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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쓰는 존재로서의 화자들은 유령작가가 된다. 현실의 비참과 오해, 입력값과 다르게 산출되는 결과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차라리 소설에 가까우니까.
그저 한 문장, 단어 하나에 여러가지 역사적 사실들이 줄줄이 꿰어져 나와서 흥미롭게 읽었다.
그에 소환된 기록된 사실들은 참으로 아이러니 하다는 점이 그렇다.
결국 나는 그 대답을 알아내지 못하고 다만 지극히 하찮은 우연들의 연쇄과정에다 대고 왜 그래야만 했느냐는 무거운 질문을 던지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사실만을 알아냈을 뿐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일들은 대부분 스캔들에 휩싸인 영화배우가 서둘러 차에 올라타면서 진실은 무었이냐고 묻는 기자들을 향해 내젓는 단호한 손짓 이상의 의미를 띠지 못한다. 그렇다면 지나간 일들을 다시 떠올릴 때 늘 만나게 되는, 서로 연결될 수 없음에도 그어지는 그 많은 선들은 대체 무슨 의미일까? 역사의 인과관계가, 혹은 지나간 일들의 진실이 도중의 사소하고 우연적이고 꾸불꾸불한 과정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단숨에 긋는, 그런 선과 같은 것이라면, 우리가 그날 걸어간 복잡하고 우연에 가까운 행로의 의미는 무엇일까? - 19,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
그 꼴을 당하고 나니 갑자기 영원한 사라이라든가, 인간의 꿈이라든가, 자유라든가, 진보라든가 그런 것들이 죄다 사라진 그 하루와 같은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더군요. 어떤 점에서 귀하의 미합중국과 제 미합중국이 절대로 하나일 수 없는 상상의 소산에 불과하듯, 은자의 나라에서 찾은 제 진실한 사랑 역시 사라져버린 그 하루같은 것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입니까? 제 인생에서 실제로 하루가 사라졌든 아니든, 우리가 진짜로 사랑하든 그렇지 않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세계는 상상하는 대로 구성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 103, 거짓된 마음의 역사
하지만 그즈음, 그는 어렴풋이 눈치를 채고 있었다. 그러니까 꿈은 절대로 패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패배하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라는 것을. - 117,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잠이 오지 않는 밤ㅁ다 그는 집에 있는 책을 한권씩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내용이나 주제가 무엇인지는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한때 자신도 지녔음직한, 소설에 나오는 순진한 기대나 막연한 소망의 문장들을 하나하나 버리고 자신에게 닥친 슬픔을 배워가는 일이었다. 이제는 그가 소유할 수 있는 삶이란 그런 것들뿐이었다. - 119,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마흔 살이 넘어서면서 성재는 세상의 일들을 짐작하는 버릇을 그만뒀다. 세상의 일들은 늘 짐작과 달랐다. 하늘을 날던 그 새들이 갈매기일 수 없듯이, 해림에는 바다가 없듯이, 더 이상 세상의 일들을 짐작하지 않게 되면서부터 인생이란 그저 사소한 우연의 연속처럼 보였다. 이제 성재에게 인생이란 납득하는 일이지, 따져 보는 일이 아니었다. - 199, 이등박문을, 쏘지 못하다
2018. o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