 만들어진 진짜 인생이 있을 거라는 희망이다. 미래에 대한 희망 한 조각조차 없다면 현재는 과거에서 넘어온 의무를 해치우는 부역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 프로그램 대상자로 선정된 여성들이 그렇다. 착하고 책임감이 강한 나머지 돌봄에 중독된 여자들, 의무밖에 남지 않은 일종의 노예들이다. - 49, 새로운 남편

- 우경은 자기 인생이 평범하다는 사실에 새삼스레 놀란다.
이제는 죽음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그것은 하얀 계란처럼 생긴 꿈 없는 잠이다. 우경은 흠 없이 깨끗한 알 속에 담겨 있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홀가분하고 후련하게 그 순간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펼쳐진 왼손에 움켜쥔 꿈 하나 없이. - 123, 왼손잡이는 꿈을 잘 기억한다

- 절필 후에도 여전히 흉터 아래 통증을 느끼며 간유리 너머 세상을 바라보듯 흐리멍덩하게 살고 있다. 언젠가 저 간유리를 깨뜨려야 세상을 제대로 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제대로'가 무엇일까? 내 평생 한 번도 맞히지 못한 과녁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 228, 맥주의 알

- 쓸쓸하고 다정한 느낌을 받으려면 멀리서 자세히 봐야 해요. - 237, 맥주의 알

- 내가 모임에 빠져든 건 시간이 건져낸 티백처럼 변한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오후에 일어나 마시다 만 찻잔을 내려다보는데, 바싹 마른 티백이 계시처럼 눈에 들어왔다. 바싹 말라 얼룩이 생긴 채로 찻잔에 달라붙은 누추한 모습. 설거지 좀 제때 하라고 잔소리하던 여자친구가 떠올랐다. 도자기 잔 역시 그녀의 선물이었는데, 안쪽이 거뭇해졌다. 여자친구는 도자기 잔에 찻물이 배어드는 것을 일컫는 '차심이 든다'라는 표현을 알려주었다. 찻잔에도 마음이 생기는데, 나는 왜 점점 마음을 잃어가는 것일까? - 240, 맥주의 알

- 미래의 기억을 손에 쥔 채 천천히 걸었다. 괜찮은 할머니가 되기 전에, 우선 위조되지 않은 현재를 즐겁게 살아야 할 테니까. - 303, 맨발 교실

2026. jan.

#왼손잡이는꿈을잘기억한다 #김성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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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천재의 사랑 ㅣ 타이피스트 시인선 9
양안다 지음 / 타이피스트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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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함을 극복하려는 작은 몸짓.

대상이, 캐릭터가 있는 시들은 몰입하는데 장벽이 조금 있지만... 뭐...
이제는 이러한 구성의 시들의 설정을 완벽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편이다.

어수선함의 극치 상태에서도 집중하려 노력하며 음미했는데도 후반으로 갈수록 나름 극복되는 시들이었다. 

플래그를 붙이며 기억하려고 한 어느 시나 시구를 골라도 다 좋았다.
다시 한번 음미하고 읽어보려 한다.

불안, 다가올 불행을 기꺼워하는 이의 시.

- 싫어하는 것에 대한 목록 :
질투심
노력에 필요한 일방적 정직함
사랑의 무용성을 주장하는 바보 천치
열등감을 숨긴 채 드러내는 이빨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변명
자신의 논리를 세상의 정답으로 치부하는 개구리들
상대의 마음을 자신의 것이라 여기는 착각
그리고 불안
불안
불안

나의 불안을 모두에게 나눠 주고 나니
이 시집을 이렇게 쓸 수밖에 없었다
이제 나는
불안이라는 이름의 그네에서 내려와
먼 곳까지 걸어 보기로 했다
2025년 5월 양안다 - 시인의 말

- 나는 당신 따뜻한 말.
당신 선한 말.
당신 우스운 말을 먹고 사는 머저리가 될래요. 적어도 이번 계절에는요.
내가 눈이 멀어 버린 걸까요. - 가장 듣기 좋은 말 중

- 세계에는 이상한 일이 일어나곤 한다. 사람들은 모르는 척하는 건지 정말 모르는 건지......
단지 이상한 일이. - 델피니움 꽃말 중

- 나는 복잡하게 말합니다. 나는 중얼거리고 중얼거리듯 네게 말하고 어제와 오늘을 헷갈리고 그러나 사랑과 불안은 아니지. 우리가 함께 넘어진 곳이 어디지? 나는 그딴 거 몰라. 내가 복잡하게 말한다고. 나의 내면이 이렇게나 복잡하다고. 너를 복잡하게 사랑한다고. - 복잡하고 어지러운 초콜릿 소년 중

- 프라하 뒷골목에도 당신의 노랫말이 울려 퍼졌으면 좋겠다. 새벽에 쪽잠 자던 쥐들이 당신 노래를 자장가 삼았으면 좋겠다. 아직 세상이 기울지 않았다고 믿고 싶으니까.
그러기 위해서 당신은 노래를 불러야 하지. - 프라하식 저녁 식사 중

- 이제부터 꿈을 꾸지 않기. 한밤중에 묻는 안부처럼 평화를 이해하기.
우리보다 오래된 세계에는 비참한 것이 무성했다. - 처음과 같이 이제 와 항상 영원히 중

- -가끔은 증오가 모든 걸 해결하는 것처럼 보여요.
- 가끔은 증오가 모든 걸 망치는 것처럼 보이지. - 울게하소서 중

- 누군가가 불안을 내다 버리기 위해 인간을 만든 건 아닐까. 뒷골목에 쓰러져 있는 당신을 내가 주워 왔다. 불안을 전부 게워 내라고 두들겨 주었지. 도대체 나는 누가 내다 버린 불안이지? 있잖아요, 온 세상이 잠들었을 때에도 나는 어지러움을 느껴요. 나 빼고 모두가 춤을 추는 기분이고 나 혼자 쓰러지죠. - 하늘은 다홍빛 불타는 시간에 중

- 괴로움은 슬픔의 친구입니까. 과거는 마음을 오리고 천천히 조각낸다. 누구도 날 한 번에 부수지 못해요. 썰물에 쓸려가는 모래성. 나의 머릿속에는 빗방울로 돌을 깎는 조각가가 있습니다. 더 얇게. 어, 더 얇아질 때까지...... 이것은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인공 정원이라고? 돌을 깎아 만든 게 대못이라고?
차라리 이 빗물로 얼굴이 녹아 버렸으면...... - 관자놀이에 푸른 점 중

- 의자에 앉은 채로 꿈을 꾸다가
어둠 속에서 맹수의 눈빛만 선명할 때...... 오로지 나는 혼자서 슬프게 되었다. - 관자놀이에 푸른 점 중

- 태어나면 죽을 날을 기다리고.
봄이 오면 겨울이 오고.
아침이 가면 밤이 되고.
걷다 보면 도착하고.
사랑을 하면 작별을 하고.
사랑 없이도 작별을 하고.
작별을 하고.

영원, 그것이 무엇이길래 사람들을 집착과 불안에 빠지게 만드는 것일까. - Fin 중

- 그 영화는 나였다. 언제나 불안하고, 그 불안을 이해받지 못해 슬프고, 그 슬픔이 무척 사소한 것 같아 외로운 나. 멋진 작품을 만들고 싶은데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고작 벌레 나오고 밥 먹다 우는 이야기라니.
(...)
그런데 영화가 그렇지 않나? 시가 그렇고, 또 사랑이 그렇지 않나? 마음에 담아 두고 곱씹다가 문득 그렇구나, 하는 일. 문자로 번역되지 못해도 뭉뚱그려 마음에 꽂히는 일. 두고두고 담아 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어 슬픔과 기쁨, 상실과 우울, 언어로ㅗ 치환할 수 없는 정서를 대변하는 일. 벌레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처럼 무척이나 초라해지고 마는 내 마음을 내비치는 일.
조금 창피하고 쑥스럽지만 솔직한 이야기가 나에게서 쏟아져 나와 우리의 손을 잡는 일. - 나의 혼잣말이 상영되는 심야 극장으로 중

2026. jan.

#이것은천재의사랑 #양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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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비평 210호 - 2025.겨울
창작과비평 편집부 지음 / 창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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띄엄띄엄 무리하지 않고 읽는 것을 목표로 읽으니 밀리지 않게 된다.

내란에 대한 잔존 감정이 여전히 여러 기고문에서 느껴지고,
여전히 주목하고 있는 일이 중요하다고 다시금 느낀다.

문학 외 분야에서 아는 참여 저자가 많은 편이라 반갑기도 하다.

조영래의 실천적 인권사상, 시와 역사의 협동적 창조, 대림동에서 안녕을 묻습니다를 흥미롭게 읽었다.

무엇보다 시즌 중 읽어 치운 게? 뿌듯한 포인트임.

간단한 감상을 남기는 현재 5월이고... 봄호가 옆에 있는데 아직 한 글자도 읽지 못하고 있다. 얼른 읽자... 다짐... 다짐...

- 과거에 우리는 세계를 통합적으로 이해하려 노력했고, 우주론적이고 존재론적인 비전을 구축했으며, 그것들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으로 향하는 길목 어딘가에서 우리는 그만 프롤레타리아화되고 말았다. - 올가 토카르추크 <다정한 서술자> 중

- 나는 용서하는 자가 가장 강한 자라고 믿고 약자를 품을 줄 아는 공동체만이 미래를 그릴 수 있다고 믿는다. - 김금희

2025. dec.

#창작과비평 #20205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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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나의 도끼다 - 소설가들이 소설가를 인터뷰하다!
악스트 편집부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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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의 인터뷰는 늘 흥미로운 분야다.
작가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늘 그런 편이다.

이 책은 산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너무 지난 글인가 싶은 게 
문학의 종말 (언제 적부터 하던 말인지 지겹기도...) 운운하는데
요즘은 텍스트 힙이 와글와글(이것도 좀 희미해지고 있지만) 하는 판이라서.

천명관 작가를 생각하면 <고래>때의 흥분과 그 이후의 거듭된 실망이라는 감정이 차례로 떠오르는데 시스템 안에서 태어난 작가가 아니라는 점과 첫 작품의 행운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은 생각. 
나이가 들어감에도 여전한 도전적인 감각을 유지하려는 건 좋지만 구태하고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윤기 감성이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인터뷰에서도 그 지점이 많이 느껴졌다.

- 사실 <고래> 이후에 글을 쓸 수 있는 동력이 없었다. 얼떨결에 등단하고 책까지 냈는데 웃기게도 곧바로 동력을 상실한 거다. - 18, 천명관

- 문학은 종교가 아니다. 숭고한 신념이 필요한 게 아니라 기술이 필요한 일이다. 내가 자주 인용하는 말 중에 조이스 캐롤 오츠의 말이 있다. 문학에 예술만 있고 기술이 없다면 개인적인 일일뿐이다. 반면에 기술만 있고 예술이 없다면 그것은 밥벌이에 지나지 않는다. <작가의 신념>에 나오는 말인데 여기서 기술은 단순한 테크닉이 아니라 오래 축적된 장인적 기술, 즉 대장장이가 쇠와 불을 다루는 기술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문학에도 그런 기술이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한국에서 문학은 종교처럼 숭고한 태도와 정신적 가치만을 강조하는 측면이 있다. 밥벌이는 천한 일이고 예술은 숭고하다는 식의. 이런 분위기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 32, 천명관

- 편집위원이니 심사위원이니 하며 문학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내버려둬선 안 된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과 신도들 사이에 끼어 권력을 누리던 중세의 성직자들과 같은 것이다. 작가와 독자 사이에 왜 선생님들의 지도 편달이 필요한지 알 수 없다. 필요하다면 유능하고 영민한 편집자가 필요할 뿐이다. - 39, 천명관


공지영 작가의 인터뷰는 뭐 이리 깊이 없는 인터뷰를 하나 싶은 얼굴 타령이 좀 별로였고.

듀나의 익명성에 관한 이야기는 듀나라는 작가의 신상이 베일에 싸여있다는 점 외엔 오히려 더 오픈되어 있는 작가라는 관점이 의외의 깨달음 포인트였다.

- 제 이야기에서 세계 멸망은 일종의 이퀄라이저라고 생각해요. 인정받지 못한 존재들에게 스스로의 모험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 88, 듀나


이장욱 작가의 학삐리 분위기가 천명관 작가와는 정반대 지점 같은 느낌이라 조금 웃기기도 했다.

- 가령 가부장이 지배하는 한국에서 여성은 자기도 모르게 제 안에서 소수성이 발생한다고 생각해요. 시인, 작가라면 더더욱 그렇지 않을까요? 마이너리티의 요소가 작가한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뻔한 얘기지만 대한민국은 수도권에 사는 중년-남성-이성애자-지식인이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있잖아요. 일단 구리죠. 이건 빼도 박도 못하고 메이저리티에 포함돼 있으니까. - 143, 이장욱

- 나는 독자가 내 소설 안에서 온갖 정서적 격랑과 만나기를 원한다. 기진맥진해서 드러누워버릴 만큼 극단의 감정을 경험하길 원한다. 분노, 절망, 슬픔, 비애, 사랑, 감동...... 소설이라는 이야기 형식 안에서 안전한 거리를 두고 겪는 감정 경험들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시선을 확장하고, 인간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만들어주고,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 203, 정유정

김탁환처럼 관심이 적었던 작가라도 즐겨읽는 작가가 겹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급' 친밀감이 생긴다. 김탁환 작가의 글을 읽는 일과는 별개의 문제지만...


2026. jan.

#이것이나의도끼다 #a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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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신비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627
백은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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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림노래 같기도, 동화 같기도...

반복에 지쳐가며 읽다가
4부의 시들이 훅 들어오는 느낌으로 좋아져서
기분 좋은 놀람이 있었다.

- 뒤집힌 치마 / 노래가 완성되면 / 거꾸로의 세계에서
침묵을 배운다는 거 / 진짜 좆같아 - 소녀 경연 대회 중

- 영원과 순간은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라는 걸
이해하지 못해서
빛이 하는 게임에 모든 걸 걸고
파산하기를 반복했다 - 비신비 중

- 한없이 길어지는 파처럼 변곡점 위에서 우리는 왈츠를 추고, 누가 내 무엇을 가져갔는데 나는 그게 뭔지 모른다. 나는 내가 겪는 일들을 때로 믿을 수 없어.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가짜인지 알 수 있는 센서가 몸 안에 있으면 좋겠다. - 누가 내 무엇을 가져갔는데 나는 그게 뭔지 모른다 중

- 가끔 문을 열고 나가면 다른 세상이 있을 것 같아서
끝없는 숲 바다
상상은 얼마나 볼품없고
아름다운지 - 세계의 배꼽 중

- 어쩐지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일으켜 세워준다면 다시
넘어질 수 있을 텐데 - 메커닉 로맨스 중

-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 어떤 노래는 사라진 자리에서 불쑥 솟아 내내 흐르다가 꿈에 정박한다고 그걸 번역하는 두 손이 오래도록 만지던 어둠이 있다고. - 꿈의 노래 중

- 나는 내내 걷고 있었는데
건물이 쏟아지고 나무가 흔들리고
손끝부터 닳아가는 웃고 있는 사람들
풍경이 표정을 바꾸며 곁을 스쳐 지나가
(...)
다 알아버린 얼굴로
돌아오는 길 이제
그런 노래는 부르지 말자 - 비신비 중

- 나의 취미는 기만이고 나의 특기는 절망이다. 혹자는 나를 보고 할 줄 아는 게 절망뿐이라고 했다. 중요한 건 절망이 아니라 절망이 도래하는 길인데, 왜 모를까. 진짜 절망뿐이라면 단 한 마디 절망이라고 쓰면 될 텐데. 내가 이런 얘길 하면 너는 갑자기 조용해진다.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사람. 아주 조금씩 움직여 결국 태산을 들어 올리는 사람. - 의미없는 삶 중

- 그런 이야기는 너무 쓸쓸해서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지. 난 사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의 돌림노래 같다고 생각했어. 어떤 사람은 노래를 들어. 내내 무엇을 하든 배경 음악처럼 삶을 끈질기게 따라다녀. 그래서 받아 적는 거라고. 평생 자신의 노래를 눈치채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는 사람도 있겠지. 노래를 듣는 사람은 평생 노래를 온전히 해석해내는 법에 몰두하며 반복하게 되는 거고. 그건 어쩌면 춤이 될 수도 책이 될 수도 때론 그저 삶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이 될 수도 있겠지. 그런 사람들은 전부 비슷한 지점을 공유한다고 생각했어. 듣는 사람, 듣지 못하는 사람. 어쩌면 듣는 일은 가혹한 형벌 같기도 축복 같기도 해. 아무것도 모르고 사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는데. 어둠 속에 잠겨 생각하게 되잖아. 어째서 이 모든 것을 알아버린 걸까. - 노래를 듣는 사람 중

2026. jan.

#비신비 #백은선 #문학과지성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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