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서 사슴까지 ㅣ 창비시선 424
김중일 지음 / 창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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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베어들어 있다고 생각하며 읽고 있을 때, <애도 일기>가 자꾸 등장했고, 시인은 죽은이가 만들어 내는 또 하나의 새롭지만 낯익은 우주들에 대해 말했다.

다정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아주 잠깐씩 위안이 되었다.

지금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위안.

내 어깨에 기대어 오분이나 잤는지 너는, 물빛 선연한 꿈을 꿨다는데 거짓말처럼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내 어깨에 기대어 한 숨 자고 난 너는, 몇년간이나 파도처럼 밀려왔던 차가운 꿈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 어깨에서 봄까지 중.

내 얼굴 위로 벌과 나비와
마땅한 이름 없는 날벌레처럼
눈 코 입 귀가 날아와 앉았습니다.
그리고 잠시, 사람의 시간으로는 평생을
앉았다가 날아갑니다. - 우리의 얼굴 중.

햇볕을 쬐며 잠시 숨 고르며 앉아 있으면, 내 무릎과 어깨를 밟고 누가 올라간다.
어디로 올라가는지 언제 다시 내려올 건지 묻지 않기로 한다.
나는 낙엽을 밟고는 아무데도 가지 않기로 한다. - 평일의 대공원1 중

너의 잘못이 아니다.
너의 잘못이 아니다.
다 중력 때문이다, 나는 공중을 끌어안으며
처음으로 소리내어 말한다. - 루틴 중.

어서 빨리 날개를 들지 않으면 지상을 거꾸러지겠지만
계속 기도하겠습니다.
영원히 새로 태어났으면 합니다.
땅을 딛고 사는 건 현생에 단 한번이면 족합니다. - 새가 되게 해주소서, 저녁 기도 중

나는 지금, 옥상 바람에 헝클어진 내 머리카락이 꾸는 꿈.
지금 나는, 무수한 내 머리카락 같은 날들을 함께 한 네가 꾸는 꿈.
내 손을 잡은 네 두 팔, 열 손가락이 꾸는 꿈.
내게 오는 네 두 다리, 무수한 발걸음이 꾸는 꿈.
꿈이 깨면 내가 사라지는 꿈.
나는 네게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꿈. - 나무는 나뭇잎이 꾸는 꿈, 나는 네가 꾸는 꿈 중.

2018. o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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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ㅣ 쏜살 문고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박연정 외 옮김 / 민음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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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 소년, 작은 왕국. 세개의 단편.

순수한 것들이 뿜어내는 파괴와 퇴폐의 욕망이려나.
사실 이것들이 엄청난 금기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서 행위의 주체들이 되는 미성년은 확실하게 그런 면이 있지 않나 생각하기 때문인데.

문신에서 내면의 또 다른 혹은 더욱 강한 자기를 드러내는 소녀.
지배당하고 지배하는 것의 의미를 놀이라는 가면 뒤에서 욕망하는 소년, 소녀들.
그것이 집단 안에서 영향력을 형성하는 작은 왕국.

모두 있을 법하다. 다만 정보와 문화적인 태도랄까 그런 것이 한정되어 있을 때 좀 더 현실성이 더해지지 않나 싶다.

성인의 서사가 아니라는 점은 일견 범죄적이지만 매혹하는 면은 분명히 있다.

문 앞까지 바래다준 세 사람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고 바깥으로 나왔더니, 거리에는 어느덧 푸르스름한 저녁 안개가 자욱이 깔려 있었고 해안가에는 가로등 불빛이 반짝였다. 문득 무섭고도 이상한 나라에서 갑자기 인간 세상으로 튕겨져 나온 기분이 들었다. - 41, 소년

2018. o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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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18-11-13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 색상이 참 곱네요. 세설을 읽고 한눈에 반해 다른 작품에도 도전했지만 적응을 못하고 실패로 끝났습니다. (중고로 도로 다 팔아버렸습니다.) 이야기를 워낙 재밌게 잘쓰시는 분이라 제 욕심같아선 세설같은 작품을 한 두어편 더 써주셨으면 좋았을텐데 라고 생각하지만 안 그러시고 다 쫌 얼굴이 붉혀지는 소재.. 하핫 ^^;;

hellas 2018-11-13 15:37   좋아요 1 | URL
저도 컨디션에 따라 매우 불호가 되어버리기도 하는 작가예요. 요즘 왠지 확 꽂혔달까. 지금이 딱 다니자키 준이치로를 읽을 때인가 싶게. 쏜살 시리즈가 참 예쁘게 나온 덕도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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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존재로서의 화자들은 유령작가가 된다. 현실의 비참과 오해, 입력값과 다르게 산출되는 결과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차라리 소설에 가까우니까.

그저 한 문장, 단어 하나에 여러가지 역사적 사실들이 줄줄이 꿰어져 나와서 흥미롭게 읽었다.
그에 소환된 기록된 사실들은 참으로 아이러니 하다는 점이 그렇다.


결국 나는 그 대답을 알아내지 못하고 다만 지극히 하찮은 우연들의 연쇄과정에다 대고 왜 그래야만 했느냐는 무거운 질문을 던지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사실만을 알아냈을 뿐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일들은 대부분 스캔들에 휩싸인 영화배우가 서둘러 차에 올라타면서 진실은 무었이냐고 묻는 기자들을 향해 내젓는 단호한 손짓 이상의 의미를 띠지 못한다. 그렇다면 지나간 일들을 다시 떠올릴 때 늘 만나게 되는, 서로 연결될 수 없음에도 그어지는 그 많은 선들은 대체 무슨 의미일까? 역사의 인과관계가, 혹은 지나간 일들의 진실이 도중의 사소하고 우연적이고 꾸불꾸불한 과정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단숨에 긋는, 그런 선과 같은 것이라면, 우리가 그날 걸어간 복잡하고 우연에 가까운 행로의 의미는 무엇일까? - 19,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

그 꼴을 당하고 나니 갑자기 영원한 사라이라든가, 인간의 꿈이라든가, 자유라든가, 진보라든가 그런 것들이 죄다 사라진 그 하루와 같은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더군요. 어떤 점에서 귀하의 미합중국과 제 미합중국이 절대로 하나일 수 없는 상상의 소산에 불과하듯, 은자의 나라에서 찾은 제 진실한 사랑 역시 사라져버린 그 하루같은 것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입니까? 제 인생에서 실제로 하루가 사라졌든 아니든, 우리가 진짜로 사랑하든 그렇지 않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세계는 상상하는 대로 구성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 103, 거짓된 마음의 역사

하지만 그즈음, 그는 어렴풋이 눈치를 채고 있었다. 그러니까 꿈은 절대로 패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패배하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라는 것을. - 117,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잠이 오지 않는 밤ㅁ다 그는 집에 있는 책을 한권씩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내용이나 주제가 무엇인지는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한때 자신도 지녔음직한, 소설에 나오는 순진한 기대나 막연한 소망의 문장들을 하나하나 버리고 자신에게 닥친 슬픔을 배워가는 일이었다. 이제는 그가 소유할 수 있는 삶이란 그런 것들뿐이었다. - 119,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마흔 살이 넘어서면서 성재는 세상의 일들을 짐작하는 버릇을 그만뒀다. 세상의 일들은 늘 짐작과 달랐다. 하늘을 날던 그 새들이 갈매기일 수 없듯이, 해림에는 바다가 없듯이, 더 이상 세상의 일들을 짐작하지 않게 되면서부터 인생이란 그저 사소한 우연의 연속처럼 보였다. 이제 성재에게 인생이란 납득하는 일이지, 따져 보는 일이 아니었다. - 199, 이등박문을, 쏘지 못하다

2018. o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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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희의 소설은 구리거울에 새겨진 인생과 우주의 만화경이다.
어떤 이는 거기서 불안과 공포의 늪을 건너는
섬뜩한 아름다움을 읽어내고, 또 다른 이는
선험적인 고향을 상실한 잃어버린 영혼들의
존재론적 심연을 응시한다. “ - 우찬제 (문학평론가)

‘문학하려는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시선과 의식’이 그렇고 그렇던 시절 60~70년대 작가로서 정체성을 확립하려면 필히 몇 겹의 문을 더 지나야 했을 것이다.

5권의 소설집을 읽고 이 짧은 인터뷰와 산문이 실린 부록을 읽으니 그 부당함의 좀 더 생각해 보게 된다.

워낙 바람 잘 날 없는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시대를 논하고 이념을 논하고 그에 비견할 만한 거대한 주제의식을 가지는 것을 뭐랄순 없지.
그러나 그에서 조금 비껴선 시선들을 깍아내리는 것도 우스운일.
그렇다고 해서 남성문인들이 거대 담론에 크게 부합하는 글을 썼는가를 생각하면 어쨌든 약간은 실소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그럴싸한 이념을 논하는 글을 써 제낄때 그들의 자리를 유지케 해주는데 공헌한 가부장제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기 때문.
.... 어찌 됐든, 작가 오정희가 자신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함을 자책하는 순간들이 있었다는 말에 나는 또 부르르하고 치를 떨고 말았다.

그리하여 다채로운 소재로 여성의 주체의식을 잃지 않는 창작물들을 남긴 여성 문인 ‘오정희’를 더욱 주목하게 되었다는 것이 포인트.

‘우리는 모두 이렇게 태어나는 것이다.
문학이란, 생이란, 결국 들짐승이 새끼를 낳는
거친 자리. 그렇게 슬픈 피비린내와 고독과
경이로움과 신비를 다함없이 끌어 안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컬렉션을 읽으면서 희미했던 무엇은,
전체를 다 읽고 나서 완성되는 어떤 이미지였다.
작가 <오정희> 라는.

2018. o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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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강 ㅣ 오정희 컬렉션
오정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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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렉션의 마지막으로 첫 단편집을 읽었다.

광기, 귀기, 범죄의 냄새가 나는 음울한 단편들.

70년대 임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다양한 시도이고 다양한 소제가 이야기가 되었다.

그것이 이야기로서 공감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시절이 많이 지났다라고 이야기 할 수 있으려나.

취향으로서는 상당히 비취향으로 밀려나 있는 우울이다.

부록으로 끼워진 얇은 책자 하나만(작가의 수필, 인터뷰 등이 실려있다) 읽으면 컬렉션의 끝을 보게 되었다.

좀처럼 장기? 프로젝트를 성공하지 못하는 요즘 뭔가 환기도 되고 의미도 있는 독서다.

이 참에 토지 재도전을?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을 오뚝이들을 없애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상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도 안 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 역시 나에게 아무런 위안도 주지 못했다. 다리가 맥없이 후들거렸다. 하늘에는 별이 없었다. 가슴은 금방 버석버석 소리를 내며 부서져버릴 듯 건조해져 있었다. - 323, 완구점 여인(1968)

2018. o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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