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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평점 :
모던이란 것들이 촌스러움으로 변하는 시기에 그것을 민감하게 알아 챈 작가. 세계가 붕괴하는 20세기 말의 정서와 서정.
그 시기의 소란과 침묵 사이의 공기흐름을 적절하게 담아내는 작가. 세계의 붕괴 속의 개인을 들여다보는 시선.
십년 전이지만 무척 좋은 작품들이다.
- 우리가 지나가고 난 뒤에도 저 불은 우리의 예상보다 좀 더 오랫동안 타오를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 안에서. 내부에서. 그 깊은 곳에서. 어쩌면 우리가 늙어서 죽을 때까지도. 이 우주의 90퍼센트는 그렇게 우리가 볼 수 없는. 하지만 우리에게 오랫동안 영향을 미치는. 그런 불들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물론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그 불들을 보지 못하겠지만. - 32,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
- 우리는 어리석다는 이유만으로도 당장 죽을 수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 삶에 감사해야만한다. 그건 전적으로 우리가 사랑했던 나날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이해되기만을 기다리며 어리석은 우리들을 견디고 오랜 세월을 버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맞다, 좋고 좋고 좋기만 한 시절들도 결국에는 다 지나가게 돼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나날들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 81, 세계의 끝 여자친구
- 그런데도 때ㅔ로 우리는 원래 만나기로 한 것처럼 누군가를 만나고 또 사랑에 빠지고, 코발트블루에서 역청빛으로 시시각각 어두워지는 광활한 밤하늘 속으로 머리를 불쑥 밀어넣는 것과 같은 황홀한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면, 그 이유는 이 도시와 청춘의 우리가 너무나 닮아있기 때문이리라.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극한의 절망과 다른 선택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완강하고도 그만큼 멍청한 확신 사이를 한없이 오가면서 그 무엇도 아닌 존재에서 이 세상 그 누구라도 될 수 있는 어떤 사람들. 시시각각 변하는, 그러므로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얼굴을 지녔지만, 결국 단 하나일 수밖에 없는 얼굴들. - 107,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
- 너무나 큰 세계였다. 흑두루미들은 그렇게 큰 세계를 가로질러 아무르 강변에서 이즈미까지 날아온 셈이었다. 우리가 그 세계를 증언할 수 없다는 것은, 그러니까 그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했다. 하지만 또한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망각할 수도 없었다. 그가 찍은 사진들 속에서 친구와 가족들은 하나둘 늙어가고 병들어가고 또 죽어갔다. 그의 사진들 속에서 사람들은 얼마나 복잡한 존재로 살아갔는지, 하지만 그들은 또 얼마나 끊임없이 변해갔는지. 거기 서서 나는 비로소 그가 평생에 걸쳐서 찍은 친구와 가족들의 일상을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그가 단 한번만 찍고 다시는 찍지 않았던, 그의 말을 빌리자면 ˝평생 잊지 못할 노을˝을 이해할 수 있었다. - 198, 네가 누그든 얼마나 외롭든
- 모든 일이 지나갔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긴 하지만, 우리는 역설적으로 행복했고 또 역설적으로 불행했다. - 235, 달로 간 코미디언
- 나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에 회의적이다.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른다, 라고 말해야만 한다. 내가 희망을 느끼는건 인간의 이런 한계를 발견할 때다.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졵대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 - 작가의 말 중.
2020. mar.